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테일러
상황은 개판이었다.
기습을 받아 반파된 마을과 얼마 없는 생존자들.
대략 열댓 명 정도 살아남았을까?
살아 있는 사람 중 부상자만 제외하고 보자면 9명이 전부다.
나머지는 거동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당했으니까.
무엇으로부터?
“키햐아아악!”
“카아아아!”
이제 막 탈피를 벗은 듯한 사이즈의 메스토카와 유충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내가 본 게 맞았다.
마을은 스타 버스트에 휩쓸린 거였다.
밖에서 몰려오는 메스토카 무리가 아니라 마을 밑에서 올라온 놈들에 의해서 말이지.
정말이지 알지 못한다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누가 마을 밑에 유충이 자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까.
심지어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 냈던 이들이다.
그 시간 동안에 이런 일은 없었겠지.
-키릭
난 검을 고쳐 쥐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유충이라 해 봤자 5성급 몬스터.
저기 있는, 몇 번 탈피하지 않아 사이즈가 작은 메스토카는 6성급 정도라고 봐야겠지.
어쩌면 더 강할 수도 있는데 성체 메스토카에 비하면 약할 거다.
마을 사람들 모두 NPC.
상위층에 올랐던 이들인 만큼 이깟 놈들을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만.
“크윽! 몸이 말을 안 듣는군.”
“놈들의 유충이 독을 쓰던가?”
“잔말하지 말고 일단 싸워!”
다들 상태가 안 좋다.
기습 공격을 받은 것만 해도 치명타인데 보아하니 독에도 중독된 모양.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유충만 있는 게 아니니까.
사이즈만 작을 뿐이지 메스토카도 있긴 하다, 놈들의 몸에는 독이 흐르고.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것.
“베이어드, 지금 일이 끝나면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내가 원인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냥 날 어떻게든 찌르고 싶었던 거겠지!”
마을 최고 전력이라 불릴 만한 베이어드와 에밀라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서로 협력해야 할 타이밍에 뭐 하는 짓이람.
문제는 몇 남지 않은 마을 사람들도 두 부류도 나뉘었다는 것.
“베이어드가 문제였다면 진작 일이 벌어졌어, 억지다!”
“닥쳐! 그래서 감염이 안 됐나?”
“감염된 지 2년이 넘게 흘렀다고! 뒤통수 맞은 거 같아? 뭐 어때! 감염돼도 멀쩡할 방법이 있다는 거잖아!”
“에밀라, 그런 식으로 듀레이를 죽게 만들었으면서 낯짝 하나 두껍구나!”
돌겠네.
무슨 대화야 이게.
베이어드가 감염됐다는 건 기정사실화된 거 같고, 듀레이를 죽게 만든 게 에밀라다?
에밀라는 듀레이의 연인 아니었나?
마을이 이 꼴이 된 건 테일러 그 자식이 원흉일 게 뻔하고.
알을 담은 편지를 보내는 놈인데 여기라고 알을 풀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골 아프다.”
“그엑, 그엑.”
동의한다는 듯 덕춘이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역시 나랑 마음이 통하는 건 너뿐이구나 덕춘아.
“응? 무사했구나!”
“궥!”
“끼아아악!”
펄쩍 뛰어오른 덕춘이가 내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더덕이를 걷어차고 자리를 차지한다.
감히 어디를 넘보냐는 눈으로 더덕이를 노려보는 녀석.
바닥에 처박혀서 부들거리던 더덕이가 발끈한다.
“끼아아!”
“그에?”
워워. 더덕아, 까불지 마.
네가 강해진 건 아는데 여기 스트롱 한 영물님은 깡패가 되었단다.
소중한 더덕이의 목숨을 위해 방방 뛰는 녀석을 다독여 줬다.
총체적 난국.
개판의 연속.
일단 정리부터 하자.
-서걱!
먼저 유충을 베어 냈다.
도축을 곁들인 공격.
그와 함께 덕춘이가 산성침을 뱉는다.
-치이이익!
그대로 살이 녹아내리는 덜 자란 메스토카.
아직 성체만 한 외갑은 얻지 못한 거 같다.
유충 쪽은…….
[영혼의 절규 (SS)]
“끼아아아아아아악!”
더덕이가 나섰다.
소름 돋는 비명.
서로를 향해 칼질을 하던 마을 사람들까지 기겁하며 몸을 멈춘다.
전에는 S급이었는데 언제 SS급까지 성장한 거지.
그나마 나를 뒤로한 채 비명을 질러 대서 버틸 만했으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그 강한 NPC 중에서도 코피를 흘리는 이가 나올 지경이었으니까.
내부에 데미지를 입었다는 거겠지.
직접적으로 공격을 당한 유충과 준성체 메스토카는 어떨까?
“크아아아오!”
“키햐아악!”
몸을 비틀거리며 괴로워한다.
거대한 몸집을 꿈틀거릴 때마다 주변을 박살 내는 건 덤.
그도 그럴 것이.
[메스토카 유충]
-5성급 몬스터.
-맨드레이크의 비명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맨드레이크의 진액이 치명적으로 적용됩니다.
[메스토카 (준성체)]
-6성급 이상.
-맨드레이크의 비명에 기분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성체가 된 이후에도 맨드레이크를 피합니다.
맨드레이크 자체가 메스토카의 천적이었다.
더덕이를 데리고 와서 그런가 전에는 보지 못했던 정보가 추가된 상태.
어쩐지 43층에서도 메스토카 유충이 더덕이가 있던 곳은 가지도 않더라.
상황이 정리되는 건 한순간.
무력화된 유충과 준성체 해치우는 건 금방이었다.
더덕이가 비명 지르고, 그 후 칼질 몇 번이면 끝났으니까.
마을 사람들도 일단 수습부터 하자고 생각했는지 나를 도왔고.
“정리가 끝났군.”
“빌어먹을.”
죽은 마을 사람들을 애도한 이들이 살벌한 얼굴로 대치했다.
베이어드와 에밀라를 기준으로 나뉜 세력.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들이대든 어쩌든 가뿐히 무시한 채 주변을 살폈다.
테일러를 찾아야 한다.
모든 일의 원흉.
워낙에 존재감이 없는 놈이라 무심코 스쳐 지나가기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권능까지 사용해 가며 찾았다.
뭐, 사람이 별로 없어서 금방 찾은 것도 있지만.
놈이 붙은 건 베이어드 세력.
그럼 그렇지.
놈은 61층을 클리어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에밀라는 클리어할 방법을 알고 있고 그렇게 할 능력도 있다.
“고생했을 텐데 못난 꼴을 보여서 미안하군, 이블아이.”
“이게 다 그쪽 탓일 텐데요.”
평소 분위기는 어디 가고 살기가 감도는 에밀라.
이미 그녀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고, 정령으로 보이는 것들이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척 봐도 강력한 에너지를 뿜는 녀석들.
[불의 상급 정령]
-NPC 델타의 힘 일부로 만들어진 분신.
[물의 최상급 정령]
-NPC 엘리콥의 힘 일부로 만들어진 분신.
[바람의 최상급 정령]
-NPC 하웬의 힘 일부로 만들어진 분신.
최상급이라.
정령은 철저한 신분제.
40층대에서 만났던 모빌리딕이 중급 정령이었지.
물론 객체마다 차이가 있고 탑을 얼마나 올랐나에 따라 수준이 나뉘겠지만 상당히 강할 게 분명했다.
비록 저기 소환된 정령들이 본체가 아니라 힘의 일부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지. 정령계는 멸망했고 남은 정령들이라고는 탑에 속한 NPC들뿐인데.
시스템의 제약에 갇혀 있는 이들이 멋대로 소환될 리가 없지 않은가.
‘로얄 드루이드라더니 실력 하나는 확실하네. 단순히 힐러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녀 뒤에 선 이들이 넷.
“베이어드, 아무리 그래도 우리를 속인 건 잘못됐습니다.”
“정말 확신했다면 솔직히 털어놨어야지.”
“배신자 녀석, 건방 떨지 마라.”
배신감이 깃든 얼굴.
그나저나 진짜 베이어드가 감염됐을 줄이야.
덕춘이가 입맛 다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러모로 명분은 이쪽에 있는 것 같았으나.
“솔직히 말하면 괜찮다? 하! 개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야, 에밀라.”
베이어드는 코를 찡그리며 투기를 올렸다.
“나와 동생은 감염돼도 버틸 수 있다. 우리 부족은 봉인에 능하니까, 배신이라고 했나?”
콰앙!
그가 도끼를 내리찍었다.
“가장 먼저 나서서 싸운 게 나다! 누구보다 마을에 헌신했던 게 나였고, 나한테 목숨을 빚지지 않은 자는 여기에 없어!”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에밀라 측 NPC들이 살짝 주춤한다.
마을의 대표가 거저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와 동생은 힘 일부를 대가로 몸속에 파고든 알을 봉인시켰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덕춘이가 달려들 때 왜 머리가 물렸나 했더니만 힘 일부를 잃었던 거군.
“61층을 클리어하는 방법은 재앙을 이겨 내는 것. 나와 동생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어. 마을에 살아 있는 사람이 우리뿐이면 됐으니까.”
맞는 말이다.
그와 동생은 이미 감염을 이겨 냈다.
메스토카를 죽일 무력도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곳에 머무는 이유는 단 하나.
등반가와 달리 NPC들은 마을 단위로 과업이 주어지기 때문.
둘만 극복했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 전부가 극복해 내야 하는 거지.
즉, 시간이 흘러 베이어드와 그의 동생만 살아남을 경우 자동으로 61층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아니, 조금 더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더 빠르게 끝냈겠지.
마을 사람을 죽이거나 메스토카와 전투할 때 은근히 위험에 빠트리거나. 방법은 많았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겠지.
“같이 살 방법을 찾았다. 빌어먹을 일을 겪은 건 다들 마찬가지였으니까, 특히 너.”
베이어드가 도끼로 에밀라를 가리켰다.
“내 동생의 연인이 있었기에 더욱 인내했지. 듀레이는 널 믿었다, 에밀라. 그래서 진실을 이야기했지.”
“…그 입 다물어요.”
에밀라가 입술을 깨문다.
3번 마을에 가기 전, 에밀라가 말했었지. 듀레이는 감염된 게 맞았다고.
감염돼도 상관없다는 것까지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안 믿었던 거 같은데. 얼굴색이 창백해지는 걸 보니까.
나 같아도 의심했을 거다. 감염돼 놓고 난 괜찮아 이러면 누가 믿을까.
실제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네가 듀레이를 살린다며 들쑤시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내 동생은 살아 있었다. 너 때문에 듀레이가 감염됐다는 게 퍼졌어! 난 내 손으로 동생을 죽여야 했고!”
그의 외침에 마을 사람들이 시선을 돌린다.
변명하듯 들려오는 목소리들.
“이미 반이 넘게 죽었어.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젠장.”
“감염돼 놓고 아니라고 거짓말하던 애들 잊었어? 그놈들만 아니었어도 마을 사람 10명은 더 살아 있을 거라고.”
“감염된 녀석은 불태우는 게 원칙이잖아! 젠장.”
감염자가 사실을 속이고 숨기는 건 모두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
듀레이의 감염 소식을 들은 이들은 분노했을 것이며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같은 처지에 있던 베이어드는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겠지.
들키면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됐을 테니까. 어쩌면 동생과도 합의된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복수심이 차오르면 차올랐지 마을 사람에 대한 애정이 생기진 않았을 테니까.
“가기 전에도 너를 부탁하더군. 본인 목숨을 잃게 만든 원흉인데 말이지.”
“듀레이를 살리기 위한 거였어요.”
“아니, 오지랖이 부른 참사지.”
에밀라가 방법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마을 사람들은 몰랐을 거다.
어쩌면 듀레이가 에밀라에게 침묵했다면 없었을 일일지도 모르지.
원인은 상관없다. 과정도 알 바 아니고.
덕분에 잘 알았다.
왜 둘이 사이가 나빴는지.
침묵이 감돌았지만 긴장감은 올라갔다.
“더 할 말 있나?”
“없습니다.”
베이어드와 에밀라가 각자의 무기를 든다.
그들 뒤에 있는 NPC들도 마찬가지.
어떤 오해가 있었든 이미 감정의 골이 생겼고, 믿음은 깨졌다.
지금부터는 서로가 믿는 방향으로 달려 나갈 때.
-구구구구구궁!
숨 막히는 패기가 공기를 울린다.
진심을 다한 살기가 날카롭게 피부를 찌르고, 여러 스킬이 무기에 중첩되며 빛을 뿌려 댄다.
톡 치면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
무엇이 시발점이 된 걸까.
-콰아아아앙!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프로즌 브레이크 (AAA) Lv.5]
[지옥불의 순례자 (AA)]
[무지개다리 (S)]
난 그들 사이를 갈랐다.
치솟는 불길과 빙벽.
원래라면 이동기로 썼어야 할 무지개다리.
이게 생각해 보니까 파괴 불가 옵션이 있더라고.
무지개다리를 가운데 두고 멈춰 선 NPC들을 바라봤다.
맞부딪치던 이들이 갑작스러운 장애물에 당황한다.
등반가 한 명한테 길을 막혔으니.
“이거 안 치워?”
“뭔데 이렇게 단단해!”
뭐라 뭐라 소리치는 사람들.
두들겨 봐야 이 다리 안 무너집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 같으니 좀 도와줄까.
[오로라 빔 (S) Lv.3]
-찌유우우우웅!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광선을 날렸다.
설마 공격할지는 몰랐는지 몸을 던지는 사람들.
“미친놈이!”
“해보자는 거냐!”
“등반가라도 상관없다. 싸우겠다면 적으로 보는 수밖에!”
흥분한 이들을 내려다보며 검을 치켜올렸다.
다들 한곳에 모여 살아서 스트레스가 쌓였나.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이상하지 않나? 의심도 안 드나?
2년이 넘게 숨겨졌던 비밀이 지금 터진다고?
이때다 싶어서 유충과 준성체가 마을 내부에서 난리를 치고?
에밀라가 멍청이도 아니고 듀레이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다녔을까? 아닐걸?
하필이면 3번 마을에 테러가 벌어진 타이밍에 12번 마을까지 이 지경이 됐다.
너무하네.
노골적이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머릿속의 퍼즐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다들 정신 차려요.”
모두의 시선을 받는 타이밍.
난 검으로 뒤에 빠져 있는 테일러를 가리켰다.
“저기, 탑 숭배 집단에 휘둘리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