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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69화 (269/740)

269화 오랜만이다?

마을에서 지낸 지 나흘째.

4일 동안 메스토카의 공격이 들어온 건 두 번이었다.

매일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놈들도 상도덕이 있는지 중간중간 멈추는 모습.

정확히 말하면 전략적으로 말려 죽이려는 거겠지만.

일방적으로 수비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공격권은 메스토카에 있었고,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우리는 계속해서 피 말리는 생활을 지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멘탈이 약한 사람이라면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아 신경이 예민해졌겠지만.

“날씨 좋네, 그치?”

“그에에.”

나와 덕춘이는 나른하게 늘어져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런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에밀라.

“왜 그렇게 태평해요?”

“걱정한다고 어떻게 되는 거 아니잖아요. 일 터지면 그때 움직이면 되죠.”

“그엑, 그엑.”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덕춘이.

이게 참 애매한 게 난 감염됐을지 모른다는 의심과 마을 내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겉도는 중이었다.

그래도 전투가 벌어지면 나가서 싸우기는 하는데 그것도 내 마음대로 날뛰지는 못한다.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괜히 흥분해서 경계선을 벗어나면 에밀라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

마을 영역 밖으로 나가는 건, 곧 도망치는 것과 같았으니까.

이래저래 그리 좋지도 그렇다고 나쁜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닌 시간을 유지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블아이, 곧 마을에서 결정이 날 거예요. 준비는 해야죠.”

“가는 길은 외워 뒀습니다. 식량도 걱정 없고, 땅속으로 움직이면 공격받을 일도 거의 없을 거예요.”

에밀라와 했던 이야기.

재앙, 메스토카를 이겨 낼 수 있는 방법.

영물보다 구하기 쉬운, 심지어 길들일 수도 있는 영약인 맨드레이크를 이용해 알을 처리하는 것.

3번 마을에 맨드레이크를 키우는 괴짜가 하나 있다 했지.

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여정을 떠나야 한다.

마을 사람들은 NPC인 만큼 영역을 벗어날 수 없으니 움직이는 건 내가 될 거고.

아이디어는 괜찮은데 이게 문제다.

“진짜 보내 줄까요? 제가 3번 마을에 자리 잡으면 어쩌려고.”

“보내 줄 거예요. 마을 대표는 재앙을 이겨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요. 차라리 거부하는 것도 좋죠. 그럼 그걸 빌미로 제가 여론을 움직이면 돼요.”

거기까지 생각해 둔 거였나.

그동안 정체되어 있던 재앙 극복.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만큼 마을 사람들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힐끔거리며 날 훔쳐보는 이들도 있었고, 성급한 몇몇은 내게 접근하려다 베이어드의 제재를 받고 물러서기까지 했다.

나라도 그럴 거 같다.

오랜 시간을 61층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며칠 이곳에 머물며 다른 이야기들도 들었다.

소소한 사건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없는 마을 사람들에 관한 것도.

이곳, 12번 마을은 처음만 해도 70명가량으로 이루어진 제법 큰 마을이었다.

다른 마을은 고작해야 60명, 적은 곳은 50명가량이었다나.

초반에만 하더라도 가장 먼저 61층을 벗어나는 마을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었지만 그것도 과거의 일.

지금에 와서는 30명가량만 살아남아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언젠가 찾아올 등반가를 기다리며 축제를 벌이며 웃었지만 진심으로 즐거운 사람은 없었다.

“에밀라.”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조금은 태평한, 둥근 성격.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러했지만 옆에서 지켜본바 그게 그녀의 전부는 아니었다.

신분부터 특별했지.

드루이드에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들도 나름의 계급이 있었다.

이전에 만난 팬그릴이 프리스트였던 것처럼 에밀라는 로얄 드루이드였다.

로얄 드루이드는 대충 귀족과 성직자의 위치가 섞인 느낌인데, 신목인 세계수의 영향을 많이 받고 태어난 이들을 가리켰다.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가지기도 했지만 상징적인 의미로도 중요한 인물들.

그녀와 야만족이었던 듀레이가 연인이었다는 건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신분을 떠나 드루이드와 야만족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으니.

그만큼 서로가 소중했다는 거겠지.

듀레이를 죽인 베이어드를 에밀라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적대감. 그를 밑으로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으니 다른 마을 사람들도 모를 리가 없겠지.

“베이어드를 원망해요?”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런 소문이 있던데요. 베이어드가 대표가 되기 위해 동생을 죽인 거다, 사실 듀레이는 감염되지 않았다.”

그동안 직접적인 언급을 피해 왔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잔인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내 목표는 등반, 100층을 클리어하는 것.

괜한 정치 싸움에 끼여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들며 탑의 초대를 받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다른 NPC 사정까지 모두 맞춰 줄 수는 없으니.

내가 던진 질문의 요지는 그거였다.

소문을 낸 게 에밀라냐고.

61층 클리어 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냐고.

개인적인 원망에 나를 끌어당기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녀가 고개를 흔든다.

“내가 한 게 아니에요. 어느 순간부터 돌던 이야기지. 그리고 전 그 소문 안 믿어요.”

씁쓸하게 웃은 에밀라가 말을 잇는다.

“듀레이는 정말 감염됐으니까, 어쩌면 그 사람도…….”

에밀라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소문을 냈다는 거다.

그것보다 그 사람도?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에밀라는 뒷말을 삼켰다.

고개를 돌려 마을 중앙을 노려볼 뿐.

“가요, 베이어드도 결정을 내린 거 같으니까.”

베이어드와 무리들이 따라오라며 손짓했고, 나와 에밀라는 그들을 따라 마을 외곽으로 이동했다.

* * *

가는 길에 베이어드가 회의한 내용을 알려줬는데, 결론만 말하면 3번 마을에 갔다 오는 걸로 결정이 났다.

아무런 조건 없이 갔다 오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에에.”

“덕춘아, 나 없다고 밥 거르지 말고. 곧 올 테니까 슬퍼하지 않아도, 야야. 그래도 가는데 아쉬운 척 좀 해라.”

“그에에.”

에밀라의 품에 안긴 채 시큰둥하게 손을 까딱이는 녀석.

그렇다.

내가 3번 마을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을 걸 우려한 이들이 덕춘이를 두고 갔다 오기를 희망했다.

명목도 있었고.

정말 영물, 혹은 영약을 통해 몸속에 숨겨진 알을 없앨 수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것을 연구할 예정.

이 부분은 나도 양보해야 하는 게, 에밀라는 영물과 영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나 다른 NPC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는 3번 마을에서 날 곱게 보내 줄 거냐 이건데.

“3번 마을은 페더가 대표로 있지. 이걸 주면 도와줄 거야. 영약을 이용하는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득이고.”

그가 내민 건 막대기.

겉보기에는 별거 없었지만.

[켈리핀의 토템 조각]

-신비한 봉인술의 부족 켈리핀. 그곳의 주술사가 만든 토템의 일부.

-주술에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켈리핀.

권능으로 읽은 베이어드가 이곳 출신이었지.

일종의 선물로 사용하는 건가.

난 물건을 받아 들고 사람들을 살폈다.

무슨 표정인지 모르겠는 베이어드와 표정을 굳히고 있는 에밀라.

덕춘이는 또 베이어드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고, 다른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잘 갔다 오라고 한 마디씩 건넸다.

“아, 이블아이. 가는 길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이것 좀 3번 마을의 니옴에게 전해 주세요. 오랜 친구인데 안 본 지가 오래돼서.”

그때 슬쩍 나서는 한 사람.

사람들 사이에 섞여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이름이…….

“테일러, 개인적인 부탁은 나중에 해도 돼.”

“아하하, 좀 그랬나요?”

베이어드의 핀잔에 이름이 기억났다.

테일러였지. 맞네, 티는 잘 안 나는데 메스토카랑 싸울 때 여유가 있었던 녀석이다.

난 흔쾌히 그가 내민 봉투를 받았다.

가벼운 것이 편지 같은데.

이걸로 챙길 건 끝.

“늦지 않게 오죠.”

3번 마을을 향해 이동했다.

* * *

3번 마을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

그냥 내가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서 그런 걸지도 몰랐지만.

대략 하루하고 반나절.

“그래, 12번 마을에서 왔다고? 흐으음.”

난 3번 마을의 대표, 페더를 만날 수 있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상당히 거친 인상이었을 그는 베이어드가 선물로 준 토템 조각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군. 그렇게 하지.”

“진짜요?”

의왼데?

생각보다 쿨 하게 나온다.

“어디까지나 자네가 감당할 수 있다면. 맨드레이크는 예민한 존재야. 쉽게 길들여지지 않지. 나도 오랜 시간 동안 보살폈지만 아직도 날 잘 안 따라.”

본인의 거처로 이동하며 그가 잡담을 한다.

맨드레이크가 얼마나 신비로운 생명체인지.

다른 영물이나 영약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왜 매력적이지만 위험한 존재인지.

반쯤은 자기 자랑이었다.

“하하하하! 비교적 최근에 얻은 아이가 있는데 아주 똑똑해. 아직 적응을 못 했는지 조금 우울해하는 것도 같은데 곧 나아지겠지. 아, 잠깐 귀를 막는 걸 추천하지. 얘들아 아빠 왔다!”

유독 커다란 건물. 귀를 두들긴 페더가 당차게 문을 열었고.

“끼익?”

“끼에에에에에엑!”

“끼햐아에에엑!”

“키햐아아악!”

안에 있던 맨드레이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펑! 퍼버벙!

-쨍그랑!

동시에 터져 나가는 유리창.

[정신 보호 (S) Lv.5]

와, 오랜만이네.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갔다 돌아왔다.

정신 보호가 S급이 아니었다면 구사일생이 발동됐을 거다.

“오, 제법이군. 보통은 여기서 죽는데. 나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말이야!”

“…페더, 귀에서 피 납니다.”

“피는 무슨, 내 귓밥이 좀 빨갛다네.”

자연스럽게 귓가를 닦는다.

어딜 봐도 피구만.

일단은 도움을 받으러 온 입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명을 지르던 맨드레이크들이 우리의 시선을 피해 도망쳤다.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운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페더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말한 대로 도움은 주겠지만 무조건 데려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말아. 맨드레이크의 인정을 받고 자네를 따라가겠다는 애만 보낼 거니까. 억지로 데려가는 건 용납 못 하네.”

사뭇 진지한 표정.

뭐랄까… 반려동물을 분양하기 전, 좋은 주인인지 확인하는 듯한 얼굴이다.

물론 애완용으로 키울 생각으로 데려가는 건 아니지만.

씨익, 그가 웃는다.

“기회는 오늘까지. 미안하지만 아침이 될 때까지 인정받지 못한다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거네.”

어쩐지 순순히 허락해 준다 했더니만 이런 계략이었나.

절대 하루 만에 맨드레이크랑 친해질 수 없다는 계산이 깔린 행동.

다른 사람이라면 통했을 거다.

아니, 나 역시 그랬겠지.

“끼익? 끼에엥!”

“오랜만이다?”

여기 더덕이가 없었다면 말이야.

문밖으로 얼굴을 살짝 내민 맨드리에크 하나가 내게 달려온다.

고만고만하게 생긴 맨드레이크지만 난 한눈에 알아봤다.

잠깐이지만 함께했던 녀석.

더덕이가 나를 향해 점프했다.

“읏차, 못 본 사이에 살 좀 쪘다?”

“끼에에에.”

녀석을 안아 들고 한 바퀴 돌았다.

에밀라가 맨드레이크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 더덕이었다.

릴카는 더덕이를 분양 보낸다고 했었다.

맨드레이크를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혹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고 결과는 보다시피.

“에, 엘리자베스? 말도 안 돼!”

엘리자베스는 또 뭐야.

설마 더덕이의 새 이름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인정받은 거 맞죠? 그럼 데려갑니다?”

난 더덕이를 어깨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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