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점프?
난 허탈하게 웃으며 쌍두귀를 바라봤다.
저게 되네?
아니, 양심이 있어야지 저 덩치와 무게로 점프를 한다고?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다 떠나가지고.
“거북이 점프를 왜 하냐고!”
종족 특성 그런 거 없냐?
목보다 다리가 짧은 놈이, 어이가 없네.
억울하기까지 할 지경이었지만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나보다 먼저 놈의 꽁무니를 따르던 이들이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오랜만에 온 신참도 이쪽으로 왔군.”
“망할 거북이가 좀 그렇기는 하지. 덩치에 안 맞게 영악하잖아.”
“느릿느릿 걷다가 갑자기 뛰어서 앞을 차지하고는 하지.”
“쯧쯧, 이 친구야. 이놈은 다른 놈들처럼 싸울 생각이 별로 없어. 자기 뒤로 가게 만들기만 하면 되거든.”
저마다 한마디씩 하더니 툭, 내 어깨를 두드린다.
“설마 정면에서 싸울 줄은 몰랐는데. 실력이 꽤 되나 보군.”
“그냥저냥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맞으면 나도 때려 줄 실력은 된다.
억울한 건 못 참아서.
“겪어서 알겠지만 앞에서 싸우는 건 할 만했을 거야. 데미지를 줄 수 있으니까.”
맞는 말이다. 내가 공격했을 때도 상처가 벌어졌으니 이들이라면 충분히 유효한 타격을 먹일 수 있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있다는 건 나처럼 당했다는 거고.
“뒤쪽은 좀 달라, 읏차!”
내게 말을 걸었던 NPC가 검을 휘두른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일격.
“키햐아아악!”
뒤에서 날아들었던 뱀 머리가 그대로 잘려 나간다.
쌍두귀의 꼬리는 뱀 머리로 이루어져 있다. 총 8개.
독성 브레스를 뿜으며 잘려도 금방 재생한다.
그는 뱀 머리를 자르는 데 그치지 않고 쌍두귀의 뒷다리까지 노렸으나.
-티이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 나갔다.
단단하다.
가죽을 뚫기는커녕 흠집조차 거의 나지 않았다.
확실히 전면부보다 뒷부분이 단단한 모양.
공격해서 뚫을 수 있었으면 진작 했겠지. 여기 모인 NPC가 몇 명인데.
“헤센이라고 하지, 자네는?”
“이블아이.”
인사는 짧았다.
지금은 상황 파악하는 것만 해도 바빠서 말이지.
쌍두귀의 뒤로 간 후 떠오른 메시지.
[추월 불가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당신은 쌍두귀를 추월할 수 없습니다.
오케이, 여기까진 예상했다.
뒤에 추가로 떠오른 메시지들은 예상 못 했지만.
[낙오자는 아웃!]
-사망선이 따라옵니다.
-사망선 이탈 시 사망.
사망선이라.
그거였구나.
맨 앞에 쌍두귀, 놈의 뒤에는 우리들, 우리들 뒤에는 붉은색 선이 따라오고 있다.
저 붉은 선이 대체 뭔가 했더니만 이런 거였군.
어쩐지 다들 쌍두귀가 뛸 때마다 득달같이 뛰더라.
시선을 멀리 던졌다.
사망선까지의 거리는 제법 있어 보였지만 글쎄.
“가끔씩 쌍두귀가 전력 질주를 할 때가 있지. 그 때 놓치면 죽는 거야.”
“빠르긴 했죠.”
나에게 달려들 때를 떠올렸다. 믿기 힘들 정도로 빨랐지.
반응하지 못하고 뒤떨어지면?
그때는 뭐, 사망선에 걸려서 죽는 거고.
이건 좀 너무하네.
“사망 확정이라, 이런 옵션이 말이 됩니까?”
“안 될 건 또 없지.”
“그냥 탈출하는 건 어때요. 사망 한 번 견딜 수 있는 스킬이면 될 거 같은데.”
“될 리가 있나. 사망선 밖에 있으면 결국에는 죽어.”
단발성 옵션이 아니라는 거다.
구사일생으로 부활하더라도 사망선 밖에 있는 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짜증 나네. 꼴에 영물이라고 사기 옵션을 가지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내게도 있다.
“덕춘아, 넌 나갈 수 있지?”
카오스 속성의 영물.
격으로 따진다면 최상위권이 아닐까?
적어도 메스토카나 더덕이보다는 높았다.
무너지는 돌탑의 영향도 받지 않았고.
턱을 긁적인 덕춘이가 귀찮은 표정을 짓더니 폴짝 뛴다.
목적지는 쌍두귀의 등.
중간에 뱀 머리가 덤벼들었으나.
[뺨치기 (S)]
철─썩!
화끈하게 목이 돌아가며 바닥에 엎어졌다.
개구리가 뱀을 잡는 생태계 교란의 현장이었으나 그걸 보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고.
“궤에.”
엄청난 속도로 쌍두귀의 등을 타오른 녀석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한 객체가 추월했습니다.]
[카오스 속성 확인!]
[영물입니다!]
[추월 금지의 영역에서 벗어납니다!]
진짜 되네.
이게 바로 태생이 영물인 개구리의 위엄인가.
“그어어어어!”
자기 앞에 누가 있는 꼴을 못 보는 분노 조절 장애 거북이가 잠깐 발광하는 헤프닝이 있었으나, 덕춘이가 자발적으로 뒤로 돌아오는 것으로 얌전해졌다.
이어서 우리를 지나친 덕춘이가 전력 질주.
쏜살같이 사망선을 지나쳤지만.
[사망선을 지나쳤습니다.]
[강제할 수 없는 격을 지녔습니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재앙이라는 것들은 신비한 힘을 지니지만 동격이거나 그 이상의 대상을 상대로는 무력한 감이 있는 거 같다.
뭐랄까. 단순 전투력이 아닌 그들만의 서열이 있다고 해야 하나?
영물도 영약도 아닌 순수 인간인 이상 그쪽에 비빌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혼돈 수치로 규칙을 일그러트리는 것 정도.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그러기 위해 최소한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혼돈 수치는 100이라고 본다.
100층에 진입하는 조건이 그거니까.
경험상 혼돈 수치는 말 그대로 최소 조건이고 제대로 싸우려면 더 많은 수치를 가지고 있어야겠지.
다행히 난 층수에 비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내가 속으로 잡생각을 하는 사이.
“그에에.”
한바탕 뛴 덕춘이 내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잘했어, 오늘 밥은 스페셜 세트.”
“궥!”
톡. 주먹을 부딪쳤다.
그런 우리를 보며 감탄하는 NPC들.
“오오오! 굉장한 개구리인데?”
“과연 멸망의 징조라는 것인가.”
“페널티 없이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데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그래도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우리는 나가지도 못하는데.”
덕춘이가 변수가 되기는 할 테지만 완전한 해결책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일대일로 덕춘이가 쌍두귀를 이길 거라는 보장은 없어서.
본인도 피 터지게 싸울 생각이 없는 거 같고.
그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상황이 엄청 나쁘지는 않은 거 아닌가요?”
밖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곳은 탑이다.
사망선이라는 제약이 있지만 애초에 NPC는 활동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건 거슬리겠지만 이들 능력이면 충분히 커버 가능할 텐데.
쌍두귀도 그리 활동적인 놈이 아니고.
지금도 걷는지 가만히 있는지 모를 정도다.
종종 뱀 머리가 공격하기는 했지만 이들에게는 귀찮은 정도 수준이고.
아, 맞네.
“퀘스트 재료 챙겨야지.”
파악!
자리를 박찼다.
그런 나를 향해 달려드는 뱀 머리들.
“캬하아아아!”
“키헤에엑!”
위협적이기는 한데 상대하기 힘들 수준은 아니다.
고작해야 꼬리. 메스토카 무리에서 뒹굴었던 내게는 깜찍한 정도라 말이지.
-치이이익!
놈들이 뱉은 산성 침이 바닥에 떨어져 연기를 내뿜는다.
그대로 땅을 걷어찼다.
-콰아아앙!
그대로 땅이 뒤집히며 돌과 흙이 뱀 머리의 시야를 가렸고.
-서걱
허리를 비틀며 그대로 목을 갈랐다.
피를 뿌리며 꿈틀대는 꼬리가 하나.
안으로 더 진입했다.
뱀 꼬리가 재료라고는 했는데 길이가 얼마나 필요한지는 몰라서 말이지.
평소처럼 여유분을 챙길 생각이다.
혹시 아나, 식재료로 쓸 수 있을지.
그럴 수 있으면 대박이지. 잘라내도 자라나는 꼬리.
무한 리필집 아닌가.
“크으으으, 카하아아악!”
보다 못한 뱀 머리 하나가 브레스를 내뿜는다.
용종 몬스터도 아니면서 브레스라니.
가지가지 한다 싶었으나 재앙이라 불리는 놈인데 그럴 수도 있지.
[파이어 밤 (S) Lv.7]
지지 않고 폭발을 일으켰다.
화끈한 열기.
브레스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독액으로 이루어진 브레스가 증발하며 유독 가스가 피어오른다.
독 내성 스킬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오르는 건 덤.
난 자세를 낮추며 허벅지에 힘을 더했다.
브레스는 강력한 스킬이다.
다만 단점이 있었으니.
“브레스를 쓰면 잠깐은 텀이 생기거든.”
모든 브레스류 스킬의 공통점.
-콰앙!
한껏 응축했던 허벅지를 펴며 안으로 쇄도했다.
한순간 번쩍이는 섬광.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오오.”
“저 녀석 칼질 좀 하는데?”
“수준급이군.”
등 뒤로 들려오는 NPC들의 감탄사를 흘리며 검을 회수했다.
찰나의 순간 그어 버린 검격만 수십 개.
-투둑
-투두두둑
한 박자 느리게 뱀으로 이루어진 꼬리가 조각나 땅에 떨어졌다.
쏟아지는 핏줄기.
유독 사납게 덤볐던 놈들은 베었고,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건 가능한 길게 잘라 냈다.
대충 3개 정도 챙기고 발을 뺐다.
당장은 해치웠지만 본체를 죽이지 않는 이상 다시 재생될 테니까.
[릴카의 부탁 (5)- 강제 퀘스트]
-릴카의 계승자가 된 당신!
-이제 반박할 수 없는 일 노예가 되었습니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생기지 않는 법. 구릅시다!
-쌍두귀의 뱀 꼬리 (3/1)
-소원을 들어주는 연못물 (0/1)
-레비아탄의 독이빨 (0/1)
-불지 않은 풍선 (0/10)
이걸로 재료 하나는 얻었고.
확인 좀 해볼까.
[쌍두귀의 뱀꼬리]
-강한 독성!
-한 입 먹으면 혓바닥이 사르르 녹을지도?
-오랫동안 삭히면 먹을 수 있습니다.
-냄새에 민감한 이들은 선호하지 않는 재료.
나름 쓰기는 하지만 그리 인기 있는 식재료는 아닌 거 같네.
일단 보내 보자. 입맛은 다양하고 헬다잉 키친은 탑 최고 요리 집단이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내가 해 먹을 일은 없을 거 같아 2개를 전송 팔찌를 통해 보내 버렸다.
일단 재료는 끝났고.
“아, 미안합니다. 말 꺼내고 그냥 갔다 왔네.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요.”
“됐어. 어차피 여기 다 같이 있을 텐데.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냐고 물었나? 그렇지는 않아.”
“그럼. 다들 운 나쁘게 걸려서 이러고 있는 거지. 필드에도 다른 NPC들이 있다고.”
“보통은 쌍두귀를 피해 떨어져 있거나 숨어 있지만 말이지.”
밖에도 NPC들이 있기는 했구나.
내가 쌍두귀 근처에 있어서 만나지 못했던 모양.
“오면서 봤나? 늪지대에 빠져 죽은 녀석들.”
“봤습니다.”
“그들이 왜 죽었을 거 같아?”
글쎄, 왜 죽었을까?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된다.
난 머리를 기울이다 그들의 다리를 볼 수 있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쌍두귀.
넘어서는 안 되는 사망선.
그리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을 움직이는 NPC들.
“우리라고 무적은 아니야. 체력은 한정되어 있지.”
난 비교적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이를 바라봤다.
지쳤는지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고.
-꾸르르륵
그의 발은 빠르게 늪에 빠져들어 갔다.
이곳은 쌍두귀에 의해 변형된 늪지대.
칭호 효과가 있는 나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쯧, 그러게 체력 조절하라니까.”
헤센이 어느새 종아리까지 잠겨 버린 그를 뽑아냈다.
짧게 고마움을 전하는 NPC.
이제 파악이 됐다.
저 거북이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지.
그 자체만으로도 괴물이지만 한번 놈의 뒤로 가면 체력이 다할 때까지 발버둥 치다 죽게 된다.
심지어 꽁무니는 말 같지도 않은 방어력을 자랑했으며, 언제 앞으로 뛰쳐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잠조차 자지 못하게 만들었겠지.
버티고 버티다 늪에 빠져 죽으면 그땐 멀찍이 떨어져 쫓아오는 몬스터들이 시체를 물어뜯을 거고.
한 마디로…….
“여기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게 클리어의 열쇠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아니면 잡아 죽이던가. 해봤다시피 앞이 아니라면 가능성은 없어.”
맞는 말이다.
뒤에서 하는 공격은 통하지 않으니까.
앞에서 때릴 때는 데미지가 박혔고.
망할 거북이 녀석, 갑자기 점프만 안 했어도.
잠깐만.
“…점프?”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는 하는데.
‘뭔 탑에서 상식을 찾아.’
해 보자.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게 이곳을 클리어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