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무지개 용사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릴카 이 녀석 때문에 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나중에 혼쭐을 내줘야지.
툭. 조였던 녀석의 머리를 놓았다.
“이이이잉, 아파!”
“응, 이따 더 아플 거야. 꿀밤 스무 대 예약이다.”
“으으으익!”
머리를 감싸 안으며 날 노려보는 녀석.
어쭈?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눈을 부라리자 흥흥 거리면서 물러선다.
그건 그거고.
“무수한 결투의 요청이라…….”
왜 익숙하지?
예전에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던 거 같은데.
몇 층이었더라.
아! 8층 오크 챔피언쉽.
그때도 각 부족의 오크들이 결투를 신청했었다.
피식. 괜히 웃음이 나왔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후우.”
작게 숨을 내쉬며 놈들을 바라봤다.
이번에 상대할 건 사람.
그것도 60층까지 오른 실력자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결투는 하루에 한 번만 할 수 있다는 것. 한 명만 조지면 된다는 거지.
다행히 컨디션도 좋으니… 어디 보자, 나한테 결투를 건 사람은 총 여섯 명.
“여섯 명 중 누가 가장 강하지?”
난 몸을 풀며 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해야지.
운 좋게 넘어가더라도 다음에 또 결투를 걸지 않는다는 법이 없으니까.
이참에 강한 놈을 꺾어 도전자를 좀 줄여놔야지.
내 발언이 도발적이어서일까.
“저 싸가지 보소. 강한 놈 나오라 이건가.”
“이번 신입은 패기 넘치는데?”
“딱 자신감에 차 있을 타이밍이잖아.”
“이봐. 여긴 60층대 오르다가 돌아온 애들도 있어. 까불면 두들겨 맞는다?”
반응이 뜨겁다.
날 지목한 여섯 명도 마찬가지.
“당연히 내가 제일 강하지. 다들 동의하지 않나?”
“세계관 최강자가 되는 꿈이라도 꿨나 보군. 헛소리 말고 빠져, 네놈보다는 내가 강하니까.”
“객관적으로 갑시다. 패배의 전당에 패배한 수 적혀 있잖아. 내가 제일 적어.”
“대련조차 안 하는 게으른 놈이라는 걸로 알겠다.”
서로 강하다고 주장 중.
60층 정도 왔으면 자신감이 없을 수가 없지.
그냥 이렇게 싸우게 두고 도망치는 건 어떨까.
살짝 끌렸지만 생각보다 다툼은 짧았다.
“뭘 그래, 번호표 뽑고 기다리면 되지. 순서 정해서 내일 덤비고 모레 덤비고 하자고.”
“오케이.”
원만한 합의 끝에 나온 대상은 아담한 체구의 남자.
키는 작지만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었고, 젊은 나이에 머리카락이 없었다.
대신 수염이 풍성한 것이 드워프가 떠오른다.
무기는…….
“몽둥이?”
“우습게 보면 큰코다칠 거다.”
날붙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서 저런 둔기류를 보는 건 오랜만이다.
무슨 재질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상 이상의 무게와 경도를 지니고 있겠지.
길이가 긴데도 짧아 보일 정도로 두께가 상당하다.
[지옥 간수의 몽둥이 (AAA)]
-지옥에 들어선 죄인들을 두들겨 팰 때 사용하는 몽둥이.
-나쁜 사람은 더 아픕니다!
-지옥의 고통이 일부 섞여 있습니다.
설명도 살벌하고 말이지.
다른 장비는 평범한 수준. 특별한 건 없다.
중요한 건 녀석 자체 스펙이지.
놈의 정보를 살폈다.
[보리스 프세볼로도비치 마시코프]
-닉네임: 근육전사
-최대 등반층: 62층
-AAA급 권능, 도살자 보유.
-칭호, 고기 장수 보유.
-칭호, 전투광 보유.
.
.
.
62층까지 올랐다라…….
눈여겨봐야 할 정보다.
권능은 AAA급. 권능이 좋으면 편하기는 하지만 비교적 낮아도 등반하는 데는 문제없다는 거겠지.
칭호도 다양하고, 스킬도 등급이 높다.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다는 말.
그렇기는 해도…….
“내가 이기겠지만.”
[결투를 수락합니다.]
[결투장이 생성됩니다.]
[정식 결투 시 죽어도 코인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정식 결투 시 살인자 칭호가 생성되지 않습니다.]
[전투 불능, 패배 선언 시 결투가 종료됩니다.]
-파아아아앗
수락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푸른빛이 뿜어져 나온다.
돔 형태의 경기장.
안에 들어가 있는 건 나와 보리스.
“자! 경기 시작됩니다. 베팅 걸어 봅시다. 우리의 짱돌주먹 보리스카! 그에 맞서는 건 신입! 그의 예명은 무엇이 될 것인가!”
“누구보고 짱돌주먹이래!”
그가 항의했지만 다들 웃어넘길 뿐이다.
얼굴을 구긴 그가 나를 바라본다.
“보리스 프세볼로도비치 마시코프라고 한다. 보리스카라고 불러.”
“이블아이다.”
“닉네임인가, 뭐 상관없겠지. 한 가지 명심해. 이번 결투 결과로 네 별명이 지어질 거니까. 저기 저 녀석 보이지?”
그가 관중들 사이 팝콘을 뜯는 헌터를 가리켰다.
“저 녀석 별명이 깽깽이다. 첫 결투 때 발등 깨져서 한 발로 싸우다 졌거든. 지면 저렇게 되는 거야. 최선을 다해라. 모두의 놀림감이 되기 싫으면.”
“걱정 마시지. 제대로 할 거니까.”
너희는 조롱과 놀림으로 끝나지만 난 사회적 목숨이 달렸다.
짊어지고 있는 무게가 다르다고.
“베팅 종료! 두 신사분은 개처럼 싸워 주세요!”
사회자로 보이는 NPC가 시작을 외쳤고.
“흡!”
-콰아아앙!
보리스카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폭발적인 움직임.
순식간에 도달한 녀석이 몽둥이를 휘두른다.
평범해 보이지만 스킬 6개와 칭호 효과까지 섞은 절기.
머리로 빠르게 상황을 예측했다.
현재 난 결투장 끝부분에 있는 상태.
뒤로 피해도 연속 공격이 들어올 거고 경기장에 길이 막힐 거다.
그걸 노리고 있는 거겠지.
조금 위험하지만 파고들자.
-까아아아앙!
난 방어 자세를 취하며 놈의 공격을 받았다.
귀를 때리는 쇳소리와 함께 후폭풍이 몰아친다.
연막처럼 피어오르는 먼지가 경기장을 가리고.
“멍청한 놈아, 그걸 막으면 어떡해!”
“보리스카가 공격이 만만해 보이기는 하잖아. 궁극기를 평타로 위장함. 크흐흐흐!”
“쯧쯧. 신입한테 건 사람들 다 죽겠구만.”
“피하는 게 정답인데, 에휴.”
관중들은 내 패배를 예상하며 소리를 질렀다.
“…네 녀석, 보통이 아니구나.”
“내가 좀 튼튼해.”
직접 날 가격한 보리스카만 진실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머리를 노리고 들어온 공격.
난 무게 중심을 낮추며 팔을 들어 막아 냈다.
[강철의 의지 (S) Lv.3]
[강체强體 (S) Lv.4]
[물리 공격 내성 (S) Lv.3]
보리스카의 공격이 위협적이기는 하나 S급 패시브 3개를 뚫을 정도는 아니라고 봐야겠지.
그렇다고 모든 데미지를 막아냈느냐.
그건 아니다.
‘계속 맞다 보면 데미지가 쌓이겠군.’
지금이야 괜찮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어떤 비장의 수가 남아 있는지 모르는 만큼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후우우우
먼지가 걷히자 구경꾼들이 보인다.
결투장 안을 확인하더니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
“뭐야! 저걸 버텼다고?”
“탱커 쪽으로 갔나 본데?”
“야야야, 제 기억해 놔라. 저 정도 되는 애들 별로 없다.”
“믿고 있었다고, 신입!”
“어… 이블아이? 이블아이 형님, 저 연합 사람입니다! 형님!”
뭐야, 60층에 연합 사람까지 있었어?
공략법은 필요도 없는 양반이 왜 연합에 든 거야.
따지지 말자, 보송송이도 연합에 들어왔는데.
애초에 길드보다는 모여서 노는 느낌이 강한 곳이기도 하고.
이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
‘가능한 빠르게 끝내야겠네.’
날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수십 명.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사회적인 의미로 죽는다. 게다가 싸움이 길어질수록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들통나기 마련이고.
다시 전투에 집중하자.
“크읍!”
날 견제하는 건가. 보리스카가 바로 뒤로 빠진다.
좋은 판단이다.
안 그랬으면.
[파이어 밤 (S) Lv.6]
-콰아아아아앙!
폭발에 휘말렸을 테니까.
거대한 홍염이 결투장을 집어삼킨다.
대폭발.
뜨거운 열기와 간담이 서늘해지는 파워.
난 곧장 달렸다.
이곳은 결투장.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나처럼 범위 공격을 하는 사람에게 유리한 구조라는 것.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으니.
[시한폭탄 (AAA) Lv.1]
[시한폭탄 (AAA) Lv.1]
[시한폭탄 (AAA) Lv.1]
.
.
.
난 놈이 움직일 범위를 줄여 나가면 그만이었다.
놈을 위협하며 결투장을 휩쓸었다.
바닥에 깔리기 시작한 시한폭탄.
-콰아아앙!
검과 몽둥이가 맞부딪친다.
강하다.
무기의 무게부터가 다른 만큼 순간적으로 내 팔이 튕겨 나갔고.
“흐압!”
[드래고니안 펀치 (S) Lv.2]
기회를 놓치지 않은 녀석이 주먹을 뻗었다.
왜 별명이 짱돌주먹인가 했더니만 이런 걸 숨기고 있었구나.
당연히 몽둥이로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말이야.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
[심연의 눈동자 (AA) Lv.6]
[집착하는 망령 (AAA) Lv.1]
허공이 찢어지며 드러난 눈동자가 놈의 트라우마를 건드렸으며, 망령이 놈을 옭아매 붙잡았으니까.
여기에다가.
[외톨이의 길 (B) Lv.1]
은신 스킬을 두르며 몸을 비틀었다.
찰나지만 혼란해진 정신, 멈춰 버린 몸.
눈앞에서 사라진 나.
놈의 주먹이 방향성을 잃는다.
남은 건 반격.
[파이어 밤 (S) Lv.6]
-콰아아아앙!
보리스카의 공격을 피해 낸 난 망설임 없이 폭발을 일으켰고.
“크하아악!”
반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간 녀석이 바닥을 굴렀다.
시한폭탄이 잔뜩 깔린 바닥으로 말이다.
그럼 잘 가라고.
-콰과과과광!
-쿠아아아앙!
연쇄적으로 터지는 폭발.
피할 곳도, 피할 수도 없는 불길의 향연.
경기장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비명과 함성은 폭음에 묻힌다.
[결투 종료]
[패배의 전당이 업데이트됩니다.]
조용히 떠오른 메시지.
중앙 홀로그램에 변화가 생겼다.
[패배의 전당]
-근육전사: 6패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진짜다.
진짜로 닉네임이 그대로 박히는구나.
말로 들었을 때랑 눈으로 확인했을 때랑 느낌이 같을 리가 있나.
위기감이 들었고.
“오오오! 신입, 잘했어!”
“저 빡빡이를 이기다니. 좀 치는구나?”
“별명 뭐로 하지? 첫 결투를 제대로 이겼으니 괜찮은 거로 해야 하는데.”
“레인보우맨?”
“폭발 봤잖아. 폭탄맛 사탕 어때? 알록달록하고.”
“네이밍 센스가 뒈진 거 같은데, 너도 나가 뒈지는 건 어떨까?”
내 기분이 어떤지 짐작조차 못 할 구경꾼들이 몰려와 환호했다.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면서 외치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이블아이는 무지개 용사라고 멍청이들아! 김신정이라고 합니다, 형님!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자랑스럽게 한쪽 팔에 연합 띠를 두르고, 연합 공식 굿즈 티셔츠를 입고 있는 녀석.
척 보기에도 진성 연합 사람이다.
머리가 아찔하다.
뭐지, 왜지. 저걸 왜 입고 다니는 거지.
보통 기념 삼아 보관만 하지 직접 안 입지 않나?
보송송이랑 같은 과인가?
이 망할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무지개 용사? 괜찮군.”
“오케이, 그걸로 결정!”
“무지개! 무지개!”
“용사! 용사!”
내 별명이 고정되고 말았다.
허허. 어허허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게 다 릴카 이 녀석 때문이라는 거지.
터벅터벅.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히히히! 예이! 이블아이 수고했어!”
한몫 땄는지 방긋거리는 녀석.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난 아닌데.
-꾸우우욱
“악! 머리! 머리!”
난 녀석의 머리를 눌렀다.
“각오는 됐겠지?”
주먹을 움켜쥐었다. 핵꿀밤 맛 좀 봐라.
그제야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는지 릴카가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친다.
“자, 잠깐! 스톱! 이거 줄게! 사실 이거 얻으려고 한 거라굿!”
“어림도 없다! 그런 거로는 날 막을 수……!”
잠깐만.
막을 수 있을 것도 같고?
난 릴카가 내민 걸 유심히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