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숭배 집단
탑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
NPC는 우리보다 빠르게 탑의 초대를 받은 선배나 다를 바 없었다.
동시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우리가 겪어야 할, 탑으로부터 역할을 부여받은 존재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서는 등반가의 든든한 아군이 되어 자신들이 오르지 못한 100층까지 도달하게 도와주는 조력자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등반가를 위험에 빠트리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이미 겪지 않았던가.
우호적으로 다가와 인연이 된 이들과 적대적으로 찾아와 고난을 준 이들을.
다행히 베힐탄은 전자.
내게 빚을 졌기에, 그가 내게 하는 말은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본인이 말할 수 있는 제한을 넘어선 정보를 줄 수도 있고.
난 자세를 고쳐 잡았다.
“특권이라는 게 뭡니까? 그건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아, 몰랐나? 아는 NPC 중에 99층까지 오른 이가 있나?”
“몇 명 있습니다. 킬더레스나 알리오스, 릴카. 꽤 있네요.”
“오오! 릴카와도 아는 사이였나?”
계승자가 될 예정이기까지 합니다.
끈질긴 인연으로 안전지대 갈 때마다 보고 있거든요.
“릴카… 대단한 대장장이지! 언제 한번 초대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기회가 없었어.”
“나중에 만나면 물어볼게요, 프램버그에서 초대하고 싶다고.”
“그럼 고맙지, 아무튼.”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99층에 오른 자는 다른 상위층에 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NPC가 될 기회가 있다네.”
기회라…….
무조건 NPC가 되는 게 아니었군.
이것도 몰랐던 사실이다.
“탑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자와 이미 멸망에 접어들었지만 자신의 세계를 포기하지 못한 이들은 NPC를 포기한다네.”
“아직 희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렇지. 99층까지 올랐을 정도면 그쪽 세계에서는 손에 꼽히는 강자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나 역시 그랬었지.”
잠깐만, 살짝 걸리는 부분이 있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99층에서 나간 후에 다시 탑의 부름을 받아 NPC가 되는 식이라는 건가요?”
“비슷해. 일단 나가야지.”
맞는 말이기는 하다.
99층까지 올랐다는 건 반대로 99층에서 모든 코인을 사용해 퇴출당했다는 것과 같으니까.
알리오스도 너무 늦게 탑 밖으로 나갔다고 했었지.
그 후에 페니를 데리고 탑으로 돌아왔고.
이 부분은 일단 넘어가자. 물어볼 수 있는 NPC는 많으니까.
곧 60층에 도착하는 만큼 릴카한테 물어도 되는 정보다.
“내가 밖으로 나간 다음 가장 먼저 한 게 뭐였을 거 같나?”
프램버그는 세인턴 피스 제국을 피해 지하로 내려가 만든 지하 도시다.
세인턴 피스 제국에 복수를 하러 간 걸까.
아니면…….
“생존자들이 있는지 살폈겠군요.”
“정답이네.”
드워프는 동족애가 강하다,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화끈하기도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더군. 역병은 이미 창궐한 상태. 우리가 상대할 건 제국도 뭣도 아닌 멸망 그 자체였지. 역병의 알 델버튼, 놈을 알아차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어.”
역시나, 이미 베힐탄은 델버튼과 마주한 적이 있다.
그러니 내기를 할 수 있었던 거겠지.
반면에 다른 드워프들은 델버튼의 존재를 모르는 눈치.
“놈을 상대로 싸웠으나 실패했지. 혼자서는 무리였다네. 못해도 나만 한 실력자 셋이 더 있었다면 비벼 보기라도 했겠지.”
내가 델버튼을 이긴 건 어디까지나 요행에 불과했다.
정면 승부로는 절대 못 이기지.
그놈의 혼돈 수치가 부족해서.
이걸로 다시 확인했다.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혼돈 100점이라는 걸.
“원한을 접고 제국의 강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지. 그쪽에는 또 다른 혼돈의 파편이 있었거든.”
“델버튼 같은 게 더 있었다고요? 벌써 머리 아프네요.”
그렇게 강한 녀석이 하나가 아니라는 거잖아.
미치겠네. 우리 세계도 멸망을 피하지 못하면 저렇게 된다는 거고.
안 그래도 대형 길드와 정부 때문에 전반적인 헌터의 수준이 낮은 편이다.
탑에 오기 전에는 ‘60층을 넘었다고? 오오! S급 헌터! 멋지다!’ 이랬었는데, 지금은 ‘고작 60층 올랐는데 최강자 반열이라고? 와, 조졌다.’ 이런 느낌.
정작 나도 50층대에 있기는 하다만, 나야 곧 위로 올라갈 거니까. 게다가 전력만 따지면 60층대 못지않고.
하여튼 문제는 그게 아니라.
‘상위층에 오른 헌터가 너무 적어.’
보송송이를 통해 들은 정보.
상위층을 오르고 있는 헌터는 고작해야 60명가량.
어디까지나 추정치에 불과했지만.
희망적으로 잡더라도 100명이 안 될 거다.
그중에서 99층까지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글쎄, 많지는 않을 거 같은데.
상위층으로 향할수록 생존율이 떨어지고 있다.
나를 비롯한 멤버들, 쁘찡연합 사람들이 추가로 더 올라간다 하더라도 몇 명이나 최상위층에 도달할지는 미지수.
“이런저런 일이 있었네만 결론을 말하면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말이야. 그래서 거래를 했지.”
그가 손가락을 빙글 돌린다.
“99층에 오른 자는 특혜가 있다고 했었지? 맞네. 자네가 말한 킬더레스는 안전지대에서 메인 이벤트를 담당하게 되었고, 릴카는 NPC 중 극히 드물게 여러 층을 돌아다닐 수 있지. 알리오스는 내가 모르는 NPC라서 말할 게 없군.”
알리오스는 페니를 데리고 왔다.
단순한 꼼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시스템이 그런 걸 묵인했을 거 같지는 않다.
99층에 올랐던 이라 모른 척 넘어가 준 느낌이지.
“내가 한 거래는 단순하네. 프램버그 전체를 탑으로 옮기는 것. 아무리 나라 하더라도 너무 큰 바람이지. 대가를 치러야 했네.”
대가가 뭔지는 알 것 같다.
“계승자를 얻지 못하는 거군요.”
“그뿐만이 아니야. 우린 안전지대도 필드도 아닌 유적에 갇혀야 했지.”
프램버그가 유적에 있던 이유가 이거였군.
“게다가 이마저도 멸망을 막는 확실한 방법은 아니었어. 멸망이 지속된다는 조건이 달렸다네. 탑 안에서 놈을 처리해야 했지.”
“실패하면 드워프는 전멸이고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와 같은 실력자 셋은 더 있어야 해볼 만하다고.
최후의 발악이나 다를 바 없었다.
“도박이라 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나마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멸망을 피해 탑으로 이주한 케이스.
어떻게 보면 유일하게 성공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만났던 이들 중 다른 차원으로 도망치려다 실했던 이들을 여럿 만나봐서.
이게 해결책인지는 모르겠지만.
탈출인지 새로운 곳에 갇힌 건지 판단은 그들의 몫이다.
베힐탄이 몸을 숙인다.
“두렵지 않은가. 탑이란 것이, 멸망이란 것이 말이야.”
“신경 쓰이기는 하죠. 그래도 우리 세계는 안 망합니다.”
“자네는 강하군. 하지만 말일세. 세상 모두가 그러진 않아. 어찌할 수 없는 존재, 두려움의 대상, 거부할 수 없는 흐름, 이런 것에 마음이 꺾인 자도 제법 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의 목소리가 은밀하다.
심각하면서도 긴장한 듯한 표정.
곁눈질로 주변을 살핀 베힐탄이 입술을 핥는다.
나만 겨우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그가 속삭인다.
“뭐가 됐든 프램버그는 제 발로 탑으로 들어왔지. 마치 탑에 소속되어 보호를 받고 싶은 것처럼.”
실상이야 최악에서 차악을 고른 것이지만 겉으로 보이기에는 그렇다.
“그런 우리한테 접촉한 집단이 있네. 사실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 자네도 알고 있어야 할 거 같거든.”
“집단이요?”
“NPC라고 전원 탑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지는 않네. 오히려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고 숭배하는 집단도 있지.”
탑 숭배 집단?
팔뚝 위로 닭살이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그들은 NPC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아. 날 찾아왔던 무리에도 등반가가 섞여 있었으니. 확실한 건 조용히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거야.”
왜 베힐탄이 이렇게 불안해하는지 알 것 같다.
탑 숭배 집단이 있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말한다는 건 그들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다른 걸 떠나서 등반가 중에도 숭배 집단이 있을 줄이야.
제정신인가? 아니, 살짝 이해될 것도 같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
탑이란 게 무엇이냐.
따지고 보면 어떻게 죽지만 않으면 늙지도 않고, 영원히 탑에서 영생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사이비들이 천국이라고 떠들 만한 조건이다.
그들이 원하는 게 뭘까.
간단하지.
“탑이 사라지길 바라지 않겠군요.”
베힐탄이 고개를 끄덕인다.
탑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가 멸망해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세계에 탑이 생길 테니까.
아이러니하게도 NPC는 탑이 사라지면 함께 소멸한다.
다르게 말하면.
“계승자를 잃은 NPC 역시 탑이 계속되길 바랄 수도 있고요.”
“상상 이상으로 탑 숭배자들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자네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그가 주먹을 쥐었다.
“수많은 도전자가 왜 99층을 넘지 못했을까. 잘 생각해 보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쉽게 올라가나 했더니만 예상치 못한 적이 늘었다.
릴카가 계승자인 걸 절대 밝히지 말라 했던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거다.
적대적인 NPC. 단순히 사이가 안 좋은 이들인가 했더니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세력이었을 줄이야.
머리 깨지겠네.
잠깐만 그렇게 따진다면.
“베힐탄, 그럼 금천황후가 자신의 계승자를 보냈다는 건 적어도 그녀는 숭배 집단이 아니라는 거 아닙니까?”
“음?”
그렇지 않은가.
금천황후는 거대 세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계승자를 만들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긴 침묵을 깨고 계승자를 만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내줄 리가 있나.
진심으로 프램버그와의 오해를 풀고 싶어서 냥펀을 보낸 거다.
나와 베힐탄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만약 금천황후가 계승자를 잃게 된다면…….”
“그쪽에 가담할 수도 있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그 친구들은 풀어줌세.”
“고맙습니다.”
좋았어. 이걸로 냥펀이랑 핥짝이는 구했고.
“등반하는 게 쉽지 않겠군요.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할 거 같습니다.”
“동의하네. 비록 우리는 이렇게 됐지만 은인의 세계는 지켜져야 하니까.”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베힐탄.
그가 테이블에 있는 버튼을 누른다.
벽면이 돌아가며 전에 봤던 아이템 전시장이 드러난다.
“여러 가지를 준비했지.”
[프램버그를 구하라!- 종합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프램버그의 은인- 칭호]
“먼저 칭호부터.”
[프램버그의 은인- 칭호]
-프램버그를 멸망에서 구해 낸 은인!
-드워프는 당신을 잊지 않을 겁니다.
-프램버그가 공식적으로 당신을 지지합니다.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품에서 카드를 내민다.
내가 가지고 있는 황금 카드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색이 다르다.
“백금 카드라네. 프램버그에서 나만 가지고 있는 거야.”
“그 말은?”
“내 개인 창고까지 전부 들어갈 수 있다는 거지.”
한 마디로 백지 수표!
제약이 없지는 않을 거다.
그럼 사기지.
“3개. 뭐든 내주지. 마음 같아서는 더 주고 싶지만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네. 그래도 걱정 말게나. 퀘스트 보상으로 못 준다는 거지 지원 형식으로 몰래 줄 수 있으니까.”
“펠라인 세트도요?”
다른 걸 떠나서 가장 욕심나는 게 있다면 펠라인 세트다.
피식. 그가 입꼬리를 올린다.
“펠라인 세트 말인가?”
내 어깨를 손을 올린 그가 따라오라고 턱짓한다.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저기 보이나?”
“뭐가 보이…….”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저 멀리 보이는 그것.
[이블아이 기념상]
-프램버그의 영웅!
-이블아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전신상입니다!
-도색? 아니죠. 실제 해당 색을 띠는 광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펠라인 세트를 입고 있는 나의 모습.
색깔까지 다 맞춰서 만들어 놨다.
뒷골이 서늘하다.
정신 나갈 거 같네.
“하하하하! 어떤가! 마음에 드나? 펠라인 세트? 저기 왼팔을 보게.”
동상의 왼팔.
내 모습과 다른 부분이 있다.
보라색 갑옷.
“펠라인의 보라색 왼팔, 이미 자네 거라네. 테이블 밑에 포장해 뒀지.”
찡긋. 이벤트가 마음에 드냐며 윙크했고.
“그믑습느드.”
이를 앙 다물며 감사함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