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노블 나이트
릴카가 내뱉은 말.
다시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왜?
어떤 이유로?
단순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싶었다기에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또 다른 혼돈의 파편이 탄생했어. 이제 막 전투를 끝마친 우리가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구.”
골치 아프네.
보스를 잡고 보물 상자를 열었더니만, ‘짜잔! 선물로 보스를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이런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한 번 잘못하면 멸망이 가속될 수도 있다는 거다.
진짜 랜덤. 어느 쪽으로든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열면 안 되는 거겠지?”
“당연하지! 에잇! 정신 차려랏!”
후다닥 달려온 릴카가 내 정수리를 때린다.
고놈 재빠르네.
오케이. 뭐가 됐든 카오스 박스는 잠시 넣어 둬야겠다.
안전지대에서 열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도 없고.
좋은 결과만 생각하고 움직이기에는 감당해야 할 게 너무 많다.
만약에 혼돈의 파편이 나타난다면 여기 있는 헌터 태반이 죽을 게 뻔하다.
NPC들이 도와줄 수도 있지만 움직임에 제한이 있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고.
-우우웅
카오스 박스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대신 이거라도 열어 봐야지.
새롭게 얻은 권능. 차원 상인의 무자본 혜택.
거기서 얻은 랜덤 박스를 열었다.
-파아아앗!
역시 예사 물건이 아니라 이건가. 화려한 이팩트가 쏟아진다.
그냥 랜덤 박스가 아니다.
현 상황에 필요한 것들로 이루어진 랜덤 박스지.
어쩌면 여기서 펠라인 세트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말.
난 기대감을 가지고 내용물을 살폈고.
“엉?”
“에헤헤, 꽝이네.”
[특제 만두]
-줄 서서 먹는다는 맛집!
-속이 꽉 찼습니다.
-하나만 먹어도 든든하다고요!
만두요?
이게 왜 나와?
현 상황에 필요한 것들로 되어 있다며.
나한테 만두가 왜 필요한데!
“궥!”
얼빵한 표정으로 만두를 집어 든 타이밍.
덕춘이가 냉큼 만두를 잡아 입속에 넣는다.
아, 내가 아니라 너한테 필요하다고?
“그엑. 찹찹. 궥.”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돌겠네. 설명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나한테 필요한 게 아니라 현 상황에 필요한 게 나오는 거였지.
그래. 덕춘이가 원한 걸 수도 있지.
허허. 어허허.
괜히 울컥한 마음에 덕춘이에게 꿀밤을 먹여 볼까 했지만.
“그에에에.”
스트롱 한 덕춘 님이 무서운 관계로 만만한 릴카를 때리기로 했다.
“에흑, 왜 때려!”
“미안, 손이 미끄러져서.”
그래도 살살 쳤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난 물끄러미 릴카를 바라봤다.
카오스 박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다.
분명 혼돈의 파편을 사냥하러 다녔다고 했지.
보아하니 4마리까지 잡고, 실패해서 NPC가 된 거 같기는 하지만.
우리라고 말한 걸 보면 혼자가 아니었던 거고.
“릴카, 혼돈의 파편을 잡으러 다닐 때 동료들이 있었잖아. 혹시 그 사람들도 탑에 있나?”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징. 넌 모르겠지만 한 명은 이미 만나 봤어.”
“내가 만나 봤다고?”
내가요?
누구지? 짐작 가는 게 없다.
워낙 세계관이 섞여 있는 곳이 탑이다 보니까.
“누군데.”
“비밀이닷!”
단호하게 입을 다무는 녀석.
주섬주섬, 보물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흔들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모양.
말해 주기 싫은 걸까, 아니면 이것도 말해 줄 수 없는 정보인 걸까.
이것도 말하기 거부한다는 건 차원에 버려진 아이가 무슨 뜻인지도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거겠지?
기회는 많으니 나중에 물어보도록 하고.
“릴카, 전에 하던 거 마저 해 볼까?”
“안 그래도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징. 우후후훗! 거래가 밀려 있어서 서둘러야 하거든. 어서 날 도와라! 노예 아니, 계승자야!”
“오냐, 가자.”
생기가 돌아온 녀석의 머리를 피식 웃으며 쓰다듬었다.
대장간에 왔으면 망치를 들어야지.
제작 스킬도 올려야 하고, 화조국에 납품할 물건도 만들어야 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어 던지고 릴카를 따라 망치를 두들겼다.
* * *
60층에 진입한 지 3일째.
일과는 단순했다.
벙커에서 릴카와 함께 장비 제작 숙련도를 올리고, 남는 시간에 포션을 만들었다.
생명수는 더 이상 납품할 필요 없었지만 다른 건 아니라서.
뭐가 됐든 레벨을 꾸준히 올려 두는 게 좋기도 했고.
릴카가 있는 덕분에 평소에는 구하기 힘든 약초나 재료도 얻기 쉬웠다.
여기까지는 평범했고 이후에는…….
“오오오!”
“거봐. 내 말이 맞지?”
“힘 좀 써 보라니까. 에휴. 너 그래 가지고 60층 벗어나겠냐?”
밖으로 나가 결투를 하거나 내기에 참여했다.
60층에서 얻어야 할 건 초월석 조각.
내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모아야 했는데, 솔직히 전부 다 싸워서 상품권을 얻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해서 편법을 쓰는 중.
“무지개 용사 또 땄네?”
“주작이냐, 어? 주작이냐고!”
“아, 그러지 말고 나한테도 살짝 귀띔만 해 주라니까.”
릴카가 그랬듯이 누가 결투에서 이길지 맞혀 상품권을 베팅했다.
권능도 있겠다 남들보다 높은 확률로 결과를 맞출 수 있었고.
[초월석 조각 (4/10)]
[60층 상품권×8]
조각 2개를 더 모았다. 상품권도 8개. 2개만 더 모으면 조각 하나를 더 구할 수 있겠군.
만족스러운 결과.
직접 싸우는 것보다 이게 더 많이 얻는데?
이렇게 해도 아직 반도 못 모은 게 함정이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 60층에 죽치고 앉아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나저나.
“강하네.”
난 방금 결투를 벌인 남자를 바라봤다.
이름이 뭐였더라.
하본 미켈라였나.
기사 같은 무장, 풀 플레이트 아머에 검.
왼쪽 팔뚝에는 작은 방패.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모양 별무늬. 표창 모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마크를 달고 있다.
처음 여기 왔을 때도 눈에 띄던 건데, 요 며칠 있다 보니 정보를 조금 얻을 수 있었다.
“형님, 역시 따셨군요! 형님만 믿고 따라 베팅했습니다!”
여기, 말 많은 녀석한테 말이지.
진성 연합 사람.
어째서인지 내가 부끄러워지는 녀석이었지만 상당한 실력자였다.
왜냐.
[패배의 전당]
-섹시가이: 2패
고작해야 2패밖에 안 했으니까.
62층까지 올랐던 보리스카도 6패를 기록했다.
물론 1패는 나 때문에 생긴 거지만.
그것보다 이 녀석 닉네임은 또 왜 이러냐.
나는 입 밖에 내기도 민망했건만.
“저 섹시가이 김정현, 언제나 무지개 형님은 응원하고 있었다고요.”
“어… 그래, 고맙다.”
이 녀석은 그런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성격 차이인가?
나도 이놈 같은 성격이었으면 당당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한 의미로 부러운 녀석이다.
“형님과 함께하는 이 귀한 금두꺼비는…….”
“궤엑!”
-철썩!
“억!”
어딜 덕춘이 보고 두꺼비라고.
매콤한 손바닥 맛을 본 녀석이 뺨을 부여잡는다.
살살 친 거야 그거. 진심으로 쳤으면 ‘뺨치기 (S)’라고 떴어.
“잡담은 그 정도로 하고… 보니까 표창 모양 무늬를 한 녀석들을 은근히 피하는 것 같던데.”
“노블 나이트가 은근 따로 놀기는 하죠. 뭐랄까… 우린 너희와 달라! 이런 느낌? 싸가지 없긴 한데 실력은 확실합니다.”
노블 나이트.
길드는 아니다. 김정현의 말에 따르면 미국 서버에서 만들어진 연합 비슷한 거라고 하는데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이 녀석들도 잘못된 공략법이랑 백환에 대해 까발렸다고 했지.’
미국에서는 백환이 아니라 빅 캔디라고 부른다던가.
아무튼 쁘찡 연합이랑 유사한 부분이 있다.
분위기는 정반대지만.
우리는 떠들고 노는 분위기라면 이 녀석들은 비밀 결사대인 것처럼 지들끼리 모여서 돌아다니는, 뭐랄까… 좋게 말하면 진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음습한 느낌이 있는 놈들이다.
개방적인 우리와 달리 폐쇄적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게 쁘찡 연합의 근본 자체가 팬클럽이다 보니 저런 느낌이 날래야 날 수가 없다.
엄숙한 팬클럽이라… 이상하잖아.
당장 옆에 있는 김정현만 봐도 알겠다.
“아! 눈치채셨습니까?”
뭘 눈치채 자식아.
“하하하! 굿즈 티셔츠 스페셜 에디션을 구해 갈아입은 건 또 어떻게 아시고! 형님이 원하신다면 하나 구해 드릴 수 있습니다.”
“너 많이 입어.”
티셔츠를 찢어 버리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지만 엄청난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부담스럽네.
이러다 뜬금없이 나한테 결투 거는 건 아니겠지?
아직 오늘은 결투 상대로 지목된 적이 없다.
현재 스코어는 3승 무패.
경기마다 사회적 목숨이 달려 있는 만큼 전력을 다했다.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서 싸우고 놀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무패로 버티고 있는 게 나 포함 4명이라고 했나?”
“뭐, 형님이야 비교적 최근에 올라왔으니 따지고 보면 3명이라 봐야죠.”
먼저 자칭 챔피언. 광장에 선팅하고 있는 이지키일 존 스페너스.
다들 욕을 해 대기는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강자다. 말마따나 가장 많은 결투를 벌인 인물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 명은 독일 대형 길드 출신 파비안.
구경거리가 되기 싫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피한다고 들었다.
단둘이 있거나 소수의 인원이 있을 때 주로 결투를 벌여 자세한 정보는 별로 없다.
다만 운 좋게 결투를 목격한 이들이 하나같이 엄청난 싸움이었다고 말하는 중.
그리고 남은 한 명이.
“어? 웬일로 저 사람이 왔네요?”
“오필리아 글렛.”
노블 나이트를 이끄는 우두머리였다.
그녀를 보호하듯 옆에 서서 움직이는 이들.
이건 뭐, 상전 대하듯 하는 거 같은데.
더욱 놀라운 건 저들 중에 일부는 대형 길드 소속이라는 것.
60층까지 왔으면 거의 루키급이라 봐야 하는데 그 녀석들이 남의 밑으로 들어갈까?
다른 곳도 아니고 60층까지 올라와서?
길드 내에서 반발도 엄청날 텐데, 제약도 걸려 있을 거고.
미국 쪽 서버도 여러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번 봐 보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난 권능을 사용해 그녀의 정보를 살폈고.
[오필리아 글렛]
-최고 등반 수: 60층
-닉네임: 갓블레스
-탑 공략 결사대, 노블 나이트를 이끌고 있습니다!
-SS급 권능, 구원자 보유.
-S급 권능, 기적의 파편 보유.
-S급 권능, 속삭이는 작은 빛 보유.
[동일 등급의 권능이 있어 자세한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내 권능과 동일한 SS급 권능을 가지고 있는 터라 읽어 낼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지만 이것만 해도 엄청나다.
권능만 3개.
그 말은 적어도 NPC 두 명의 계승자가 됐다는 건데.
권능만도 저 정도니 다른 칭호나 스킬은 보지 않아도 엄청나겠지.
저 정도면 어지간한 60층대 헌터보다 강하지 않을까?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는 타이밍.
“뭐야? 둘이 척진 거라도 있나?”
“야야야, 비켜 봐. 재밌는 거 볼 수도 있겠다.”
“대박 매친데?”
웅성거림이 퍼지더니 사람들이 비켜난다.
남은 거라고는 옆에 있던 김정현과 내 앞에선 일단의 무리.
가장 앞에 서 있던 오펠리아가 나를 바라본다.
하얀 피부에 갈색이 섞인 금발.
중무장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의 그녀가 나를 마주 본다.
아, 진짜. 아니지?
슬며시 몸을 돌렸다.
“하하하! 둘이 할 이야기가 있나 보군요. 자자, 편히 이야기들 나누세요.”
“…형님?”
자연스럽게 정현이의 어깨를 두들기고 빠져나가려는데.
“당신의 싸움을 지켜봤습니다. 대단하더군요, 무지개 용사.”
그럼 그렇지.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