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긴급탈출
되갚기.
데미지 누적량에 따라 파괴력이 늘어나고, 동시에 파이어 밤 이상으로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스킬이다.
어느덧 S급까지 성장한 상태. 한계치까지 오른 폭발은 NPC인 테일러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것도 아스트랄 레인보우로 데미지가 몇 배나 올라갔다면 말 다 했지.
대부분의 스킬이 MAX 레벨인 NPC를 찍어누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거였으니까.
-파스스스스스
주변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되갚기의 폭발이 멈추고, 나와 테일러는 크레이터 안에 서 있었다.
서 있다고 말하는 게 맞는 걸까.
내가 끌어안은 테일러는 온몸이 검게 물든 채 연기만 내뿜고 있는데.
기껏 단기 회귀를 했더니 한 번 더 남아 있을 줄은 몰랐겠지.
-털썩
박살 날 것 같은 몸을 풀자 테일러가 바닥에 엎어진다.
일대는 엉망진창.
마을 건물은 폭발에 휘말려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다른 숭배자와 싸우고 있던 에밀라와 베이어드도 전투 장소를 옮겼다.
뭐라 말을 못 하겠는 게, 내 스킬 대부분이 폭발형이라 주변에 아군이 있으면 같이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아직 둘은 싸우고 있는 것 같았고, 서로를 감시하라 했던 마을 사람들은 멍하니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이제 막 61층에 들어온 놈이라고?”
“아니, 마지막 공격 봤어? 저거 못해도 MAX 레벨 스킬 아닌가? 어, 어떻게?”
“80층은 가야 초월이 가능한 거 아니었어? 나도 80층은 못 갔는데.”
“괴물 새끼가 나타났군.”
어허, 괴물 새끼라니.
순화해서 괴물 베이비로 합시다.
저러는 걸 보아하니 둘은 숭배자가 아닌 거 같다.
역시 블러핑이었나.
하여튼.
‘맞네, 테일러는 그럼 80층까지는 올랐다는 거구나.’
MAX 레벨 스킬을 얻으려면 80층에는 올라야 하니까.
그럼 내가 80층대에 오른 사람을 이긴 건가?
물론 테일러는 전투 특화가 아니다. 기본적인 전투력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비밀 특사. 그게 그의 권능이었고,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연결망 역할이 더 크다고 본다.
아니, 그래도 80층대인데 나한테 진다고?
방심한 걸 수도 있다. 이제 막 60층대를 오르는 등반가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냐 하면서.
본인이 한 짓이기는 하지만 한밤중에 유충과 준성체 메스토카의 기습을 받기도 했고.
그냥 결과가 좋으니 좋게 생각하면 그만인데, 왜일까.
이 불안함, 찝찝함.
탑은 절대 친절하지 않다. 층마다 고난이 있고 그걸 뚫고 올라간 사람은 그에 걸맞은 힘을 얻는다.
60층과 80층.
두 층 사이의 거리는 20층이었고, 탑에서 20층이라는 거리는 좁히는 게 불가능할 수준.
상위층의 경계인 70층을 지나 초월의 영역인 80층에 도달했다는 거니까.
단순히 생각해도 40층을 오르던 나와 60층의 나 사이에도 엄청난 격차가 있지 않은가.
까득. 검을 움켜쥐었다.
-끼기기긱
온몸이 박살 날 거 같지만 지금 확인 사살을 마쳐야겠다.
아스트랄 레인보우 효과는 10초. 이미 버프는 끝났으나 여전히 망자귀환의 효과는 남아 있다. 버프 다이스 효과, 아물지 않는 상처도 마찬가지.
지금 입은 부상은 치유되지 않는다. 되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릴 거고.
이번에는 아스트랄 레인보우 때 사용한 스킬이 되갚기밖에 없으니 다른 스킬들은 페널티를 받지 않은 상황.
마력이 얼마나 남았지? 스킬을 몇 번이나 쓸 수 있을까.
스킬로 모자라면 칼질이라도 해야지.
관절이 삐걱거리고 뼈는 부러질 것 같다.
근육은 무리한 지 오래라 뻣뻣하고.
거의 자폭하다시피 전투를 했으니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
“진짜 살아 있었을 줄이야.”
난 바닥에 누운 채 숨을 고르고 있는 놈을 노려봤다.
데미지가 안 들어간 건 아니다.
타들어 간 몸이 재생되지 않아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럼에도 죽지는 않았다.
이대로 놔둔다면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겠지.
어쩌면 지금이 탑 숭배 집단에 대해 물어볼 절호의 기회일지 몰랐지만 괜한 위험을 자초할 생각은 없었다.
기회는 또 생기겠지.
“예사 놈은… 아니구나, 이블아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푸욱!
난 그대로 놈의 몸에 검을 꽂아 넣었다.
먼저 심장에 한 번.
이어서 머리까지.
연달아 두 번 검을 찔러 넣었다.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놈의 보호 스킬이 반응하기는 했지만 나 역시 절삭을 비롯한 스킬을 사용했으니까.
“후우.”
이제야 좀 불안감이 잦아든다.
괜한 걱정이었나.
일반적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강한 게 당연하기는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건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61층에 있지만 더 높은 층에 있는 사람이랑 싸워서 질 거 같지는 않다.
탈모맨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 70층 언저리 정도의 수준은 되지 않을까?
다른 걸 떠나서 S급 스킬을 버프로 데미지 10배로 만들었으니 안 당하는 게 더 이상하기는 하다.
그래, 확인 사살까지 했잖아.
이 이상의 불안은 그냥 강박이다.
혹시 모르니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자.
“해치웠나?”
마법의 문장까지 뱉었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확실한 거지.
암, 그렇고말고.
내 쪽은 마무리됐으니 고전 중인 베이어드나 도와주러 가 볼까.
몸을 풀며 그쪽으로 향하려던 때.
-쿠구구구구구
“…그냥 입 다물고 있을걸.”
“그에에.”
“끼이익.”
등 뒤로 섬뜩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아니지? 에이, 이건 아니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언제나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
분명 확인 사살했을 놈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런 놈의 몸을 감싸는 시커먼 기운.
“넌 너무 위험하다, 나와 함께 가야겠어.”
테일러가 입을 열었다.
[연명 (S) Lv.8]
-사망에 이르는 공격을 받을 시 일정 기간 동안 목숨을 연명합니다.
-연명 중, 모든 능력치 200퍼센트.
-10분간 연명합니다.
-연명 후, 반드시 빈사 상태에 빠집니다.
돌겠네.
진짜 별 스킬이 다 있구나. 바퀴벌레 같은 녀석.
10분이라.
그보다 눈에 띄는 건 모든 능력치 200퍼센트.
“하하, 우리 말로 할─!”
-콰아아아앙!
말을 잇기도 전에 놈의 주먹이 복부에 꽂혔다.
찌그러진 갑옷.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은 통증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땅에 처박히는 나와 달리 여유로운 녀석.
“우선 이 귀찮은 것들부터 치워야겠지.”
놈은 곧장 날 처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완전히 위험의 씨앗을 지우겠다는 건지 더덕이를 노리려 했지.
“끼, 끼아아!”
“소리 지르면 안 되지.”
-콰직!
“더덕아!”
더덕이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대로 발로 짓뭉갰다.
파편과 함께 피어오르는 먼지.
아무리 영약이라도 강한 부분이 있고, 약한 부분이 있다.
어떻게 봐도 더덕이가 피지컬형은 아닌데.
“크흡!”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잘도 더덕이를!
이를 악물며 달리는 그때.
“그에에.”
“끼, 끼에?”
먼지가 가라앉으며 덕춘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덕춘이 밑에 쭈그리고 있는 더덕이.
덕춘이가 외갑을 두른 채 테일러의 발을 버티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번에 특성 등급이 올라갔었다. 그중에는 괴력도 있었고.
으득.
테일러가 미간을 찌푸린다.
설마 개구리한테 막힐 줄 몰랐다는 거 같은데.
“이 망할 개구리가!”
“망할 개구리가 아니라 스트롱 한 영물님이시다!”
[땅굴 이동 (A) Lv.8]
-콰가가가각!
땅굴 이동으로 쾌속 접근.
이어 위로 솟아오르며 덕춘이와 더덕이를 안으로 잡아당겼다.
내 상태는 내가 잘 안다.
지금으로서는 덕춘이와 더덕이를 보호하면서 싸울 수 없다.
그럴 만한 능력도 여유도 없으니까.
안 그래도 모든 걸 써서 겨우 이긴 놈이다.
단 10분이라고 하지만 능력치가 2배로 오른 놈을 상대하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
그러니 내게 주어진 방법은 하나뿐이다.
-꾸우우욱
난 놈을 끌어안았다.
피식, 입꼬리를 올리는 녀석.
“왜? 한 번 더 해보려고? 해봐. 네 몸이 먼저 부서지는지 내 몸이 먼저 부서지는지.”
“내 몸이 먼저 부서지겠지, 쓸 수도 없고.”
되갚기는 이미 터트린 상황.
데미지를 누적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그만큼의 충격을 버틸 만큼 상태가 좋지도 않고.
인정한다. 못 이긴다.
적어도 지금은, 내 힘만으로는.
“무지개 타 봤어?”
“뭐?”
[파이어 밤 (S) Lv.6]
[스킬 레벨 업!]
[파이어 밤 (S) Lv.7]
-콰아아아앙!
놈이 뭐라 묻기도 전에 폭발을 일으켰다.
위치는 내 발아래.
땅굴 이동으로 뚫렸던 대지가 무너진다.
이걸로 덕춘이와 더덕이는 숨겼다.
-쿠구구구궁!
폭발로 위로 솟구친 몸.
온몸이 흔들리며 끔찍한 통증이 뇌를 찔렀지만 참아 냈다.
참아야 할 때다.
멀어지는 마을.
난 시야를 멀리 뒀다.
내가 원하는 곳은 하나.
[무지개다리 (S)]
-촤아아아아악!
무지개가 뻗어 나간다.
그와 함께 나와 테일러는 고속으로 목적지로 향하게 됐으니…….
“미친 짓을 벌이는구나!”
“내가 좀 그래.”
그곳은 내가 지나온 길.
수많은 메스토카가 밤이 되기를 기다리며 웅크리는 둥지였다.
“키햐아악?”
“카하아아아!”
[메스토카가 유충 살해자를 목도합니다!]
나한테 원한을 가진 녀석들.
아직 해가 떠 있건만 분노를 참지 않은 놈들이 날카로운 톱날을 들어 올리며 나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 수가 족히 서른 마리.
“놔! 놔라!”
놈이 발버둥 쳤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중량 팔찌 (C)]
[달라붙기 (B) Lv.3]
[심연의 눈동자 (A) Lv.9]
[집착하는 망령 (AA) Lv.2]
[프로즌 브레이크 (AAA) Lv.5]
무게로 찍어누르고, 바닥을 기는 마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긁어모아 놈을 붙잡았다.
속박기를 걸고 망령으로 놈과 나를 묶었으며, 프로즌 브레이크로 서로를 가두었다.
-츠즈즈즈!
무지개다리가 끝나간다.
메스토카가 내뿜는 살기가 실시간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좋아.
그럼 마무리를 하자.
내가 테일러를 해치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칭호, 밤을 부르는 자가 발휘됩니다.]
[밤이 찾아옵니다.]
-스아아아아아!
하늘을 뒤덮는 어둠.
분명 여명이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해는 자취를 감추었고.
[다시 찾아온 밤에 메스토카가 환희합니다!]
나와 테일러를 둘러싼 서른 마리의 메스토카가 일제히 입을 벌렸다.
인위적인 밤.
그 사이에서도 드물게 점멸하는 별.
그것이 죽어갔다.
동시에 가공할 만한 에너지가 위태롭게 모여들었으니.
“이건 안 돼. 제엔자아아앙!”
[스타 버스트 (SS)]
[스타 버스트 (SS)]
[스타 버스트 (SS)]
[스타 버스트 (SS)]
.
.
.
테일러의 비명과 함께 수십에 다라는 파괴의 광선이 우리를 덮쳤다.
뭐, 정확히 말하면 테일러한테만이겠지만.
왜냐.
-찌익
[긴급탈출 No.1 (AAA)]
-긴박한 순간 50킬로미터 밖으로 랜덤 전송됩니다.
-떨어지는 곳이 용암이 아니길 바랍니다!
나한테는 페더에게 받아온 아이템이 있어서 말이야.
[긴급 탈출합니다!]
그걸로 시야는 암전.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정신이 드나?”
“베이어드, 좀 더 부드럽게 깨워요. 상처가 심하다고요.”
베이어드와 에밀라, 살아남은 마을 사람 둘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이겼나 보네.
하늘이 맑은 걸 보니 밤을 부르는 자 효과도 끝난 거 같고.
운이 좋았다.
바로 정신을 잃어서 어디로 떨어졌는지도 몰랐는데 마을 근처 어딘가로 떨어진 모양.
그건 그거고.
“덕춘이는? 더덕아?”
“그에에에.”
“끼아아아!”
부르기가 무섭게 내게 달려드는 두 녀석.
더덕이는 나한테 얼굴을 비비고.
“그에에엑!”
“억! 어헉! 덕춘아, 나 환자야! 어허, 주인이라고!”
덕춘이는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목이 부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 에밀라가 중재해 준 덕에 살았다.
테일러, 네가 맞았다.
요, 망할 개구리 같으니. 기껏 도와줬더니만.
아고고.
에밀라가 치료를 해 줬는지 통증은 있지만 죽을 거 같지는 않다.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 끝났나요?”
“덕분에. 안타깝지만 생존자는 우리가 전부다.”
베이어드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분명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탑 숭배자와의 전투에 휘말려 죽은 것 같다.
제때 치료받지 못한 탓도 있겠지.
안 된 일이지만 전멸하지 않은 거로 만족하자.
보아하니 기절해 있던 동안 베이어드와 에밀라도 어느 정도 오해를 푼 거 같다.
여전히 어색한 건 똑같지만 적대하지는 않았으니까.
약간의 침묵. 그게 불편했던 걸까 베이어드가 주섬주섬 뭔가를 꺼낸다.
“전투가 끝나고 테일러를 비롯해 탑 숭배자들을 물건을 살폈지.”
생존자가 우리뿐이라 했을 때 짐작했지만 숭배자들을 제압하는 건 실패한 거 같다.
어쩔 수 없지. 어설프게 제압했다가 당하면 그게 더 손해니까.
“한번 봐 봐라. 그거 말고 놈들이 죽기 전에 했던 말도 있는데 그것도 알려 주지.”
베이어드가 천으로 감싼 물건들을 내민다.
난 조용히 그것들을 받아 살폈고.
“…이건?”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