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그래, 이게 속 시원하지
은신 스킬, 외톨이의 길을 사용한 채 이동했다.
가능한 마주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기 때문. 특히 김정현.
사람이 싫은 건 아니지만 유난 떠는 게 많았고, 연합 사람이다. 그것도 진성 연합 사람.
이미 60층에서 멤버들이 만난다는 사실은 퍼져 있는 상황.
60층에 있는 연합 사람은 우리를 제외한다면 김정현뿐.
[섹시가이]: 형님들, 제가 반드시 모두의 사인을 받아 내겠습니다!
[섹시가이]: 보셨잖아요, 셀카 같이 찍은 거. 진짜 다 모이고 있다니까?
[섹시가이]: 공듀 님의 용안을 보고 오겠다, 이 말입니다!
우리를 직관할 수 있다는 생각과 다른 연합 사람들에게 자랑 겸 정보 전달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
단순한 팬심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상인 자격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는 벙커로 모이라 한 거고.
릴카가 나를 데리고 들어갔듯 상인 자격이 있다면 동행자와 함께 입장할 수 있으니까.
다행히 냥펀도 상인이었고, 나도 릴카의 계승자가 되면서 상인 자격을 얻었다.
각자 한 명씩 챙겨 가면 된다는 말.
그건 그거고…….
“진짜 어떻게 하냐.”
“그에에에.”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앉혀 놓고 바로 툭 까놓고 말해?
다시 생각해도 억울하네.
콘셉트질만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심지어 대부분은 반 장난으로 대하고 있는데?
커뮤니티에서 ‘공듀 님, 공듀 님’이라고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공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새내기라면 모를까 연합에서 좀 놀아 본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탈모맨이라 더 짐작이 안 된다.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몸은 저절로 달려 어느새 물류 창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오는 중에 마주친 사람은 없었고…….
“아하하, 이벤트야? 나 이런 거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응응, 이벤트야. 빅 이벤트지. 흐흐흐.”
“핥짝아, 팝콘 먹을래?”
“좀 이따가 같이 먹자.”
저 멀리 눈을 가린 탈모맨과 양쪽에서 그의 팔을 잡고 끌고 오는 핥짝이와 냥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양손까지 포승줄로 묶여 있는 게 죄인을 압송하는 분위긴데.
김정현은 잘 떼어 낸 거 같으니 다행이다.
그렇게 넷이 모인 자리.
“음? 앞에 한 명이 있는데, 남자? 이블아이랑 비슷한 무게감인데?”
눈이 가려졌음에도 나를 알아차린 탈모맨이 두리번거렸다.
무서운 녀석, 기감이 얼마나 좋아야 저런 게 되지?
“안으로 들어가지. 상인 자격이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데 동행자도 데리고 갈 수 있어. 내가 탈모맨을 데리고 갈게.”
“아하, 웬 물류 창고인가 했더니만 이거였구나? 근데 너 상인 자격 있어?”
“이번에 생겼지.”
“포션에 장비에 이젠 상인까지. 으으, 점점 잡탕이 되어 가고 있어.”
어째서인지 측은한 눈빛을 보낸 녀석이 핥짝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간다.
나도 마찬가지.
양손을 묶은 줄을 잡고 탈모맨을 이끌었다.
-구구구궁
문이 열리며 펼쳐진 공간.
이쪽은 화조국 구역이니 통과하고.
-깡! 깡! 깡!
저기, 망치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인기척을 느낀 걸까. 쇳소리가 멈추었고, 곧 가죽 앞치마를 입고 있던 릴카가 모습을 보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
자리에서 굳은 릴카가 눈을 깜빡이며 우리를 살폈다.
“여기 정신병원 아닌뎅.”
“나도 알거든?”
헛소리하는 녀석의 뒷덜미를 잡고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자연스럽게 본인의 구역으로 우리를 안내한 릴카가 앞치마를 벗는다.
각자 자리에 앉자 릴카가 슬금슬금 다가와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는다.
“힘냉, 어쩐지 네가 이상하다 했더니만 이런 애들이랑 어울려서… 불쌍해.”
“누구보고 불쌍하대? 애들한테 실례라고.”
“아, 미안. 사실 나도 좀 부끄럽긴 했어.”
“나두!”
이때다 싶었는지 핥짝이와 냥펀이 소리친다.
너희가 그러면 안 되지, 이것들아. 양심이 없어.
됐다, 릴카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곳만 한 곳이 없다.
비밀도 유지되고, NPC인 릴카도 있다.
심지어 이곳은 릴카의 작업실.
‘돌발 상황이 벌어져도 릴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지, 정당성도 생기고.’
평상시에는 만만하지만 어찌 됐든 간에 99층에 올랐던 녀석 아닌가.
안전 장치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그럼…….
“다 온 거야? 흠흠.”
“어, 다 왔다.”
난 녀석의 포승줄을 풀었다.
이어서 눈을 가리고 있던 천도.
잠시 쫄쫄이에 붙어 있던 후드를 벗고 머리카락을 정돈한 녀석이 다시 후드를 쓴다.
그러려니 하자.
어찌 됐든 쫄쫄이는 일체형 장비, 저 착 달라붙는 후드가 투구 역할이나 마찬가지니까.
“음? 저번에 봤던 귀여운 친구네?”
“아, 전에 봤었지?”
릴카에게 작게 손을 흔든 녀석이 주변을 둘러본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공간.
그곳에 모인 인원을 살핀 탈모맨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고.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까 얼굴을 가릴 필요는 없겠지.”
난 투구를 벗었다.
“그것도 맞네.”
그 모습에 살짝 놀란 핥짝이도 어깨를 으쓱이더니 헬멧을 벗는다.
그와 함께 드러나는 단발머리.
무쌍꺼풀의 눈은 묘하게 반짝였고,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팔짱을 끼는 것이, 앞으로 벌어질 일에 흥미가 가득해 보였다.
“여, 여자였어?”
“그럼 남자겠냐? 엉? 콱 씨, 그냥.”
“당연히 남자인 줄… 흠흠, 무슨 소리. 알고 있었지. 내가 그 정도 눈썰미도 없겠냐!”
녀석이 당당히 가슴을 폈지만 핥짝이는 짜게 식은 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오케이, 이걸로 이 녀석 눈치를 밥 말아 먹었다는 게 결정.
나와 핥짝이에 이어 냥펀도 주섬주섬 황금 도깨비 가면을 벗었다.
“으으, 얼굴 보이기 싫었는데.”
슬쩍 가면을 끌어안은 채 쭈그러든다.
가능한 정체를 숨기고 싶었던 건 냥펀도 마찬가지.
얘는 알아보겠지. 그래도 걸그룹 출신이고, 탈모맨은 특임대 소속이니까.
군대에 있을 때만큼 연예인을 잘 아는 시기가 없다.
“오오오! 우오오!”
“그래! 내가 핑크펑크의 박예은이다!”
어차피 얼굴을 공개한 거 당차게 나서기로 했는지 냥펀이 자기소개를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군! 어? 핑크펑크 그거 아닌가? 보송송이가 좋아하는 거?”
“…핑크펑크 몰라?”
“잘 모르는데.”
“왜 몰라? 아니, 난나 난나난나! 몰라?”
“어, 헤헤.”
냥펀이 간단한 안무와 함께 멜로디를 흥얼거렸지만, 탈모맨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겁니까, 탈모맨.
어디 인터넷 끊긴 무인도에 있다 왔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말 그랬을지도 모를 거 같아 그만뒀다.
94특임대라는 특수성. 말마따나 어디 비밀 시설에서 몰래 키워진 이들일지 누가 알겠는가.
뭐, 대충 얼굴은 공개했으니.
“약속대로 다 모였다, 탈모맨.”
난 담백하게 말을 꺼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머리 굴리면 뭐 할까, 결국에 밝혀질 텐데.
“그러게. 진짜 넷이 다 모였네.”
“그, 그렇다! 탈모맨과 핥짝이, 냥펀과 쁘띠공듀가 모두 모인 것이얏!”
핥짝이 역시 피식 웃으며 답했고, 냥펀 역시 충격에서 벗어나 아공간에서 팝콘을 꺼냈다.
말로만 하는 줄 알았더니만 진짜 챙겨 왔네, 나쁜 녀석.
그러거나 말거나.
탈모맨이 쁘띠공듀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뜬다.
그제야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깨달은 릴카가 이마를 쳤다.
릴카도 내 닉네임이 뭔지 알았으니까.
“아닛, 여기에 쁘띠공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녀석이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는다.
“얜 핥짝이고, 넌 이블아이? 아! 어쩐지 커뮤니티에서 이블아이라는 닉네임이 안 보인다더니… 그런 거였구나?”
어째서인지 밝게 웃은 녀석이 내게 손을 내민다.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뭐야, 이 녀석. 사실 알고 있던 건가.
일단 손을 마주 잡으며 악수했다.
“반갑다, 냥펀! 커뮤니티에서의 이미지랑 좀 안 맞기는 한데 다 개성이지. 나도 고양이 좋아해. 음하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탈모맨.
팔꿈치 안으로 입을 가린 채 끅끅거리며 웃는 핥짝이.
어디서 구했는지 콜라까지 꺼내서 팝콘을 와작거리는 냥펀.
작은 한숨과 함께 손을 놓았다.
“그럼 역시 쁘띠공듀는… 너일 줄 알고 있었다고! 그럼 그럼, 항상 상상해 왔던 그 모습. 너를 위해 이걸 준비했도다.”
짜잔!
인벤토리에서 꽃다발을 꺼낸 녀석이 냥펀에게 내민다.
냥펀이야 한 발 더 물러서며 도리질을 쳤고.
“후우… 탈모맨, 놀라지 말고 들어.”
“응?”
난 녀석을 불렀다.
“내가 쁘띠공듀야.”
머리 위로 정신 보호 스킬의 레벨이 올랐다는 알림이 떴지만 무시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멀뚱히 날 바라보던 녀석이 픽 웃으며 내 가슴을 툭 쳤다.
“에이,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고 있어.”
그래, 말로 해서 안 믿을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난 커뮤니티를 켰다.
짧지만 확실한 문장.
흘낏.
개인 메시지 알람이 왔는지 탈모맨이 허공을 매만진다.
녀석이 봤을 메시지는 하나.
[쁘띠공듀]: 나야… 이블아이.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탈모맨은 그 모습 그대로 멈추었고.
핥짝이와 냥펀은 쉴드까지 쳐 놓고 우리를 관람하고 있었다.
릴카는 은근슬쩍 자신의 물건들이 깨지지 않도록 한구석으로 몰고 있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네가 쁘띠공듀라고? 이블아이?”
뭐라 한 단어로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 배인 얼굴.
그가 이번에는 냥펀과 핥짝이에게 고개를 돌린다.
“너희도 알고 있었고?”
“당연한 거 아니냐. 누가 그딴 콘셉트질을 하는데 여잔 줄 아냐. 멍청이도 아니고.”
“공듀랑 이블아이 동선만 비교해도 알 만한뎅. 설마 몰랐던 건 아니지?”
말마따나 둘은 내가 밝히기 전에 이미 정체를 알고 있었다.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이블아이랑 처음 만난 게 언제야, 10층이지? 그전까진 커뮤니티에 없다가 안전지대에서 처음 나타난 게 이블아이.”
“이블아이는 커뮤니티 하지도 않는데 공듀 부탁 들어서 여기저기 나댕기구.”
“공략법 올라오는 거랑 이블아이 등반 속도랑 별 차이도 안 났지.”
“사진 올렸을 때도 모습 나온 적 없음. 공듀랑 이블아이랑 동시에 활동한 적도 없음.”
“정체까진 몰라도 남자인 건 연합 사람들도 대충 알걸? 여자라 말한 적도 없고.”
“반쯤 놀리면서 노는 걸듯?”
핥짝이와 냥펀이 번갈아 이야기한다.
잘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다.
둘의 이야기를 들은 탈모맨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군… 그런 거였어, 후우.”
길게 숨을 내뱉은 녀석이 날 응시한다.
아까와 달리 조금은 차분해진 얼굴.
생각보다 잘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탈모맨.”
“공듀.”
-파아아아아앗!
우리를 중심으로 빛무리가 번져 나갔다.
흡사 60층 결투 이벤트가 벌어질 때와 같은 이팩트.
푸르스름한 빛이 원형 돔을 만들고, 불티처럼 날아오른 마나의 파편이 허공으로 올라간다.
번쩍.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든 녀석의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쫄쫄이를 찢고 튀어나올 것같이 부푼 근육이 꿈틀거렸고.
“사나이의 순정, 비록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지만 소중했다.”
녀석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권능이 발휘되며 정보가 떠올랐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건 스킬.
[악마의 결투장 (S) Lv.4]
-악마들이 결투를 위해 생성시키는 결투장.
-둘 중 하나가 전투 불능, 패배를 인정하기 전까지 풀리지 않습니다.
“내가 멍청해서 몰랐을 수도 있어. 그래서 너희가 말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고.”
-쩌어어엉!
맞부딪친 건틀릿에서 쇳소리가 울린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기.
“개인적인 착각이 있었을 뿐.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바뀌지 않지, 하지만!”
-쿠구구구구궁!
실체화된 투기가 어지럽게 솟아오른다.
대단한 박력.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던 녀석들도 작게 감탄한다.
정작 정면에서 그 기세를 받아 내야 하는 난 그럴 수 없었지만…….
“사나이의 가슴은 그러지 못해! 네가 만약 조금이라도 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다면 검을 들어라, 이블아이 아니, 쁘띠공듀!”
괴성과도 같은 외침을 내뱉은 녀석이 자세를 잡았고.
철컥. 나 역시도 묵묵히 검을 뽑았다.
그래, 이 녀석을 데리고 뭔 대화로 끝을 내냐. 그게 더 찝찝했겠다.
“가끔은 사나이끼리 몸으로 대화해도 괜찮지?”
탈모맨은 답 없이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럼.
최선을 다하자고.
-콰아아아앙!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발을 박찼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서로를 향해 검과 주먹을 내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