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63층
“흐아아암.”
공략을 다 올리고 하품을 했다.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가 졸음이 쏟아진다.
재앙이 없어진 영향인지 몬스터도 발길이 뜸하고, 저기에 새도 한 마리 날아간다. 멀어서 잘 안 보이지만.
필드에 새가 있었나?
모르겠다. 있겠지. 숲도 잘 찾아보면 쥐나 작은 들짐승이 돌아다닌다. 곤충도 있고.
필드라고 무작정 몬스터만 있는 건 아니다.
기본적인 생태계는 마련되어 있다. 풀도 있고, 나무도 있고, 그렇지 뭐.
“이제 이것만 올리면 되는 건가?”
난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살폈다.
61층, 탑 숭배자들과 싸우고 얻은 물건들.
그중에서도 직인이 찍힌 편지를 살폈다.
요즘 들어 연달아 폭탄을 터트리고 있는지라 괜찮나 싶기는 한데 그렇다고 비밀로 할 수도 없다.
탑 숭배자들은 등반가가 공략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니까.
겪어본바 본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같은 NPC들을 공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으며, 어찌 된 영문인지 등반가 공격 페널티도 안 받았다.
여러모로 꺼림칙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애들한테만 먼저 말을 해 두자.
우리가 놈들을 경계하면 할수록 놈들도 우리를 경계할 테니.
다 떠나서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만큼 공격권은 그쪽에 있다.
연합 사람들에게는 표식이 있는 만큼 불리한 건 이쪽이었다.
차례로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건 이준석.
[이준석]: 공듀 님! 이런 간악무도한 놈들이 있을 줄이야… 괜찮으십니까?
[쁘띠공듀]: 저는 무사하답니닷! 걱정 마시라구욧.
[이준석]: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사항은 아니군요. 우리 쪽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고요.
역시 팬클럽 회장님.
바로 상황 파악을 했다.
[이준석]: 이건 시간을 두고 터트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준석]: 50층 이하는 연합이 잡고 있고, 50층대는 NPC가 끼어들 만한 필드가 많이 없죠.
맞는 말이다.
우리가 그동안 탑 숭배자들을 못 만난 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무조건이라는 건 없기에 어떤 식으로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그렇다.
[이준석]: 아직 60층대에 오른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준석]: 공듀 님을 포함해 탈모맨, 핥짝 님, 냥냥펀치, 이블아이. 여기에 오지혁과 김소담.
[이준석]: 최근 이상옥을 포함해 두 명이 더 올라왔다는 거 같더군요.
생각보다 많네?
나랑 애들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등반 중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뒤따라오는 이들 역시 범상치 않다.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내가 뿌리는 공략이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다는 거겠지.
올라온 사람들 이름이 낯이 익기도 하고.
저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이준석]: 조금 더 연합 사람들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푸는 걸 추천합니다.
[쁘띠공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용. 미국의 빅스타 길드와 노블 나이트와도 연계해서 같이 움직여도 좋겠죠.
[이준석]: 그렇죠. 상대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면 우리도 그에 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요.
[쁘띠공듀]: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죠! 뒷일을 맡깁니닷!
[이준석]: 공듀 님은 저만 믿고 정상으로 향하십쇼! 충성!
확실히 이준석이 있으니까 편하다.
녀석의 말마따나 연합 관련된 일은 전부 떠넘기고 있어서 공략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나중에 선물이라도 하나 줘야지.
다들 노력을 하는 상황.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63층으로 가자.
그 전에 확인할 건 확인하고.
난 퀘스트창을 띄웠다.
[릴카의 부탁 (5)- 강제 퀘스트]
-릴카의 계승자가 된 당신!
-이제 반박할 수 없는 일 노예가 되었습니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생기지 않는 법, 구릅시다!
-쌍두귀의 뱀꼬리 (0/1)
-소원을 들어주는 연못물 (0/1)
-레비아탄의 독이빨 (0/1)
-불지 않은 풍선 (0/10)
.
.
.
가져가야 할 건 4개.
보아하니 재앙에서 얻어 내야 할 것들 같은데.
다른 건 몰라도 레비아탄은 빼박 재앙이다.
쌍두귀나 소원을 들어주는 연못은 재앙의 이름인 것 같고.
무너지는 돌탑 같은 건가?
불지 않은 풍선은 짐작도 안 간다.
“릴카 녀석, 은근히 도와주네.”
직접적으로 뭐가 있다고 말해 주는 건 시스템상 걸릴 수 있지만, 이렇게 퀘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 뭐가 있는지 말해 주는 건 괜찮은 모양.
그래도 계승자라고 챙겨 주는구만.
그건 그건데.
[릴카의 부탁 (5)- 강제 퀘스트]
-특수 조건, 소원 들어주는 연못 파괴 시 추가 보상.
-릴카와 대림원(大林園)은 껄끄러운 사이입니다.
“특수 조건에 추가 보상이라.”
처음 보는 건 아니다.
오델토의 퀘스트를 깼을 때도 있던 거니까.
복수를 해 주고 대가로 영혼 찢기를 받았었다.
다만 그동안 릴카가 내준 퀘스트 중에 이런 건 없었는데.
게다가 껄끄러운 사이라.
릴카가 하는 짓이 딱밤을 불러서 그렇지 탑 내에서는 꽤 인지도가 있다.
사람이 모두와 친할 수 없듯이 릴카 또한 사이가 나쁜 NPC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만.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라 껄끄러운 사이라고 했잖아.’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이건 가 보면 알겠지. 추가 보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받을 수 있으면 받을 생각.
간접적이나마 날 도와주는데 나도 녀석이 바라는 걸 해 줘야지.
대림원이 뭐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그곳에 연못이 있다는 건 알겠다.
오케이.
확인할 건 다 했다.
62층에서 구해야 할 물건이 없다는 것도 파악했고.
“올라가자.”
“그에에에.”
난 덕춘이와 함께 포탈을 넘었다.
-우우우웅
붕 뜨는 기분.
63층은 좀 편하게 갔으면 좋겠는데.
다른 곳도 빡셌지만 60층대는 더 그렇다.
재앙이라는 이름값이 있어서 그런가.
-파아아앗!
전송이 끝나고 빛이 터졌다.
* * *
살짝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느껴지는 위협은 없다.
쉐핀처럼 눈을 가리는 NPC도 없었고.
습하면서 꿉꿉한 냄새가 올라온다.
“늪지대군.”
[칭호, 늪지대의 지배자 효과]
-늪지대에서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늪에 잘 빠지지 않습니다.
-늪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두려움을 느낍니다.
내 위로 떠오르는 메시지.
어쩐지 몬스터가 없다 했더니만 이거 때문이었나.
35층, 김소담과 고대진, 최영미, 김서균과 함께 탑을 오르던 당시 얻었던 칭호.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써먹네.
“발이 덜 빠지기는 하네.”
“그에엑.”
휙. 나무뿌리 사이에 끼어 있던 돌멩이를 던졌다.
잠시 떠 있나 싶더니 쑥 아래로 꺼져 버린다.
일반적인 늪지대가 아니군.
좀 더 질척거리고 잘 빨아들인다.
날씨도 상당히 더운 게 돌아다니기만 해도 진이 빠질 것 같은 환경.
중장비로 무장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 힘들겠지.
나야 상관없지만.
칭호 효과도 있거니와 샤워에 클린, 펠라인 세트에는 쾌적 옵션까지 달려 있으니 불편함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중요한 건 이곳에는 무슨 괴물이 있냐는 것.
난 울창하게 뻗은 나무를 바라봤고.
[63층]
[재앙을 극복하시오.]
-츠즈즈즉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권능을 통해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쌍두귀(雙頭龜)의 뒤를 따르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뭔 소리야 저게.”
이번 층의 재앙이 쌍두귀라는 건 알겠다.
잘됐네. 릴카의 퀘스트 재료로 녀석의 꼬리가 필요했는데.
쌍두라고 하는 걸 보니 머리가 두 개인 건 뻔하고, 퀘스트에 뱀 꼬리라 되어 있었으니 키메라 종류인가?
앞뒤로 공격할 수 있는 객체인 건 분명하고, 거기에 하나 더.
거북 귀.
거북이 형태의 괴물일 게 뻔했다.
설마 메스토카처럼 군집체형 몬스터는 아니겠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칭호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평지보다는 기동력이 달리는 게 사실.
흙바닥도 아니니 땅굴 이동도 제한된다.
-스릉
검을 뽑았다.
뭐가 됐든 긴장 풀지 말고 움직이자.
60층대가 만만치 않은 건 겪어서 알고 있지 않은가.
오감에 집중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늪지대에 서식하는 몬스터가 두려움에 떤다는 게 거짓은 아닌지 마주치는 몬스터는 없었다.
느껴지는 기척을 보면 거리를 벌린 채 날 지켜보고 있는 모양.
직접 덤빌 수는 없으나, 자신의 영역에 들어선 날 가만히 놔두고 싶지는 않은 거 같은데.
“그냥 확 다 뒤집어?”
은근 신경 쓰인다.
쌍두귀가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어중간한 놈들도 따라붙고 있어.
작게 숨을 내쉬며 정신을 다잡았다.
저놈들은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다.
괜히 난동을 부려서 이목을 끌지 말자.
저딴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있으면 흔적을 찾는 데 더 집중하는 게 나았다.
이곳에도 마을이 있을까?
NPC들이 살고 있다면 어딘가 흔적이 있을 거다.
굳이 그들이 아니더라도 먼저 이곳에 도달한 등반가나 쌍두귀의 흔적이라도.
그렇게 1시간.
“그에.”
“어, 나도 봤어.”
내 노력이 통한 걸까.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 좋은 미래를 암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삭아 빠진 좋은 검 (D)]
-오랫동안 방치되어 삭아 버린 명검.
-망가지며 등급이 내려갔습니다.
-고치는 것보다 녹여 버리는 게 나을걸요?
[꿰뚫린 방패 (C)]
-튼튼했던 방패.
-구멍이 뚫려 있네요. 물이 들어오죠.
망가진 아이템이 굴러다니고 있다.
상태가 안 좋은데도 등급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니 원래는 꽤 높은 등급이지 않았을까.
조용히 검을 집어 들었다.
칼날에 손끝을 대고 쑥 훑었다.
-트드드득
가뜩이나 상해 있던 칼날이 뭉개지며 쇳가루가 떨어진다.
설명에 명검이었다고 적혀 있던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
아무리 습기가 높다지만 이렇게 부식될 리가 있나.
“단순히 질퍽거리는 게 다가 아니었군.”
다시 한번 늪 전체를 대상으로 권능을 발휘했다.
[오염된 늪지대]
-재앙, 쌍두귀의 영향으로 오염된 늪지대.
-강한 산성을 띠고 있습니다.
-변종 몬스터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독성 가스가 지속적으로 배출됩니다.
-한번 가라앉으면 빠져나오기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쩐지 색깔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도 아직 내성 스킬이 반응하지 않은 걸 보니 프램버그 때보다는 상황이 나은 것 같다.
하기야 거기는 재앙이 아니라 혼돈의 파편이 있던 곳이니까.
같은 괴물이라도 급이 다르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은 같지만.
늪지대를 계속해서 나아갔다.
방금 본 아이템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안으로 갈수록 더 많은 흔적이 있었으니까.
전부 늪지대에 빨려 들어간 이들이 남긴 것일 터.
중간중간 어딘가에 걸려 흔들거리는 해골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63층까지 올라온 사람이 고작 늪지대에 빨려 들어가 죽었다고?
한두 명도 아니고 이렇게나?
내가 본 아이템만 수십 개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열댓 명은 죽었다는 건데.
“평범한 늪지대가 아니라지만 너무한 거 아닌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궥!”
저 멀리서 소음이 들렸다.
63층에 들어오고 처음 듣는 인위적인 소리.
가자. 가면 뭔가 단서가 있겠지.
-파앙!
난 발을 박찼다.
힘이 가해지자 푹, 푹, 발이 빠졌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고.
-구구구궁
-쿠우웅
둔중한 진동음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동시에 느껴지는 비린내.
마치 오랫동안 물을 갈지 않은 어항 냄새가 난다.
코가 절로 찡그려지는 상황이었으나 그보다 더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찾았다.”
63층의 재앙, 쌍두귀의 등장이었다.
거대한 몸통.
초대형종에 가깝다.
미친 듯이 큰 건 아니지만 어디 가서 덩치로 꿇리지는 않을 정도.
길게 뻗은 두 개의 목에는 거북이 머리가 달려 있다.
등딱지는 척 봐도 단단해 보였고, 꼬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8개의 뱀 머리가 자리 잡았다.
얼씨구?
불도 뿜고, 독도 뱉네?
늪지대가 썩어 들어갈 만하다.
그보다 말이지.
“저 사람들은 뭐 하는 거야?”
난 멀리 보이는 쌍두귀의 뒤를 쫓는 인파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도 날 봤는지 뭐라 뭐라 소리친다.
거리가 있어 잘 안 들리기는 했지만 집중하자 조금은 들렸다.
“오지, 마! 앞으로 가! 앞!”
“앞으로 가라고!”
“이쪽, 안 돼!”
오지 말라고?
고개를 갸웃하는 타이밍.
“그어어어?”
쌍두귀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