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쉐핀
62층에 올라오자마자 누군가에게 뒤를 잡혔다.
대기하고 있던 건가? 아니면 우연?
탑을 오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수많은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60층대는 다른 곳과는 느낌이 다르다. NPC들이 있고,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닌 재앙이라는 존재가 나타나니까.
이 사람은 등반가인가 NPC인가.
목적은? 우호적일까? 아니면 적대적으로 싸우려는 걸까.
나도 모르게 눈을 가린 손을 끌어내리려 했지만.
“잠깐만 가만히 있어요. 날 믿어야 합니다.”
뒤에 있는 여인이 제지했다.
아니, 왜요.
누구 때문에 놀랐는데 가만히 있으래.
어쩔까 고민이 들기는 했으나 일단은 따르기로 했다.
이미 뒤를 잡힌 것도 있고, 나쁜 마음을 먹었으면 진작에 공격했을 테니까.
게다가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덕춘이가 먼저 덤볐겠지.
“그에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거로 봐서 위험한 인물은 아닌 거 같다.
NPC인가? 그럼 좀 안전하기는 한데.
어찌 됐든 탑은 등반가가 위로 향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NPC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등반가가 위로 오르도록 돕는 역할이다.
간혹 별다른 페널티 없이 직접적인 공격이 가능한 이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고.
잠깐만, 그러고 보니 테일러는 날 공격했음에도 별다른 페널티가 없지 않았나?
숭배자들은 딱히 제약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페더의 말마따나 탑과 모종의 계약을 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거야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자. 지금은 이 사람이 왜 이러는지부터 알아야겠다.
“저는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그쪽은?”
“쉐핀이라고 해요. NPC죠. 오랜만에 보는 등반가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예, 저도 반갑기는 한데 악수도 전에 ‘누구게’ 놀이는 진도가 빠른 거 같네요. 뭡니까 대체?”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예요.”
안전?
말을 걸면서도 감각은 날카롭게 세웠다.
예민해지는 오감.
비록 눈은 감겼지만 다른 감각은 주변의 정보를 모았다.
들리는 건 쉐핀의 미약한 숨소리와 바람 소리 정도.
다른 생물이 움직이는 소음은 없다.
향수 냄새야 이 사람 걸 테고.
음?
‘빵 냄새가 나는데?’
갓 만든 건지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난다.
군침이 절로 삼켜질 지경.
요리 스킬을 가지고 있는 등반가는 거의 없으니 NPC가 뭔가를 만들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빵이라는 게 만들려면 은근 장비를 필요로 한다.
모닥불에 냄비 있다고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
물론 약간의 편법을 써서 만드는 방법도 있겠으나, 지금 느껴지는 냄새로 봐서는 제대로 만들고 있는 거 같다.
탑 밖에 있을 때도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는 고르다 보면 가격이 좀 나가서 잘 안 갔었지 아마?
이건 잡생각이고.
이 정도 장비가 있으려면 마을, 못해도 건물 안이라고 보는 게 합당할 거 같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랜덤으로 떨어지는 곳이 필드.
NPC가 머무는 곳에 떨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안전하네요. 실례했습니다.”
쉐핀이 조심스레 가렸던 손을 치웠다.
역시나.
“실례는 제가 한 거 같네요.”
“그에에에.”
내가 있는 곳은 건물 안.
열려 있는 오븐과 갓 만든 빵이 놓여 있다.
내 뒤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뒤로 머리를 묶은 쉐핀이 있었는데…….
‘천사?’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그거였다.
분위기나 외모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내가 본 천사는 플레타뿐.
그녀와 달리 날개도 딱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충만한 신성력이 그녀에게서 느껴졌으니까.
단순히 신성력 스텟을 지닌 것과는 다른 존재 자체가 신성력을 품고 있는 느낌.
그런데 저건.
“아, 좀 신기하죠?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들 물어보더라고요. 악마인지 천사인지.”
“천사 같긴 합니다만. 궁금해할 사람이 많을 거 같네요.”
쉐핀의 왼쪽 이마에 솟아난 하얀색 외뿔.
마찬가지로 하얀 머리카락과 눈썹.
고정 관념일지 모르겠지만 뿔 하면 악마가 떠올라서.
“제2 천계의 천사들은 다들 뿔이 있답니다.”
천계도 여러 개로 나뉘어 있댔지.
마계만 하더라도 제7 마계까지 있었으니까. 킬더레스도 제7 마계 출신이다.
39층에서 만난 게일이 제4 마계 출신이고.
악마들도 출신에 따라 특이점이 있다. 제4 마계는 색깔별로 나뉘었으니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왜 내 눈을 가렸냐는 거지.
“안전하다 했죠? 뭐로부터 안전한지 알려 주겠어요?”
“이곳은 62층. 당연히 재앙이죠.”
그녀의 말과 함께 떠오르는 메시지.
[62층]
[재앙을 극복하시오.]
여기까지는 평범하다.
61층 때도 이거와 똑같은 메시지가 떴었으니까.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즉
눈에 띄는 건 권능을 통해 보이는 추가 설명.
난 미간을 구겼다.
[재앙을 극복하시오.]
-무너지는 돌탑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무너지는 돌탑?
이건 또 뭔.
의구심이 생기는 것도 잠시.
-촤악
커튼으로 창문을 닫은 쉐핀이 입을 열었다.
“재앙은 단순히 몬스터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설명할 수 없는 괴현상들과 신비로운 대상들도 포함되죠.”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의자를 권한다.
이야기가 길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기 있다 보면 차라리 메스토카 같은 괴물이 편하다고 느낄 거예요.”
그녀가 운을 띄었다.
* * *
“빈방이 따로 없어 여기서 주무셔야 할 거 같네요.”
“밖에서 자도 됩니다. 노숙은 익숙해서.”
“오랜만에 온 등반가를 잃을 수는 없죠. 아무리 익숙하다 하더라도 건물 안이 낫고요.”
“빵도 먹어도 돼요?”
“음…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요?”
쉐핀이 한쪽을 가리킨다.
“궥?”
한 손에 빵을 쥔 채 우물거리고 있는 녀석.
쉐핀이랑 떠드는 동안 묘하게 조용하다 싶었더니 멋대로 먹고 있었냐.
적당히 먹었으면 뭐라 변명이라도 하겠는데 이미 만들어 둔 빵의 절반을 해치웠다.
“하, 하하. 빵값은 치를게요.”
“괜찮아요. 제가 부탁한 것만 들어준다면 얼마든지 먹어도 좋아요.”
“아니, 그…….”
“잘 자요.”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쉐핀.
대화가 끝나고 머물라고 내준 곳은 1층 베이커리 구석.
작은 식탁과 소파가 배치되어 있다.
화장실도 마련되어 있으니 먹고 자는 데는 문제가 안 된다만.
“이거 괜찮나?”
난 쉐핀이 준 퀘스트를 확인했다.
반쯤은 억지로 받은 퀘스트.
[죽은 자에게 안식을- 일반 퀘스트]
-제2 천계의 천사 쉐핀은 함께했던 62층 NPC 켄락의 시신을 수습하고 싶어 합니다.
-재앙을 피해 켄락의 무덤을 만들어 주는 건 어떨까요?
-켄락이 남긴 유품도 전달해야 합니다.
-보상: 천사의 뿔 단검 (S), 날개 없는 천사의 깃털 (AAA), 천족의 호감도 상승.
언뜻 보기에는 손해 볼 게 없는 퀘스트다.
무덤을 만들어 주는 게 꺼림칙할 수야 있지만 이미 시체는 질리도록 봐 왔다.
망자가 편하게 쉴 수 있게 해 주면 좋지.
그런데…….
“이런 종류의 재앙일 줄은 몰랐단 말이지.”
난 커튼 친 창문을 바라봤다.
차마 커튼을 치지는 못한 채로.
말로만 들어서는 감을 못 잡겠다. 한번 직접 겪어 봐야지.
영 못하겠다 싶으면 몇 번 죽어서라도 재도전하면 된다.
일단은 재정비가 우선이지만.
소파에 누운 채 인벤토리를 열었다.
페더의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얻은 것들을 살펴볼 생각.
보상으로 얻은 건 총 3개다.
먼저 맨드레이크 액.
시커먼 액체가 유리병에 담겨 있다.
[맨드레이크 액]
-영약, 맨드레이크의 수액.
-구하기 매우 힘듭니다.
-신묘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대로 섭취 시 영혼이 쩌적! 쨍그랑!
-견딜 수만 있다면 스텟이 오릅니다.
-특별한 포션을 만드는 재료입니다.
직접 마시거나 재료로 쓰거나.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가져다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작용이 어마어마하다.
단순 신체도 아니고 영혼에 데미지를 준다니.
오케이, 먹는 건 포기.
특별한 포션이라는 게 뭔지나 살펴볼까.
예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권능 등급이 SS급을 찍은 지금은 추가 정보를 읽어 낼 수 있었고.
[맨드레이크 액 기반 포션]
-영혼의 독 (AA)
-최상급 악몽 포션 (AAA)
.
.
.
꽤 많은 종류의 포션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맨드레이크 액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것들 중심이라 더 자세히 나오는 거 같은데.
가장 낮은 등급이 AA급이라, 나쁘지 않네.
주르륵. 포션 목록을 살피던 그때.
“음?”
한 가지 포션이 이목을 끌었다.
가장 높은 등급의 포션.
[사자 소생의 비약 (SS)]
-대상이 완전히 썩지 않았다면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만…….
-(자세한 내용을 읽을 수 없습니다.)
-(다른 재료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야 합니다.)
이런 것도 있었나?
자고로 목숨을 구하거나 부활시키는 아이템은 굉장히 귀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부활의 씨앗도 SSS급이다.
대놓고 천년에 한 번 얻을까 말까 한 귀한 물건이라 적혀 있었고.
반면에 이건 제작이 가능할 뿐더러 등급도 SS급이다.
혹시 모를 부작용을 감안하더라도 매력적인 아이템.
이건 따로 찾아봐야겠다.
다음은…….
[영약 기록서]
-NPC 페더가 작성한 책.
-각 영약의 형태와 특징, 식생 등을 기록해 뒀다.
-영약에 진심인 페더의 기록인 만큼 정확도는 훌륭하다.
“이것도 나름 쓸 만하겠네.”
영약이야 있으면 좋지.
더덕이야 정이 들어서 차마 먹을 생각이 안 들었다만 다른 거야 있으면 먹지.
이것도 킵. 안 그래도 80층에 진입하려면 모든 스텟이 999를 넘겨야 한다는데, 영약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먹어야지 않겠는가.
마지막 물건은 이건데.
[오래된 오르골 (???)]
-오래됐지만 고급스러운 오르골.
-미미한 신성력이 느껴집니다.
“오르골은 오랜만에 본다.”
“그에에.”
가장 기대되는 물건.
손바닥에 올릴 수 있을 만큼 작은 사이즈였으나 굉장히 정교하다.
금속으로 된 상자. 뚜껑에는 거울이 붙어 있었으며 상자 전체에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태엽은 어디 있는 거지?
앞뒤, 좌우 모두 살펴봤지만 태엽으로 보이는 곳은 없었다.
기계 장치가 아니라 마법적인 처리를 해 둔 건가.
뭐든 상관없지.
어깨를 으쓱이고 뚜껑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는데.
“뭐야, 왜 안 열려.”
꿈쩍도 안 한다.
사실 뚜껑이 아니었나.
그럴 리가 있나.
두들겨도 보고, 장치가 있을까 싶어 눌러도 봤으나 감감무소식.
던질까 말까 고민하는 찰나.
“혹시?”
-스스스스슥
난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적혀 있지 않았던가. 미미한 신성력이 감돈다고.
비슷한 물건을 안다.
성물.
신성력을 기반으로 사용하는 아티팩트.
오르골 상자가 기다렸다는 듯 신성력을 집어삼킨다.
그와 동시에 내부 장치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고.
-달칵
-띵, 띠링, 띠딩
뚜껑이 열리며 오르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청아한 멜로디.
그에 맞춰 모습을 뽐내는 새하얀 반지가 천천히 회전했다.
잠깐만…….
반지요?
생뚱맞게 왜 반지가 나와. 이거 오르골이 아니라 반지 케이스였어?
예상치 못한 물건의 등장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파아아앗!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는 걸까, 오르골과 반지가 빛을 뿜었고.
-츠즈즈즈즉
아이템 설명에 변화가 생겼다.
물음표로 되어 있던 등급이 확정되고, 아이템 설명이 바뀌었다.
천천히 새로운 정보를 읽어 내려간 난.
“맞네, 트리거 아이템.”
작게 중얼거렸다.
[메루가의 청혼 반지 (AAA)]
-천족을 섬긴 왕국, 잉그리옴.
-교단, 다섯 날개의 신도 엘리는 천사를 만났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결말 또한 마찬가지죠.
-메루가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케이스 속 반지는 하나.
홈이 하나 더 있다. 남아 있는 반지보다 조금 더 큰 홈.
원래 있던 반지는 두 개였다는 뜻이었고, 남은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게 누군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