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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59화 (259/740)

259화 조심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다.

약속한 것도 있었고, 탑에 들어온 지도 꽤 지났으니까.

60층에 접어들며 등반가의 수 또한 줄어들었으니 원하든 원치 않든 마주치게 될 거라고.

앞으로 남은 40층을 돌파하려면 결국에는 정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름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며 조금은 흐릿하게 별일 없겠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어구, 사람이 많네. 60층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아, 전 서버가 다 합쳐져서 그런가?”

눈앞에 실체를 가지고 떠들고 있는 탈모맨을 보자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설마 핥짝이와 냥펀, 탈모맨이 같은 날에 이곳에 올라올 줄은 몰랐지.

대체 얼마나 빠르게 위로 올라온 거야.

아니다, 어쩌면 이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냥펀과 핥짝이는 프램버그에서 시간을 보냈고, 탈모맨은 등반에만 집중했으니까.

공략법도 올려 두었으니 더 빠르게 올라왔겠지.

“저놈은 또 뭐야, 쫄쫄이 맨?”

“보니까 쁘찡 연합인 거 같은데?”

“오우, 코리아… 이상한 곳이에요우.”

“한국 애들은 다 이 모양인가?”

“그것보다 이 정도면 미국이랑 비슷한 수준인데? 중국보다 많이 올라왔어.”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다른 녀석들도 웅성거린다.

그럼에도 섣불리 다가오는 이는 없었는데…….

“직접 보니 더 가관이네.”

“핥짝앙, 내 앞에 서 줘.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고 싶어.”

“역시 우리 냥이, 나랑 생각이 똑같구나.”

“앗! 으아아!”

서로 더 멀어지겠다며 빙글빙글 도는 두 녀석.

“…노블 나이트가 더 낫지? 암만 봐도?”

“오필리아 님, 비록 결투는 졌지만 인권과 체면은 우리의 승리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요.”

오필리아를 비롯한 노블 나이트는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왜 다들 쳐다보지? 아, 다들 어떻게 알고! 공듀 만난다고 내가 또 꾸몄지! 턱시도 대신이랄까? 음하하하!”

저놈의 옷차림이 문제였다.

양심이 터졌네. 저걸 턱시도랑 비교하다니.

목에 찬 보타이를 늘리는 녀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딴에는 멋을 부리겠다는 건지 검정색 쫄쫄이를 입고 있다.

[타이즈 시리즈 No.9 (S)]

-세련된 블랙!

-격식을 갖추는 자리는 물론 데이트할 때도 입지 마세요, 말라고.

-밤에 입으면 잘 안 보입니다.

-입고 있어도 맨몸 같은 편안함!

-자가 수복에 방수까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그 와중에 등급 S급인 거 진짜냐.

타이즈 시리즈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변태거나, 변태거나, 변태일 것이다.

“그에에.”

덕춘이가 물끄러미 내 갑옷을 훑어보며 울었지만 고개를 돌려 모른 척했다.

여전히 소란스러운 분위기.

유독 날뛰는 녀석이 있다면 김정현.

“우오오오오! 내 삶의 행운을 모두 쓴 것인가! 섹시가이 김정현, 오늘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소리를 지르는 녀석.

누가 보면 골든 골 넣은 축구선수인 줄 알겠네.

진심으로 기쁜 건지 눈물을 찔끔 흘리는 것도 같고.

한참을 괴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던 녀석이 냅다 탈모맨을 향해 달려갔다.

“탈모맨 형님, 보고 싶었습니다! 이 우아한 자태의 쫄쫄이! 비단길 같은 매끄러움은 형님의 창창한 앞날과도 같으며, 목에 단 보타이는 웅장하기 그지없군요. 제 등짝에 사인 하나만 해 주십쇼!”

“너 이 녀석, 보는 눈이 있구나? 얼마든지.”

“핥짝이 형님도 약속대로 팬티에 싸인을……!”

“그런 약속 안 했거든?”

“그럼 가슴에라도! 이블아이 형님, 지금입니다! 지금 셀카를 찍을 거예요!”

저 정도면 진짜 정신병이 아닐까 싶은 행태에 할 말을 잃었지만, 뭐라 따지기보다는 얼른 끝내 버리고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몹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렇게 두 녀석에게 사인을 받는 모습 그대로 셀카를 찍은 녀석이 히죽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쁘찡 연합.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주변 반응을 보아하니 이미 연합에 대한 이미지는 글러 먹은 거 같은데.

“허허, 허허허.”

진짜 큰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멘탈이 깨질 것 같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우리랑 엮이기 싫은 구경꾼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벗어났다는 것.

“한국 놈들은 조심해야겠어.”

“크흠, 동감이야.”

“쟤네만 이상한 게 아닐까? 상식적으로 그렇잖아?”

“하지만 여기서 본 한국인들은 죄다 저 모양인데.”

“쁘찡 연합이라… 조사를 해 봐야겠군.”

그중에는 오필리아와 노블 나이트도 있었다.

“우리도 가 보겠습니다, 이블아이. 다음에 또 만나죠. 여전히 욕심이 나기는 하지만 우리와는 섞이기 힘든 부류의 사람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왠지 가슴이 아픈 말을 내뱉은 그녀가 몸을 돌렸다.

“앞으로도 마주칠 일은 많을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를 나누죠, 그럼.”

노블 나이트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남은 건 몇 없었는데 나와 멤버들, 그리고 구석 건물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이지키일.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건 이렇게였다.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스스스스

권능을 통해 보인 건 좀 달랐지만.

무패 기록자 중 한 명이자, 독일의 대형 길드 소속 헌터 파비안.

은신 스킬로 인기척을 죽인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권능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

무슨 목적이 있는 걸까.

별다른 티를 내지 않으며 못 본 척했다.

“오우. 생각보다 강자였군, 레인보우맨.”

그런 내게 이지키일이 다가온다.

항상 광장에만 있던 녀석.

헐렁하던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그 속에 은근히 감춰진 호기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나와 오필리아가 싸우는 걸 보고 흥미가 생긴 거 같은데.

이때다 싶은 걸까.

“아하하! 탈모맨, 드디어 만났구나.”

“…진짜 핥짝이었어?”

“그럼 가짜야? 딱 대. 너, 만나면 내가 가만 안 둔다 했지. 어디서 쪼그마한 게.”

“그, 그렇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악! 잠깐만! 공듀 만나야 한다고! 머리는 안 된다!”

탈모맨의 목에 팔을 두른 핥짝이가 나를 향해 엄지를 세운다.

잠깐이나마 시간을 끌어 주겠다는 뜻.

냥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탈모맨을 밀고 있었다.

“오오오! 형님들 저도 껴 주십쇼! 이블아이 형님은 안 가십니까?”

“난 선약이 있어서.”

사실 아무런 약속도 없었지만 대충 둘러댔다.

탈모맨을 잠깐이나마 떼어 낼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가능하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탈모맨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하여튼 간에.

‘이 녀석은 갑자기 왜 온 거지.’

오필리아와 마찬가지로 무패를 기록 중인 녀석.

“언제 한번 붙어 볼까 하고 있었는데 잘됐네. 다른 애들은 상대해 주지를 않아서. 나랑 내일 한판 할래?”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먼저 붙어야 할 수도 있어서 확답은 못 하겠군.”

탈모맨이랑 정말 말로만 끝날 거 같지는 않아서 말이지.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녀석이 눈썹을 찌푸린다.

“오케이. 계속 피할 건 아니지? 난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 우리의 얇지만 끈끈한 인연을 위해서 시간 좀 내줘.”

“나도 상품권은 얻어야 하니 나쁘진 않지. 보니까 패배 기록이 적은 사람을 이길수록 상품권을 많이 주는 거 같더라고.”

“오우,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걸. 마음에 들어.”

장난기 어린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녀석이 돌연 스킬을 사용했다.

[요정의 속삭임 (AAA) Lv.6]

-대상에게 은밀하게 말을 전합니다.

내 귓가에만 울리는 목소리.

-잠깐만 이렇게 걷자고, 그냥 잡담하듯이 지나가면 돼.

육성으로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이지키일이 속삭였다.

-브로, 승부는 좋지만 이번에는 너무 날뛰었어. 이러면 놈들 눈에 띈다고.

놈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뒤에 파비안이 쫓아오는 거 알아? 무패 기록자 한 명 있잖아. 뒤돌아보지 마, 들켜.

알다마다. 이미 권능을 통해 알아차린 후다.

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내 반응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은 녀석이 말을 잇는다.

-난 이미 여기서 얻을 건 다 얻었어. 초월석, 알지? 말했잖아. 난 여기서 가장 많은 결투를 벌였다고.

그렇다 했었지.

의문이었다. 60층대는 중요한 구간이다.

상위층에 올라가기 전 마지막 안전지대인 동시에, 대부분의 헌터가 올라오지 못하는 곳이었으니까.

동시에 권능 등급을 올릴 수 있는 아이템, 초월석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고.

나였다면 초월석을 다 모은 동시에 위로 올랐을 거다.

반면 이 녀석은 얻을 걸 다 얻은 후에도 광장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고.

-그런 내가 왜 있었을까? 다 저 녀석, 파비안을 감시하기 위해서지.

감시라.

그보다…….

“오필리아를 제외하면 기존의 무패 기록자는 너와 파비안만 남았지. 둘이서 싸운 적은 없었나? 오필리아하고도 싸우지 않은 거 같은데. 그랬다면 누군가는 패배의 전당에 올랐을 테니까.”

“각자의 사정이 있다고, 브로. 오필리아가 내 취향이라서 말이야. 파비안은 잘 안 보이기도 하고. 팍팍하게 살 필요 뭐가 있겠어.”

능청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오필리아에겐 개인적인 빚이 있어서, 저놈은 껄끄러운 게 있고. 아무튼 내가 속한 빅스타 길드 알지?

슬쩍 녀석이 별 모양 문신을 비추었다.

-보통은 신생 길드가 대형 길드로 인정받는 건 불가능해. 기존에 있던 놈들의 견제가 빡세거든, 정부까지 한통속이고.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 거야, 그치?

놀랍게도 빅스타 길드 역시 대형 길드와 정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오필리아가 이끄는 노블 나이트도 마찬가지.

둘 다 미국에 뿌리를 두는 만큼 협력 관계에 있는 걸까.

워낙 땅덩어리가 넓고 사람도 많으니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이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대형 길드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 지금 길드장도 대단하지만.

이지키일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길드 소속 중에 꽤 높이 올라간 녀석들이 있거든, 지금도 오르고 있고. 듣자 하니 한국 쪽에도 은근 많다고 들었는데.

많다면 많다. 보송송이도 곧 상위층에 진입하고, 헬다잉 키친에서 만났던 녀석도 있었으니까.

루키 집단. 그 외에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겠다.

상위층에 있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으니 파악하기도 힘들고.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하다.

상위층에 오른 이들을 두려워한 대형 길드가 빅스타 길드를 인정했다는 것.

이건 눈여겨봐야 한다. 우리도 비슷한 형태의 길드가 만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덕분에 이런저런 소식을 많이 접해. 쁘찡 연합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있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지키일이 날 바라본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탑에도 밖에도 이상한 놈들이 있어. 탑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녀석들, 멸망이 오기를 부추기는 놈들 말이야.

탑 숭배 집단.

머리가 아파온다.

이놈의 탑은 조용할 날이 없어.

어쨌든 이지키일이 나한테 접근한 이유는 알겠다.

-파비안을 조심해. 적어도 난 그놈이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경고.

그 안에는 약간의 호의와 동질감이 섞여 있었다.

쁘찡 연합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미국과는 별개로 노블 나이트가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었으니.

어쩌면 우리와 동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브로, 그럼 난 마저 썬텐이나 즐기도록 하지. 광장으로 놀러 와. 올 때 모히또 하나 가져와 주면 더 좋고!”

할 말을 마친 녀석이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나 역시 대충 대꾸해주며 몸을 돌렸다.

파비안은 사라졌는지 권능에도 잡히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며 릴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비밀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곳은 릴카가 있는 벙커뿐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았지만 지금은…….

“탈모맨이랑 결판을 내야지.”

-띠링

-띠링

타이밍도 좋지.

[정수리 핥짝]: 야, 더 이상 못 잡아 둬! 준비해!

[냥냥펀치]: 그동안 즐거웠어, 공듀! 잊지 않을게!

두 녀석에게서 개인 메시지가 왔고.

[쁘띠공듀]: 남쪽 물류 창고로 오세욧! 거기서 만납시다. 김정현은 빼구용.

난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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