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이─블─아─이!
쁘징 연합과 노블 나이트.
다른 이들의 전투는 마무리된 상황, 남은 건 나와 오필리아.
두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만 남았다.
[각 대표 앞으로.]
[결투를 시작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우리를 가두고 있던 장막이 사라졌다.
급할 것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이미 다른 녀석들의 싸움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른 상황.
기대감을 가진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여왕! 여왕! 여왕!”
“무지개! 무지개!”
“마무리가 중요한 거 알지? 지금 지면 개쪽이다!”
“아무나 이겨라!”
말마따나 마지막이 제일 중요하기는 하지.
시작과 과정이 어찌 됐든 끝이 안 좋으면 불편한 결말을 맞이하는 거고, 모든 게 개판이어도 끝이 좋으면 나름의 추억으로 간직되는 거니까.
결과론적인 이야기라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뭐, 그것도 그건데.
‘궁금하네.’
얼마나 강할지.
그녀가 이끄는 노블 나이트 멤버들도 결코 약하지 않았다.
60층에 있는 다른 헌터들이랑 비교하더라도.
잘 훈련된 인원들.
승리에 대한 집념도 있었고, 자신감을 가질 만한 실력도 있었다.
그들이 저토록 따르는 인물이라면 보통은 아닐 터.
“봐주지 않을 겁니다.”
“나도요.”
상대의 전력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
어설프게 상대할 생각은 없다.
그런 의미로.
-스으으으
난 차고 있던 검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들.
그들이 뭐라 생각하든 간에 난 새로운 검을 인벤토리에서 꺼냈으니…….
[이블아이의 혼돈의 검 (SSS)]
-프램버그의 영웅, 이블아이를 위해 베힐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검.
-혼돈의 파편 델버튼을 감싸고 있던 역병의 알로 만들어졌습니다.
-단단합니다.
-세상이 두 쪽 나고 당신의 머리가 깨져도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겁니다!
-혼돈이 깃들어 있습니다.
-착용 제한: 혼돈 수치 50 이상.
무려 내 이름이 들어간 아이템.
등급조차 SSS급.
프램버그를 구하고 베힐탄에게 3개의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펠라인의 보라색 왼팔.
그다음 건 영약이었다.
다른 물건들도 탐나기는 했지만 80층 진입 조건이 스텟 999였기 때문에 고른 선택.
나머지 하나는 뭐로 할까 고민하던 찰나 베힐탄이 내민 물건이 이 검이었다.
내가 사라진 동안 역병의 알 일부를 가공해 검을 만들었다고.
SSS급치고 화려한 효과는 없었지만 부러질 일이 없는 강도를 가지고 있으며.
‘나중에 만날 혼돈의 파편을 처리하는 데 필요할 거라 했지.’
혼돈을 머금은 만큼 다른 혼돈의 존재와 맞설 때도 유의미한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거다.
다르게 말하면 혼돈 수치가 별로 없는 대상은 이 검이 위협적으로 다가올 것이고.
자기 이름으로 된 아이템을 가지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건지 아냐며 베힐탄이 말했었다.
그건 하나의 역사를 쓴 것과 같다고.
전 서버 최초, 등반가의 이름을 담은 아이템이 생겼다는 메시지가 떠오르기도 했다.
원래였다면 새로운 칭호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난 이미 역사를 새롭게 쓴 등반자 칭호가 있어서.
-촤아악
잡념을 지워내고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적당한 무게감과 완벽에 가까운 무게 균형.
생긴 게 좀 특이한 것만 빼면 훌륭하다.
“저거 뭐야? 현무암 아닌가?”
“현무암검이다. 현무암검이 나타났다!”
“이 무슨 끔찍한…….”
그래, 저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나도 맨 처음 받고 그 생각부터 들었으니까.
“저런 건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야?”
“으으… 공블아이가 좀 더 괴상해졌엉.”
“형님, 멋있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핥짝이와 냥펀, 김정현의 목소리.
응원해 주는 애가 한 명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이군요. 그런 재질의 검은 본 적이 없습니다.”
괜히 긴장한 오필리아가 경계심을 올린다.
안목이 괜찮군.
다른 사람들은 우습게 보고 있을 따름인데.
긴장되는 순간.
“그에에.”
덕춘이가 작게 울었고.
-파앗!
-타아아앗!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시작과 동시에 모든 스킬을 사용할 생각은 없다.
이곳에 있는 사람 모두 59층, 즉사 구간을 통과한 이들.
뭐가 됐든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단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는 거였고, 무리한 공격으로 힘을 빼 봤자 불리하게 작용될 뿐이었으니까.
-스악
빠르게 검을 그었다.
굴하지 않는 검귀에 절삭.
평소랑 같은 조합이었으나 동화율도 스킬의 등급도 올라간 지금, 범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검이 지나간다.
-카아아앙!
오필리아는 피하는 대신 그대로 손을 내뻗었다.
강력한 신성력이 느껴진다.
하얀빛과 함께 생성된 보호막이 그녀를 감싸며 검을 막아 냈다.
난 표정을 굳혔다.
단단하다.
찢어발기리라 예상했건만 반쯤 부수며 틀어박혔을 뿐 오필리아에게 닿지는 않았다.
[칭호, 수호천사가 발휘됩니다.]
아무래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칭호 효과 덕분인 거 같은데.
뭐든 두드리다 보면 깨지겠지.
퉁!
발을 튕겨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오로라 빔.
-찌유우우웅!
반쯤 깨져 버린 보호막을 노리고 오색 광선이 날아든다.
파괴적인 힘으로 밀고 들어가는 공격.
당황할 법도 했지만.
“흠!”
오필리아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번쩍!
섬광과 함께 그녀의 손에는 검이 쥐어졌고 그대로 오로라 빔을 쳐 냈으니까.
-콰르르릉!
각도가 꺾이며 결투장 장벽을 때린 오로라 빔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몇 차례 되지 않는 공방이었으나 상대방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신성력 기반이라.”
오필리아의 힘이 어떤 식으로 발휘되는지 알 것 같다.
그녀가 가진 칭호와 권능.
지금 들고 있는 검.
[멸악의 신성검 (SSS)]
-제6 천계의 대천사 벨루악이 사용하던 성물.
-대악을 처단한 영웅의 검!
-멸망을 극복한 세계의 흔적이라 전해집니다.
-착용 제한: 천족의 인정, 신성력 900 이상.
등급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따로 있다.
멸망을 벗어난 세계의 파편.
진짜로 있던 건가, 멸망에서 벗어난 세상이?
그런 곳의 물건이 어째서 여기에 남아 있는 걸까.
저기서 말하는 대악이 뭔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재앙, 아니면 혼돈의 파편이겠지.
벨루악이라고 했나… 저 사람은 100층까지 오른 걸까?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멸망을 피한 게 아니라 극복했다고 했다.
다른 뭔가가 있을 거라는 말.
그건 그거고.
‘신성력이 900 이상이라.’
괴물이네.
난 검을 고쳐 쥐며 오필리아를 응시했다.
나 역시 신성력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기껏해야 700대 후반 정도.
그것도 최근 프램버그에서 고른 보상으로 영약을 먹었기에 이룬 수치였다.
덤으로 명성이 퍼지면서 신성력이 늘어난 덕분이기도 하고.
씨익. 입꼬리가 올라간다.
얼마 만인가, NPC를 제외하고 등반가와 이렇게 싸우는 게.
“오지 않는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칭호의 효과인지 아니면 스킬의 능력인지 허공에 반쯤 떠오른 그녀가 검을 옆으로 든다.
빛으로 이루어진 검. 마찬가지로 하얗게 불타오르는 날개가 등 위로 솟아오른다.
마지막으로 머리 위로 빛으로 만들어진 왕관이 생성됐을 때.
[SS급 권능, 구원자가 빛납니다!]
[칭호, 대천사의 후계자가 빛납니다!]
[칭호, 천황의 인도가 빛납니다!]
하나의 권능과 두 개의 칭호가 힘을 발휘했으며.
[참마의 일격 (S) Lv.4]
-신성력을 제외한 모든 속성에 강한 공격력.
-후우우우우웅!
하늘을 가를 것처럼 빛의 검이 내리꽂혔다.
모든 걸 불사르듯 빛을 뿜으며 거대해진 검이 결투장을 집어삼키고, 패도적인 기세만이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뜬 찰나.
[버프 다이스 (AAA) Lv.1]
[4]
[스플래시 데미지]
[러브 앤 피스 (S) Lv.5]
[파이어 밤 (S) Lv.6]
-콰아아아앙!
신성력을 담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는 데미지.
신성한 빛을 품은 일격.
“크으읍! 뭐 하는 놈들이야!”
“결투장 밖에 있는데도 이 정도라고?”
“미친놈들이었잖아!”
결투장 밖에서 구경하던 이들마저 얼굴을 가린다.
장벽으로 막혀 있음에도 충격의 여파가 밀려왔기 때문.
난 곧장 앞으로 달렸다.
충격이었는지 눈을 크게 뜬 오필리아.
“마, 말도 안 돼! 천족의 인정을 받은 건 나밖에 없을 텐데!”
“맞아, 난 천족이랑은 별 인연이 없거든.”
내가 가진 신성력의 근원은.
[칭호, 잊힌 교단의 팔라딘이 번뜩입니다!]
고대 왕국에 존재했던 불과 얼음의 교단이니까.
신성력을 지니는 건 천족뿐만이 아니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폭발.
그것을 추진력으로 앞으로 날아갔다.
예상치 못한 내 신성력에 당황한 그녀가 위로 날아오르려 했으나.
[프로즌 브레이크 (AAA) Lv.5]
머리 위로 거대한 빙벽을 생성.
[일렉트릭 쇼크 (AAA) Lv.3]
-파지지지지직!
거기에 전격까지 쏘아 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인벤토리에서 뇌봉참검을 꺼내 그녀의 밑에 던져 꽂았으니.
-콰가가가가강!
뇌봉참검을 피뢰침 삼아 모든 전격이 하나로 모여들었다.
뇌전이 벼락이 되어 그녀를 관통했고.
“끄으읍!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마비되는 몸을 억지로 움직인 오필리아가 검을 내질렀다.
강력한 신성력으로 몸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반격이라니.
대단하다 못해 징그러울 지경이었으나.
-타앗
나 역시 그런 그녀와 맞서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검격.
한줄기 섬광과도 같은 공격을 향해 돌진했다.
검이 목을 꿰뚫기 직전 안개 질주.
-푸스스스
안개화된 몸이 검을 통과해 위로 향한다.
잠깐이지만 무적 상태.
동시에 나 역시 공격할 수 없는 상황.
그 사실을 눈치챈 걸까. 오필리아가 위에서 떨어지는 빙벽을 부수더니 더욱 위로 올라갔다.
-사각!
-파바바밧!
나를 견제해 검을 휘두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이대로 안개화가 풀리면 공격에 노출당할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위로 뻗어 나갔고.
[안개화가 종료됩니다.]
[망자귀환 (AAA) Lv.5]
망자귀환을 통해 스텟을 늘렸다.
실체를 되찾은 나를 향해 들어오는 검.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검날이 쇄도한다.
“끝이에요!”
피할 각도가 아니다.
피하게 놔둘 그녀도 아니고.
난 담담히, 즉사하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비틀었다.
전력을 담은 일격이었던 걸까.
-쿠드드드득!
갑옷의 연결 부위를 뚫고 들어온 일격에 강렬한 통증이 일었다.
온몸이 지져지는 듯한 격통.
그럼에도 난 미소를 지었다.
[데미지가 최대치까지 누적됩니다.]
이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되갚기.
그동안 쌓아 온 데미지를 한 번에 터트리는 강력한 스킬.
델버튼과 싸우며 S등급까지 올렸다.
59층에서, 그리고 올라와 결투하면서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기에 데미지가 상당히 누적된 상황.
그걸 사용할 때가 됐다.
[되갚기 (S) Lv.1]
-쩌저적
-쩌어어어어엉!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파괴적인 에너지가 나와 오필리아를 집어삼켰다.
오로지 파괴만을 위해 퍼져 나가는 힘의 파동.
함성과 비명을 지울 굉음.
구구구궁!
결투장 전체를 울리는 진동만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고, 이내 눈을 떴을 때는.
“헉. 허억.”
결투장 바닥에 처박힌 오필리아를 볼 수 있었다.
질긴 생명력으로 숨은 쉬고 있었으나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해 보였다.
나 역시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폭발의 반발력으로 날아간 건 마찬가지니까.
그저.
[독자무강獨者武强 (S) Lv.4]
[강철의 의지 (S) Lv.3]
[강체强體 (S) Lv.4]
[물리 공격 내성 (S) Lv.3]
그녀보다 보호 스킬이 많았을 뿐.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눈만 겨우 굴려 날 바라본다.
“더 할 거예요?”
난 지그시 물었고.
피식. 웃음을 흘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무지개 용사.”
[결투 종료.]
[패배의 전당이 갱신됩니다!]
-와아아아아!
난장판이었던 결투장이 해체되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몸을 굽혀 쓰러져 있던 오필리아를 부축했다.
승패를 떠나 좋은 경험이었다.
장기전으로 갔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거다.
지금도 신성력과 회복 스킬로 그녀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역시 공블아이! 믿고 있었다구!”
“어우, 귀 터지는 줄 알았다 야.”
“형니이이이임!”
내 쪽으로 달려오는 냥펀과 핥짝이, 김정현.
“오필리아 님, 괜찮으십니까!”
“어서 포션을!”
“부축해!”
노블 나이트 역시 서둘러 다가와 오필리아를 챙겼다.
깨끗이 승복했기 때문일까. 결투가 끝났음에도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나도요.”
나와 오필리아는 가만히 서서 악수를 나누었다.
[결투 승리 보상]
[상품권×10개를 획득합니다.]
강한 상대를 이겼기 때문인지 상품권도 두둑이 받았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결투에 미소 짓고 있는 타이밍.
“이야! 이블아이, 못 본 사이에 더 강해졌구나? 하하하하하! 저게 아프긴 하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피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등 뒤로 소름이 돋는다.
뻣뻣해진 목을 간신히 돌려, 인파를 헤치며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타, 타타… 탈모, 맨?”
그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