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맨투맨
베이어드와 에밀라.
두 사람을 기준으로 나뉜 마을 사람들이 격돌하기 직전 막아섰다.
정신 차리라고. 저기, 뒤에 빠져 있는 테일러에게 놀아나고 있다고 말이지.
게다가 탑 숭배 집단이라고 외치기까지.
“탑 숭배 집단?”
“그런 놈들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진짜로 있던가?”
“테일러가? 개소리 집어치워!”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동안 함께해 온 동료와 만난 지 며칠 안 된 내가 하는 말 중.
어느 쪽에 믿음이 갈까.
나였어도 잘 모르는 사람이 ‘탈모맨은 탑 숭배 집단이다!’라고 외치면 헛소리로 들었을 텐데.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구체적인 증거는 없어.’
전부 다 심증이다.
당장은 이들을 멈춰 세우는 게 급해서 지르고 봤다는 게 더 맞는 표현.
수상쩍은 부분이 많지만 그게 탑 숭배 집단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으니까.
쯧, 골치 아픈 일에 엮였다는 생각에 혀를 찼다.
살벌한 눈으로 날 노려보는 사람들.
이러나저러나 이들은 NPC.
나 혼자서 어떻게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상대다.
영 위험하다 싶으면 페더가 준 긴급 탈출 아이템을 사용하면 되지만 일단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보자고.
[‘무지개다리 (S)’를 해제합니다.]
무지개다리를 해제하고 바닥에 내려섰다.
흐름을 끊었기 때문일까. 아까와 같이 흥분한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냉정해졌다는 말.
그럼에도 서로를 향한 적대감은 여전했다.
이해한다. 어떤 오해가 있었든 간에 베이어드와 에밀라는 서로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
동생을 죽게 만든 원인.
연인을 죽인 자.
감염을 숨긴 대표.
선동에 휩쓸린 마을 사람들.
이 모든 게 섞여 지금의 일을 만들었으니까.
한곳에 모여 오랜 시간을 함께한다는 건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힘이 될지도 몰랐지만, 동시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더라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과 같았다.
어찌 보면 터질 게 터졌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
문제는 누군가의 의도로 인해 이 꼴이 됐다는 거지.
“테일러, 할 말 없습니까?”
난 정면으로 그를 응시했다.
포커페이스인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몇몇 사람이 테일러를 경계하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약간의 의심일 뿐, 크게 조심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어깨를 으쓱인 테일러가 마을 사람들을 바라본다.
“탑 숭배 집단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저한테 이러면 곤란하죠. 아니, 여기 있는 사람 모두 탑에 원한이 있으면 있었지… 이중에 탑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요?”
있지, 왜 없어.
탑 안에서라도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 한두 명일까.
직접적으로 말을 안 할 뿐이지 마음속에는 약간의 욕심이 있을 거다.
애초에 NPC는 상위층에 오른 이들.
강렬한 생존 본능이 없다면 위로 못 오른다.
누구보다 살고 싶어 하는 자들이지만 직접적으로 탑을 옹호할 수는 없다.
이곳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세계를 잃은 자들이니까.
“어중간한 선동은 그만하시죠. 탑 숭배 집단이 아니라고 했나요? 그럴 수 있죠. 그건 내 짐작이니까.”
“짐작만으로 이런다?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닌가요?”
“막 나가기는 무슨, 싸우는 거 말린 게 막 나가는 건가?”
이상한 친구네.
서로 죽자고 칼을 겨누길래 중재한 거 가지고 막 나가냐니.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걸까.
아니면 치솟았던 감정이 잦아들어서 그런 걸까.
“확실히 성급하긴 했군.”
“워낙 갑작스러워서 화가 뻗치기는 했지.”
“후우, 이미 지난 일이기는 한데.”
베이어드와 에밀라는 쌓인 게 많으니 그렇다 쳐도, 다른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의 목숨을 탐할 만큼 심각하지는 않단 말이지.
그냥 한밤중에 기습을 받고 정신없는 와중에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보는 게 맞았다.
테일러가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 내게 보이는 메시지.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파스스스.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스킬.
[분위기 조성 (S) Lv.MAX]
왜들 이러나 했더니만 이런 깜찍한 스킬을 쓰고 있었구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스킬이 아닌 만큼 NPC들도 몰랐겠지.
심지어 같은 마을 사람이 사용한 건데.
“다들 정신 차린 거 같은데 스킬 끄지? 분위기 깨진 거 같은데.”
대놓고 나가자.
존대를 쓰는 것도 귀찮다.
내가 말하는 바를 눈치챈 테일러가 이를 악문다.
그것도 잠시.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입꼬리를 올린다.
“이블아이, 당신이 등반가인 건 맞지만 지금은 마을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끼어들 자리가 아니죠.”
“그건 네가 판단할 게 아니고, 여러분.”
-짜악
난 몸을 돌리며 손뼉을 쳤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맞아요. 전 마을 사람도 아니고, 테일러가 탑 숭배집단인 걸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죠.”
내가 내민 건 테일러가 보냈던 편지 봉투와 편지지.
아무런 내용도 없다.
한 가지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면 이거.
톡톡.
편지 봉투를 털어 내자 작고 동그란 알이 나온다.
메스토카의 알.
“이 사람은 우리가 61층을 클리어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다행히 하나 남아 있었다.
맨드레이크들이 다 먹어 치웠으면 살짝 곤란할 뻔했는데.
진실 확인을 위해 3번 마을이랑 오가길 반복해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뭐, 페더의 사실 증명이 담긴 편지 한 통이면 해결될 문제기도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보여 줄 게 있으면 더 쉽지.
알의 정체를 눈치챈 이들이 얼굴을 굳힌다.
“테일러가 3번 마을에 있는 니옴에게 전해 달라 했던 편지입니다. 보다시피 편지는 없고 대신 알이 있죠. 알아보니 니옴과도 그리 잘 아는 사이는 아니더군요.”
베이어드와 에밀라까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내 말이 진실이라면 3번 마을을 공격한 거나 다를 바 없으니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경청하는 자세 아주 좋다.
“여러분을 기습한 유충과 준성체 메스토카. 누가 뿌렸을 거 같아요? 3번 마을이 무너지면 맨드레이크도 사라집니다.”
선동하는 건 아니다.
그냥 진실과 함께 의견을 전달하는 것뿐.
“3번 마을 테러, 12번 마을도 기습. 말해 봐요, 에밀라. 듀레이에 대한 사실을 다른 누구한테 말한 적 있나요? 감염됐다는 소문은 누가 냈습니까?”
에밀라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고, 이어 베이어드에게도 말을 걸었다.
“베이어드, 직접 동생의 목숨을 거뒀죠. 어쩌면 진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격리된 채 살았어도 됐을 겁니다. 감염돼도 무사하다는 걸 증명했으면 됐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듀레이를 죽이자고 외친 사람이 누굽니까.”
이상하잖아.
모든 일이 한 번에 터지는 게 말이 되나?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중간에 개입한 사람이 한 명 있는데?
나는 여러 의문을 던졌고.
“난 헤지스에게 들었었는데.”
“나, 나도 테일러가 그렇다고 말해서 그런 거지.”
“메일린도 비슷한 말 하지 않았나?”
“메일린? 예전에 주점을 했던 친구로군. 지금은 좋은 데로 갔지만. 그 친구 예전에 테일러와 교제했던 거로 아는데.”
절대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은근히 부추기던 인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던 만큼 근원지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테일러도 어디서 주워들은 거라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뭐, 깔끔하게 끝나지는 않았지만.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어쩌구.
얼마나 간편한 말인가.
상황이 이쯤 되자 테일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경계심이 올라간다.
굳이 선동을 떠나서라도.
“3번 마을을 테러한 건 심각한 문제지.”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해 줘야 할 거 같은데, 테일러.”
메스토카 알을 뿌린 것만 해도 신뢰를 잃기는 충분했다.
“이블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요?”
“맞아, 오히려 저 녀석이 선동하는 걸 수도 있어.”
의심은 의심을 낳는다고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관없다.
[퀘스트창을 공유합니다.]
[61층에 희망을– 돌발 퀘스트]
-알 수 없는 악의가 61층 클리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을 알아 오세요.
-당하고만 살 수는 없는 법!
-다른 마을에 맨드레이크를 보내 줍시다!
-보상: 영약 기록서, 맨드레이크 액, 오래된 오르골(???)
-퀘스트 NPC: 페더
난 페더에게 받은 퀘스트를 공개했다.
이걸로 논란은 끝.
말이나 편지는 조작할 수 있지만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퀘스트는 조작할 수 없다.
특히나 탑에 속한 NPC라면 더욱.
“이거면 답이 됐을까요?”
반박할 수 없다.
힘든 일이지만 믿어야만 한다.
“흐흐, 이거 한 방 먹었네.”
더는 할 말이 없어졌는지 테일러가 헛웃음을 지었다.
평소의 존재감 없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를 중심으로 살벌한 패기가 흘러나온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마을 사람들까지 움찔한다.
“눈썰미가 좋아, 하지만 하나는 틀렸어.”
우우우웅.
검을 움켜쥔 테일러가 내게 한발 다가온다.
“난 61층을 클리어하고 안전지대로 올라갈 생각이었거든. 여기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이렇게 싸움을 부추기고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잖아. 사람이 너무 많아. 안전지대에도 수용 가능한 인원이 정해져 있다고.”
그건 몰랐네.
하긴 제한이 없었다면 모든 NPC가 안전지대에 있었지.
모빌리딕이나 치히린처럼 어중간한 층에 남겨질 일이 없었을 거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긴 예외 아닌가? 정해져 있다며, 61층을 클리어한 마을은 안전지대로 이주하는 거로.”
61층은 사정이 다르다.
시스템적으로 약속을 받아 냈으니까.
마을 사람이 10명이든 100명이든 성공적으로 재앙을 극복해 낸다면 안전지대로 간다.
그 정도도 못 할 탑이 아니고.
이 녀석이 하는 말은 뭐랄까…….
“따로 안전지대에 갈 사람들을 정해 뒀다는 거 같네?”
“정답.”
-푸화아아악!
그와 함께 핏줄기가 튀었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는 마을 사람이 둘.
피 묻은 무기를 쥔 채 날 노려보는 놈도 둘.
이거였구나.
안전지대를 가더라도 같은 탑 숭배 집단과 가겠다는 뜻이었다.
12번 마을.
이 안에 있는 숭배자는 테일러 한 명이 아니다.
“무슨 짓이냐!”
“배신이다, 배신자야!”
당황했어도 NPC는 NPC.
저항하는 사람들을 피해 숭배자들이 한곳으로 뭉쳤다.
숭배자가 3명.
싸울 수 있는 마을 사람이 4명. 나까지 합친다면 5명.
숫자로는 확실히 더 많은데.
“너희 안에 한 명 더 있어, 친구들.”
테일러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바뀐다.
대놓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이에 배신자가 한 명 더 있다고.
가뜩이나 베이어드와 에밀라의 사이가 틀어진 마당에 이렇게 나오다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이따위니까 클리어를 못 하지.”
저 말이 블러핑이든 진실이든 상관없다.
만만치 않은 적을 앞에 두고 동료 중 배신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은 채 싸워야 하니까.
-스슥
-척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우리 쪽 NPC들이 거리를 벌리기 시작한다.
서로의 위치를 시야에 두려는 모습.
결코 등 뒤에 다른 이를 두지 않으려는 의도.
오랫동안 함께해 왔던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어차피 나야 이들 입장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해서 신뢰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에에.”
“끼아아악.”
양옆으로 나서는 덕춘이와 더덕이.
차라리 이 녀석들이 더 믿음직스럽네.
다들 혼란스러운 거 같으니 내가 지시를 내리자.
가능한가 싶기도 한데 더덕이까지 있으면 비벼볼 만해서.
“여러분, 서로 못 믿겠죠? 언제 등에 칼 꽂힐지 몰라서 불안하잖아요.”
대답은 없었다.
침묵은 긍정으로 보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신경 안 쓰이게 일대일로 갑시다. 에밀라, 저기 왼쪽에 있는 놈 맡아 줘요. 베이어드는 오른쪽. 테일러는 제가 맡겠습니다. 남은 두 분은 서로 감시하다가 허튼짓하는 놈 있으면 견제해 주시고요.”
“알겠어요.”
“그러도록 하지.”
서로를 믿을 수 없다?
그럼 다 따로 움직이면 되지. 굳이 합동해서 싸울 필요 없으니까.
맨투맨으로 상대하면 그만인데.
테일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자신감이 지나치구나.”
어디까지나 내가 NPC 한 명을 상대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방법이지만.
테일러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고.
“쫄리면 죽더라고, 탑이란 곳이.”
-콰아아앙!
나를 시작으로 전투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