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64층
63층 클리어.
바위가 되어 허공에 떠 있는 쌍두귀.
NPC들이 환호하는 사이, 난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바라봤다.
[월광月光의 옥토선생玉兎先生이 쌍두귀의 죽음을 반깁니다.]
쌍두귀는 타락한 영물.
60층대 재앙 구간의 주축 중 하나.
그런 놈과 연관되어 있는 존재가 있다.
고작 한 문장이지만 서로 썩 좋은 사이는 아닌 거 같고.
뭐,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옥토선생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당신의 행적을 읽을 것입니다.]
“호감을 느낀다라…….”
전에도 이거랑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지.
처음으로 메스토카 유충을 잡았던 날.
메스토카는 위협을 했었다.
재앙쯤 되면 이런 식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거겠지.
이번에는 적대적인 게 아니라 우호적인 거지만 또 모른다.
정작 만나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대의 정체가 불명확하다. 메스토카처럼 재앙 중 한 명일 수도 있고, NPC일 가능성도 있다.
그 외에 다른 무언가든가.
만만치 않은 존재인 건 확실해 보이니 이름 정도는 기억해 둘 생각.
옥토玉兎면.
‘달토끼를 말하는 거겠지?’
옥토끼, 혹은 달토끼.
어떤 존재일지 살짝 호기심이 들었다.
그건 그거고.
“얘도 뭔가 사연이 있던 거 같단 말이야.”
난 바위가 된 쌍두귀를 바라봤다.
거대한 덩치 때문인가. 그 자체만으로도 경외심이 드는 모습이었으나, 슬픈지 고통스러운지 찡그린 표정과 크게 벌린 입, 역동적으로 휘젓는 모양 그대로 굳어 버린 팔다리는 신비롭기보다는 절박한 느낌이 강했다.
추월 욕망에 사로잡힌 영물이라.
영물이라는 것이 뭔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타락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건 알게 됐다.
물끄러미 덕춘이를 내려다봤다.
이 녀석도 속성이 특이하기는 하지만 영물은 영물이니 어쩌면…….
“야야! 지지야, 지지. 아무리 네가 돌도 씹어 먹는 나이라지만 진짜 돌은 좀 아니지!”
“그에에에.”
내가 걱정을 하든 말든 바닥으로 내려온 덕춘이가 돌덩이를 입에 물었다.
요즘 들어 아무거나 막 먹는 경향이 있다, 너?
재빨리 팔을 뻗어 덕춘이가 물고 있던 돌멩이를 낚아챘다.
“그에!”
조그맣고 강력한 주먹을 움켜쥐며 날 노려보는 녀석.
어쭈? 한 대 칠 기세다.
돌멩이 뺏었다고 주인도 못 알아보다니. 이참에 서열정리 한번 해… 보지 않겠습니다, 봐주세요! 폭력 쓰지 말자!
“그엑! 그에에!”
“아, 진짜! 말을 하라고. 아, 말을 못 하지. 이놈의 양서류가!”
어깨에 올라타 머리를 흔드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목 부러지겠네.
“하하하하! 다들 활기차 보이는구만.”
“좀 더 어울려 즐기고 싶네만 탑이 가만히 놔두지 않는군.”
“고마우이, 나중에 인연이 닿는다면 보자고.”
“에필테 출신을 만나면 내 이름을 말해. 잘 대해 줄 거야!”
나와 덕춘이가 싸우는 동안 빛에 휩싸인 헤센과 NPC들이 안전지대로 전송되었다.
다 같이 힘을 모아 공략한 만큼 보상을 받은 모양.
엉겁결에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그들을 보낸 난 가까스로 덕춘이를 떼어 낼 수 있었다.
어우, 어깨야.
“궥, 궤에.”
당당히 손을 펼쳐 돌멩이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덕춘이.
나도 딱히 가지고 싶어서 뺏은 건 아니다.
먹으려 해서 뺏은 거지.
“이게 대체 뭐라고.”
난 손에 쥔 돌멩이를 바라봤다.
쌍두귀가 흘렸던 눈물로 이루어진 돌.
좀 다르다.
돌멩이치고 가볍다. 살짝 시원한 게 물가에 잠겨 있다 꺼낸 느낌.
츠즈즈즈.
빛무리와 함께 권능일 발현되며 돌멩이의 정보가 떠올랐다.
[쌍두귀의 마지막 눈물]
-타락한 영물 쌍두귀가 마지막에 흘린 눈물.
-가슴 속 깊이 존재하던 순수의 흔적.
-쌍두귀의 영혼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잘 가공하면 보석, 잘 다스리면 영약이 됩니다.
그냥 돌덩이인 줄 알았더니만 아이템이다.
등급은 따로 적혀져 있지 않았지만 영물한테서 나온 거니까 꽤 값어치 있지 않을까.
용도에 따라 보석으로도, 영약으로도 쓸 수 있는 거 같고.
덕춘이가 이걸 먹으려고 했던 건…….
“너한테 좋은 건가 보구나? 메스토카 알처럼.”
“그에에.”
영물의 경지까지 오르지 못했던 메스토카의 알도 덕춘이와 더덕이에게는 훌륭한 보양식이 되었다.
이건 타락하기는 했어도 강력한 영물인 쌍두귀가 남긴 것이고.
그래, 이건 덕춘이 줘야지.
바로 먹을 수 있는 영약이면 또 모를까, 이렇게 가공도 안 된 물건은 함부로 먹을 게 아니었다.
나보다 덕춘이한테 더 효과가 좋아 보이기도 하고.
처음 만날 때부터 식탐이 많던 덕춘이지만 본인이 강해질 수 있는 것들은 더 확실히 표시를 한단 말이지.
난 순순히 녀석에게 돌을 건넸다.
“궥!”
누가 뺏어 먹을세라 냉큼 받아먹는 녀석.
그와 동시에 청량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에에에에!”
“오오오?”
[덕춘(카오스 개구리)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A → AA등급]
[혼돈이 강해집니다.]
[존재의 격이 상승합니다.]
[초월 가능성이 열립니다.]
등급 상승!
메스토카의 알을 먹고 난 후 특성이 더욱 강해졌었다.
이번에 쌍두귀의 눈물을 먹고 확실한 성장을 이루어 낸 것.
혼돈이 강해졌다라, 이건 속성 강화라고 봐야겠지.
안 그래도 카오스 속성으로 여러 규칙을 무시했던 덕춘이다.
지금 재앙을 만났을 때만이 아니지, 예전에도 그랬다. 따지고 보면 오래됐다.
24층, 예티와 함께 춤을 퀘스트. 춤과 불의 화신 칭호를 얻었던 그때도 덕춘이는 전투 불가 던전에서 애들을 때려잡았었으니까.
혼돈. 규칙을 무시해 버리는 힘.
규칙적이지 않고, 분란을 야기하기도 하며, 때로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덕춘이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는 내가 잘 지켜봐야겠지.
그거야 옆에서 함께하도록 하고.
[덕춘(카오스 개구리- AA)]
-속성: 카오스
-특성: 산성 (S), 회복 (S), 독 (S), 화염 (S), 외갑 (S), 괴력 (S)
-고유 능력: 뺨치기 (S), 폭식 (S), (???)
덕춘이의 정보를 불러오자 변화가 보인다.
다른 건 전이랑 같지만 괴력의 등급이 올랐고.
“새로운 고유 능력인가?”
물음표로 되어 있는 고유 능력이 보인다.
아직 정해져 있지 않은 건가.
속성이 카오스라 그런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는 않네.
새로운 고유 능력을 얻을 가능성이 열렸다 정도로 보면 될 거 같다.
아니면 봉인되어 있어 아직 개화되지 않았던가.
뺨치기 때는 그동안 덕춘이의 행동을 토대로 고유 능력이 생성되었다.
폭식은 내가 없을 때 생긴 거라 잘 모르겠다.
이것도 지켜봐야지 뭐.
아무튼.
-우우우우웅
“63층도 클리어.”
나와 덕춘이는 포탈을 향했다.
릴카의 퀘스트에 필요한 뱀 꼬리도 얻었으니 더 있을 필요는 없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타이밍.
[추월 불가의 거구, 쌍두귀가 무너집니다.]
[일주일 후, 새로운 쌍두귀가 등장합니다.]
[혼돈 +3점]
-쿠르르릉
메시지와 함께, 부유석과 하나 되었던 쌍두귀가 무너져 내렸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 탑에서 자체적으로 처분하고 새로 만드는 거겠지.
탑에 속한다는 거 저런 거다.
분명한 역할을 가지고 시스템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
그 안에 개인의 욕망과 삶, 개인사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으며, 필요하다면 언제든 갈려 나가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NPC가 자아를 잃은 탑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는 이유.
말 그대로 탑의 부품이 되어 버리니까.
“가자.”
“그엑.”
나와 덕춘이는 한 무더기의 돌덩이가 되어 버린 쌍두귀의 잔해를 잠시 바라보다 포탈을 넘었다.
* * *
시야가 바뀐다.
늪지대가 사라지고 초원이 펼쳐졌다.
[64층]
[재앙을 극복하시오.]
단출한 설명.
난 가볍게 흙바닥을 밟았다.
이름 모를 벌레가 기어 다니고, 풀 내음 섞인 바람은 싱그럽다.
하늘은 맑고 높았으며, 저 멀리 보이는 숲은 녹음이 우거졌다. 작은 동물 몇 마리가 얼굴을 비추다 몸을 숨겼다.
평화로움.
포근한 날씨에 발목을 넘지 않는 잔디.
돗자리만 펴면 그대로 소풍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여기에 속으면 안 되지.”
필드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곳이 많았으나,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어딘가 기괴하고 위험한 몬스터가 득실거렸다.
겉으로 드러난 숲, 그 속에서 안광을 번뜩이며 먹잇감을 기다리는 몬스터가 몇 마릴까.
몬스터보다 무서운 재앙은?
이곳에도 분명히 재앙이 있을 거다. 이번에는 뭐가 있으려나.
난 지그시 메시지를 바라봤고.
[64층]
-값싼 소원은 대가를 바란다.
이곳에 뭐가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모든 재앙을 아는 건 아니지만.
“소원이라는 단서가 나오면 다르지.”
소원 들어주는 연못.
난 퀘스트창을 열었다.
[릴카의 부탁 (5)- 강제 퀘스트]
-릴카의 계승자가 된 당신!
-이제 반박할 수 없는 일 노예가 되었습니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생기지 않는 법. 구릅시다!
-쌍두귀의 뱀 꼬리 (1/1)
-소원 들어주는 연못물 (0/1)
-레비아탄의 독이빨 (0/1)
-불지 않은 풍선 (0/10)
릴카가 주는 퀘스트는 의외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퀘스트에 필요한 재료를 통해 뭐가 있을지 간접적으로 알려 주는 것도 있지만.
“순서도 대충은 알 수 있단 말이지.”
재료 순서 역시 층 순서에 맞춰 정열되어 있다.
63층에서 얻을 수 있는 뱀 꼬리가 맨 위에, 64층에서 얻을 수 있는 연못 물이 두 번째.
레비아탄은 64층 이후에 있는 거겠지. 그다음에는 풍선과 관련된 뭔가가 있는 거고.
정확히 몇 층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비는 할 수 있다.
입술을 핥으며 추가 보상에 대해 살폈다.
[릴카의 부탁(5)- 강제 퀘스트]
-특수 조건, 소원 들어주는 연못 파괴 시 추가 보상.
-릴카와 대림원大林園은 껄끄러운 사이입니다.
대림원이라는 이름을 봤을 때 숲에 위치하는 게 확실하다.
재앙은 혼란을 부추기는 법.
아무도 없는 곳에 존재해 봤자 재앙의 의미가 없다.
고로 대림원 내부, 혹은 그 근처에 소원 들어주는 연못이 있다고 봐야겠지.
릴카와 관계가 좋지 않을 걸로 봐서는 폐쇄적인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애가 시끄럽고, 짜증 나고, 간혹 혈압을 오르게 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니까.
오히려 다른 이들한테는 귀여움을 받는 입장이다.
나름 생각이 깊을 때도 있고 말이지. 여러모로 정감 가는 캐릭터라고 해야 하나.
그러지 않았다면 홀로 상인 일을 하며 인맥을 다지지 못했겠지.
“여기는 좀 긴장해야겠군.”
“그에에.”
[외톨이의 길 (B) Lv.3]
-스스스슥
나와 덕춘이는 인기척을 죽인 채 숲으로 향했다.
* * *
초원에는 별다른 습격이 없었다.
은·엄폐 할 곳이 없어 적들이 다가오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역시 64층의 메인은 숲이라는 거겠지.
숲 초입.
난 좀 더 자세를 낮추며 긴장감을 높였다.
혹시 아는가. 숲속에 몸을 숨긴 채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지.
은신 스킬을 쓰고는 있지만 아직은 등급이 대단치 않아서 불안한 마음이 있다.
-스으으으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기온이 내려간 듯한 착각이 든다.
오감이 예민해진다.
좀 더 짙어진 풀냄새.
몸에 달라붙기 시작하는 습기.
미묘한 짐승의 냄새와 그 틈을 파고드는…….
‘피 냄새.’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거의 기다시피 움직이던 난 시야를 가리던 관목을 옆으로 밀었고.
‘이건 또 뭔 상황이야.’
피 냄새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