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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96화 (296/740)

296화 과거의 소원

대림원. 평소에는 평화롭고 웃음이 많은 마을의 집합체였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달랐다.

길거리를 오가던 수인들이 집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고, 상가는 문을 닫았으며, 마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시설만이 가동됐다.

무장한 이들이 팀을 이루어 순찰을 다녔고, 성격 급한 이들은 살인자를 잡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침묵과 긴장. 흥분과 공포가 뒤섞인 공간.

그중에서도 토끼 수인들이 자리 잡은 산 중턱애는 더욱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화르륵

횃불이 타들어 갔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나 베히가에 이어 겔릭의 죽음까지 전해지며 밤에 대비하는 손길이 분주해졌다.

부쩍 늘어난 조명. 자경단이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시각.

“흐음.”

난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

모든 대표가 토인족 마을로 몰려갔다.

겔릭의 손가락이 나왔다. 그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고, 손가락이 나온 집의 주인과 그와 관련된 모든 이가 조사를 받았다.

용의자는 간이로 만들어진 천막에 틀어박혀 삼엄한 경계를 받고 있었다.

“결국 아니었다는 거네.”

“그에에.”

모든 대표가 집결한 가운데 취조가 이루어졌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는 범인이 아니었다.

알리바이가 확실하다. 단순히 토인족 마을 내부에서의 동선만 확인됐으면 상관이 없는데, 호인족 마을 지인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잠든 것으로 밝혀졌기에 불만을 품고 있던 타이가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즉, 손가락은 혼선을 주기 위해 범인이 수작을 벌였다는 말.

여기서 개인적인 확신이 하나 생겼으니.

‘모르토는 아니야.’

녀석은 지금 밖에서 조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범인 추적을 위해 마을 내부, 외부 모두가 뒤집히는 중. 모르토가 살해를 한 후 내부에 몰래 진입해 손가락을 숨기고 다시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따로 하월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르토에 관한 이야기.

성격이 좀 삐뚤어지기는 했으나 그녀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고, 내게 많은 정보를 내주었다.

등반 층수 78층. 너구리족인 만큼 신비한 능력을 쓰기는 하나 마을 사람 중에는 80층대에 오른 이도 여럿 있다.

모두의 눈을 숨길 여력은 없다는 것.

“도와줘서 고마워. 다음에는 내가 도와줄게. 필요할 때 말만 해.”

혀를 씹으며 생각을 곱씹던 중 옆으로 리아나가 다가왔다.

쫑긋했던 토끼 귀가 접혔다. 묘하게 릴카를 닮아서 신경이 살짝 쓰인다. 정수리가 꿀밤 때리기 좋아 보이…….

정신 차리자. 나까지 정신 줄을 놓으면 안 되지.

“고마울 게 있나요.”

“범인이든 아니든 일단 죽이고 보자 할 애들이 여럿이야.”

부정은 안 하겠다.

일단 어디 하나 자르고 시작하자고 날뛰는 타이가와 대화로 어떻게 진실을 들을 수 있냐며 부추기던 서량.

치킨맨 역시 앙금이 살짝 있어 동의해 댔고, 동족이 죽은 그레이 역시 복수를 원했다.

절반이 과격한 선택을 종용하는 가운데 중립을 제외하면 용의자의 무죄를 지지하던 이는 나와 리아나밖에 없었다.

뭐, 사실 나도 무죄라 생각했다기보다는 체계적으로 조사하려고 한 것뿐이지만.

리아나에게는 유일한 도움의 손길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진짜 우리 중에 범인이 있을까?”

조금은 뜬금없는 소리. 내 옆에 쪼그려 앉은 리아나가 비탈길을 따라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마을을 내려다봤다.

나무 사이를 이은 줄. 줄지어 매달린 연등이 은은한 빛을 내뿜는다.

알록달록한 종이로 만들어져 다양한 색이 마을을 비추고 바람에 날린 나뭇잎이 하염없이 흘러 날아간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 역시 옆에 앉았다. 이제야 조금 눈높이가 맞는 거 같다.

“믿기지 않아. 광란의 밤 이후에 이런 서로를 잡아먹는 건 사라졌는데.”

“먹어요?”

“사라진 손가락. 분명 누군가 물어뜯은 거야.”

발견된 손가락은 하나.

시체에서 사라진 손가락은 셋.

나머지 둘은 어디에 있을까. 버리거나 사이코 같은 범인이 기념으로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건 생각도 못 했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와중에도 리아나의 말은 이어졌다.

“나도 알아. 다들 모르는 척 평화롭게 살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걸. 약육강식. 적자생존. 생태계의 법칙.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 이들이 많아.”

수인은 인간과 다르다.

시점을 달리해서 봐야 한다. 지성체인 동시에 부족별 동물의 특색이 진하게 남아 있으니까.

그것은 강인한 육체와 능력을 주었지만 동시에 야성이라는 원초적인 본능을 남겼다.

“지금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도 은근히 있을걸. 광란의 밤이 옳았다고 믿는 이들도 제법 되거든.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겠지만.”

“옳다고 생각한다라, 왜죠?”

난 질문을 던졌고.

“우리가 종을 초월해 단합할 수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리아나는 역으로 질문을 했다.

육식과 초식, 잡식.

뿌리를 이루는 동물의 특성이 다르다. 당연히 마찰이 생길 만한 일도 많았을 거다.

그 안에는 상대방을 깔보거나 경계하는 것도 있었을 거고.

당장 히포토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날 얕잡아봤었지.

그때는 단순히 NPC의 오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포식자의 눈빛이었군.’

상위 포식자가 먹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나한테도 그럴진대 초식 동물을 바탕으로 하는 수인이나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까.

어째서 그들은 광란의 밤이 끝나고 동등한 위치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해답은 금방 나왔다.

“서로가 서로의 위가 아님을 확인했군요.”

“맞아. 토끼를 얕보던 놈들은 목이 꺾였지.”

리아나가 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앙증맞았으나 저걸로 맞으면 어지간한 놈들은 배가 뚫릴 거다.

“광란의 밤. 포식자들은 굴욕을 당하고 피식자들은 힘을 증명했지. 웃기는 일이야. 그냥 얌전히 있으면 호구로 봐.”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말이죠.”

“그치! 아무튼 그 일 때문에 굴욕이라며 불만을 품은 이도 있고, 반대로 ‘어? 얘네 짖어 대던 것보다 약하네? 꼽네?’ 이런 애들도 있고. 그렇다고 다시 붙으면 참극이니까 참는 거지. 다만 그때의 광기는 남아 있어, 아마 나한테도 조금은.”

말의 취지는 알아차렸다.

지금의 평화는 완벽하지 않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한 가지.

“근데 그 광란의 밤이라는 거 대체 누가 빈 소원이에요? 도대체 어떤 소원을 빈 거죠?”

“아무도 몰라. 아직 안 잡혔으니까. 광란의 밤 때 죽었을 수도 있고.”

“소원 들어주는 연못에 빌면 되잖아요, 범인 찾아 달라고.”

“이미 했는데 글쎄… 소원이라는 게 애매해서 말한다고 바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아무도 몰라. 위험하지. 대가도 있어.”

팔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켠 리아나가 말을 이었다.

소원 들어주는 연못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안 들려주기에 집중했다.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야. 세계 정복 이런 건 안 돼. 될 거 같은 것만 되지. 그리고 같은 소원도 안 돼.”

“같은 소원이요?”

“우움, 정확히는 결과가 같은 소원은 안 돼.”

리아나가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리더니 설명해 줬다.

예를 들어 ‘베히가를 죽인 범인을 알려 주세요’와 ‘겔릭을 죽인 범인을 알려 주세요’라는 소원을 각각 빌었을 경우, 범인이 같다면 사실상 똑같은 소원이기에 늦게 빈 소원은 이루어 주지 않는다는 것.

만약 범인이 다른 사람이라면 두 소원 모두 이루어지겠지만 말이다.

재앙도 제약이 있는 모양. 하긴 정말 다 되면 그게 재앙인가 신이지.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약간 원숭이 손 느낌도 있다.

소원을 빌면 잘못된 결과로 이루어지는.

대충 그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은 했다만.

그놈도 참, 용케 안 잡혔네. 잡아달라고도 했건만.

잠깐만…….

“리아나, 아직 이번 사건의 범인을 찾아달라는 소원은 안 빈 거죠?”

“어? 그치?”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머리 싸맬 것 없이 그러면 되는 건데.

“해 봅시다.”

“엥? 그거 절차도 있고 대표 전원의 통제하에 하는 그건데…….”

“여기 대표 다 있잖아요. 나 도와준다면서요. 그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어쩌면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 * *

소원 들어주는 연못.

잠시 이런저런 사건이 벌어져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으나 65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재앙을 극복해야 한다.

순서가 어찌 되든 마주치기는 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연못을 향해 걸어갔다.

연못은 대략 3~5일에 한 번씩 위치를 바꾼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기존의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마음에 안 드는군. 이방인을 연못으로 데리고 가다니.”

“어쩔 수 없잖아, 타이가. 그 크기만 한 머리를 잘 굴려 보면 이해가 될 텐데.”

“이 고양이 녀석이!”

“너도 고양잇과다, 멍청아.”

타이가와 서향이 투덕대며 싸운다.

같은 고양잇과라 그런지 잘 통하는 모양.

짧게 고개를 젓고 대표들을 따라 움직였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마을은 통제되었고 밖으로 빠져나간 이도, 밖에서 들어온 이도 없었다.

어딘가에 반드시 범인이 있다.

너구리 부족 사이에서 모르토를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는 게 살짝 걱정이기는 한데.

‘이 녀석 완전 아싸라 관심이 없어.’

친구가 없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무도 그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지 않았다.

집 안에 박혀 있거나 구석진 데서 놀고 있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상황.

일반적이었다면 실종 신고라도 했을 텐데 말이지.

좋은 건지 슬픈 건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다행인 일이었다.

“모르토는 괜찮겠죠?”

“아직 살아 있어요.”

옆으로 다가온 하월이 은밀하게 묻는다.

사건이 지나며 그녀와는 좀 더 친해진 상황.

모르토에 대한 것도 공유했다. 옳은 선택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그녀 역시 범인일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말을 하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

‘옆에서 감시할 수 있잖아.’

믿지는 않지만 눈앞에 두고 감시할 수 있다면 괜찮다.

난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보여 줬다.

얇은 나무 반지.

[호목 나무 반지]

-너구리 술법으로 만든 반지.

-가짜!

꼴에 너구리 수인이라고 나뭇잎으로 물건을 만들어 냈다.

시전자가 죽으면 반지 역시 나뭇잎으로 돌아갈 터.

아직까지는 잘 살아 있는 거다.

내 말뜻을 이해한 하월이 희미하게 웃었다.

“둘이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하십니까! 저도 끼워 줘요!”

“윽, 치킨맨.”

“흐흐흐. 둘이 설마, 으흐흐.”

그런 우리에게 끼어드는 근육질 닭 치킨맨과 음침한 고양이 수인 서향.

치킨맨이 어깨에 팔을 딱 두르는데 뭔 팔 두께가…….

“등반은 좀 할 만해요? 64층까지 올라온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데. 갑옷도 예쁘게 염색했네. 혹시 구애 중? 조인족 중에 앵무새 수인이랑 공작 수인 있는데 혹시 만나 볼 의향 있습니까?”

“하하.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 보죠. 우선 일이 좀 끝난 다음에.”

구애 색을 띤 게 아니라 원래 갑옷 색이 이런 겁니다.

“뭐엇? 하월을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 못된 남자였어?”

“예, 아무런 사이 아닙니다. 아니, 언제 봤다고 뭐가 있어요.”

“그 말은 오래 보면 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군.”

옆으로 다가온 서향도 말을 걸어 댄다.

오래는 무슨, 끔찍한 소리 하고 있어.

까딱 잘못하면 진짜로 오오오오랫동안 탑에 갇혀 있게 생겼는데.

세상이 망하기 전에 100층을 클리어하고 나가는 거.

그게 내 인생 목표다.

“잡담은 그만하지. 곧 도착이네.”

잡담을 하며 길을 걷는 중 히포토스가 핀잔을 줬다.

그의 말마따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못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는 않은 모양. 거기까지는 좋은데.

“수호자들이 죽었군.”

“16명 전원 사망했어.”

“아아, 범인이 연못을 이용했다는 건 사실인 것 같소.”

전투의 흔적과 함께 연못을 지키던 이들이 몰살되어 있었다.

이미 며칠 지난 흔적이다.

다들 놀라지는 않았다. 예상은 했을 테니까.

“요 며칠 이곳을 이용한 자가 누가 있지?”

“베히가가 당한 걸 알게 된 이후로는 연못을 통제했으니 그 전이 마지막이겠지.”

“조인족 차례였군.”

“또 접니까!”

다시 분위기가 어수선해 지려 한다.

그러면 안 되지.

“그건 나중에 따지세요. 지금은 계획에 집중합시다.”

어차피 잡으면 된다.

그 방법이 여기에 있고.

“하지만 소원에는 대가가…….”

“제가 하겠습니다.”

난 연못으로 다가갔다.

어떤 식으로 소원을 비는지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다.

바닥에서 돌멩이를 하나 쥐어 던졌다.

-풍덩

물 위로 번지는 파문.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최근 대림원에서 벌어진 사건의 범인을 알고 싶다.”

난 긴장했다.

무슨 대가를 요구할까. 재물? 신체? 다른 무언가?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과거에 빌었던 소원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들어줄 수 없습니다.]

파문이 멈췄다.

“이미 같은 소원을 빌었다고?”

“말도 안 되는…….”

저마다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이런 미친.”

[과거에 빌었던 소원]

-광란의 밤을 일으킨 자를 알고 싶다.

나만은 다른 이유로 입을 벌렸다.

광란의 밤을 일으킨 범인과 이번 사건의 범인.

동일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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