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얘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눈을 뜬 곳은 컴컴한 공간.
당연하게도 역병의 알 내부였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끈적한 어둠의 기류가 사라졌다는 것.
평범한 바위 속이다.
야간 시야로 주변을 확인하는 건 어려움이 없었고, 현무암 같은 겉면이 눈에 들어왔다.
델버튼이 사라지면서 생겨난 변화.
그건 그거고.
“결국 이겼네.”
델버튼과의 내기에서 승리했다.
쉽지는 않았다. 고통스럽기도 했고.
중간에는 괜한 선택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며, 반쯤은 자포자기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성장해서 버틸 만했지만.
뭐든 지나고 나면 추억 아니겠는가. 결과론적으로 잘 해결되기도 했고.
스킬 등급도 상당히 올랐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속도.
그건 그거고.
“뭐가 많구만.”
난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하나하나 살폈다.
[델버튼과의 내기에서 승리했습니다!]
[전 서버 최초! 혼돈의 파편을 처치했습니다!]
[위대한 업적!]
[프램버그가 멸망의 길에서 벗어납니다!]
[모든 드워프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칭호, 드워프의 친구를 획득합니다.]
여기까지는 오케이.
델버튼과의 내기를 통해 드워프를 구한 건 이해했다.
그 결과로 드워프의 친구 칭호를 얻는 것도 예상 범위 내고.
신경 쓰이는 건 다음 메시지.
[혼돈 수치 +30점]
일단 혼돈 수치가 상당히 많이 올랐다.
무려 30점.
현자 존 트레일러가 90층대까지 오르며 모았던 혼돈 수치의 절반가량 되는 수준이고.
내가 지금까지 모아 온 것과도 맞먹는 수치다.
이걸로 내 혼돈 수치는…….
[현재 혼돈 수치- 69점]
많이도 모았네.
일반적으로 혼돈 수치를 본격적으로 얻기 시작하는 게 60층대라는 걸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점수다.
혼돈의 파편을 50층대에서 만난 것도 말이 안 되는 거지만.
하여튼 이런 추세라면 100층에 도달하기 전까지 혼돈 수치 100점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다른 멤버들와 등반가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것까지 챙겨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알아서 잘하길 빌어야지.
오케이, 100점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부족해. 가능한 많이 모아야겠어.”
직접 겪어 보니 알겠다.
세계의 멸망을 불러오는 존재, 혼돈의 파편.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 혼돈 수치 100점이 필요하다.
그 증거로 90층대에 오른 이들조차 놈들을 처리하지 못해 NPC가 됐으니까.
단순히 강하다 약하다가 아니다.
놈과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100점 이상의 혼돈 수치가 필요한 거지.
어쩌면 100점도 제대로 된 타격이 가능한 최소한의 기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겪은 몬스터랑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강대한 적.
스킬 일부가 S급까지 올랐음에도 놈의 공격을 막아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반대도 마찬가지.
혼돈이 없으면 S급이든 SSS급이든 의미를 잃는다.
멸망에 접어든 세계에 저런 녀석이 몇 명이나 생성될지 모르는 지금, 최대한 힘을 모아 두는 게 좋았다.
이건 감에 불과하지만…….
“등반을 계속하다 보면 또 만날 거 같단 말이지.”
델버튼 같은 존재를…….
이건 이 정도로 넘어간다 치고.
[혼돈의 파편 일부가 흡수됩니다.]
뒷부분 메시지가 마음에 걸린다.
혼돈의 파편 일부가 몸에 깃들었다는 게 무슨 소리일까.
스테이터스를 열어 보고, 스킬창을 열어 보고, 기타 변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살펴봤지만 바뀐 거는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놈의 일부를 받아들인 결과 혼돈 수치가 올라갔다는 것.
이렇게 넘어가는 게 속 편하기는 하다만, 놈이랑 워낙 안 좋은 경험을 많이 해서 말이지.
차라리 놈이 쓰던 역병의 안개 같은 걸 권능이나 스킬로 줬다면 그러려니 하겠다만.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넘어가자.
그 과정에 있어 페널티가 주어졌다면 모를까.
[당신의 유형은 정의할 수 없는 혼돈입니다.]
[페널티가 사라집니다.]
마지막 메시지를 살펴보면 나는 무사히 넘어간 거 같다.
40층, 선택 구간.
그곳을 지나며 얻은 두 개의 유형 중 하나.
무슨 기능이 있나 했더니만 이런 게 있었네.
“이건 어떻게 할까.”
난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는 카오스 박스를 살폈다.
혼돈 수치가 50점을 넘기면 열 수 있는 물건.
궁금하기는 한데 괜히 꺼냈다가 다시 역병이 퍼지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이건 나중에 확인해야겠다.
그럼 이제 여기서 나가자.
역병의 알에 더 있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안개 질주 (S) Lv.1]
-10초 동안 유지 가능합니다.
델버튼한테 죽기 싫어서 사용하다 보니 어느새 S등급까지 올라가 버린 안개 질주.
이제는 10초나 쓸 수 있다.
전에는 1초도 안 됐었는데… 그래, 이 정도는 돼야 S등급이지.
자그마치 10초 동안은 무적이라는 건데.
가히 사기적인 수준 아닌가?
-스스스스스
잡생각을 하는 사이 난 역병의 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안개화가 종료됩니다.]
“음?”
수많은 꽃이 쌓인 토굴에 도착했다.
* * *
뭐야. 뭔데.
“사, 사람이다!”
“이블아이야!”
“은인이 나타났다!”
“귀, 귀신. 끄르르륵.”
꽃을 든 채 경건하게 서 있던 드워프들이 경악한다.
귀신이라니 너무하네.
쓰러진 녀석의 뺨을 찰싹 때려 깨우고 상황 파악에 나섰다.
어, 이거 아무래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건가?”
“그에엑.”
“그치? 네가 생각해도…….”
잠깐만, 이 그립고 띠꺼운 울음소리는?
“덕춘아!”
“그에에에!”
난 팔을 벌리며 덕춘이에게 달려갔고.
-처어어얼썩!
그대로 뺨을 맞았다.
뜨끈한 혓바닥의 감촉.
그래, 이 맛이지!
덕춘이 이 녀석, 나 없는 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틱틱 대도 날 잊지 못하고…….
-철썩!
-찰싹! 찰싹!
“그에에에!”
“아, 알았어. 미안해. 그만 때려.”
애정 표현이 너무 과한데.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머리끄덩이를 잡고 때려 댄다.
거, 너무하네. 안 그래도 실컷 얻어터지다가 나왔는데.
아니, 나도 꽤 강해졌는데 왜 이렇게 아프지?
살짝 어이가 없어 덕춘이의 정보를 열었다.
[덕춘(카오스 개구리- A)]
-주인(조현수)의 영향을 받아 카오스 속성이 더욱 진해졌습니다.
-특성: 산성 (S), 회복 (S), 독 (S), 화염 (AAA), 외갑 (AAA), 괴력 (AA)
-고유 능력: 뺨치기 (S), 폭식 (S)
워우, 이게 무슨 일이야.
등급이 올라가 있다.
A등급으로 상승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특성까지 향상된 상황.
못 보던 특성이 생겼다. 괴력? 안 그래도 무식한 녀석이 아예 괴력을 쓴다고 인정을 받아 버렸네.
고유 능력도 뭐가 추가됐는데 이상하지는 않다.
평소에도 워낙 잘 먹었어서.
주인과 펫은 일심동체. 훌륭하다. 더욱 강하고 멋진 스트롱 영물이 되었구나.
“그으으으에.”
분풀이가 끝났는지 덕춘이가 엉금엉금 어깨로 올라온다.
만족하는 표정.
내 어깨가 탑승감이 좋지.
나가자.
자연스럽게 길을 비켜 주는 이들.
몇몇이 뭐라 말을 걸기는 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나와 같이 있었던 탐사대원들.
그리고…….
“베힐탄한테 들을 이야기가 있지.”
프램버그.
지금껏 봐 왔던 유적과는 많은 게 달랐다.
이제 진실을 알 차례다.
-끼이이익
타이밍도 좋지.
그새 내가 나타났다는 소문이라도 난 건가.
토굴을 빠져나오자마자 내 앞으로 증기차가 멈추어 선다.
레트로한 게 은근 멋지다.
소소한 감상을 하던 중 문이 열리더니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진짜, 진짜로군! 반드시 살아 돌아오리라 믿고 있었어!”
“마이어스!”
차에서 내린 그가 나를 끌어안더니 구석구석을 살핀다.
“다행히 어디 다치지는 않았구만.”
“예, 뭐. 어떻게 그렇게 됐네요.”
죽었다 부활해서 멀쩡한 거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네. 자네 펫이 살아 있는 걸 보고 확신했어, 자네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다시 만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빈말이 아니라 덕춘이를 보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거구만.
덕춘이는 펫, 내가 죽으면 안전지대로 따라갈 테니까.
이번에는 특수한 경우라 계속 이곳에 있었던 모양.
“보이나? 여전히 매캐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청정구역이나 다를 바 없지. 모두 자네 덕분이야.”
그가 도시를 가리킨다.
그의 말마따나 독성 가스가 차오른다던가 그렇지는 않다.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건 똑같았지만 이 정도는 애교지.
내성 스킬도 반응이 없고.
그보다.
“마이어스도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상태가 좋지는 않았는데.”
나와 함께 탐사대원을 구하러 갔던 마이어스.
안개에 노출된 만큼 몸이 심각하게 망가졌었는데,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한 거 같다.
“흐하하하! 그럼! 생명수 덕분에 흉터도 안 남았네. 나뿐만이 아니지. 그때 쓰러져 있던 탐사대원들도 모두 생명을 건졌거든. 아직 요양 중이기는 하지만 곧 회복될 거야. 모두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어.”
“뭘 또 은혜씩이나.”
“자, 가세. 베힐탄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오고 싶어 했지만 사정이 있어서. 가 보면 알 거야.”
“그러죠.”
“아, 그리고 내가 줬던 퀘스트 보상은 베힐탄이 줄 예정이네. 나보다는 베힐탄이 줄 수 있는 보상이 더 많아서 말이야.”
더 주려고 보상 지급 대상을 바꾸는 건 또 처음이네.
나야 좋으니 상관없지만.
그를 따라 차에 탑승했다.
뛰어가는 게 더 빠를 텐데 뭐하러 차를 타고 왔나 했더니만.
“이블아이다!”
“여기 좀 봐 주세요!”
“제 다리가 나았습니다! 공방에 들러 주십시오!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얼굴 한 번만 보여 주세요!”
“이블아이! 이블아이!”
“무지개! 무지개!”
소문이 돌았는지 내가 타고 있는 차량을 향해 드워프들이 몰려들었다.
아니, 무지개라고 외친 녀석 누구야. 콱, 씨! 그냥.
풀도 안 자라는 곳인데 어디서 가져왔는지 꽃을 뿌리고 난리가 났다.
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도로를 정리해 주기까지…….
앞서가던 증기 골렘이 순식간에 분해돼서 사라졌다.
거리를 차지하고 있던 대형 증기차는 군중들의 손에 들려 구석에 처박혔고.
운전자의 욕설이 걸걸하게 들려오는 건 덤.
이게 환영식인지, 폭도인지 분간이 안 됐지만 파이팅 넘치는 걸 보니 기분은 좋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군중을 이끌고 청사에 도착하자 또 다른 게 준비되어 있었다.
“프램버그의 영웅! 이블아이 님이 입장하십니다!”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큰소리로 외치는 안내자.
미리 준비했는지 경호원으로 보이는 드워프들과 크리쳐가 주변을 통제하고, 밑에는 레드카펫이 깔렸다.
청사 꼭대기, 내 모습이 그려진 거대한 깃발이 웅장하게 펄럭인다.
-빵빠라! 빠라라람!
폭죽과 함께 연주가 시작되는 건 덤.
관악대는 왜 부른 거야. 하지 마. 쪽팔려. 하지 말라고!
뭘까… 잘해 주는데 이를 악물게 되는 건.
재빨리 투구를 뒤집어쓰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에는 안내자를 따라 대표실로 올라갔고.
“지시가 있어 저는 내려가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아, 예. 안내 고마워요.”
대표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 안내자가 밑으로 내려갔다.
인기척이 없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건가.
그만큼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거겠지.
꿀꺽. 침을 삼켰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 본데.”
베힐탄.
그의 성격상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찾아왔을 텐데 오지 않았다.
탐사대 부대장인 마이어스가 찾아왔지.
모르겠다. 고민할 게 있나. 직접 만나 보면 되지.
-똑똑
“이블아입니다. 들어갈게요.”
난 노크를 하고 대표실의 문을 열었고.
“엥?”
“왔는가? 크흠. 오자마자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줘서 미안하군.”
예상치 못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척 보기에도 살벌한 쌍도끼를 내뻗고 있는 베힐탄.
그 도끼가 목에 닿아 있는 건.
“어엇? 공, 이블아이? 사, 살려 줘! 이 아저씨가 나 때리려고 해!”
“역시 이블아이! 구해 주러 왔구나!”
냥펀과 핥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