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눈을 감다
세 NPC가 준 퀘스트는 시선 품앗이.
[시선 품앗이– 일반 퀘스트]
-8번 마을의 NPC, 모쿠토, 벤, 호호문은 무너지는 돌탑을 마주했습니다.
-서로 협력하면 오랫동안 돌탑을 잡아 둘 수 있지 않을까요?
-보상: 불꽃을 품은 수정 (AAA), 벼락 줄기 스티커 (AAA)
사실 보상 자체는 대단하지 않다.
아니지, 좋은 거기는 하구나. AAA등급인데.
요즘 좋은 아이템을 많이 봐서 눈이 좀 높아졌다.
당장 쉐핀이 내게 보상으로 내건 것들만 해도 굉장한 것들이라.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이번 퀘스트는 보상이 목적이 아니다.
주면 주는 대로 받긴 하겠지만 진짜 확인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다.
“오오오, 이쪽으로 오게.”
“이제 좀 살겠구먼, 셋이서 유지하는 건 좀 힘들었어서.”
“돌탑 보고 있나?”
퀘스트 수락에 그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지는 않지만.
“예, 보고 있습니다.”
난 자연스럽게 NPC들 사이에 꼈다.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돌탑을 보고 있는 모양새.
그제야 NPC들의 얼굴이 얼핏 시야에 들어온다.
자세히 살필 여유는 없지만.
혹시나 싶어 빠르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역시나 몸이 무너지지 않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기에 가능한 일.
다르게 말하면 지금이라도 시선을 돌려 도망칠 수 있다는 말.
그럴 생각은 없지만.
“이제부터는 눈 깜빡이는 것도 조심해야 하네.”
“그래야죠.”
아까는 일부러 한 거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방법은 간단하네. 이제 4명이 모였으니 순서대로 움직일 수 있겠지. 두 명이 돌을 바라보고 한 명은 그 두 명을 지킨다. 남은 한 명은 휴식을 취하든 볼일을 보든 할 거고.”
“어때, 간단하지?”
“그냥 보기만 하면 된다 이거야.”
심플하다.
꽤 체계적이기도 하고.
굳이 두 명이서 돌탑을 바라보는 이유는 하나.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한다. 재채기를 할 수도 있고, 본인이 인지하지도 못한 채 눈을 깜빡일 수도 있다.
그러니 두 사람을 붙여서 혹시라도 실수가 발생할 때 커버하겠다는 거지.
두 명이 동시에 눈을 감아 버리면 뭐,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누구 하나는 죽는 거고.
몬스터도 그렇고, 주변의 환경적인 변화로 인해 돌탑 감시자들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 호위가 붙는 것도 당연하다.
이렇게 셋이서 한 팀, 남은 한 명은 자기 할 일 하는 거지.
생명체인 이상 밥도 먹어야 하고 볼일도 봐야 하니까, 잠도 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 4명이 필요하다.
이들이 내게 퀘스트를 부여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이들의 지시를 따를 생각은 없다.
급작스럽게 만든 퀘스트라 그런지 구체적이지가 않더라고.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는 알겠는데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구체적인 시간.
언제까지 이 상태를 유지해야 퀘스트가 클리어되냐 이 말이지.
나도 언제까지고 여기에 묶여 있을 수는 없으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셋이서 돌탑을 컨트롤하는 사이, 내가 마을로 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올 거니까.”
“이후부터는 우리끼리 해결을 보지. 운 좋게 생각해. 어쩌면 이번 거로 62층을 클리어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하하하하!”
“그럼 그럼, 돌탑은 하나밖에 없거든. 이렇게 잡아 둔다면 돌탑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지!”
맞네. 꽤 괜찮은 방법이다.
번거롭기도 하고 인력도 많이 쓰이겠지만 제법 확실한 해결책이다.
완벽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상관없지. 지금은 지금 상황에 맞게 행동하면 그만이다.
“슬슬 빠진다. 등반가랑 모쿠토가 돌탑을 보고 있고, 벤이 주변을 지켜.”
“그러지.”
“발은 네가 제일 빠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맞은편에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벗어났다.
남은 건 나 포함 셋.
“으으, 이제 좀 살겠군. 소변부터 봐야지. 걱정 말아. 근처에서 경계하면서 일 볼 테니.”
“…벤, 굳이 안 말해 줘도 돼.”
“하하! 안심하라 이 말이지.”
벤 역시 잠시 모습을 감추고 나와 모쿠토만 돌탑을 노려보는 모습이 되었다.
슬슬 물어볼까.
내가 이들과 함께 움직인 이유.
“모쿠토, 켄락이라는 NPC를 압니까?”
켄락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함.
게다가 쉐핀이 말해 준 정보의 사실 확인도 할 예정이다.
“아, 그 새끼? 걘 죽었을 텐데, 어떻게 아는 사이지?”
그 새끼?
아무래도 사람들과 좋은 사이는 아니었던 거 같다.
“개인적으로 퀘스트를 받은 게 있어서요. 듣자 하니 이 근처에 켄락이 있었다고 하는데, 흔적은 없고 여러분만 있더군요. 같은 마을 사람인가요?”
“같은 마을이기는 했지. 워낙 싸가지 없는 놈이라 겉돌았지만. 본인은 자기가 우리를 따돌린 거라고 했었지. 어떤 의미로는 대가리가 참신하게 돌아간 녀석이었어.”
마을 사람인 건 확실하다는 거네.
잠깐만, 쉐핀은 그럼 켄락을 어떻게 안 거지?
다른 마을이었다면 알기 힘들었을 거 같은데. 시신을 수습했는지 안 했는지도 확인하기 힘들 거고.
사실 같은 마을 사람인가? 쉐핀이 있던 곳과 이곳은 그리 멀지 않다.
마음먹고 이동하면 2시간도 안 걸린다.
아니면 여기는 활동 범위가 넓은 걸지도 모른다.
“켄락이 죽었다면 돌탑 때문이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 온몸이 토막 나 있었으니까. 또 몰라, 놈한테 원한 가진 놈도 몇 있거든. 그들이 죽인 후 그렇게 만든 걸 수도 있어.”
“그 정도로 원한이 쌓였다고요?”
“NPC라고 다 강한 건 아니거든. 켄락은 자기보다 약하다는 생각이 들면 같은 NPC라도 짓밟았지. 인격 모독은 기본이고, 같은 NPC로 대우할 생각도 없더군. 쉐핀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쯧.”
쉐핀의 이름이 나왔다.
역시나 그녀도 이 마을 출신인 건가.
이상하군. 같은 마을 출신이었는데 왜 따로 떨어져 있는 거야.
“쉐핀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떨어진 곳에 있던데요.”
“아, 만났나? 그렇겠지. 시스템도 아니다 싶었는지 쉐핀을 이주시켰거든. 그쪽 마을에서는 잘 지내나 모르겠네. 직접 가 보고 싶지만 제한이 있어서.”
시스템이 그렇게 친절하던가? 39층에서 착취당하던 악마들은 보호 안 해 주던데.
60층대라 다른 걸지도 모르겠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쉐핀은 잘 지냅니다.”
“다행이군.”
쉐핀이 있는 마을이 전멸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기는 하지만 빵도 해 먹고 나름 잘 지내는 거 같으니까.
이걸로 의문점이 해결됐다.
쉐핀은 시스템적으로 이동됐다는 것.
이곳으로 올 수 없기에 내게 퀘스트를 내줬다는 것.
원한이 쌓였을 그녀가 어째서 시신을 수습하길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테니 넘어가자.
“그래서 켄락의 시신은 어디 있나요?”
“마을 외곽에 대충 던져 놨지.”
그냥 방치했다는 거나 마찬가지.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긴 했구나.
“몬스터가 먹었을 수도 있고, 찾더라도 해골일 거야. 녀석이 죽은 건 예전 일이니까. 흔적이나 있으면 다행이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 들은 거 같고.
지금부터는 쉐핀이 해 준 말이 맞는지를 확인하자.
돌탑을 똑바로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그와 함께 스트레이트.
-콰아아앙!
주먹이 제대로 꽂히며 굉음이 들렸지만 돌탑은 굳건했다.
돌이 흔들리기는커녕 부스러기 하나 안 나온다.
주먹만 아프네.
“진짜 안 무너지네.”
“…자네도 정상은 아닌 거 같군. 보통은 혹시라도 무너질까 봐 건들지도 않는데 말이야.”
그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지만 가뿐히 무시해 줬다.
아직 체크해야 할 게 많아서.
발로도 차 보고, 불로 지지기도 했다. 전격도 한번 쏴 보고.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마법적인 공격도 무시하는 건가.
돌탑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돌멩이를 떼 보려고도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오케이. 이 부분은 맞는 거로.
다음은 그거지.
[디그 (C) Lv.2]
돌탑 아래 땅을 파 버렸다.
밀어서는 안 움직이지만 밑바닥이 없어진다면 어떨까?
양심이 있다면 밑으로 떨어지겠지만.
“양심이 없네.”
“그에에.”
“허 참, 이런 건 나도 처음 봤군.”
어떻게 되먹은 건지 땅이 사라져도 공중에 떠 있다.
덕춘이가 돌탑 밑을 돌아다녔지만 진짜 허공에 떠 있다.
신기하네. 특이한 현상이기는 하다만 해결 방법과는 관계가 없고.
“모쿠토, 만약에 돌탑을 보고 있는데 누가 공격해서 죽는다 칩시다. 그럼 돌탑은 어떻게 되나요?”
돌탑을 보고 있던 마지막 사람이 죽으면 돌탑이 무너지나?
아니면 그 자리에 계속 있나.
만약 그렇다면 한 명이 희생한 다음 돌탑을 가려 버리면 해결될 텐데.
“그건 잘 모르겠군. 자기 목숨을 대가로 실험해 볼 사람도 없거니와, 확실히 죽으면서도 돌탑을 보고 있던 건지 확신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기는 하지.
탑이 무너져도 보던 사람이 죽어서 무너진 건지, 시선을 떼서 무너진 건지 알기 힘들다.
안 무너진다 하더라도 누가 죽을 때까지 돌탑을 노려보고 있을까.
진짜 마을 사람들이 생각해 낸 방법이 최선인가.
가능성은 있는데 이걸 극복해 냈다고 말할 수 있냐 하면 좀 애매한 것도 같고.
겪어 본바 몬스터들은 돌탑을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반면 덕춘이는 반응이 있었고.
카오스 속성 영물이라 버텨 냈다고 했지.
몬스터는 상관없지만 영물은 해당된다라, 사람도 해당되고.
지성이 있냐 없냐의 차이인가? 아니면 다른 조건이 있다던가?
그 조건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의외로 간단히 해결할지도 모른다.
프램버그에서 본 크리쳐 같은 존재를 만들어 계속 돌탑을 보게 할 수도 있으니까.
베힐탄에게 부탁해서 크리쳐 하나 보내 달라 할까.
보낼 수가 있나? 호문쿨루스 경우에는 NPC 취급이었는데 크리쳐는 어떠려나.
어쩌면 재료만 받고 내가 직접 제작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돌탑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고.
“모쿠토, 저만 이상하다고 느끼는 거 아니죠?”
“나도 같은 생각이네.”
해가 저물어갈 때쯤 깨달았다.
“호호문이 오지 않는군요.”
“벤도 마찬가지야.”
마을 사람을 데리러 오겠다던 호호문이 돌아오지 않는다.
소변을 보겠다고 자리를 비웠던 벤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마을이 여기서 멉니까?”
“멀어 봤자지. 아무리 늦어도 지금쯤에는 왔어야 정상일 텐데. 끄응.”
이럴 줄 알았다, 설마 모쿠토까지 버리고 갈 줄은 몰랐지만.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 중일지도 모르잖아요. 에이, 설마 우리를 버렸겠어요?”
“전자이길 빌어야지. 아니, 일단 벤은 우리를 버린 게 맞는 거 같네만…….”
호호문이야 사람들을 설득하고 데려오느라 시간이 걸리는 걸지도 모르지만, 벤은 어떻게 생각해도 도망친 게 맞았다.
기척이 사라졌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나야 애초에 믿음이 없었다만 모쿠토는 배신감에 몸이 떨릴 거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내뱉은 모쿠토.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 줄 게 없어 묵묵히 그의 옆에 섰다.
그렇게 날이 밝았고.
“버린 게 맞는 거 같군.”
“하루가 지났으면 그렇다고 봐야겠죠?”
“개자식들! 이딴 식으로 뒤통수를 쳐!”
“우연이라도 마을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면 도움을 청해 보죠.”
“아니, 절대 안 올 거야. 그러면 본인이 한 짓이 들통나니까.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 근처는 얼씬도 못 하게 하겠지.”
NPC의 세계도 만만치는 않구나.
이래서 다들 안전지대로 가고 싶어 하는 건가.
필드 오래 있으면 인간 불신은 물론이고 정신병 걸릴 거 같네.
그나저나.
“왜 모쿠토는 안 도망칩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텐데.”
“그러는 자네는 왜 안 도망치지?”
“그야.”
-뻐억!
“무슨 짓이야!”
난 그대로 발로 모쿠토를 걷어찼다.
“전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눈 돌리십쇼, 모쿠토.”
[프로즌 브레이크 (S) Lv.1]
주변에 빙벽을 만들어 그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럼 마저 확인해 볼까.
씨익. 입꼬리를 올린 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