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80화 (280/740)

280화 시선 품앗이

몸이 무너진다.

단순히 쓰러졌다는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의 의미.

쌓아 올렸던 돌탑이 무너지듯 몸이 조각나 버렸다.

생명체라면 당연히 죽을 만한 일이었으나.

[구사일생 (S) Lv.6]

“후아! 죽는 줄 알았네!”

“그에에.”

난 버텨 낼 수 있었다.

반가운지 덕춘이가 울어 댄다.

와 씨, 너무하네.

쉐핀한테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진짜 이 모양일 줄은 몰랐다.

62층의 재앙, 무너지는 돌탑.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돌탑이 재앙으로 분류된 이유는 하나.

돌탑이 생긴 이후, 돌탑을 보는 시선이 모두 사라지면 돌탑이 반드시 무너지기 때문이다.

맨 마지막에 돌탑에서 눈을 돌린 사람과 함께.

다르게 말하면 아무도 돌탑을 보지 않든가, 누군가 돌탑을 계속 볼 수만 있다면 돌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돌탑을 향하던 시선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 무너지는 구조니까.

그런데 돌탑을 계속 보는 게 가능하냐고. 지금도 망할 몬스터가 덤벼들고 있는데.

가만히 서서 물어뜯길 수는 없잖아.

“크하아아악!”

그럼 그렇지. 부활한 걸 만끽할 사이도 없이 몬스터가 달려든다.

“아오, 좀 꺼져!”

-콰아아아앙!

불쑥 짜증이 치밀어 그대로 폭발을 일으켰다.

불길에 휩싸여 버둥거리는 놈의 목을 날려 버리고 발을 박찼다.

아까와 같이 소극적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

쉐핀이 말해 준 정보.

“돌탑은 한번 사라지면 최소 몇 시간은 나타나지 않아.”

고로 한동안은 문제없다는 거지.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 들기 무섭게 갈라진다.

핏물이 뿜어져 나와 앞을 가렸지만 그것도 잠시.

[파이어 밤 (S) Lv.7]

-콰과과과광!

강렬한 열기에 핏방울마저 증발해 사라진다.

덤으로 주변에 있던 놈들도 까만 재만 남기고 사라졌고.

5성급 놈들은 제대로 덤비지도 못하고 죽어 나간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기가 죽어 뒤로 물러난 상태.

남은 건 6성급 놈들인데.

“몇 마리야, 대체. 다섯? 여섯?”

내가 잡은 놈만 몇 마린데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아 있어.

탑 밖에서는 보기 힘든 놈들인데 60층대에서는 널려있구먼그래.

멸망이 가속되면 밖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되겠지만.

쯧, 속으로 혀를 찼다.

재앙이고 나발이고 6성급 몬스터 선에서 세계가 멸망하는 건 아닌가 몰라.

못해도 50층대에는 오른 이들이 처리해야 할 텐데,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게이트가 터져 버리면 버틸 수 있으려나.

마음 같아서는 빠르게 탑을 오르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

겪어 보니 알겠다. 어째서 세간에서 60층대가 헌터의 끝이라 불리는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작 몇십 명밖에 통과하지 못했는지.

상위층에 오르려면 6성급 몬스터가 떼로 몰려와도 이겨야 하고, 지랄 같은 재앙도 극복해야 한다.

조급해하지 말자.

지금도 충분히 빠르게 오르고 있는 거니까.

못 오를 거라는 생각은 없다.

단순히 무한코인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다만 이미 나보다 먼저 위로 올라간 이들이 있지 않은가.

나라고 못 할 건 없지.

정답은 있다, 난 그걸 찾아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걸리적거리는 놈들부터 치워야지.

“그르르르.”

“크아아아.”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하는 놈들.

사납게 짖어 대지만 직접 나서는 놈이 없다.

안 덤비나?

그럼 내가 가지.

“덕춘아, 빠르게 끝내자.”

“그에.”

-파앗!

-팔짝!

숫자를 셀 필요도 없다.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동시에 앞으로 뻗어 나갔으니까.

검은 선을 그으니 불길이 하늘을 수놓는다.

덕춘이에게 뺨을 맞은 놈들의 목이 돌아가며 울리는 뼈 소리.

놈들 또한 분발했지만 그뿐이었다.

강력한 놈들인 건 변함이 없지만 메스토카와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

일방적인 학살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략 30분?

“크학! 크아악!”

“크르르르릉!”

대다수의 몬스터가 죽고, 남은 놈들은 도망쳤다.

쫓지는 않았다. 지금 몇 마리 더 잡는다고 나중에 덜 나타나는 건 아니니까.

후우.

가볍게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바닥에 즐비한 몬스터 사체.

도축 스킬로 부산물을 얻어 냈다. 고기는 헬다잉 키친에서 받은 전송 팔찌를 통해 보냈다.

61층을 통과하며 얻었던 메스토카 유충의 살덩이도 함께.

나머지 뿔이나 가죽 같은 건 상점창에 대충 팔아넘기고, 상태가 좋은 것들은 보물 주머니에 챙겼다.

나중에 장비 만들 때 사용할 예정.

이걸로 대충 정리는 끝났고.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단 말이지.”

“그에에.”

난 전장 구석에 있는 무너진 돌탑을 바라봤다.

이거 때문에 내가 죽을 뻔했다.

상식적이지 않다. 이해도 안 된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 여긴 탑이고, 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공간이었으니까.

무너진 돌덩이를 집어 들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돌이다.

-꾸구구국

-콰직!

힘을 주자 그대로 부서진다.

특별히 더 튼튼하거나 하지는 않네.

이런 돌덩이가 쌓여 탑이 만들어진다는 건데, 대체 언제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난 건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난 덕춘이를 바라봤다.

덕춘이는 재앙의 영향을 안 받는다.

돌탑을 먼저 발견한 것도 덕춘이고, 그럼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보지 않았을까?

“그에에.”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턱을 문지르더니 나뭇가지를 줍는다.

슥슥 땅바닥에 뭔가를 그리는 녀석.

오오, 역시 영물! 그림으로 말해 주는 것인가. 영특한 녀석 같으니.

난 가만히 덕춘이가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렸고.

“…오, 너 진짜 그림 못 그리는구나?”

“그에엑!”

“악! 알았어! 왜 때려!”

이놈의 성질머리.

날 두들기는 덕춘이를 달래고 그림을 유심히 살폈다.

쉐핀이 말해 준 정보도 상당했지만 알 수 없는 부분도 꽤 있었다.

돌탑이 생성되는 과정도 마찬가지.

그림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대충은 파악했다.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는 건 아니었네.”

덕춘이의 그림에 의하면 돌탑이 있던 자리에 원래는 돌이 없었다.

그냥 평범한 흙바닥이었지.

거기서 갑작스레 돌무더기가 나왔고, 바로 돌탑으로 쌓아졌다는 것.

오케이, 이걸로 확실해졌다.

징조가 아예 없지는 않다. 너무 자연스럽고 소소해서 놓치기 쉬운 거지.

길거리에 돌멩이 있다고 ‘재앙의 징조다!’ 이러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하나 더.

무너지는 돌탑은 어디에도 나타날 수 있다 했던가. 그 말이 맞다. 돌이 없는 곳에서도 저절로 생겼으니.

-츠즈즈즈

난 잡고 있던 돌멩이를 보며 권능을 발휘했다.

[돌멩이]

-돌멩이요.

심플한 설명.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을까 했지만 무너진 이후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감이 잘 안 잡히네.

실험해 볼 게 많다, 쉐핀이 말해 준 정보가 얼마나 맞는지도 체크해야 하고.

전투에 휘말려 부러진 나무에 걸터앉아 쉐핀이 준 쪽지를 살폈다.

주의 사항. 무너지는 돌탑의 규칙.

돌탑을 본 후 시선을 돌리면 무너진다.

같이 무너지는 사람은 맨 마지막까지 돌탑을 보고 있던 사람.

이게 가장 기본이었고.

“돌탑 상태일 때는 파괴 불가?”

시선을 떼기 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부술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반대로 돌탑에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선을 떼면 무너진다.

괴력의 소유자가 돌탑을 끌어안고 있어도, 얼음으로 뒤덮어도 시선을 떼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무너져 내린다라…….

물리적인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하긴, 그럴 수 있었으면 재앙이 아니다.

그 외에 눈여겨볼 게 있다면 돌탑은 한 번에 하나, 텀을 두고 생성된다는 것.

이건 좀 괜찮네. 동시에 여러 개가 나타나면 답도 없을 텐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생성 주기가 랜덤이라는 거군.”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가장 오랫동안 안 보인 게 14일, 가장 짧은 게 3시간.

실제로는 더 짧을 수도 있었다.

쉐핀은 어떻게 이것들을 알고 있는 걸까.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쉐핀이 있던 마을에 생존자는 그녀뿐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읏차.”

휴식은 이 정도면 족하다.

앞으로 2시간 정도는 안전할 것 같으니 지금 움직이는 게 나을 터.

쪽지에 그려진 약도를 살피고 발을 박찼다.

* * *

켄락의 시신이 있을 거라고 추측되는 곳.

아쉽게도 그의 시신은 확인할 수 없었다.

시간도 어느 정도 지나 다시 바닥만 쳐다보며 걸어야 했고.

3시간이 지난 만큼 언제 어디서 돌탑이 솟아오를지 몰랐다.

그나마 몬스터의 습격이 없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음? 누가 있는데?”

“그에에.”

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비슷한 타이밍에 덕춘이도 반응을 보인다.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머리를 두들기는 게 그쪽에 돌탑이 있는 모양.

우연이네, 내가 느낀 인기척도 그쪽에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살피자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한 명? 아니다, 세 명이다.

“거, 거기 좀 도와주게!”

“여기까지 온 걸 보니 등반가 같은데. 이것도 인연이구만. 하하. 잠깐 우리 말 좀 들어 봐.”

“그, 그 뭐냐. 퀘스트 좀 할 텐가?”

척 봐도 당황한 목소리.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한 채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퀘스트를 운운하는 걸 보니 NPC인 건 분명하고.

그래, 그럴 거 같았다.

61층에도 여러 마을이 있었는데 여기라고 아니라는 법이 어디 있나.

애초에 60층대는 혼자서는 해결하기 힘들다.

미리 겪었던 자들의 조언을 듣든, 도움을 받든 해야지.

내가 별다른 대꾸가 없어서였을까 그들의 말이 빨라졌다.

“자자, 우리가 지금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가진 게 제법 있어.”

“그럼 그렇고말고. 어차피 자네도 62층을 클리어하려는 거 아닌가? 돌탑. 그래, 돌탑 해결해야지.”

“서로 돕자고, 방법이 다 있다니까?”

방법이 있는 양반들이 왜 그러고 있는 겁니까.

척 보니 사이좋게 돌탑을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타이밍.

[시선 품앗이– 일반 퀘스트]

-8번 마을의 NPC, 모쿠토, 벤, 호호문은 무너지는 돌탑을 마주했습니다.

-서로 협력하면 오랫동안 돌탑을 잡아 둘 수 있지 않을까요?

-보상: 불꽃을 품은 수정 (AAA), 벼락 줄기 스티커 (AAA)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퀘스트가 떠올랐으나 바로 선택하지 않았다.

무작정 하기에는 내용이 좀 부실해서.

시선 품앗이? 뭔데 이게.

“무너지는 돌탑에 대해서는 알겠지? 우린 나름 방법을 찾아냈다네.”

“돌탑은 보고 있는 한 무너지지 않아. 여럿이서 목격한 후 돌아가면서 휴식을 취해도 되지.”

“어찌 됐든 한 명만 보고 있으면 되니까. 내가 보고 있다가 그다음에 옆에 있는 친구가 보고, 그사이 난 밥을 먹든 할 일을 하고 돌아오면 되지.”

제법 그럴싸하다.

돌탑의 규칙을 이용한 방법.

그런데 말이지.

“그러다 다 도망치면요?”

말이야 바른말이다.

어쩌면 62층 클리어의 방법이 될지도 모르지.

사람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안전하게 진행될 거다.

누군가 보고 있는 사이 다른 사람들이 몬스터를 사냥해 안전을 확보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이상적으로는 그렇다는 말.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러냐고.

여럿이서 돌탑을 바라봤다?

그럼 바로 눈치 게임 시작이지.

곧장 눈을 뗄 거다. 어차피 맨 마지막에 돌탑을 바라본 사람만 희생하면 되니까.

그러다 자기가 꼴찌인지도 모르고 시선을 떼 버리면 그냥 죽는 거고.

“막말로 내가 보고 있을 때 아저씨들이 도망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럼 애꿎은 나만 죽는 거지. 언제까지고 돌탑을 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뿐인가? 나도 모르게 눈을 깜빡일 수도 있는 거잖아. 운이 더럽게 나쁘면 뭔가가 날아와 내 시야를 가려 버릴 수도 있다.

악의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내 눈을 가려 버리겠지.

그 외에도…….

“아, 이거네.”

슬슬 감이 잡힌다.

재앙은 혼란을 부추기는 무언가.

메스토카 알이 마을 사람을 균열시켰듯 돌탑도 마찬가지.

이 망할 돌탑은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럿이서 있을 때 더 위험하다.

다 같이 감당하거나 동료를 배신하기를 종용하니까.

더럽다. 더러워.

진짜 별의별 수단으로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구나.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고.

“퀘스트 수락하죠.”

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확인해 볼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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