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반 토막
블링크.
짧은 거리를 순간 이동 하는 스킬.
고속 이동도, 도약하는 것도 아닌 만큼 장애물을 통과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혹시나 거리 계산을 잘못하면 중간에 껴서 낭패를 볼 수도 있지만, 탈모맨이 그렇게 어설플 일은 없고.
-파아아앗!
권능을 통해 녀석이 스킬을 쓴 것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검을 내리쳤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과 권능.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빛납니다!]
[절삭 (AAA) Lv.6]
망자귀환에 아스트랄 레인보우까지 사용한 상황.
잠깐이지만 난 오버 스펙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여기에 새롭게 얻은 펠라인 세트 스킬까지 사용했다.
[홍예참虹蜺斬 (SS)]
-모든 속성을 지닌 일격.
-강한 힘! 화려한 이팩트!
-하루 10분 동안 유지 가능합니다.
무지개 홍.
무지개 예.
벨 참.
직역하자면 무지개를 베어 낸다는 거였고, 펠라인 세트 스킬 중 처음으로 나온 공격 스킬답게 등급 또한 높았지만, 한 가지 특이점이 있었으니…….
“저게 뭐야, 큽!”
“콘셉트 확실하구.”
“이히히히히!”
검로를 따라 무지개 이팩트가 터진다는 것.
무슨 게임 스킨 두른 것처럼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떨어진다.
웃어 젖히는 구경꾼들.
웃어라 그래, 난 이기는 데 집중할 테니까.
-파아아앗!
블링크가 끝나고 탈모맨이 튀어나온다.
주먹을 뻗은 자세 그대로.
나 역시 그걸 예측하고 검을 휘두른 거지만.
어느새 놈의 몸에는 일렁이는 마나가 둘러져 있다.
마치 거대한 산이 날아오는 것 같은 기분.
-콰아아아아앙!
-차가가강!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우린 격돌했다.
에너지의 파장이 폭발한다.
공기가 찢어지며 사방이 흔들렸고, 바닥이 깨져 파편이 흩날렸다.
충격파가 결투장을 휩쓸며 먼지가 피어오른다.
시야까지 가려진 상황. 언제 들어올지 모를 공격에 대비하는 게 옳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챙강
금이 잔뜩 간 검이 결국 부러졌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고, 그게 신호라도 되듯이 우리를 감싸고 있던 장막이 흩어졌다.
우리가 싸운 결투장은 탈모맨의 스킬로 만들어진 것.
그 말은 곧.
“아, 죽겠네. 내가 졌다, 공듀.”
탈모맨이 스킬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는 뜻이었다.
대자로 바닥에 누운 녀석.
오른손에 끼고 있던 건틀릿은 박살 났고, 주먹은 피투성이다.
가슴을 훑고 간 상흔, 갈라진 쫄쫄이 위로 피가 흘러내린다.
깊은 상처는 아니다. 나도 조절을 했으니까.
서로 풀려고 붙은 거지 진짜 죽자고 싸운 건 아니지 않은가.
난 두 동강 난 검을 버렸다.
그래도 AA급인데 이렇게 부러지네.
홍예참. 강력하기는 한데 검에 무리가 간다. 어중간한 등급의 검으로는 사용도 못 할 거 같다.
나야 역병의 알로 만든 검이 있으니 상관없지만.
욱신거리는 손을 가볍게 털고 탈모맨에게 손을 내밀었다.
“속은 좀 풀렸냐?”
씨익, 녀석이 웃더니 손을 맞잡고 몸을 세운다.
“그래, 아주 뻥 뚫렸다.”
나름 깔끔하다면 깔끔한 승부였다.
이렇게 풀리면 다행인 거지.
지금 와서 생각한 건데 녀석은 진짜 화가 나서 나랑 붙은 게 아닌 거 같다.
물론 분풀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뭐랄까…….
그냥 나랑 한 번 더 싸워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10층 투기장 이후로 마주치지 못한 만큼 겨루어 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올라간 녀석의 입꼬리를 보자니 진짜 그런 것도 같고…….
“오오오오! 쁘띠공듀의 승리!”
“탈모맨, 아직 늦지 않았어. 기습 펀치를 날리자!”
“이길 줄 알고 있었다! 그, 그럼 그렇고말고.”
우리의 결투가 마음에 들었는지 핥짝이와 냥펀, 릴카가 박수를 쳐 준다.
좀 다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안전지대인 만큼 즉사급으로 다친 것만 아니면 알아서 회복될 터.
“자, 구경 다 했으면 청소 좀 하자.”
탈모맨의 결투장 스킬이 끝나면서 주변이 난장판이 됐다.
벽에 걸려 있던 도구와 장비들이 떨어지고, 테이블도 박살 났고, 바닥도 깨졌다.
먼지와 파편 때문에 좀 떨어져 있던 곳도 어질러졌고.
“우우! 싸운 건 너흰데 청소는 왜 우리가 하냐!”
“어지르는 사람 따로, 청소하는 사람 따로 있냥!”
핥짝이와 냥펀이 항의를 한다.
맞지, 어지른 사람이 치우는 게 맞는데…….
“일단 쟤는 환자고.”
손가락으로 탈모맨을 가리켰다.
기회다 싶었는지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입가에 묻히고 피를 토하는 시늉을 한다.
“쿠, 쿨럭! 으으윽! 죽을 것만 같다! 몸도 마음도 너무나 아프다!”
“와, 연기 진짜 못해!”
릴카가 외침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환자인 건 맞으니까. 몸과 마음이 아픈 것도 맞고.
다음으로.
“이렇게 다 모였는데 기념 파티라도 해야지. 내가 요리해 줄 테니까 치우는 것 좀 도와주라. 같이하면 금방 하잖아.”
내가 밥을 해 주겠다는데 일손 좀 보태 줘야지.
이래 보여도 공식 헬다잉 키친 파트너.
재료도 고급으로 받아올 수 있고, 간단한 레시피도 구할 수 있다.
겸사겸사 요리 스킬도 올리고.
60층에 올라온 후 릴카의 창고에서 머물면서 틈틈이 요리도 했다.
장비 제작이나 포션 제작도 좋지만 밥은 먹으면서 해야 하니까.
이미 내 요리를 맛본 릴카는 군침을 삼키더니 빗자루를 들어 올리며 의욕을 불태웠다.
“요긴 내가 치울게!”
빗자루질을 할 때마다 꼬리가 흔들리는 것이, 제대로 치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대충 넘어가기로 하고.
난 슬쩍 핥짝이와 냥펀을 바라봤다.
오들오들 떨면서 핥짝이를 껴안는 냥펀.
핥짝이 역시 경계 어린 눈으로 날 노려본다.
“하, 핥짝아. 공듀가 날 죽이려 해!”
“이 못된 녀석, 우리가 또 속을 거 같냐?”
왜 이래, 파편에 머리 맞아서 회까닥했나?
뭔가 싶었지만 곧 깨달았다.
얘네도 내 요리를 먹어 본 적 있다.
54층 벨자트한테 맛없어 포션을 부은 음식을 줄 때 같이 줬었지 아마?
정확히는 녀석들이 달라고 한 거였지만.
살짝 억울하네. 그때는 사정이 있던 거고.
“믿어 봐라. 그때는 어? 맛없어 포션 때문에 그런 거고, 나도 요리 좀 해.”
“이미 내 머리에는 ‘공듀의 요리=쓰레기’라고 입력되어 있는걸.”
“한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턴 쉽다 했음. 너의 사악한 의도는 파악되었다! 순순히 냄비를 내려놓고 물러서!”
이 자식들이 진짜.
“자꾸 그러시면 소원권으로 맛없어 포션을 다이랙트로 먹이는 수가 있습니다, 고갱님.”
싱긋 웃어 주며 포션병을 들어 올렸다.
잊지 마라, 핥짝아. 나한테는 소원권이 있다.
그것도 계약서로 이루어진 진짜 소원권이.
움찔. 핥짝이가 멈춘다.
“하, 핥짝아?”
“냥펀, 가끔은 함정인 걸 알면서도 도전해야 할 때가 있어. 지금이 바로 그때야.”
“싫어! 사, 사람 살려!”
냥펀이 발버둥 쳤지만 핥짝이에게 잡혀 끌려갈 뿐이었다.
오케이. 이걸로 핥짝이와 냥펀도 청소에 동참.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들었어야지. 꼭 한마디 더 하게 해요.
나 역시 손을 털고 쓰레기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녀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처음으로 모두가 모인 것을 기념하는 것도 있고, 그동안 따로 등반을 해 왔던 만큼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고 싶은 것도 있지만, 해야 할 게 있다.
“밥 먹고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
“엇, 설마? 공듀가 따로 숨어 있나. 이건 깜찍한 이벤트고!”
“응, 아니야. 다시 누워 있어.”
급 방긋한 탈모맨이 행복 회로를 돌렸지만 어림도 없지.
이 자식, 깔끔하게 넘어가나 했더니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네.
시무룩해진 녀석을 무시하고 입술을 씹었다.
녀석들한테 알려줄 게 있다.
세계가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
탑 숭배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
아직 전 세계에 정보를 풀기에는 연합이 가지는 영향력이 적다.
60층에 올라오는 연합 사람들이 늘어나고, 전 세계 서버에 우리의 이름이 오르내릴 때쯤 퍼트리려 했는데 이 녀석들한테는 미리 말해도 되겠지.
이준석에게도 따로 말해야겠군.
좋은 기억은 아닐 테지만 릴카 역시 우리가 겪게 될 걸 먼저 겪은 녀석이니 조언을 해 줄 수도 있겠지.
조금은 가슴 한편이 무거워지는 느낌. 묵묵히 쓰레기를 모으기를 잠깐.
난 고개를 들어 녀석들을 바라봤다.
어느새 다시 장난을 치고 있는 냥펀과 핥짝이.
자연스럽게 배를 밟힌 후 일어나 청소를 돕기 시작하는 탈모맨.
빗자루질을 하다 말고 팝콘 부스러기를 우물거리는 릴카.
나름 평화롭고 즐거운 분위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됐든 잘될 거다, 잘돼야 하고.
* * *
60층에 올라온 지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일과는 특별할 게 없었다.
스킬 레벨 올리고 중간중간 나가 결투하고 내기하면서 상품권 모으고.
그것도 이제 끝이다.
[초월석 (10/10)]
드디어 다 모았다.
혹시나 내가 가지고 있는 권능이 4개라 초월석도 4개가 필요하나 했는데, 릴카의 말에 따르면 그건 아니라고 한다.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그 말은 곧 이곳에서 얻어야 할 걸 다 얻었다는 뜻이었고, 이제 위로 떠날 때가 됐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고개를 들어 광장 홀로그램을 살폈다.
[패배의 전당]
-율리어스 베리곤: 8패
-더블배럴: 3패
-이자자키: 4패
-엘레강스 강_골든 타이거: 6패
-니머리 탈모: 1패
.
.
.
힘겨웠다.
결국 마지막까지 승리해서 패배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중간에 탈모맨이 한 번 더 붙어 보자 했을 때는 식은땀 줄줄 났었는데.
그래도 이겨서 녀석의 이름을 패배의 전당에 달아 줬다.
핥짝이와 냥펀은 무패행진 중이고.
둘이 싸울 일도 없고, 탈모맨 역시 신사는 레이디에게 손대지 않는 법이라며 염병을 떠는 관계로 두 녀석의 이름이 저기 달릴 일은 없지 않을까?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내게 릴카가 다가왔다.
“가게?”
“올라가야지. 너도 알잖아.”
내 말에 릴카가 고개를 끄덕인다.
탈모맨과 붙은 날, 다 이야기했으니까.
조언은 듣지 못했다. 시스템적으로 제약이 있기도 했고, 따지고 보면 멸망을 막지 못한 입장이라 해 줄 말이 많지 않았던 것.
손가락을 쪼물락거리던 녀석이 툭툭 내 등을 두들기더니 고개를 숙여 보라고 손짓한다.
“조심히 가구. 내가 따로 줄 건 없고, 이거라도 챙겨가.”
웬일이지?
그래도 계승자라고 챙겨 주는 건가?
살짝 기대감을 가지고 릴카가 내미는 손을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주먹을 펴자.
[릴카의 부탁 (5)- 강제 퀘스트]
-릴카의 계승자가 된 당신!
-이제 반박할 수 없는 일 노예가 되었습니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생기지 않는 법, 구릅시다!
“짜잔! 60층대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한 것들이 있다구! 믿는, 엑!”
그럼 그렇지.
바로 꿀밤을 먹여 줬다. 사람 기대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도 꿀밤만 주기에는 정이 없으니까.
슥슥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발걸음을 옮겼다.
“딴 애들은 안 봐도 돼?”
“봐야지. 걔네들 말고도 볼 사람이 있어서 따로 모여 있으라 했어.”
“그랭! 잘 가!”
날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릴카에게 나도 손을 흔들어 주고 길을 따라 걸었다.
그냥 말없이 갈까도 생각해 봤는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지.
“어이, 무지개 용사! 포커 한 판 칠래?”
“저번에 뭐냐, 떡볶이? 그거 맛있던데 한 번 더 해 주라! 난 마실 걸 준비하지.”
“오늘도 광택이 좋네. 멋져부러.”
워낙 사람이 적은 곳이라 그런가.
아는 체를 하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화답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하늘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목조 여관.
노블 나이트가 머무는 곳이었고.
-끼이이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오필리아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노블 나이트와.
“형니이이임, 오늘 가신다구요? 저도 데려가십쇼!”
“왔냥?”
“빨리빨리 안 와? 콱 그냥.”
“이블아이라니! 이블아이라니!”
멤버들, 거기에 김정현.
대충 연합 무리가 커다란 테이블을 따라 앉아 있다.
난 오필리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급한 일이 있다고요?”
바로 질문을 던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모이자 한 건지.
조금은 심드렁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찰나.
“이번에 미국 서버에 신입들이 들어왔어요.”
오필리아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저번에 들어온 인원의 절반입니다.”
멸망의 과도기.
그 흔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