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새로운 권능
릴카의 계승자가 되는 것과 동시에 찾아온 고통.
그동안 아픈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건 상상 이상으로 강렬했다.
델버튼에게 수없이 죽었을 때랑은 다른 형태의 통증.
몸이 분열되고 합쳐지고 깨지는 격통이었다.
“크으으읍!”
신음이 절로 새어 나온다.
살짝만 방심하면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기분.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무한 코인도 있고, 안전지대에 있는 만큼 망가진 신체도 복구가 될 거다.
“참아야 해! 안 그럼 한 번 더 해야 된다굿!”
“빠, 빨리도 말한, 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릴카의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고통을 무조건 견뎌야 한다는 거니까.
어차피 해야 한다면 할 때 제대로 하자.
정신을 집중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주변 자극이 사라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마치 거대한 공간 홀로 있는 기분.
어깨에 있을 덕춘이의 존재감마저 지워진다.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는 상황. 머리에 폭죽이 터지듯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고.
[차원에 버려진 아이, NPC 릴카를 계승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허억! 헉!”
“그에에에.”
“괜찮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내게 덕춘이와 릴카가 다가온다.
덕춘이는 목을 핥으며 회복을 걸어 줬고, 릴카는 빙빙 돌면서 어디 안 좋은 곳은 없는지 날 살폈다.
근심 어린 표정.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건가.
신기하게도 그만한 통증이 있었는데 몸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
변한 게 있다면.
[NPC 릴카의 혼돈 일부를 가져옵니다.]
[혼돈 수치 +15]
혼돈 수치가 올랐다는 것.
계승자가 되면 대상 NPC의 혼돈 수치 일부를 가져온다는 건 알고 있다.
알리오스의 계승자라는 이유로 혼돈 수치 5점을 받았었으니까.
싱크로율이 오르면서 추가적으로 몇 점 더 받기도 했고.
이번에는 다르다. 한 번에 15점이 올랐다.
-꾸우우우욱
“악! 왜! 왜! 누르는데!”
“힘들어서, 지팡이로 쓰려고.”
“여기 의자도 있다구우우욱, 악!”
발발거리는 릴카의 머리통을 잡으며 내 정보를 읽었다.
계승자가 됐으니 권능이 하나 생겼을 터.
난 내가 가진 권능들을 살폈다.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
[SS급 권능, 스킬 합성]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
-동화율: 71퍼센트
[SS급 권능, 차원 상인의 무자본 혜택]
역시나 권능이 늘어났다.
이걸로 권능만 총 4개.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기겁할 만한 수치다.
심지어 등급도 SS등급으로 통일되어 있다.
릴카 이 녀석 생각보다 좋은 권능을 줬네.
효과는 직접 봐 봐야 알겠지만.
그전에…….
“뭐야, 왜 동화율이 없어.”
“그것 때문에 아픈 것이지!”
이때다 싶었는지 손아귀에서 벗어난 릴카가 당당한 포즈를 취한다.
계승이라고 다 같은 계승이 아닌 건가?
이번에 두 번째라 잘 모르겠다.
릴카가 풍성한 꼬리를 흔들며 설명을 이어 나간다.
우쭐한 표정이 심히 거슬렸지만 일단 참았다.
“흠흠, 계승자가 얻는 권능은 여러 종류가 있징. 예로 들어서… 얍!”
릴카가 짤막한 다리로 발차기를 한다.
어쭈.
옆차기, 뒤차기, 뒤돌려차기.
자세가 제법이다. 예전에 발차기 좀 했었나.
짝짝짝. 작게 박수를 쳐 줬다.
콧대가 높아져서 흥흥거리던 녀석이 나를 바라본다.
“이런 식으로 발차기에 관련된 권능이 있으면 당연히 그만한 기술과 숙련도가 있어야겠지?”
“아무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굴하지 않는 검귀가 저런 식이다.
검술에 대한 보정치를 주지만 마법같이 알리오스 급의 검술 실력을 바로 가지게 해 주지는 않는다.
그 녀석이 준 기억 파편과 수면 전투 복기 스킬로 간접적으로나마 가르침을 받으며 실전으로 소화해 내야 했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깨어 있을 때는 등반을, 자면서는 알리오스의 기억을 토대로 또 다른 전투를 해야 했으니.
“반면에 이런 권능도 있엉. 음… 천운이라고 운이 좋아지는 것도 있고, 지옥불의 파괴자처럼 폭발이나 폭염 스킬에 위력을 더 해 주는 것도 있지.”
그런 것도 있었나.
다른 건 모르겠고 지옥불의 파괴자는 좀 끌린다. 저것만 있으면 완벽한 폭탄마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런 것들은 특별히 숙련도를 요구하지 않아.”
“맞지. 그냥 효과가 적용되는 거니까.”
“웅웅. 그래서 동화 작업이 한꺼번에 진행돼. 짜잔! 방금 느낀 통증이 그거랍니닷!”
이번에 얻은 ‘차원 상인의 무자본 혜택’도 그런 거라는 거구만.
오케이. 대충 이해했다.
자세한 내용은 알아봐야지, 옆에 제일 잘 알고 있는 녀석도 있고.
난 권능의 정보를 살폈다.
SS급인 만큼 뭐가 있어도 있겠지.
엄청난 기대를 하지는 않지만.
예전이라면 ‘SS급 권능이라고? 엄청나다!’ 이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권능도 등급이 올라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릴카가 99층까지 올랐으니 적어도 2번은 등급을 올렸다는 말.
차원 상인의 무자본 혜택은 원래 AAA급 권능 정도였다는 거겠지.
‘잠깐만, 동화 완료되기 전에 차원에 버려진 아이 릴카라고 메시지가 뜨지 않았었나?’
차원 상인의 무자본 혜택.
차원에 버려진 아이.
릴카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한데.
살짝 궁금해졌지만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개인사랑 엮여 있을 거 같으니 껄끄러운 주제일 수도 있고.
지금은 권능부터 확인하자.
[차원 상인의 무자본 혜택- SS급 권능]
-아무것도 없는 차원의 균열!
-빈털터리가 굶어 죽기 딱 좋은 곳이죠.
-아무런 보급이 없다면 말이에요.
-일주일에 한 번, 현 상황에 필요한 물건이 담긴 랜덤 박스가 지급됩니다.
-상인 자격을 얻습니다.
상인 자격을 얻는다는 건 좋은 소식이다.
당장 내가 있는 곳도 상인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구역이다.
냥펀도 상인 자격으로 프램버그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다 치는데…….
“랜덤 박스?”
“웅! 뭐가 나올지 모르는 박스지!”
“그건 나도 알거든? 상점창에서도 파는 거잖아.”
“으아아아! 무엄하다!”
“악!”
찰싹! 릴카가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내려친다.
은근히 아픈 걸 떠나서 기분 나쁜 일격.
쓱 노려봤지만 릴카도 피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그런 조잡한 것들이랑 비교하지 말라구. 안에서 뭐가 나올지 아무도 모르니까. F급 쓰레기 템이 나올 수도 있고, 식량이 나올 수도 있고, SSS급 보물이 나올 수도 있다굿!”
“종류, 등급 상관없이 진짜 무작위로 나오는구나?”
“그렇다!”
상황에 따라 엄청난 능력이 될 수도 있고, 희대의 쓰레기 권능이 될 수도 있었지만 난 자신 있었다.
무려 행운 스텟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 권능은 좋은 점이 있다.
현 상황에 필요한 물건들로 내용물이 차 있다고 하니까.
[SS급 권능, 차원 상인의 무자본 혜택이 발휘됩니다.]
[차원 랜덤 박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급 받겠습니까?]
“예스.”
-우우웅
성능 확실하네
바로 효과가 발휘되고.
하늘에서 떨어진 박스를 집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다.
어? 랜덤 박스 하니까 떠오르는 게 하나 있는데.
난 조심스럽게 인벤토리에서 카오스 박스를 꺼냈다.
[카오스 박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혼돈 수치 50점을 넘겨야 사용 자격을 얻습니다.
수상쩍은 물건.
내용만 보면 릴카의 권능과 비슷하기도 한데.
단순히 물건만 나오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게 함정이다.
막말로 열자마자 역병의 안개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것.
릴카에게 박스를 던져 줬다.
“혹시 이거 뭔지 아냐?”
“챱! 어디 보자. 히이이익!”
직업병인가 냉큼 박스를 잡아든 녀석이 내용을 살피는 것과 동시에 기겁한다.
그러곤 냅다 던져 버리고 소파 뒤로 숨는다.
꼬리털까지 바짝 선 거 보니까 진짜 놀랐나 본데.
이게 그 정도로 문제 있는 건가?
“왜 남의 물건을 던지고 그래.”
“그, 그거 어디서 났어? 위험한 거라고!”
“그래 보이긴 하더라.”
“알면서 나한테 주다니… 나빠!”
나쁘긴 뭐가 나빠. 안 열면 괜찮은 거지.
아무튼 저렇게 반응한다는 건 카오스 박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있었다.
혼돈의 파편.
릴카도 만난 적 있을까?
그놈들을 잡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건가?
가능은 할 거 같다.
놈들도 무적은 아니라는 걸 직접 확인했을뿐더러 이번에 계승자가 되면서 얻은 혼돈 수치로.
[현재 혼돈 수치- 88점]
무려 88점에 달하는 혼돈 수치가 쌓였으니까.
릴카가 말했지. 보통 60층대부터 혼돈 수치를 얻기 시작한다고.
난 이미 100점 가까이 모았다.
12점만 더 모으면 100층 진입 조건은 충분히 만족한다는 거지.
뭐, 100점에 만족할 생각은 없다. 최대한 있는 대로 긁어모을 생각.
델버튼을 상대하면서 혼돈 수치의 중요성은 충분히 체감했으니까.
“너 이거 뭔지 알지? 프램버그에 있는 혼돈의 파편 잡고 얻은 건데.”
“거짓말! 네가 어떻게 혼돈의 파편을 잡앙!”
불신 가득한 녀석에게 베힐탄에게 받은 백금 카드를 꺼내 보였다.
프램버그의 대표를 제외하면 나 말고 가진 사람이 없다.
상인인 릴카라면 그 정체를 알아 볼 터.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눈이 동그래진다.
“백금 카드?”
“어. 베힐탄한테 받았지. 그 양반이 너 장인으로 초대하고 싶다더라.”
“에헤헤. 내가 좀 잘 만들기는… 아닛! 어떻게 잡았냐구! 그놈들은 아직 네가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약간 요령을 부렸지. 그러지 말고 좀 알려 주지?”
뚱한 표정을 지은 릴카가 슬며시 나온다.
손을 내밀기에 카오스 박스를 쥐어 주자 면밀히 살피기 시작한다.
“확실히 진품이네, 으으음.”
“이거 열어 본 적 있어?”
“몇 번 있기는 하지.”
짧은 답변이었으나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많았다.
릴카 역시 혼돈의 파편을 잡은 전적이 있다는 것.
카오스 박스는 혼돈의 파편을 마주하고 얻을 수 있으니까.
몇 번이라고 한 걸 보니 한두 번은 아닌 거 같고.
랜덤 박스 역시 열어 본 경험이 있다는 것.
“미리 경고하는데 이거 안 열어 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엉.”
“뭐가 나왔길래.”
“완전히 랜덤이기는 한데, 어디 보쟝.”
릴카가 손짓하더니 뭔가를 꺼낸다.
내 것과 똑같이 생긴 카오스 박스가 4개.
다른 게 있다면 이미 개봉되어 있다는 것.
“여기선 저주받은 아이템이 하나 나왔고, 다음 거는 그냥 꽝. 숯덩이 몇 개 들어가 있었어. 이 두 개는 별 신경 안 써도 됑.”
남은 두 개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건가.
난 릴카의 말에 집중했다.
“세 번째건 대박이었지. 멸망의 영향으로 하늘에서 산성비가 내리던 지역이 있거든? 생명체면 다 녹아 버렸는데 그곳에 있던 혼돈의 파편을 잡고 이걸 열자…….”
쫘악.
릴카가 팔을 벌렸다.
“산성비가 사라졌엉. 일대가 전부 다 정화되고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돌아왔지!”
“굉장한데?”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거 아닌가.
중요한 정보다. 멸망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는 만큼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게 맞았으니까.
카오스라더니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었구나.
“그리고 네 번째.”
희망적인 생각을 이어 나가던 때.
릴카가 마지막 상자를 쓸었다.
“동부에 있던 혼돈의 파편을 잡고 이걸 열었고…….”
씁쓸하게 웃는 녀석.
“그날부로 그곳은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