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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68화 (268/740)

268화 영물이 아니어도 된다면?

난 기겁하며 덕춘이를 붙잡았다.

밥을 잘못 먹었나, 얘가 왜 이래?

아니면 방금 먹은 알이 너무 맛있어서?

아무리 베이어드의 머리가 알처럼 매끈하다지만 이건 아니지.

빠르게 덕춘이를 껴안으며,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베이어드를 바라봤다.

화가 많이 났는지 목부터 빨갛게 올라온다.

“아하, 하하하. 우리 애는 착해서 잘 안 무는데 갑자기 이러네요. 어이구, 피 나는 거 봐. 일단 좀 닦으시고…….”

“궥! 그에엑!”

“요놈의 개구리가! 가만히 있어, 씁! 아악. 미안, 아 좀 있어 봐라!”

“그에에에.”

덕춘이가 팔딱거렸지만 주인의 위엄을 보이며 제압했다.

영 못 미더운 표정으로 사람들이 바라봤지만 모른 척 갑옷 속에 덕춘이를 숨기고, 보물 주머니에서 천 조각을 꺼내 그의 머리를 닦아 광을 냈다.

“아이고, 두상이 예쁘시네. 너무 화내지 마요. 개구리가 뭘 알겠어요, 그쵸?”

클린에 샤워 스킬까지 사용하니 보송보송해지기까지.

“끅. 끄흑흑.”

“크흠!”

입을 꾹 닫은 채 잘게 몸을 떠는 사람들.

웃지 맙시다. 어? 사람이 개구리한테 물렸는데!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단 말입니다.

아, 베이어드도 귀까지 빨개졌다.

그래도 욕을 하지는 않으니 다행.

그것보다 좀 당황스럽네.

‘덕춘이가 돌발 행동을 한 것도 맞고, 강한 것도 맞는데 베이어드가 반응하지 못할 정도인가?’

물론 뒤돌아 있던 만큼 사각지대에 있던 건 맞다.

몬스터나 암살자도 아니니 살기를 띠고 공격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황.

지쳐서 반응이 느려진 걸 수도 있는데…….

“…제대로 관리해. 그 녀석 때문에 격리하는 거니까.”

베이어드를 자세히 살피니 그것도 아닌 거 같다.

조금은 당황스러운, 왠지 모를 경계심이 느껴진다.

본인도 놀랐다는 거겠지. 피하지도, 막지도 못해서 부끄러운 것도 같고.

뭐가 됐든 녀석은 이 마을의 대표 아닌가.

모든 집단이 그런 건 아니지만 이곳처럼 직접적인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이라면 무력이 곧 최고의 덕목일 게 분명했다.

그런 상태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지금의 위치가 흔들릴 수도 있다.

있기는 한데…….

‘상관없지 않나? 마을 대표가 무슨 대단한 위치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생각하기에는 그런데.

왤까, 베이어드가 필요 이상으로 다른 NPC를 신경 쓰는 것 같은 이 기분은…….

그러고 보니 에밀라가 나섰을 때도 좀 피하는 느낌이었지?

잠시 경직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다른 구역에 있던 사람들도 마무리를 하고 마을로 돌아가는 상황.

“에밀라, 이번 선택에는 네 책임도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이블아이와 영물의 격리는 네 몫이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다들 돌아가자.”

그 말을 끝으로 베이어드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다.

남은 건 나와 에밀라, 상황의 원인인 덕춘이.

투구를 벗고 머리를 긁었다.

“이러니저러니 말은 해도 생각보다 쉽게 풀어 주네요. 이대로 도망치면 어떻게 하려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을은 등반가를 필요로 한다.

방금도 그러지 않았나. 격리한다니 뭐라니 말은 하지만 날 쫓아낼 생각은 안 했다.

그래서 퇴로부터 막아섰던 거고.

처음 마을에 왔을 때도 여관에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녀석이 이렇게 바로 놔둔다고?

“지금부터는 이블아이가 도망치면 제 책임이니까요.”

“아, 그렇네요.”

견제 아닌가?

등반가가 도망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에밀라에게 책임을 물을 기회를 잡다니…….

모르는 게 많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

이제 61층에 올라온 지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그사이에 정보를 모을 수 있었으면 정보상으로 활동했지.

지금부터는 좀 더 수월해질 거 같지만.

“에밀라, 이야기 좀 할까요? 등반가가 필요한 이유와 그 책임이라는 게 뭔지.”

“그래야겠네요. 저도 당신이 필요하니까요. 어쩌면 정답을 찾을 수도 있겠어요.”

그녀가 내게 시선을 던진다.

이어서 덕춘이한테도.

* * *

마을 여관.

해가 떠오르고 아침이 찾아왔다.

메스토카와 싸우느라 힘이 들 법도 했건만 마을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스타 버스트에 맞아 무너진 곳도 있었고, 환자들도 치료해야 했으니까.

밤을 대비한 땔감을 모아야 하기도 했고…….

보니까 꽤 규칙적이다.

밤에 마을에서 대비하던 이들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중.

전투에 나섰던 이들은 쉬고 있겠지.

에밀라의 경우는…….

“후우. 이제 좀 살 만한 곳이 됐네요.”

“이렇게 다 한 거예요? 도와준다 했는데.”

“아니에요. 이블아이는 싸웠잖아요. 이런 건 쉰 사람이 해야 하는 거죠.”

정작 본인도 힐러로서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바빴을 텐데, 내색 하나 없이 날 방에 집어넣고 여관을 청소했다.

폐가나 다를 바 없던 곳이 깔끔하게 변했다.

잡동사니는 창고에, 못 쓸 물건들은 밖으로 빼고, 쓸고 닦고.

화로에 불을 붙여 주방에서는 은은한 열기가 감돌았으며, 내가 첫날에 본 핏자국 역시 사라져 있었다.

방도 정리가 됐는지 햇빛에 말린 침대보와 이불이 깔렸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커튼이 나름 감성적이다.

“이제부터는 이 방에서 자요. 그나마 상태가 좋은 게 여기니까.”

“그럼 저야 좋죠.”

“그에에.”

덕춘이도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저건 뭐예요?”

난 벽을 가리켰다.

원래였다면 막혀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뻥 뚫려 있다.

적당한 사이즈의 가림막이 문을 대신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블아이를 격리하고 살피는 게 제 역할이니까 근처에 있어야죠. 그럴 거 같지는 않지만 감염됐을 수도 있고, 우리 몰래 밖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잖아요.”

“안 도망친다니까요. 일단 뭐, 알겠습니다.”

보아하니 싫다고 안 할 것 같지는 않다.

은근 단호한 면이 있단 말이야.

털석. 난 침대에 걸터앉자 에밀라가 나무 의자를 끌고 맞은편에 자리 잡는다.

“상황 파악은 어느 정도 끝났나요?”

“대충은요.”

에밀라가 청소를 하기 전,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마을에 등반가가 있어야 하는 이유.

“61층 클리어는 등반가와 NPC 모두에게 주어지는 과제라는 거잖아요.”

“우리들의 숙원 중 하나죠.”

61층에 있는 이들 모두 메스토카에 의해 보금자리를 빼앗긴 경험이 있다.

세상의 멸망.

혼란을 부추기는 재앙.

그중 하나인 메스토카.

이미 그들이 살아가던 세상은 멸망했음에도 NPC가 되어 탑 안에서 그때의 과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등반가가 마을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메스토카가 활동하기 시작한다, 마을과 등반가를 해치우기 위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왜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메스토카가 공격하지 않았는지.

내가 마을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마을이 축제를 벌이며 빛을 뿜은 이유?

61층 어딘가에 떨어졌을 등반가를 부르는 거다.

더 크고 화려하게 빛나서 발걸음을 이끌도록.

내가 마을 밖으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 이유?

그럼 또 다른 등반가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새로운 등반가가 61층에 진입한다 하더라도 이 마을에 올지는 미지수고.

60층대에 오르는 사람 자체가 얼마 없다 보니 오랜 시간 방치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61층의 클리어 조건은 메스토카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잖아요.”

“재앙을 이겨 내라는 거였죠.”

메스토카는 군집체 몬스터.

몇 마리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혹여나 다 쓸어버린다 하더라도 어딘가에는 유충이 자라나고 있을 거고.

“재앙을 이겨 내면 등반가는 62층으로 올라가고 우리는 안전지대로 가요. 보통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여기까지만 말하죠.”

61층 클리어가 등반가와 NPC의 합동 과업인 이유.

단순히 척박하고 위험한 61층을 벗어났다는 거에 기뻐하는 게 아니다.

위안이 되는 거지.

답이 있었다는 것을, 멸망에 저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재앙을 이겨 낼 수 있다는 걸 몸소 증명하는 행위는 이들에게 있어서 삶의 원동력일지 몰랐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극복하고 싶은 커다란 벽일 수도 있고.

문제는 여기에도 한 가지 이해관계가 끼어든다는 것.

난 입술을 씹었다.

“안전지대로 올라간 NPC 중 대표는 특별한 이벤트를 담당할 수 있다.”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그걸 보조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요.”

예로 들자면 그거다.

10층 킬더레스의 투기장.

킬더레스는 투기장의 주인이고, 그를 돕는 다른 NPC가 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이들보다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는 거지.

역할을 해야 자아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NPC.

그 역할의 중요도에 따라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적어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탑의 꼭두각시가 되는 일은 걱정할 필요 없겠지.

“베이어드는 권력욕이 있어요. 자기의 신분에 열등감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있죠.”

권능을 통해 봤던 베이어드에 대한 정보.

분명 야만족이라 불리기를 싫어한다고 했었지.

에밀라가 다리를 꼬며 미간을 문지른다.

“책임을 진다는 의미도 그거죠. 마을의 대표가 되는 걸 포기하는 것, 계약을 통해 확실하게요.”

“책임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권력 다툼에서 떨어트리는 거네요.”

“저도 담당 NPC가 될 수 있다면 노려보겠지만 그걸 위해서 재앙을 이겨 내는 걸 포기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요.”

“베이어드는 자리 지키는 게 더 우선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내 물음에 그녀가 입을 다문다.

대답 여하에 따라 에밀라는 베이어드를 믿지 못한다고 선언하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

과도한 정치질로 보일 수도 있고.

이야기를 들어 본 결과, 마을 대표는 기본적으로 재앙을 이겨 낼 때 많은 노력을 하고, 많은 희생을 치른 이에게 주어졌다.

만약 에밀라가 재앙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

그럼 마을 사람들은 에밀라를 대표로 인정할 거다.

지금 베이어드가 대표라는 건 그가 그만큼 많은 일을 했다는 거고.

“에밀라가 청소하는 동안 마을 사람 몇 명이 찾아온 거 알아요?”

“모를 수가 없죠.”

에밀라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한 사람 말만 들을 생각이 없다.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맹신하지 말자.

의심은 탑을 오르는 이들에게는 필수 덕목.

난 창밖을 바라봤다.

베이어드가 사람을 보내왔었다.

명목상으로는 에밀라가 날 잘 감시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차원이라고 하던데.

‘그 목적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

에밀라를 신경 쓴 걸까.

내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줬다.

나야 손해 볼 거 없으니 떠들게 놔두었고, 꽤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여관에 들어오고 봤던 핏자국.

핏자국의 주인 듀레이.

그는 베이어드의 동생이었다.

감염된 사실을 알고 직접 끝을 봤다고.

쉽지 않은 결정.

베이어드가 마을의 대표가 된 계기기도 했다.

게다가 하나 더.

듀레이는 에밀라의 연인이었다.

“…재앙을 벗어날 아이디어가 있어요.”

답을 회피한 에밀라가 입을 열었다.

좋다. 말하기 싫다는데 강요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판단은 내가 하니까.

그보다 아이디어라, 이야기나 좀 들어 볼까.

난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할 준비를 했고.

“메스토카가 위험한 이유는 사람 몸에 알을 넣기 때문이에요. 그것만 해결하면 이겨 낼 수 있어요. 서로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고, 감염될 걱정도 없이 싸울 수 있죠.”

“그 방법이 덕춘이다, 이거고요.”

“메스토카는 영물이 되기 전 타락한 존재. 영물이라면 괴물의 알을 찾고 먹어 치워도 문제없죠.”

“미리 말하지만 그건 해결책이 안 돼요.”

“알아요. 이블아이가 언제까지나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덕춘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그렇지.

지금이야 마을 사람 서른 명 정도가 전부지만, 탑 밖이었다면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게다가 영물은 수가 적다.

영물이 왜 영물인데. 인위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면 진작 늘렸겠지. 사람이나 NPC나 욕심 있는 건 똑같은데.

조금은 흥미가 떨어지려던 때.

“잘 봐요. 우리가 신경 쓸 건 메스토카 자체가 아니에요. 고작해야 알, 굳이 영물급이 아니어도 된다는 거죠.”

에밀라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3번 마을에 영약, 맨드레이크를 모으고 키우는 괴짜가 있어요. 그의 도움이 필요해요.”

“오, 꽤 가능성 있는…….”

잠깐만.

맨드레이크?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녀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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