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12번 마을
메스토카의 알이 담긴 편지.
테러나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만약 이런 식으로 대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편지에 신경이 쏠려 메스토카의 알이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본인도 모르게 감염되거나, 감염되지 않더라도 그의 집 어딘가에는 알이 남아 부화했겠지.
감염되었다 하더라도 본인 입으로 말을 할지도 의문이고.
아직까지 감염자를 구할 방법은 없다. 바로 죽이거나 격리 후 감시하는 게 전부.
결말이 정해져 있는데 솔직하게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 이런 미친놈이.”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니옴이 이를 악문다.
대체 왜?
어떤 악감정이 있어서?
개인적인 보복이 아니다.
니옴의 반응만 봐도 이 사람은 테일러와 별다른 관계가 아니다.
게다가 애초에 알을 보낸다는 건 마을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 행위기도 하고.
“이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12번 마을 전체의 의견일까요?”
“그건 아닐 거야. 수작질을 할 거면 진작 했겠지.”
“우리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어쩔 건데? 그쪽으로 갈 방법 있어?”
“직접적으로는 못 해도 간접적으로는 할 수 있지.”
모두가 경악하고 흥분한 가운데 꽤 성급한 성격인 듯한 NPC가 내게 다가온다.
“먼저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그쪽이 아니었으면 당했을 테니까.”
“별말씀을, 저도 의심스러웠거든요.”
턱으로 더덕이를 가리켰다.
더덕이가 먼저 알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거다.
믿기 힘든 일이기도 했고.
“부탁 하나만 하자. 우리는 이번 일을 결코 묵시할 수 없어.”
[12번 마을에 철퇴를!- 돌발 퀘스트]
-3번 마을의 주민 크레딘.
-그는 테러를 감행한 12번 마을에 복수를 원합니다.
-보상: 심해산호 방패 (AAA)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거절한다.”
난 생각할 것도 없이 퀘스트를 거부했다.
설마 단칼에 거절할지는 몰랐는지 그가 입을 벌리더니 곧 인상을 쓴다.
우람한 근육을 과시하며 내게 얼굴을 내밀기까지.
“너도 두 눈으로 봤을 텐데? 놈들은 우리를 공격했다고! 너한테라고 수작을 부리지 않았을까? 그곳에 머물면서 정이라도 든 모양인데, 그딴 말랑한 마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어!”
“그런 거 아닙니다. 정든 것도 없고 괜히 오지랖 부릴 마음도 없어요.”
슬쩍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퀘스트를 거절한 이유?
진짜 모르는 건가, 아니면 흥분해서 머리가 굳은 걸까.
주변을 쓱 돌아보자 다른 마을 주민들도 고개를 젓고 있다.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이는 이도 있었고.
“내가 대신 사과하지. 이 친구가 흥분하면 시야가 좁아져서,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페더!”
마을의 대표인 페더는 머리를 숙여 사과까지 한다.
크레딘이 반발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끌어낸다.
“이번 일이 12번 마을 전체 의지인지, 테일러의 단독 행동인지도 불명확하지. 어떤 의도로 벌인 짓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무엇보다 당한 건 자네도 마찬가진데 저 친구가 무례했어.”
페더의 말대로다.
목적을 모르겠다.
애초에 적대적인 관계였다면 모를까 두 마을은 떨어져 있다.
교류 자체가 거의 없다는 말.
게다가 페더의 말마따나 나 또한 테일러에게 이용당한 처지 아닌가.
남의 계략에 이용당하는 건 사절이다. 까딱 잘못했으면 내가 독박을 썼을 수도 있는 일.
3번 마을 사람들에게 공격당했을 수도 있었다.
뭐, 다 떠나서 방금 녀석이 준 퀘스트는 워낙 개판이라 할 생각 자체가 안 들었지만.
60층대를 오르고 있는 등반가한테 NPC 수십 명이 있는 마을을 공격해 복수를 이루라고?
고작 AAA급 방패 하나를 보상으로 내걸고?
에라이, 양심이 있어라.
속으로 혀를 차는 타이밍.
“둘이 이야기할 테니 다들 하던 거 해. 뒷정리는 내가 하지.”
페더가 마을 사람들을 물렸다.
사람이 많아 봤자 의견만 늘어날 뿐.
마을 대표인 페더가 주도적으로 나서는 게 맞았다.
안 그래도 해가 조금씩 지고 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내가 떠나지 않는다면 메스토카의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을까?”
모두가 나가고 나서 털썩, 의자에 걸터앉은 페더가 물었다.
짐작 가는 부분이라.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페더 역시 같은 생각일 수도 있고.
“그동안 가만히 있던 12번 마을이 움직인 데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변한 점은 크게 두 가지죠.”
먼저 나를 가리켰다.
“첫 번째, 제가 12번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랫동안 마을을 유지했던 사람들이다.
그동안 스쳐 간 등반가가 몇 명일까?
아무리 60층대에 오른 사람이 적다고 하더라도 몇 명은 있을 거 같은데.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작업을 쳤다?
다른 마을에서 모를 수가 없다.
메스토카 알을 이용한 테러.
강력하지만 무조건 성공하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테러는 보통 경쟁자를 없앨 때 쓰는 거란 말이지.’
단순히 생각해 봐도 그렇다.
마을 수를 줄여 버리면 등반가가 올 확률이 올라간다.
등반가가 고를 수 있는 마을 자체가 줄어드니까.
초반이었다면 이해하겠는데 지금은 이미 마을이 절반 이상 줄어든 상황.
뭣보다 내가 들어왔는데 다른 마을을 없앨 필요가 없지.
그렇다는 건…….
“다른 변화는 하나, 61층을 클리어할 단서를 얻었다는 것.”
이거밖에 없다.
나와 덕춘이. 에밀라의 지식으로 발견된 재앙을 피해 낼 방법.
다만 덕춘이는 나와 함께 탑을 올라야 하니 마을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찾은 방법이 영약인 맨드레이크를 이용하는 것.
쉽지는 않지만 맨드레이크는 따로 키우는 게 가능할 정도로 사육 난이도가 낮은 편이다.
어디까지나 다른 영약이나 영물에 비한다면 말이지.
뭐가 됐든 이번 교류를 통해 3번 마을 역시 61층 클리어의 해답을 얻게 된다.
그걸 막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난 내가 생각한 내용을 페더에게 설명했고.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거든.”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이번 테러는 3번 마을이 61층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수작이었던 거로 정리하자.
이래도 신경 쓰이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미간을 문지른 페더가 나를 바라봤다.
“자네, 12번 마을로 돌아갈 건가? 그냥 이곳에서 61층을 클리어하는 게 나을 거야.”
“갈 겁니다.”
덕춘이가 12번 마을에 있다.
물론 내가 이곳에서 층을 클리어해도 덕춘이는 자동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날 건드렸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테일러 그 자식한테 날 이용한 대가를 받아야겠다.
그런 내가 걱정되는지 페더가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테일러든 12번 마을 전체든 자네를 노릴 가능성이 크네.”
“저를요?”
“최악의 경우기는 하지만 이번 일은 공략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일 수 있어.”
무슨 소리냐 하면.
“공략법이 밝혀지는 것 자체를 꺼린다는 거군요.”
“자네가 위로 올라가 공략법을 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뭐, 이번 테러가 성공해서 우리 마을과 맨드레이크들이 모조리 죽어 버렸다면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이거 짜증 나네?
다 같이 올라가면 좋지 왜 등반가고 NPC고 다른 사람 앞길을 못 막아서 안달일까.
내 성격이 꼬인 건가. 아니꼬운 걸 보면 그냥 넘어가기가 싫다.
“그래도 가기로 결정했다면 나도 부탁 하나 하지.”
[61층에 희망을– 돌발 퀘스트]
-알 수 없는 악의가 61층 클리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을 알아 오세요.
-당하고만 살 수는 없는 법!
-다른 마을에 맨드레이크를 보내 줍시다!
-보상: 영약 기록서, 맨드레이크 액, 오래된 오르골(???)
퀘스트 내용을 살핀 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건 모르겠고 상대를 엿 먹이고 싶다는 의지는 잘 느껴진다.
기껏 모아 키우던 맨드레이크를 61층 마을 전체에 뿌릴 생각을 하다니.
은근 통하는 게 있다.
보상도 나쁘지 않고.
단순히 등급 좋은 무기나 방어구는 내게는 의미가 없으니까.
장비 제작 스킬도 있을뿐더러, 방어구는 펠라인 세트로, 무기는 이미 혼돈검이 있다.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등급 자체는 SSS급. 그 외에도 뇌봉참검이나 타락한 천사의 검도 있으니 말 다 했지.
차라리 다른 영약에 대해 기록된 책이 더 이득이다.
저거, 오래된 오르골도 관심이 좀 가고.
등급에 물음표에 있는 거치고 평범한 게 없더라고.
운 좋으면 트리거 아이템일지도 모른다.
망설임 없이 퀘스트를 수락했고.
“조심하게. 먼저 12번 마을에 대해 알아 와. 혹시 모르니 이거 가져가고.”
페더가 던진 물건을 잡았다.
[긴급탈출 No.1 (AAA)]
-긴박한 순간 50킬로미터 밖으로 랜덤 전송됩니다.
-떨어지는 곳이 용암이 아니길 바랍니다!
뭘 이런 걸 다.
난 손을 흔들고 더덕이를 챙겨 마을 밖을 나섰다.
노을이 지고 있는 타이밍.
“서둘러야겠는걸.”
[땅굴 이동 (A) Lv.6]
난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 * *
한번 왔던 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땅굴 이동의 스킬 레벨이 올랐기 때문일까.
저번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혹시나 잘못 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제대로 찾아온 모양.
저 멀리 12번 마을이 보인다.
시간은 막 동이 트는 시점.
난 땅굴 이동을 해제하고 완전히 땅 밖으로 나왔다.
덕춘이는 잘 있으려나.
막 떠오른 노른자 같은 태양이 나를 비추고.
“어?”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시커먼 연기가 바람에 따라 휘날렸다.
내가 3번 마을을 갔다 돌아온 며칠.
“젠장!”
12번 마을에는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콰아아앙!
발을 박찼다.
그걸로 모자라 파이어 밤을 연달아 터트려 추진력을 더했다.
반쯤은 날아갔다.
아니, 위로 떠올라 그 난리를 쳤으니 진짜 난 거나 다름없지.
허공을 가로지르는 내 눈에 마을 내부가 보였다.
박살 난 건물들.
마을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과 사지 일부.
설마 전멸?
그건 아니다. 그나마 멀쩡한 건물과 잔해에 가려진 공간, 조금이지만 소음이 들려왔으니까.
머리가 띵하다.
대체 왜?
메스토카의 습격이라도 있었나?
실제로 마을이 부서진 꼴을 보아하니 스타 버스트에 공격받았을 때랑 비슷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없는데 메스토카가 왜 찾아와.
그건 말이 안 된다. 61층의 규칙에 어긋난다.
탑이 아무리 개판이라지만 시스템에 의해 굴러갔고, 시스템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탑에 속해 있는 존재인 NPC나 몬스터한테는 더욱더.
-타닷
자세한 건 나중에 알아보자.
지금은 덕춘이와 생존자를 찾는 게 우선이다.
“덕춘아! 에밀라! 베이어드!”
소리를 지르며 마을을 가로질렀다.
혹시나 싶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마을 사람을 흔들어봤지만 싸늘한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코를 찌르는 탄내.
방치된 시체.
여전히 피어오르는 연기.
사고가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시체가 굳지도 않았으니 고작해야 몇 시간 전에 일이 생긴 거겠지.
빌어먹을.
땅 밑으로 이동해서 눈치채지도 못했다.
진동이 울리고 굉음이 퍼져도 메스토카 무리가 이동하거나 싸우는 거로 착각했겠지만.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원흉이 아직 이 안에 있어.”
생존자가 있었다면 구조 작업부터 했을 터.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는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지.”
인벤토리에서 혼돈검을 꺼냈다.
소음이 들려오는 곳은 하나.
난 그곳을 향했고.
“일을 망친 건 너다, 에밀라!”
“더러운 입 닥쳐!”
“이게 무슨 일이냐고! 제기랄!”
“죽여! 그냥 죽여!”
각자의 무기를 꺼내고 싸우는 마을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에 하나 더.
“그런 거였군.”
마을을 이렇게 만든 원흉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