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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84화 (284/740)

284화 끌어들이지 마요

눈을 끔뻑였다.

레지스탕스요? 탑에 그런 게 있었나?

아니면 밖에서부터 있던 집단이 탑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건가.

레지스탕스가 있다는 건, 일단 뒤엎고 싶은 뭔가가 있다는 건데.

물끄러미 쉐핀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방긋 웃는다.

어서 물어보라는 듯한 느낌인데 그럴 생각은 없다.

‘알아서 뭐 해, 귀찮기만 하지. 사연 없는 NPC가 어디 있다고.’

비단 쉐핀뿐만이 아니다.

다들 세계가 멸망해서 탑에 온 이들 아닌가.

갈등과 혼란, 분열된 힘과 집단, 무슨 일이 있어도 있었겠지.

깊게 파고들지 말자. 안 그래도 할 게 차고 넘친다.

그런데 왤까, 레지스탕스인지 뭔지 하는 애들이랑 엮일 거 같은 이 기분은…….

따지고 보면 이미 엮이기는 했구나.

쉐핀이 하얀뿔인가 뭔가 하는 곳 소속이니까.

무엇에 대항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하얀 나무.’

높은 신분의 천족이 만든 집단.

쉐핀은 천계에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곳이라고 했었는데.

나도 들르기는 해야 한다.

이건 차차 생각하도록 하자.

천족의 호감도가 올랐다고 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그보다…….

“성능 좋네.”

[천사의 뿔 단검 (S)]

-제2 천계 천사의 뿔로 만든 단검.

-강력한 신성력을 지닙니다.

-마魔를 가를 수 있습니다.

[날개 없는 천사의 깃털 (AAA)]

-제2 천계 천사가 사망 시 남기는 깃털 중 하나.

-강력한 신성 무구를 만드는 재료!

-제2 천계에서는 깃털에 영혼 일부가 담겨 있다고 전해집니다.

-동족에게 가져다주면 깃털 주인에 따라 대접을 받을지도?

퀘스트 보상이 제법 훌륭하다.

단검 옵션 중에 마를 끊는다는 건 아마도…….

“마기나 저주 같은 거로 이어져 있는 걸 끊는다는 거겠죠?”

“그렇죠.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의 속박을 끊든지, 아니면 저주받은 물건에서 저주를 떼어 내든지요.”

상황만 맞아떨어진다면 유용하게 쓸지도 모르겠다.

조금 변형시키면 나한테 달라붙은 저주도 끊어 버릴 수 있다는 거니까.

다 떠나서 S등급이기도 하고.

깃털은 뭐, 나중에 무기 만들 때 쓰든지, 릴카한테 팔든지, 가지고 있든지 하면 되겠지.

이번 퀘스트는 난이도에 비해 보상이 짭짤하다.

재앙을 먼저 해결해서 그런 거겠지만.

원래였다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무너지는 돌탑을 피해 유골과 유품을 챙겨 와야 했다.

나야 쉽게 가면 좋지.

“받아요. 약속했던 물건이에요.”

그녀가 유품을 건넨다.

알 수 없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정육면체 목걸이.

“하얀 나무에 들어가려면 필요할 거예요.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거거든요. 하얀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몰라요. 70층대에 있다는 것만 알죠.”

“그거면 충분합니다.”

올라가서 뒤져 보면 되는 거니까.

난 목걸이를 받아 챙겼다.

왕족과 귀족 출신 천족들이 모여 만든 집단, 하얀 나무.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열쇠라는 거지.

역시 이상하다.

쉐핀은 켄락에게 좋은 감정을 지닐 만한 일이 없다.

당장 이렇게 미련 없이 유품을 건네주는 것만 봐도 그렇지.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쉐핀이 손가락을 튕겨 의자를 소환해 앉았다.

내가 앉을 의자도 함께.

자연스레 자리에 앉자 쉐핀이 은근히 바라본다.

“설마 유골을 가져와 줄 줄 몰랐어요. 어떻게 더 보답하고 싶은데. 괜찮다면 일 하나…….”

“아,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있었어요.”

그녀가 뒷말을 잇기 전에 냉큼 끼어들었다.

내가 원하는 걸 얻으면 얻었지 괜히 원치도 않은 걸 받을 생각은 없어서.

마침 그녀에게 원하는 것도 있고.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쪽지를 펼쳤다.

도움이 될 거라며 적어 준 주의 사항과 돌탑의 규칙.

계속 걸리더라고.

“쉐핀, 62층 공략법을 알고 있었죠?”

“…….”

대답이 없다.

침묵은 긍정으로 받아들여야지.

“언제부터 알았죠?”

“며칠 됐어요.”

도로 쪽지를 집어넣으며 잠시 말을 끊었다.

뭐라 하려는 건 아니다.

물론 그녀가 미리 알려 줬다면 더 쉽게 클리어했을지 모르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해결을 봤으니까.

“제가 처음 이곳에 소환된 날, 쉐핀은 제 눈을 가렸죠. 안전을 확인하겠다면서요. 무슨 수로? 심지어 다른 마을 사람들과 달리 창문에 커튼도 안 쳐 뒀죠, 제가 온 이후에 쳤지.”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는데 62층을 클리어한 지금은 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돌탑을 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증거.

동시에 돌탑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돌탑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집 안에서 내 눈을 가리고 돌탑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한 게 쉐핀이다.

돌탑의 영향을 받지 않고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면 내가 한 것처럼 봉인시키는 것 역시 가능했겠지.

즉, 쉐핀은…….

“62층을 벗어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군요, 아마 그 사람…….”

턱으로 그녀가 안고 있는 유골을 가리켰다.

“켄락의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겠죠.”

난 인벤토리에서 그녀가 보상으로 준 천사의 뿔단검을 꺼냈다.

보자기 사이로 뿔이 부러진 해골이 보였다.

“깊게 관여할 생각 없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관심도 없고, 당신이 뭘 원하든 이 정도로 끝내 달라는 이야기예요.”

안 그래도 탑 숭배 집단이니 뭐니 하는 것들 때문에 골머리 아프다.

릴카의 퀘스트도 해야 하고, 아직 현자에게 받은 퀘스트도 남았다.

아직 사용처를 모르는 아이템도 있었으며, 상위층을 오르고 있는 놈들까지.

가뜩이나 세계도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상황.

NPC 개개인의 은원까지 해결해 주면 답이 없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 끼워 넣지 말라는 거다.

특히나 NPC 간의 알력 다툼 같은 거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슬쩍 바라보니 웃고 있다.

아까와는 달리 진심으로.

“눈썰미가 좋네요? 진짜 욕심난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도 한 번만 물을게요. 하얀뿔에 들어올 생각 없어요?”

“없습니다.”

“아쉽네요. 그래도 서로 나쁜 사이는 되지 말아요.”

“그 정도는 가능하죠.”

나도 NPC 집단을 적대할 생각은 없다.

다른 누군가는 쉐핀의 영입에 혹했을 수도 있고.

뭐가 됐든 NPC로 이루어진 세력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위로 올라갈 확률이 더 높아지니까.

심지어 NPC와의 관계는 탑 안에서만 유효하다.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것.

문제는 난 100층까지 무조건 올라가야 한다.

게다가…….

‘이미 뒤를 봐줄 세력은 충분해서 말이야.’

헬다잉 키친, 프램버그.

그 외에 수많은 NPC와도 친분이 있다.

릴카만 해도 영향력이 꽤 세고.

뭐 하는 곳인지도 불분명한 데다가, 규모도 다른 거대 세력에 밀리는 곳에 들어갈 필요는 없지.

딱 봐도 지원해 주는 대가로 뭔가를 요구할 거 같은데.

그런 건 질색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까 좀 더 보상해 주고 싶다고 하셨죠? 쉐핀이 아는 공략법 좀 알려 줘요. 필요하거든요.”

“그러죠. 어찌 됐든 당신에게 고맙거든요.”

그녀가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건넨다.

“이곳에 머물며 정리한 내용이에요.”

“잠깐이지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원하는 건 얻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쉬고 싶었지만 그거야 8번 마을이 있던 곳에 가서 해도 늦지 않다.

괜히 여기서 어물쩍거리다가는 귀찮아질 거 같아서.

-파앙!

가볍게 발을 박찼다.

걸리적거릴 것도 없겠다 천천히 걸어갈 필요는 없지.

쉐핀 역시 날 잡지는 않았다. 그저 멀어지는 날 바라볼 뿐.

그녀를 뒤로한 채 난 8번 마을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 *

“슬슬 올려 보실까.”

“그에에에.”

비교적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커뮤니티를 켰다.

61층과 62층 공략법을 올릴 생각.

탈모맨과 핥짝이, 냥펀도 지금쯤이면 61층을 오르고 있을 거다.

녀석들 실력이면 60층에 누가 있어도 결투에서 이길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니머리 탈모]: 으아아아! 공듀우우우우, 어디야!

[니머리 탈모]: 이거 서러워서 살겠냐고!

탈모맨 녀석이 올린 글이 보인다.

얜 또 왜 이래.

개인 메시지도 보냈네?

[니머리 탈모]: 공듀… 난 사나이의 의리를 믿는다.

[니머리 탈모]: 소개팅 잡히면 몇 층이라도 갈 테니 말만 하라고!

아, 맞네. 소개팅 해 준댔지.

언제라고는 말 안 했지만.

그런데 얘만 그런 게 아니다.

[정수리 핥짝]: 이 썩을 놈들, 아주 탑을 지들만 쓰지? 콰악 씨, 그냥.

[냥냥펀치]: 핥짝이(솔로)가 ㅂㄷ거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수리 핥짝]: 냥펀, 어디야? ^^ 오늘따라 보고 싶네?

[냥냥펀치]: 방금 건 고양이가 쳤습니다, 판사님. 믿어 주세요.

얘네는 또 왜 이러고.

보아하니 둘도 떨어져 있는 모양.

오픈 필드는 대부분 랜덤으로 떨어지니까 그럴 수 있지.

“뭔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거야?”

난 머리를 긁적이며 그동안 못 본 커뮤니티를 살폈고.

“…아.”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합 사람들의 댓글이 유독 많이 달린 글이 몇 개 있었다.

카메라 스킬로 찍은 사진이 올라간 게시글.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으니.

[소담소담]: 60층 카페테리아에서 한 장!

(사진)

오빠 사진 찍을 때 얼굴 좀 풀라고!

테이블 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김소담의 손을 잡고 있는 오징혁이었다.

둘이 묘하게 붙어 다닌다 했더니만 기어코!

“오징혁 이 자식! 이런 놈도 연애하는데 왜 내 옆에는 개구리랑 이상한 애들밖에 없지?”

“궤?”

왜요. 투정 좀 부릴 수 있는 거잖습니까, 덕춘 선생님.

너랑 쫄쫄맨이랑 금붙이랑 은갈치가 옆에 있는데 내가 누굴 만날 수 있냐고.

사람들이 보면 뒷걸음질 친다니까?

내가 사람들을 못 만나는 건 다 얘들 탓이다.

암, 그렇고말고.

작게 혀를 찬 난 공략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쁘띠공듀]: 요☆정 등. 장!

안뇽, 칭구들! 내가 돌아왔어요!

다들 열심히 등반하고 있죠? 보니까 60층에 올라온 사람들도 있군욧! (짝짝짝!)

물론 시이이이인성한 탑에서 연애질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요오오오즘 것들은 하여간……! 흠흠!

짜─란!

그게 중요한 게 아. 니. 죠.

여러분을 위해 공략을 가져왔습니닷!

.

.

.

열과 성을 다해 공략글을 써 내려가는 타이밍.

“그에에.”

덕춘이의 한숨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 * *

조현수가 공략글을 올리는 시점.

홀로 남은 쉐핀은 야외 테이블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듯 평소에 쓰지도 않던 새 물건이었다.

찬장에 아껴 두었던 차와 무늬가 들어간 주전자.

간단한 간식과 함께 차를 홀짝이는 그녀의 발아래에는 작은 봉분이 있었다.

켄락의 유골을 묻은 곳.

흙만 덮혀 초라하기 그지 없었고.

“이제 당신이 내 발밑에 있네요, 켄락?”

쉐핀은 그 위에 발을 올리며 미소 지었다.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고, 잠시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켄락의 유품을 살폈다.

가문의 문장이 박힌 물품들.

아이템도 뭣도 아닌 장신구들.

금반지를 손가락에 넣었다 뺀 쉐핀이 작게 혀를 찼다.

“대체 이런 게 얼마나 중요하다고 당신들은… 뭐, 좋아요. 가는 길 장식이라도 해 줘야지.”

-꾸득

주먹을 쥐자 으스러지는 반지.

봉분 위에 금 부스러기를 털어 낸 쉐핀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고 있다.

목에 넥타이를 한 갈매기.

자기가 맹금류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하늘을 한 바퀴 돈 녀석이 테이블에 착지했다.

익숙하게 갈매기의 머리를 쓰다듬은 쉐핀이 미리 준비해 뒀던 편지와 켄락의 유품을 건넸다.

“1,500포인트 되겠습니다, 고객님.”

갈매기가 부리를 열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탑의 우체국, 갈매기.

NPC들이 서로 연락할 수 있게 해 주는 집단이었으며.

“하얀뿔 본부로 보내 줘요, 늦어도 4일 내로. 다른 레지스탕스 임원들과 모임이 있기 전에요. 꽤 쓸 만한 인재가 탑을 오르고 있거든요.”

“3일 내로 전달해 드리죠.”

화조국 못지않게 탑 곳곳에 퍼져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기도 했다.

푸드득.

갈매기가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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