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패배의 전당
60층에 올라오자마자 듣는 소리가, 왓 더 뭐?
무지개 맛 좀 볼 테야? 아주 그냥 별나라로 보내 줘?
울컥하고 뭔가가 올라왔지만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으니까.
내가 발끈하는 것도 모양이 우습고.
솔직히 따지면 나 같아도 뜬금없이 알록달록한 애가 튀어나오면 놀라겠다.
어떤 의미로든 말이지.
“오우, 이거 실례했군. 그런 차림은 처음 봐서. 어디서 왔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쪽은 아닌 거 같은데.”
“한국에서 왔지. 그쪽은?”
“미국 빅스타 길드의 이지키일 존 스페너스.”
“…이블아이다.”
소속이 없는 건 아닌데 쁘찡 연합의 이블아이다 하고 말하기는 좀.
연합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부끄러운 건 별개 아닌가.
힐끔 놈의 팔목에 새겨진 문신을 봤다. 올드스쿨 느낌으로 그려진 별.
다른 길드와 다르게 빅스타 길드원들은 문신을 새겨 소속을 나타낸다.
그만큼 소속감이 강하다는 이야기. 한 가지 더 특이점이 있다면…….
‘몇 안 되는 차세대 헌터들로 이루어진 대형 길드지.’
백환이나 잘못된 튜토리얼 공략법. 어느 쪽에도 관계가 없는 세력이라는 것.
경계심이 살짝 풀린다.
어떤 놈인지는 겪어 봐야 알겠지만 당장은 괜찮아 보이고.
60층에 올랐다는 건 실력이 있다는 거기도 하니까.
그건 그거고…….
“휑하네.”
이곳은 광장.
60층에 올라온 사람이 가장 먼저 발을 디디는 곳이다.
안전지대에서의 광장은 번화가이다.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만큼 NPC들 역시 모여서 장사를 하는 곳.
60층도 비슷한 느낌이라 생각했는데 광장에 있는 거라고는 이 녀석뿐.
하와이안 셔츠에 선글라스. 선배드에 누워서 음료수를 빨고 있는 게 태평하기 그지없다.
누가 보면 휴가라도 나온 줄 알겠는데.
“여기가 햇빛이 잘 든다고. 갑갑하게 갑옷 입고 있지 말고 일광욕이나 하는 거 어때? 여유를 즐겨야지.”
“다른 사람들은 없는 건가?”
“있기는 한데 다들 자기 볼일 보고 있을걸?”
생각 외로 60층에 있는 헌터들끼리 끈끈하게 묶여 있지는 않은 모양.
사람도 별로 없으니 뭉쳐 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대형 길드 애들끼리 돌아다니거든. 나랑은 좀 껄끄러운 사이지. 나머지는 잘 모르겠고.”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개인 사정이 있는 모양.
보아하니 본인은 개의치 않는 것 같고.
나도 딱히 관심 없으니 모르는 척 넘어가려는데…….
“그래. 궁금하겠지. 이게 참 시트콤 같은 상황인데 말이야. 내가 60층에 올라온 지……. 헤이, 이블아이!”
뒤도 안 보고 광장을 가로질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못 해서 난리인지.
미안하지만 지금은 어울려 줄 시간이 없다.
탈모맨이 올라오기 전에 준비를 해 둬야 해서.
나와 탈모맨이 60층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 이미 커뮤니티에 퍼진 상황.
연합 사람이 있다면 60층대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쁘띠공듀를 찾아내려 할 게 뻔했다.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 쁘띠공듀.
멀리서라도 보고 싶어 할 거 아닌가, 슬쩍 다가와서 대화도 좀 하고 싶고.
탈모맨과 멤버들을 비밀리에 만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릴카도 찾아야 했고.
퀘스트도 전부 깼으니 계승자가 될 수 있겠지.
탈모맨과의 전투도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좋았다.
가능하면 좋게 말로 끝나면 좋겠다만.
그건 좀 힘들겠지?
“헤이,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그래도 60층에 올라왔는데 구경도 좀 하고,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글로벌 하게 놀아봐야지.”
“이따가. 지금은 바빠.”
빠른 걸음으로 날 쫓아온 녀석이 계속해서 말을 건다.
왜 이렇게 질척거려. 릴카는 또 어디 있는 거야. 평소에는 잘 보이더니.
“나 아웃사이더란 말이야. 외로운 날 위해 약간의 시간을 내줄 수도 없는 거야?”
“응.”
“그에.”
“오우, 마음에 상처가!”
너무 단호했나.
녀석이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지만 가뿐히 무시해 줬다.
“나와 같은 부류라 생각했는데. 관종에 마이웨이, 아웃사이더. 뻑킹 레인보우 같으니.”
하나같이 맞는 말인 거 같아서 할 말이 없다.
제대로 간파했네, 이 녀석.
어떻게든 나와 말을 섞고 싶은 걸까.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녀석이 손가락을 튕긴다.
“아! 아까 올 때 서열 정리 뭐라 하던데 관심 있어?”
“뭔 소리야.”
그냥 울컥해서 쥐어박고 싶었다는 거였는데.
“음, 알고 말한 거 아니었나? 결투 신청을 말하는 건 줄 알았는데.”
“결투 신청?”
“예스. 60층 이벤트. 오우, 몰랐구나. 이거 어쩔 수 없이 내 이야기를 해 줄 수밖에 없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건 들어 봐야겠다.
60층 안전지대에도 이벤트가 있을 거 같기는 했다만 자세한 건 몰라서.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는데 해야 할지, 안 해야 할지도 중요하다.
내 정체를 숨겨야 할 필요가 있어서.
“60층에서 결투 신청이 가능하지. 저기 보여?”
그가 가리킨 곳은 광장 위에 있는 홀로그램.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다.
[패배의 전당]
-율리어스 베리곤: 8패
-더블배럴: 3패
-이자자키: 4패
-엘레강스 강_골든 타이거: 6패
.
.
.
뭐야 저게.
패배의 전당?
“상대가 결투 신청을 해 오면 받아야 해. 거부권은 없지. 물론 아무 제약이 없는 건 아니야. 하루에 한 번만 싸울 수 있거든.”
“최소한의 휴식 시간은 준다는 거군.”
“예쓰.”
“무슨 의미가 있지? 굳이 힘 뺄 필요가 있나?”
“의미야 많지. 첫 번째, 승자한테는 이곳에서만 쓸 수 있는 상품권이 주어지거든. 잘 모으면 다른 데서 살 수 없는 걸 구할 수도 있다고.”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해 볼 만하다 이거군.
장비의 중요성이란 말 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60층에 올라온 만큼 장비를 업그레이드하고 싶을 게 뻔하다.
아직 목록을 보지는 못했지만 장비 외에도 영약이나 퀘스트 관련 아이템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도 있고.
살짝 흥미가 생긴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걸 본 녀석이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펼친다.
“두 번째, 지면 쪽팔리잖아. 지면 저기 홀로그램에 박제된다고, 닉네임이랑 같이. 내가 따돌림당한 이유도 그 때문이지. 오자마자 대형 길드 놈들이 결투 신청을 해 댔거든. 무패의 사나이 이지키일 존 스페너스!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봐줄 걸 그랬어.”
툭, 녀석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른다.
“여기서 나보다 많이 싸운 녀석은 없지. 어떻게 보면 챔피언이라고. 원한다면 애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약점이 뭔지 알려줄 수도 있는데.”
“잠깐만.”
“이제 시간이 생기나? 저기 괜찮은 펍이 있는데 어때? 내 입으로 말하기 창피하지만 사람이랑 대화를 못 한 지 4일째거든. 혓바닥이 굳을 거 같아.”
아니, 시간이고 나발이고.
“지면 닉네임이 박제된다고?”
“그렇지.”
허허. 그 닉네임이 내가 생각하는 그 닉네임 맞나?
에이, 아니겠지. 바꿀 수 있겠지.
지금까지 그래왔잖아.
난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 혹시 패배할 때 올라가는 닉네임 있잖아. 본인이 정하는 건가? 그치, 그렇지?”
“어… 글쎄. 난 져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커뮤니티 닉네임이 그대로 올라갈걸? 지자마자 바로 패배의 전당에 기록되거든. 기절한 상태로 닉네임을 고르지는 않았을 거잖아.”
세상에나.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만, 딱 하나만 더 묻자.
“결투 신청이 좀 자주 있나?”
“뉴페이스가 나타나면 한 번쯤 다 걸지? 실력도 궁금하고, 실전 감각도 지키고, 괜찮은 녀석이면 영입하고.”
미치겠네.
어떤 식으로든 패배하면 닉네임 강제 공개.
결투 신청을 안 할 사람은 소수.
가능한 피하는 게 상책.
“정보 고맙다, 나중에 따로 찾아갈게.”
[외톨이의 길 (B) Lv.1]
은신 스킬을 사용해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이블아이? 오케이. 난 광장에 있으니까 그쪽으로 오라고.”
당황한 듯 녀석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 쪽을 보며 손을 흔든다.
B급 은신 스킬 정도는 눈치챈다는 거겠지.
미세한 발소리든 아니면 발자국이든, 관찰력이 뛰어난 걸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잠깐은 위치를 놓칠 정도는 된다는 거다.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변수가 생기기는 했지만 계획의 큰 틀은 그대로다.
그저 조금만 더 조심하면 되는 거지.
릴카를 찾아내자.
* * *
-파아앗!
난 빠르게 광장을 벗어났다.
사람 자체가 없는지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NPC들이 보였고, 등반가로 보이는 무리는 보이지 않았다.
릴카의 성격상 음식점 아니면 작업장에 있을 거 같았는데.
“어디 있는 거야.”
“그에에.”
둘러봐도 없다.
음식점에도 없고, 개인 공방이라도 차렸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저번처럼 별장 하나 만들어서 쓰고 있을지 누가 아나.
그렇다면 외곽 쪽에 있다는 건데.
메인 상점가에는 보이지 않는 상황. 구석에 있을 가능성이 컸고.
-스으으으윽
판단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달려 나갔다.
생각이 맞은 걸까 조금씩 소음이 들려온다.
상점가가 하나 더 있던 건가?
메인 상가보다 목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거 같은데.
가 보면 알겠지.
난 소음의 근원지로 향해 이동했다.
확실하다. 광장 쪽보다 사람이 훨씬 많다.
묘하게 흥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발적인 환호성과 숨소리.
은근한 땀 냄새와 미약한 혈향이 느껴졌고.
“오오오오! 잘하는데?”
“못 본 사이 준비 많이 했나 봐.”
“거기 좀 비켜 봐. 안 보여!”
“아저씨, 안 쫄리십니까? 제가 이길 거 같은데.”
“흥! 건방진 등반가 같으니. 내 안목을 뭐로 보고.”
골목을 빠져나오자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등반가 수십 명과 NPC들이 섞여 있는 풍경.
푸르게 빛나는 돔 형태의 보호막.
어지간한 공터보다 큰 사이즈의 경기장 안에는 두 사람이 싸우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결투 중]
-진입할 수 없습니다.
스페너스가 말했던 결투가 이런 거였나?
난 또 당사자끼리 조용히 하나 했더니만 아예 격투기 대회나 다를 바 없다.
짧은 머리의 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남자.
둘이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쪽이 더 강한지 짐작하기 힘들다.
그만큼 팽팽한 싸움.
“큰 거 들어간다!”
“눈뽕주의!”
-콰아아아앙!
짧은 머리가 검을 휘두르는 것과 함께 강렬한 광채가 터지며 스킬이 쏘아졌다.
보호막이 흔들릴 정도의 위력.
-후우우웅
흙먼지가 가라앉자 내부가 보인다.
쓰러진 건 마스크남.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모양.
“와아아아아!”
“거 봐! 내가 이긴댔지?”
“젠장, 일어나! 할 수 있잖아!”
결투가 끝나자 희비가 엇갈린다.
등반가고 NPC고 모여서 내기를 했던 모양.
“자, 그럼 정산하겠습니다!”
사회자로 보이는 NPC가 손가락을 튕기자 정산이 이루어진다.
고개를 저으며 빠지는 사람과 한탕 땡겼는지 환호를 지르는 사람.
그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는 수인이 하나.
“안돼애애애!”
릴카였다.
이 녀석 어디에 있나 했더니 여기서 이러고 있던 건가.
은근히 도박 좋아한단 말이지. 잘하는 거 같지도 않은데.
뒤로 다가가 녀석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어떤 놈이…….”
“나다, 이 녀석아.”
“엇. 이블아이!”
꼴에 위협적이려 보이려고 미간을 구긴 녀석이 날 알아보고 탄성을 지른다.
“날 위해 와 줬구나!”
와락 나한테 달라붙는 녀석. 뭐야, 왜 이래.
아니 뭐, 녀석과 나를 위해 퀘스트 재료를 모아 오기는 했는데.
“사회자! 한 번 더 간다! 출전자는 이블아이! 혼내줘!”
“뭐 인마? 잠깐, 잠깐! 난 싸울 생각 없어!”
내가 지금 왜 은신하고 있는데 이 망할 수인이!
손사래 쳤지만 사회자는 가만히 웃을 뿐이었고.
“저 녀석 뭐야. 지금까지 숨어 있던 거야?”
“호오. 저런 차림으로 내 눈을 속였다라. 꽤 실력이 있어 보이는데.”
“처음 보는 걸 보니 오늘 올라온 거 같지? 간만에 신입이면 오우. 재밌겠다.”
“좋아. 내가 나서 보지!”
“개소리 말고 꺼져. 내가 할 거니까.”
[상대방이 결투 신청을 걸었습니다.]
[상대방이 결투 신청을 걸었습니다.]
.
.
.
“…넌 좀 이따 보자.”
“앗, 머리 깨져! 깨진다굿!”
난 어금니를 악물며 릴카의 머리를 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