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61층
오필리아가 내뱉은 말에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이렇게 될 건 알고 있었다.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세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몇 년 남지 않았으니까.
바깥 기준으로 짧으면 2년, 길어야 6년. 보통 4년이 지나면 더 이상 탑의 부름을 받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릴카가 이야기했으니까.
솔직히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탑은 바깥 세계보다 시간이 2배 빠르게 흐르고, 나와 멤버들은 전례 없는 빠른 속도로 탑을 등반하고 있었으니까.
희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앞으로 3년 안에 충분히 100층에 도달할 거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 실상은 달랐다.
“인맥을 통해 알아보니 이미 탑의 부름을 받는 사람 수가 적어지고 있더군요. 각 나라마다 다르고, 같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초대를 받는 시기가 제각각이라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요.”
불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초대.
그것도 서버별로 초대가 이루어졌으니 알아차리기 힘든 게 당연했다.
특히나 헌터가 곧 국력이 되는 시대. 각 정부 역시 그런 예민한 주제를 언급하지 않을 테니 더 알기 힘들었겠지.
오필리아의 말에 다들 표정이 굳었다.
평소 가볍게 행동하던 김정현도 눈치를 살필 정도.
‘골치 아프게 됐네.’
이들에게는 이미 다 말했다.
멸망의 과도기, 멸망의 징조,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 혼돈의 파편 등등.
말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탈모맨과 맞붙은 날. 난 멤버들에게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고, 우리끼리 고민해 봤자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니까.
차라리 협조해 줄 세력과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알리기로 했다.
가장 먼저 연락한 건 이준석.
녀석과 이야기를 나눈 끝에 노블 나이트와 같이 움직이기로 결정.
아시아 서버에서는 우리의 영향력이 크지만, 아메리카나 유럽 쪽은 노블 나이트의 입김이 셌으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요 며칠 머무는 동안 쁘징 연합과 노블 나이트가 합동 발표를 했다.
커뮤니티가 혼란스러워지는 건 당연.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며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공듀 님 말이면 믿어야지
-회장님이랑 핥짝이도 글 올렸던디.
-공포심 부추기는 거 아님?
└연합이 뭐 하러?
└선동질로 사람 모아서 길드 만들려는 걸 수도 있음 ㅇㅇ.
└ㅋㅋㅋㅋㅋㅋㅋㅋ 너, 연합 최근에 들왔지? 길드 만들 거였음 걍 만들어도 들갈 사람 넘침ㅋㅋㅋㅋ.
-근데 진짜 게이트 생성률 높아지긴 함. 형 정부 기관에서 일했었다.
-미국 쪽에도 같이 발표했다더만.
기존에 신뢰를 만들어 뒀기 때문인지 대부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심각성은 아직 체감하지 못한 거 같지만.
그건 처음에 우리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이제는 진짜로 좀 심각해졌지만…….
“아무래도 멸망의 과도기가 늦게 온 만큼 진행이 빨라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가능성 있는 말이네요.”
오필리아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 길드와 정부의 합작으로 헌터 수를 인위적으로 조절한 결과, 비정상적으로 오랫동안 과도기에 접어들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부작용이라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기도 하고…….
“뭐가 됐든 아직 망한 건 아니잖아? 일단은 지금처럼 공략 올리면서 최대한 사람들이 안 죽고 올라가게 만들면 되지 않나?”
탈모맨의 말도 맞다.
확실하게 탑에 들어오는 인원이 줄어든 걸 확인한 만큼 최대한 등반가들이 죽지 않게 만드는 게 최선의 전략이다.
지금까지 해 온 일이기도 하고.
다만…….
“멍청아, 그걸로 끝내면 안 되지. 탑은 탑이고 바깥도 문제라고.”
“아, 폭력 반대!”
옆에서 듣고 있던 핥짝이가 탈모맨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멸망이 가속되고 있다며. 우리야 알고 있고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치지만, 밖에서는 대비를 제대로 할까? 엉? 이참에 뇌 마사지라도 해 줘?”
“밖에 있는 사람들도 멍청이가 아니면 뭐라도 하겠지!”
“대형 길드랑 정부가 잘도 그러겠다.”
핥짝이가 우려한 대로다.
그들을 제외한 일반인과 헌터 대부분은 멸망에 대해 모른다는 것.
6성급 몬스터와 네임드 몬스터, 내가 겪었던 혼돈의 파편.
60층에 오른 거로 S급 헌터라며 시시덕거리고 있는 마당에 그것들을 감당할 수나 있을까?
이건 낙관론자라도 고개를 저을 거 같은데…….
게다가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할 정부와 대형 길드가 입을 다물고 정보를 숨길 가능성이 크다.
이미 그러고 있는 중이고, 대대적으로 준비를 하려 해도 시간이 걸릴뿐더러 자신들이 해 온 일을 밝혀야 할 수도 있다.
아니, 다 떠나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할 거 같은데.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을 테니…….
벌써 뒤통수가 아릿해져 오는 게 불안감이 싹튼다.
탑이랑 바깥세상은 소통은커녕 어떠한 연결도 안 된다.
난 잠시 관자놀이를 누르다 눈을 떴다.
“여기서 고민해 봤자 답이 없죠. 바깥에서 활동할 사람이 필요해요.”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이다.
바깥 일은 바깥에서 해야지.
탑에 있는 사람은 탑에서 할 일을 하고.
역할은 명백히 나뉘어 있다.
“무작정 밖으로 보내는 건 안 됩니다. 뭐가 됐든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조금씩 쌓아가자고요.”
앞으로 살짝 몸을 뺀 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우선 각 연합에 미리 말을 해 두자고 이야기했다, 이 사태의 심각성을.
만약 코인을 모두 써서 탑에서 퇴출당하면 밖에 있는 연합 사람들끼리 모여 힘을 합치고 진실을 퍼트리기 위한 것.
“으으, 그걸로 괜찮을까? 좀 더 발언권이 세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는 힘들다구.”
냥펀이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맞다.
정말이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고작 개인이, 더 모여 봤자 기성세력에서 보면 보잘것없는 무리가 떠들어 봤자 어떤 취급을 받을까.
하지만…….
“상위층에 오른 헌터가 밖에 나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60층에 오른 녀석과 70층 이상을 오른 녀석. 그 격차는 확실하지. 사회적 파장이 꽤 클 거야.”
“너… 혹시?”
“어, 상위층에 있는 사람들을 꼬드겨야겠어.”
연합 사람 중에 상위층에서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게 언제일지도, 누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이미 상위층에 있는 이들이 먼저 밖으로 나가게 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다행히 꽤 있지 않은가.
루키 출신으로 이루어진 무리도 있고, 보송송이 역시 곧 상위층에 오른다.
보송송이야 우리와 인연이 있으니 협조해 주겠지.
김정현처럼 위층에 있는데도 연합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아직 상위층 커뮤니티 채널을 이용하지는 못하는 만큼 확실하게 얼마나 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결국은 위로 올라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뭐든 하지.
“미국 쪽은 그나마 상황이 나아요. 노블 나이트는 빅스타 길드와 협력 관계니까요.”
“좋은 소식이군요.”
오케이, 미국 쪽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지키일이 안 보인 지 좀 된 거 같은데요?”
나랑 언제 한번 붙자며 이야기를 꺼내던 녀석인데.
“이지키일은 먼저 위로 올라갔어요. 지켜보던 사람이 등반을 시작했거든요.”
“파비안을 말하는 거군요.”
무패 기록자, 동시에 탑 숭배 집단의 일원으로 의심되는 사람.
이지키일 녀석을 감시하고 있다고 했으니 예정된 일이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면 파비안이 움직일 만한 일이 생겼다는 거기도 했고.
그동안 가만히 있던 녀석이 왜 갑자기 움직였을까.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그 부분은 잠시 치워 두자. 아직 파비안의 정체가 밝혀진 것도 아니고, 따로 마찰이 있던 것도 아니니.
“전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나 먼저 간다.”
“그에에.”
움직이자.
난 오필리아와 노블 나이트 사람들에게 인사했고, 멤버들한테도 손을 흔들었다.
“곧 따라잡을 테니까 목 닦고 기다려.”
응원인지 협박인지 모를 소리를 하는 핥짝이.
“흑흑, 우리를 버리고 매정하도다! 가는 길에 안전하게 나한테 포션 몇 개만 사 가지고 가.”
헛소리를 하는 냥펀과.
“언젠가 공듀를 만나면 안부 전해 줘. 입 다물어!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고, 아흑!”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는 탈모맨.
뭐라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내버려 두자. 알아서 하라지.
그래도 좀 그러니까.
“나중에 여자 소개해 줄 테니까 울지 마라.”
“지, 진짜?”
“물론이지.”
언제라고는 말 안 했지만.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탈모맨이 이상형인 사람이 있지 않을까?
아님 어쩔 수 없고.
“그에에에.”
덕춘이가 날 바라보더니 혀를 찬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하하하! 언제나 기다리고 있지. 내 보타이를 반겨 줄 그 사람을 위, 해애액! 아, 왜!”
“넌 좀 맞을 필요가 있어. 이놈의 보타이를 뜯어 버리든가 해야지, 이딴 걸 왜 매고 다니는 거야.”
“이게 어때서! 안 된다!”
“조심히 가!”
활기를 되찾은 탈모맨이 호탕하게 웃었고, 그 꼴이 보기 싫었는지 핥짝이가 녀석의 보타이를 잡아당겼다.
이래저래 평소랑 같은 분위기.
날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행동해야 하는 타이밍이기도 했고, 같이 움직이기에는 멤버들은 아직 초월석을 모으지 못한 상태여서.
오필리아와 노블 나이트는 따로 할 일이 있는 듯하고.
작별 인사를 마친 난 건물을 벗어나 포탈로 향했다.
사람이 적기 때문인지 한적한 곳.
-우우우웅
난 슬쩍 60층 안전지대를 훑어보고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60층에 꽤 오래 머문 만큼 휴식은 충분히 취했다.
결투를 하며 감도 유지했고, 대인전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이제는 다시 몬스터와 뒹굴며 위로 올라갈 차례.
-파아아앗!
시야가 밝아지며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 * *
“오.”
“그에에.”
난 작게 감탄했다.
시간은 밤.
내가 서 있는 곳은 숲길 언덕.
나무가 드문드문 자라난 곳 아래, 시야가 탁 트여 있었고.
-파스스스
밑에 보이는 마을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환하게 빛나는 곳.
축제라도 벌이는 걸까.
조명이 쏘아졌고, 야시장으로 사람들이 몰렸으며, 둥둥 하는 북소리가 울렸다.
가정집 역시 불을 끄지 않은 건 마찬가지.
밖으로 나온 이들의 손에는 자그마한 호롱불이 들려 있었다.
-펑! 퍼어엉!
-타다다다닥.
때마침 하늘로 올라온 폭죽이 터지며 밤을 몰아낸다.
어릴 적 보았던 폭죽놀이보다 더욱 화려한, 더 다채로운 불빛이 하늘을 수놓는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빛이 바래기 전에 또 다른 폭죽이 쏘아졌으니…….
“예쁘네.”
“그에에.”
감정이 메마른 사람도 한순간 발걸음을 멈추게 할 광경이 펼쳐졌다.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60층대라길래 어떤 모습일까 했더니만 꽤 괜찮아 보이는데?
이렇게 마을 형식으로 되어 있는 필드도 처음이고.
굳이 비교할 대상이 있다면 유적에 있던 프램버그 정도?
그쪽이야 뭐, 나름 사정이 있던 거니까.
-뚜둑
오솔길을 따라 걷는 도중 풀더미에 감춰져 있던 무언가가 부서졌다.
발로 풀을 들추자 보이는 건 썩어 부러진 나무판자.
표지판인가?
뭔가가 적혀 있는 팻말을 들어오려 털어 내자 글자가 좀 더 선명해진다.
[통역 (A) Lv.10]
“…빛이 함께하기를?”
영문을 알 수 없는 글귀.
묘하게 신경 쓰인다.
그런 내게 떠오르는 메시지.
[61~69층의 테마는 재앙입니다.]
[멸망을 부추기는 혼란.]
[그대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척 보기에도 불길한 설명.
60층대는 거의 모든 등반가가 고꾸라지는 구간이자, 상위층으로 가기 전 마지막 단계다.
뭐가 있어도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재앙이라니.
왤까… 재앙 하면 자연재해가 가장 먼저 떠올라야 하건만 내 머릿속에는 다른 존재들이 떠오르는 건.
그 불안감을 확인시켜 주기 위함인가.
[61층]
[별을 삼키는 거귀충巨鬼蟲- 메스토카]
[재앙을 이겨 내시오.]
새로운 알림이 떠올랐고.
-쿠구구구구구궁!
[메스토카가 유충 살해자를 눈치챕니다.]
[메스토카는 당신을 용서치 않을 겁니다.]
“이번에도 쉽게 가긴 글렀네, 후우.”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