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93화 (293/740)

293화 누구를 따라

각 대표들과의 통성명은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야 진행되었다.

그들 역시 외지인을 놔두고 지들끼리 떠들어 댄 것이 민망한지 침 묻은 입가를 닦고 딴청을 피웠다.

그나마 제정신으로 보이는 견인족이 사과를 했다.

마른 듯하지만 강인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개로 따지면 그레이 하운드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 이였다.

“손님을 두고 무례를 범했군요. 견인족 대표 그레이라고 합니다.”

“크흠, 난 호인족 대표 타이가다.”

이어 우람한 몸집을 자랑하는 호인족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타이가라, 이름 하나는 외우기 쉽다.

성격은 척 봐도 호전적이고, 아까 떠들 때도 가장 먼저 흥분했었다.

“후우, 너구리족 대표 하월이에요.”

비교적 작은 키, 의자에 눕다시피 앉은 여인이 곰방대로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이 사람이 너구리족 대표.

모르토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역시 대표쯤 되면 뭔가 있어도 있다는 건가.

“어흠, 이 몸은 웅족 대표 고행이라 하오.”

“귀여운 난 리아나야! 이히히히!”

웅족은 웅족같이 생겼다. 타이가와 마찬가지로 우락부락했지만 실눈캐에다 진중한 모습.

죄인을 찢느니 자르니 할 때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고개만 까딱거렸지.

저기, 0.5릴카스러움이 느껴지는 토끼 수인이 리아나.

호기심이 반짝이는 눈을 보니 가까이했다가는 귀찮아질 거 같았다.

“묘인족 서량이다, 흐흐.”

부스스한 머리. 다크서클이 심했지만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는 날카롭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두웠으나 꽤나 미인.

“조인족연합 대표 키더입니다! 치킨맨이라 불리고 있죠.”

닭대가리를 달고 있는 근육질 남자가 치킨맨.

머리에 달린 벼슬을 한번 만져 보고 싶었지만 실례일 거 같아 참았다.

남은 건 히포토스, 늑대 수인의 수장.

그와는 이미 안면을 텄으니 별다른 인사는 필요 없었다.

사람이 많다 보니 머리가 살짝 아프다.

각자 느낌이 다른 것도 있지만.

‘다 수상해 보여.’

정말이지 하나같이 의심쩍다.

대놓고 흥분했던 타이가나 히포토스, 묘족 서량 역시 당연했고.

비교적 얌전했던 웅족 고행, 치킨맨, 토족 리아나 역시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광기가 섞여 있던 토론인지 말싸움인지 모를 것에 동의를 하면 했지 반대하던 이는 없었으니까.

남은 견인족 그레이와 너구리족 하월 역시 꿍꿍이를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이쪽이 의중을 알기 힘들어 더 경계심이 든다.

특히나 하월, 저 사람은 다리를 꼰 채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중.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했으면 좋겠는데. 살짝 눈을 찡그리자 윙크로 답해 준다.

“궤엑.”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덕춘이가 주먹을 움켜쥔다.

워워. 덕춘아, 참자.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사고 치면 감당이 안 된다.

대림원 역시 탑의 세력 중 하나로 분류되는 곳이다.

여기 모인 이들은 그중에서도 대표라 불리는 이들이 모였고.

싸워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말.

애초에 이들과 싸우러 온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목적은 범인 색출과 연못 파괴다.

아직까지는 양쪽 다 아무런 진척이 없다.

이제 시작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 범인 색출은 그나마 빨리 끝날 수도 있는데 연못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단 말이지.

‘히포토스도 말하는 걸 피했지.’

여기서 더 언급했다가는 경계심이 생길 거다.

급하게 가지 말자. 어차피 그쪽은 모르토가 확인하기로 했으니까.

녀석과 짠 계획은 단순했다.

‘역할 분담.’

나는 대림원 내부에서, 녀석은 외부에서 범인을 찾는다.

모르토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다만 사실 관계와 상관없이 대림원으로 들어갈 경우, 잡혀 죽을 가능성이 컸다.

회의를 해 보니 알겠다. 지금 분위기라면 그냥 아무나 잡아다 범인이랍시고 죽여 버리더라도 놀랍지 않다.

베히가의 시신을 수습하는 거로 호감을 사는 동시에 유일한 현장 목격자로 조사에 참여한다.

녀석은 이들이 말하기 꺼리는 소원 들어주는 연못을 위주로 단서를 살필 거고.

모르토의 말에 따르면 연못은 대림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들었다.

공생이라 불러야 할지, 재앙을 이용하는 단계에 다다랐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대림원의 구성원들은 한 가지 특권이 주어진다.

‘소원을 비는 것.’

하루에 한 명.

각자의 순서에 맞게 소원을 빌 수 있다.

순서는 정해져 있으나 대림원의 구성원이 많은 관계로 대표도 아닌 모르토가 알 수 있을 리는 만무.

주변에서 들려온 소문이나 경험상의 지식을 토대로 추적해야 했으며, 그것도 아니라면 직접 연못을 찾아 흔적을 찾아야 했다.

최근에 들어서는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거 같기는 한데, 대림원 내부에서도 아웃사이더인 모르토가 자세한 사항을 알 턱이 없고.

연못이라는 것도 재앙답게 생성 위치가 랜덤이라고 한다.

그나마 필드 내부에서는 숲 안에서만 생긴다나.

대림원이 왜 숲에 지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각자 마을로 돌아가 탐색대를 꾸려 다시 모입시다. 현장 먼저 들려야 하니 동쪽 입구에서 뵙죠.”

“그러지.”

“동의한다.”

“좋아요.”

대표들은 그들만의 대화를.

난 나대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회의가 종료됐다.

동시에 시선이 내게 모인다.

뭔데, 왜 날 봐.

“크흠. 귀공은 거처를 정하셨소? 괜찮다면 소인과 함께 가는 게 어떠실지.”

웅족, 고행이 운을 띄우며 다가왔다.

똑바로 서 있어서 그런가 덩치가 장난 아니다.

2미터는 무조건 넘을 거 같은데.

나도 운동 좀 했다고 자부했건만 고행의 팔뚝은 내 허벅지만 했다.

겉으로 보이는 피지컬로만 봤을 때는 탈모맨이 와도 못 비빈다.

“무슨 소리! 너희는 너무 심심해. 갈 거면 나랑 같이 가자고. 등반가면 싸움도 좋아할 거 아니야? 화끈하게 놀게 해주지.”

“고행, 평소에는 곰탱이 같더니 이럴 땐 약삭빠르네? 음침한 남정네보단 나랑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아?”

고행이 날 데려가는 걸 반대하는지 호족 타이가와 묘족 서량이 끼어들었다.

음, 솔직히 말하면 두 녀석보다 서량이 더 음침하긴 한데.

아니, 왜 갑자기 이런 걸로 싸우는 거지?

날 왜 데려가려고.

“다들 물러서게나. 이블아이는 올 때부터 우리가 맡았으니까. 게다가 동족을 수습해 준 자이기도 하지. 우리가 대접하는 게 옳아.”

바로 옆에 있던 히포토스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엄포를 놓았다.

상식적으로 따지면 그게 맞기는 한데…….

그가 뭐라 하든 말든 다른 이들 역시 나를 데리고 가겠다며 뭐라 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는 건 둘.

너구리족의 하월과 토족 리아나.

조금은 의외다. 정확히 따지면 하월은 그럴 거 같았으나 리아나는 저기 섞일 줄 알아서.

견인족 대표인 그레이가 끼어든 게 반전이지.

서로 떠들도록 놔두며 궁리했다.

이들이 왜 이러는지.

나를 데려가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

단순 호감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언제 봤다고 호감이 올라서 날 대접하고 싶어 할까.

혹시나 그런 거라고 해도 안 믿는 이유가 있는데.

‘호감이 올랐다는 메시지는 여기 와서 한 번도 못 봤다고.’

내게는 아니, 탑을 오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그 메시지가 뜨질 않았다.

물론 그 메시지가 뜨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호감은 가질 수 있으나 글쎄…….

저 양반들 하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그건 아닌 거 같고.

“아, 그거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따지고 보면 간단했다.

이곳에서 범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

범인을 특정 지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그것도 나.

이들이 원하는 건?

범인.

안 그래도 서로의 특성 차이를 인정해 마을을 분리하고 연합 형태로 만든 이들이다.

수색이라고 다 같이 할까?

아닐걸.

즉, 범인을 먼저 찾는 쪽이 범인의 신변을 구속한다는 이야기.

난 대표들을 살폈다.

어느 쪽이 내게 도움이 될까.

어디로 가야 허튼짓 안 하고 진짜 범인을 찾으려 노력을 할까.

더 나아가…….

‘진짜 범인이 있다면 어느 종족의 수인일까.’

정말 동족을 감싸는 게 이들의 특징이라면 각 대표는 자신의 동족을 지키기 위해 가짜 범인을 만들려 할 거다.

분위기를 봐서는 아닐 가능성이 더 높기는 한데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의외로 선택은 쉬웠다.

“하월, 그쪽 마을에 손님 한 명 들어갈 자리는 있겠죠?”

“물론이죠.”

내 물음에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지들끼리 떠들던 이들이 일제히 말을 멈춘다.

“그, 무슨 소린가 자네. 왜 그쪽으로.”

“너구리 녀석,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히포토스와 타이가가 반발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한번 가 보고 싶어서요.”

“수작이라니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죠, 타이가. 본인 위치가 가지는 말의 무게를 생각하세요.”

나 스스로가 거부했고, 하월 역시 은연중에 협박을 가했으니까.

이건 사실 타이가가 말실수를 한 거지만.

공동체에서 근거 없는 의심은 독.

단순한 듯하지만 그 역시 한 부족의 대표.

할 말을 잃고 뒤로 빠졌다.

“결정된 거 같네요. 다들 준비하고 새벽에 모여요. 가죠.”

툭툭. 곰방대에서 재를 털어 낸 하월이 나를 이끌고 마법진 위에 섰다.

난 회의실에 남아 있는 이들에게 고개를 까딱였고.

-우우우웅

빛과 함께 건물의 1층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하월 님.”

올라갔을 때와는 다른 수인이 우리를 반긴다.

너구리 수인.

간단히 눈인사를 한 하월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한 곳에만 연결되어 있던 게 아니었군요.”

“대림원은 넓고 부족마다 선호하는 지형이 달라서 말이죠.”

히포토스가 이끄는 늑대 부족의 마을이 약간 서늘하면서 나무가 빼곡했던 곳이라면, 이곳은 바위가 많았다.

정말 하나의 바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것도 있었고, 건물들도 흙과 돌, 나무가 섞여 자연과 동화되어 있는 느낌.

너구리 수인들이 저마다 일을 하고 있다.

해가 조금씩 지는 시간.

‘너구리족은 농사에 좀 더 집중하는 모양이군.’

하긴 모든 부족이 같은 업종에만 몰두하지는 않지.

모르토에게 대략적으로 들었다.

각 부족마다 주 업종이 조금씩 다르다고.

“이쪽으로 오세요.”

하월이 자신의 집으로 보이는 건물의 문을 연다.

크지는 않지만 깔끔히 정돈되어 있다.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천으로 된 소파.

바닥에 깔린 양탄자.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직접적으로 물어볼게요. 왜 저와 함께 간다고 했죠? 아무런 어필도 안 한 거 같은데.”

“불만이시면 지금이라도 다른 데로 가고요.”

난 자리에서 일어서는 시늉을 했다.

덕춘이 역시 좋다며 어깨를 두들기고.

이 녀석 은근 너구리 싫어하네.

그러거나 말거나 픽 웃은 하월이 곰방대에 불을 붙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고맙죠. 사실 타이가 말이 맞아요. 말싸움이 고조되면 틈을 봐서 수작질이라도 하려 했죠. 당신을 꼬드기려고요.”

후우, 연기를 길게 내뱉은 그녀가 소파에 반쯤 눕다시피 몸을 기울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빛줄기 사이로 연기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의외로 냄새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정화초 연기]

-마음이 진정됩니다.

-조금은 나른해지기도 하죠.

권능을 통해 보이는 설명은 좋은 편이었다.

신기하네.

“왜 우리가 바로 숲 밖으로 나가지 않는지 궁금하죠?”

“조금은요.”

가늘게 눈을 뜬 하월이 입꼬리를 올렸다.

“서로 잡아먹지 말라고요.”

잡아먹지 말라고?

“말이 그렇다는 거죠. 우리끼리의 약속이에요. 밤에는 나가지 말자. 다 같이 밤을 보내자. 그런데 말이에요.”

하월이 입술을 살짝 깨문다.

“모르토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어요. 당신은 이유를 아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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