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무너지는 돌탑
두 개의 반지.
그중 하나는 메루가라는 천사가 가지고 있을 거고, 남은 하나는 엘리?
교단의 신도가 가졌어야 정상이겠지만…….
“여기 남아 있는 걸 보니 일이 잘 안 풀렸나 보군.”
“그에에.”
아이템 설명에 대놓고 적혀 있지 않은가.
메루가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여기서 알 수 있는 점 하나.
메루가는 탑 안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기다린다고 적혀 있지.
이미 죽었다면 ‘메루가는 죽을 때까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적히지 않았을까?
-탁
오르골 아니, 반지 케이스를 닫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퀘스트와 연관되어 있는 건 알겠다. 메루가 혹은 엘리, 둘 중 한 명한테 가면 뭐든 할 수 있겠지.
엘리라는 사람이 탑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보다 천사라…….
등반하면서 다양한 종족을 만났지만 천사는 많이 못 봤단 말이지.
정보가 부족하다. 천사라고 다 같은 천사도 아니고, 천계가 한두 개여야지.
잡다한 생각을 하며 소파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데.
“거기서 뭐 해요?”
힐끔 계단 쪽을 바라보니 쉐핀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숨으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외뿔 때문에 다 보인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 눈을 깜빡이며 날 마주 보는 중.
의도치 않게 눈싸움이 시작됐다.
아니, 말을 하세요. 난 눈빛만으로 마음을 읽는 재주가 없단 말입니다.
후우, 작게 숨을 내뱉고 자세를 고쳐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슬쩍 다가오는 쉐핀.
“방금 익숙한 소리를 들었어요.”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쉐핀이 손가락을 튕긴다.
그와 함께 소환된 찻잔 두 개.
그녀가 내민 찻잔을 조용히 받아 들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NPC들은 손가락 튕기는 거로 이것저것 잘 소환한단 말이지.
능력인가, 아니면 NPC에게 주어지는 특권?
살짝 탐난다. 실용적인 걸 떠나서 뭔가 멋지잖아.
“그거 손가락 튕겨서 물건 소환하는 거 있잖아요, 스킬이에요?”
“아, 이거요? 제스처 아티팩트예요. 행동을 지정해서 물건을 빼고 넣고 하는 거죠.”
그런 것도 있구나.
몰랐던 사실이다. 탑은 넓고 아이템은 많은 것인가.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지.
60층대에 들어서면서 인벤토리 공간도 늘어나고 아공간 아이템도 여러 개 가지고 있는지라 급하지는 않다.
그보다…….
“익숙한 소리라 하심은?”
“음, 음으음. 음. 이런 멜로디였는데…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어설프기도 하고, 살짝 다른 느낌이기는 했지만 뭘 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내가 방금 열었던 오르골의 멜로디.
“천계에 있을 때 유행했던 곡 중 하나거든요. 그때는 어딜 가도 들려서 싫었었는데 지금 들으니 좋네요. 잘못 들은 거겠지만요. 이미 천계는…….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착각한 모양이에요.”
호록.
차를 삼킨 쉐핀이 일어서려 한다.
어허, 어딜 가시려고.
이걸로 확실해졌다. 쉐핀이 있던 천계와 오르골의 주인이 있던 천계는 같은 곳이라는 게.
심지어 활동 시기도 엇비슷하다.
“착각 아닙니다. 여기서 들린 거니까.”
인벤토리에서 다시 오르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와 함께 들리는 멜로디.
쉐핀의 눈이 커졌고.
“…그거, 귀족가의 물건이군요.”
“귀족가요?”
바로 물건의 출처를 알아냈다.
천족들도 신분제 사회인가? 이건 몰랐는데.
“잠깐 좀 볼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혹시 메루가라는 천사 알아요? 탑에 있으면 좀 보고 싶은데. 엘리라는 사람도 알면 더 좋고요. 다섯 날개 교단 소속 사람이라던데요.”
혹시나 싶어 두 사람의 이름을 물었으나 답은 따로 없었다.
그저 오르골 곳곳을 살피더니 반지까지 꺼내 내부에 각인된 문장과 보석을 확인할 뿐.
차가 식을 때쯤에서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맞네요. 공작가의 문양이에요.”
몸을 기울여 오르골과 반지 내부에 있는 문양을 보여 준다.
얼핏 보면 마법진같이 생긴 곳.
그 중앙에는 검지를 교차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꽤 높은 신분일 텐데 인간에게 청혼을 했다라… 변덕인지 단순한 놀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끝이 좋았을 거 같지는 않군요. 메루가라고 했죠? 들어 본 것도 같네요.”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거군요.”
“아뇨, 누가 감히 귀족을 해할까요. 공작이면 왕가도 함부로 대하지 못해요. 문제가 생겼다면 인간 쪽이겠지요. 분수도 모른다며 해코지나 하지 않았으면 다행일걸요?”
벌써부터 일이 꼬여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나야 신분제에 별다른 생각이 없다. 겪어 본 적도 없고 겪을 일도 없었으니까.
현대 사회도 돈과 권력, 시대가 바뀐 이후에는 힘에 따라서 사는 세계가 달라지지만, 신분이 확실히 갈리지는 않는다.
듣자 하니 여기는 좀 다른 모양이지만.
“이런 말이 있죠. 마계는 요정계와 친하고 천계는 정령계와 친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얼핏 들어서는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데.
“요정이나 악마나 장난치는 거 좋아하는 건 매한가지지만 악마는 더 폭력적이고 선이 없죠.”
“무슨 느낌인지는 알 거 같네요. 그럼 천계와 정령계가 친하다는 건?”
“두 곳 모두 완벽한 신분제거든요. 높은 신분끼리 쿵짝이 잘 맞죠.”
바로 납득했다.
정령은 태생부터가 상급, 하급 이런 식으로 나뉜다.
하다못해 탑의 부름을 받는 것조차 제한이 걸렸었지.
천계도 그 못지않은 신분제 사회라는 걸 말해 주는 거다.
새삼 대단한데.
60층에서 만났던 노블 나이트의 수장 오필리아.
그녀가 말했었다. 천족의 인정을 받은 건 자신뿐이라고.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이제 보니 굉장한 일이었다.
“메루가를 찾는다고 했죠? 공작이니 탑에 있다면 하얀 나무 소속일 거예요. 탑에서도 신분 놀이 하려고 만든 집단이니까. 그만큼 다른 이들은 배척하죠.”
하얀 나무라.
그곳도 NPC로 이루어진 세력이겠지.
“등반가한테도 그럴까요?”
“인간이요? 자신들을 숭배할 미천한 존재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정작 신앙 덕에 먹고 살지만요.”
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플레타 성질머리가 더럽더라니, 이런 식으로 보고 있어서 그랬던 건가.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을 거 같다.
그런 내게 답을 주려는 걸까.
쉐핀이 지그시 날 바라봤다.
“어쩌면 켄락의 유품 중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지도 몰라요. 켄락도 귀족 출신이었으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준 퀘스트를 클리어해야겠죠?”
“안 그래도 할 생각이었어요.”
결국 원점.
아니지, 오히려 잘됐다.
어차피 받아들인 퀘스트. 62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라도 밖에 나가 재앙과 뒹굴어야 한다.
다음 퀘스트에 도움이 될 만한 걸 얻을 수 있다면 이득이지.
이거야 그렇다 치고.
“쉐핀은 귀족에게 좋은 감정이 없어 보이네요.”
신분제니 천계니, 귀족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묘하게 공격적이었다.
내 말이 진실인지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밑바닥 출신이라면 모두 같은 마음일 거예요. 밤이 늦었네요. 진짜 쉬어야죠.”
그 말을 끝으로 쉐핀은 위로 올라갔고 나 역시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조용한 공간.
“이상하네.”
난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귀족이 싫다던 쉐핀은 왜 귀족인 켄락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하는 걸까.
* * *
날이 밝았다.
컨디션 양호. 간단히 빵과 도시락으로 배를 채운 뒤 장비를 챙겼다.
대부분 인벤토리와 아공간에 담겨 있어서 별거 없었지만.
“나가려고요?”
“그래야죠. 계속 앉아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대략적인 계획은 다 세워 뒀다.
어제 쉐핀이 62층의 재앙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줬고.
따로 주의 사항도 적어 뒀으니 이제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행동할 차례였다.
뭐든 부딪치고 봐야지.
“조심히 갔다 와요.”
“끽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죽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쉐핀이 뭐라 중얼거렸지만 손을 내저으며 무시했다.
딴 사람이라면 몰라도 난 괜찮다.
자, 그럼.
-벌컥
난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시원한 바람.
간밤에 부슬비라도 내렸는지 축축한 풀냄새도 조금 난다.
날씨 좋고, 하늘 맑고.
무슨 마경이 기다리고 있나 했더니만 풍경은 깔끔하네.
완만한 비탈길 사이에 지어진 집.
주변에는 쉐핀과 함께 살았던 이들의 흔적이 보인다.
간단히 말하면 폐가들이 널려 있다는 말.
햇빛이 밝아서 그런지 을씨년스럽지는 않았으나, 여기저기 망가져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습은 그리 좋지 않았다.
시체나 유골은 딱히 없어 보이는 게, 사고가 있던 거 같지는 않다. 그냥 방치된 거지.
마을 단위라…….
여기도 61층처럼 재앙을 극복하면 마을 사람들도 같이 올라가는 구조인 걸까?
모르겠다. 따로 말을 안 해 줘서.
주머니에 넣어 뒀던 쪽지를 꺼내 들었다.
간단한 주의 사항과 함께 켄락의 시신이 있을 걸로 추측되는 곳의 약도가 그려져 있다.
위치를 보아하니 동쪽으로 움직여야겠는데.
중간에 산이 하나 있는 거 같고, 주변은 들판?
산이 높지는 않으니 하루면 충분히 넘어갔다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타앗
난 앞으로 달렸다.
평소와는 달리 폭발로 위로 날아가지 않은 이유는 하나.
‘62층은 시야가 넓으면 불리해.’
움직일 때도 바닥을 보고 돌아다니라 했다.
거북목 생기기 딱 좋은 조언이지만 나름 현실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왜냐.
“그에에에.”
“주변에 뭐가 있구나, 덕춘아.”
62층의 재앙은 몬스터가 아니다.
하나의 현상이었고, 법칙과도 같은 거였지.
머리에 올라가 있던 덕춘이가 낮게 운다.
권능으로 떠오른 메시지.
[덕춘(카오스 개구리)가 재앙에 저항합니다.]
[영물로서의 존재감이 상대 이상입니다!]
[혼돈의 효과!]
[재앙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역시나 킹갓개구리.
메스토카랑 더덕이 때도 느꼈지만 괴현상이나 상위급 존재에 관해서 덕춘이는 대단한 저항력을 가진다.
그러니까 더덕이 뺨도 치고, 메스토카 알도 씹어먹고 그러지.
영물이라는 게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존재인 모양.
그 영향은 재앙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
아쉽지만 난 영물이 아니다.
메시지를 보아하니 혼돈 수치가 높으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거 같다만, 지금의 내가 버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어느 쪽?”
“궤에.”
내 물음에 덕춘이가 왼쪽을 두들긴다.
접수 완료.
왼쪽은 쳐다도 안 봐야지.
은근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한 무시해야 한다.
무시해야 하는데.
“크아아아아악!”
“그래, 왜 안 나오나 했다.”
환경이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
나를 덮쳐오는 거대한 쇳덩이 곰.
5성급 몬스터 메탈 베어였고.
[절삭 (S) Lv.1]
[도축 (S) Lv.2]
-서걱
난 그대로 검을 뽑아 횡으로 휘둘렀다.
깔끔하게 반으로 갈린 녀석이 바닥에 엎어지고 핏물이 바닥을 적신다.
5성급 몬스터 정도야 우습지.
61층에서 뒹굴었던 놈들이 워낙 빡셌어서.
문제는…….
-구구구구궁
“하, 쉐핀이 말한 그대로네.”
나를 향해 덤벼드는 놈들이 한두 마리가 아니라는 것.
고개를 들었다.
땅을 울리는 발소리, 코끝으로 느껴지는 노린내와 악취.
최소 5성급, 게다가 6성급 몬스터도 심심치 않게 섞여 있었으며 그 수가 적어도 50마리 이상.
“크아아앙!”
“키히이이익!”
놈들이 나를 덮치는 건 한순간이었다.
바로 발을 박차 검을 긋고 폭발을 일으켰다.
-촤아아아악!
-콰아아아앙!
몸을 날리고 파이어 밤. 일렉트릭 쇼크에 오로라 빔.
긴장감에 식은땀이 흐른다.
놈들이 위험해서?
아니.
전투 중에는 시야를 넓게 가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막 앞에서 달려드는 놈의 목을 베고 달려드는 찰나.
[무너지는 돌탑을 마주했습니다.]
“이런 젠장.”
난 보고 말았다.
62층의 재앙, 무너지는 돌탑.
그것을 봤다고 인지한 타이밍.
“크하아아악!”
6성급 몬스터가 나를 덮쳤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쿠르르릉
-콰드드득
돌탑과 함께 내 몸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