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릴카의 계승자
날 위기로 밀어 넣은 릴카에게 정의의 핵꿀밤을 먹이려 했지만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릴카가 내민 게 내 시선을 끌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바로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데.
“이봐, 무지개 용사! 승리한 기분이 어때?”
“알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꺾은 녀석은 보통이 아니라고.”
“이거 새로운 강자의 등장인가, 꽤 하는구만.”
“자자, 너무 그러지 말고 데려가서 뭐라도 먹이면서 물어보자고.”
“좀 더 지켜보는 게 낫지.”
어느새 몰려든 녀석들이 관심을 보인다.
평소였다면 흔쾌히 무리에 끼어 시간을 보냈을 거다.
뭐가 됐든 60층에 오른 녀석들.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권능을 통해 보인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대부분 60층 위를 도전했다 떨어진 이들이다.
최고 등반층이 61층이 사람도 있고, 63층인 녀석도 있고.
즉, 나는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서 나쁠 일도 없고.
다만 절반 이상이 대형 길드 소속인 게 살짝 걸리기는 하는데…….
‘의외로 어디 소속인지 모를 애들도 좀 있네?’
한국이야 내가 있어 소속 상관없이 등반 생존율이 올라갔지만 다른 곳은 아닐 텐데?
눈을 가늘게 떴다.
쁘찡 연합임을 알리는 표식이 연합띠.
길드의 경우 길드 마크를 어깨에 붙인다.
빅스타 길드 같은 경우에는 문신을 하고.
그런 가운데…….
‘모르는 표식이 있군.’
일단 대형 길드의 마크는 아니다.
길드 소속인 사람들도 섞여 있는 걸 보니 우리와 같은 연합에 가까운 집단 같다.
‘+’형태의 별 모양.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건 나중에 확인하고.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어서.”
릴카를 붙잡았다.
자리를 뜨자.
내 정체를 알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그런 내 위로 떠오르는 알림.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60층 상품권 2개가 지급됩니다.]
난 뭔지 모를 물건을 인벤토리에 챙기고 달렸다.
은신 스킬, 외톨이의 길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고.
“엇, 사라졌다!”
“잘 찾아봐. 어디 있을 거야.”
“이야기 좀 하자고.”
이미 은신 스킬을 사용한다는 걸 인지한 녀석들이 나를 찾으려 했지만.
“얍!”
[신기루 (S) Lv.MAX]
릴카가 스킬을 사용하자 방향을 잃는다.
MAX 레벨의 스킬.
릴카도 쓸 줄 알았구나. 하긴 99층까지 올랐다는데 당연하지.
웬일로 눈치 있게 행동한다.
“어디 사람 없는 곳 없어? 저번에 별장 같은 곳. 그런 데를 써야 해.”
“몇 군데 알앙! 60층부터는 사람 수 대비 안전지대가 넓거든.”
사람이 적기는 하지.
난 릴카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움직였고.
“오, 뭐야 이게.”
약 30분 뒤, 수상하게 생긴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뭐랄까. 지상 위에 지어진 벙커 느낌?
튼튼해 보이는 곳이었고 동시에…….
“물류 창고야. 상인들이 사용하라고 만들어진 거징. 엣헴! 이 몸 덕에 들어가는 줄 알라구!”
상당히 위협적인 보안 장치들이 눈에 보였다.
총기같이 생긴 것도 있고, CCTV 같은 것도 있고.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보안용 개틀링건]
-제작자: 으히하아하하하! 다 죽어라!
-정신 나간 연발 속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램버그 생산.
[보안용 레일건]
-볼트와 너트를 당신의 심장에!
-프램버그 생산.
“프램버그에서 만든 거였구만.”
삐뚤어진 장인 정신이 만들어 낸 괴작인가.
60층에서 보안용으로 사용할 정도면 위력은 말할 것도 없겠지.
하여튼.
[NPC, 릴카 확인.]
[동행자와 함께 입장합니다.]
-쿠구구구궁
CCTV가 돌아가며 릴카를 확인하더니 입구가 열렸다.
두께만 1미터가 넘는 철문이 움직이는 자태가 웅장할 지경.
안으로 들어가자 꽤 넓은 공간이 보였다.
각종 물건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여기는 화조국 애들이 쓰는 공간이고, 난 저쪽이얌.”
“따로 구분되어 있구나.”
“상인들도 규모가 다양하지.”
릴카 같은 경우에는 개인 거래 위주니까.
일손 자체가 딸려서 대량 거래는 힘들기도 하고.
“여기가 내 공간이다!”
당당하게 팔을 펼치는 녀석.
난 릴카에게 분배된 창고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크네?”
“후후, 나를 뭘로 보고. 무려 대장간도 있징!”
에헤헤. 웃으면서 대장간으로 달려가는 녀석.
뭔가를 만들고 있었는지 쇳덩이가 올려져 있다.
형태를 보아하니 도끼를 만들고 있던 모양.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감탄했다. 끽해야 컨테이너 몇 개 붙여 놓은 수준일 줄 알았더니 규모가 꽤 된다.
대형 물류 창고 수준?
화조국이 사용하는 것보다는 작지만 그것의 3분의 1 정도는 된다.
작업 공간이랑 합쳐져서 체감되는 건 더 작지만.
여기서 생활하기도 하는지 갖출 건 갖추었고, 난 적당한 의자에 앉았다.
“이리 커먼. 어딜 슬쩍 넘어가려고.”
“으이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자연스럽게 도끼를 만들려던 릴카가 다가온다.
할 게 많다. 퀘스트도 깨야 하고, 계승자도 되어야 하며, 전에 끝내지 못했던 장비 제작 스킬도 올려야 한다.
그뿐일까. 나중에 올라올 멤버들과의 만남을 위해서 공간도 필요하던 참.
이곳을 좀 빌려야겠다.
S급 헌터들이 돌아다니는 곳. 어디에 눈과 귀가 있을지 몰랐으니 확실한 보안이 있는 곳이 필요했으니까.
그 전에…….
“아까 보여 준 거 줘 봐. 괜찮은 거면 꿀밤 10대로 봐준다.”
“왜애애애! 10대 싫어!”
“9대?”
“…1대.”
“쓰읍.”
“알았어. 2대, 으헥!”
귀가 축 처진 채 옆에 다가온 녀석의 머리에 꿀밤부터 날렸다.
머리를 감싸며 노려보는 녀석.
“왜 때려!”
“2대라며. 일단 한 대 때리고 시작하게. 덕춘이랑 놀고 있어.”
“맞다, 덕춘이이이.”
“그에에!”
안전지대에 올 때마다 덕춘이를 만지게 해 준다는 건 여전히 유효한 계약.
덕춘이가 질색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릴카가 아니다.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만.
싫은 척하지만 사실 덕춘이도 즐기는…….
“그엑.”
덕춘이가 가운뎃손가락을 날렸지만 못 본 척 무시했다.
어허, 주인한테 못 하는 게 없어.
다시 집중해서.
“왜 다들 결투를 하는지 알겠네.”
[초월석 조각 (2/10)]
-80층 안전지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초월석의 조각.
-권능의 등급을 올리고 싶나요?
-지금 바로 모아 보세요!
무려 권능의 등급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
80층.
현자 존 트레일러가 말했었지.
80층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모든 스텟을 999까지 찍어야 하며, 그곳부터가 진정한 초인의 영역이라고.
그동안은 강해지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70층부터가 진짜 상위층, 80층은 초월의 영역이었다. 90층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100층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안전지대니 뭐가 있어도 있겠지.
100층은 말할 것도 없이 탑의 정상이고.
“우웁! 그거 얻을 장소 여기밖에 없어. 70층에서는 또 다른 거 모아야 된다구! 자세한 건 못 말해 줘!”
“그에에에.”
끌어안은 덕춘이에게 얼굴이 밀려나고 있는 릴카가 말했다.
초월석으로 끝이 아니라는 건가.
그래도 중요한 걸 알았다. 초월석을 모아야 한다. 결투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초월석 조각을 얻는 데 상품권이 얼마나 필요하지?”
“10개에 조각 하나얌.”
대충 100개를 모아야 온전한 초월석을 얻을 수 있다는 거군.
릴카가 준 건 상품권 20개 분량이고.
나쁘지 않군. 내가 결투로 얻은 상품권이 2장.
결투 때마다 2장을 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1장, 아니면 2장 이상을 줄 수도 있겠지.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오케이, 이건 알겠고.
“퀘스트 클리어해야지?”
“에헤헤. 사실 그것 때문에 이쪽으로 온 거기도 해.”
무슨 소린지 안다.
다른 재료는 그렇다 쳐도 미니캣은 덩치가 커서 말이지.
난 챙겨온 퀘스트 재료를 펼쳤고.
“오오! 상태 깔끔하구, 상등품이야. 아주 훌륭하도다.”
꼬리를 흔들며 재료를 살핀 릴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머리를 토닥인다.
뭐지. 왜 열받지?
내 생각이 어찌 됐든 간에 퀘스트는 깔끔하게 클리어됐다.
[릴카의 부탁 (4) - 강제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훌륭하게 재료를 모은 당신에게 상인 NPC들이 관심을 가집니다!]
[칭호, 심부름꾼을 획득합니다.]
[릴카의 계승자가 될 자격을 획득합니다.]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들.
단순히 계승자만 되는 줄 알았더니만 부수적인 게 많다.
악명이 자자했던 릴카의 강제 퀘스트를 클리어한 건 나뿐.
그 때문인지 상인 NPC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고…….
“어째 이름만 들어서는 구려 보이는 칭호도 얻었네.”
심부름꾼은 또 뭐야.
내용을 살펴보자, 이름만 들어서는 별로 쓸모없게 생겨서.
뭐든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별다른 기대감 없이 설명을 읽어 나갔다.
[심부름꾼- 칭호]
-불가능에 가까운 퀘스트를 클리어한 당신!
-까다롭고 지랄 맞은 NPC들의 심부름꾼이 되지 않겠는가?
-오랫동안 클리어되지 않은 퀘스트를 받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NPC 사이에서 신뢰 높은 심부름꾼으로 이름이 알려집니다.
“어떠냣! 내가 돌아다니면서 영업 좀 해 놨지. 후후훗!”
NPC 사이에 내 이름이 무슨 수로 퍼졌나 했더니만 네가 한 거였냐.
평판으로도 칭호가 생기는 줄 몰랐네.
허리에 손을 얹고 우쭐대는 녀석에 손을 올렸다.
움찔. 릴카가 머리를 감싼다.
아, 왜 그러냐. 누가 보면 때리기만 한 줄 알겠다.
불신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과정이야 어떻든 칭호 만들어 주려고 노력한 거니까.
“땡큐, 잘 쓰도록 할게.”
“에헤헤. 나 잘했지? 그런 의미로 남은 꿀밤은 없던……”
-따악!
“으악!”
어림도 없지, 보상은 보상이고 꿀밤은 꿀밤이다.
2대 맞기로 했으면 다 맞아야지.
“때린 데 또 때렸어!”
“노린 건 아닌데, 맞았으면 어쩔 수 없지.”
“이이이익! 나빠!”
릴카가 발광을 하며 냥냥펀치를 날려 댔지만 가뿐히 무시해 줬다.
칭호는 잘 받았다.
퀘스트, 그것도 난이도 있는 퀘스트를 받기 쉬워진다는 거 아닌가.
당연히 그에 따른 보상도 상당할 거고.
60층 이후에 있는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할 테니 어려운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겠지.
그건 나중에 하게 되면 신경 쓰도록 하고.
“릴카.”
“왜.”
씩씩거리는 릴카를 불렀다.
남은 보상은 한 가지.
“이제 계승자가 될 차례지?”
“으으으. 이 괘씸한 녀석을 계승자로 삼는 게 옳은 선택일까?”
“꼬우면 말고. 가 봅니다. 아~ 이 좋은 기회를 놓치네. 평생 탑에 갇혀 있어도 난 몰라.”
“안 돼!”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나가려 하자 릴카가 매달린다.
태세변환 빠르네.
“아, 왜애애! 튕길 수 있잖아! 좀 져 주라아아아!”
쪼만해서 그런가. 매달리니 다리가 붕 뜬다.
말리는 거야 업히려는 거야.
장난은 여기까지 하자.
나도 계승자가 될 생각이었으니까.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소파에 올렸다.
“그럼 바로 하자고.”
“알았엉. 나 진짜 너 믿는다? 내 인생인 너한테 달린 거라구.”
고개를 끄덕였다.
근엄한 표정을 짓던 릴카가 손을 뻗는다.
[NPC 릴카가 조현수 님을 계승자로 삼고자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NPC는 단 한 번 계승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NPC는 본인의 계승자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수락한다.”
난 릴카의 손을 맞잡으며 동의했고.
“어… 미리 말은 안 했는데 좀 아플 수도 있어.”
“응?”
[조현수 님이 릴카의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크아아아압!”
계승자가 됐다는 알림과 함께 엄청난 격통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