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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45화 (245/740)

245화 델버튼과의 거래

잠시 마주치는 시선.

델버튼은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지?’라는 표정이었다. 내 표정을 내가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사뭇 진지하지 않을까.

그럴 거다. 내게는 중요한 이야기니까.

피식, 델버튼이 헛웃음을 터트린다.

“그들을 대신해 죽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대단한 희생정신이군, 영웅이야.”

명백히 비꼬는 말투.

혼돈의 파편이라는 것들은 전부 다 이렇게 성격이 꼬여 있는 건지, 아니면 이 녀석이 유독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많은 놈이라는 건 알겠다.

정보는 힘. 특히나 내가 유리해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특히나 입 싼 녀석을 상대하는 거라면 편리하지.

“난 딱히 정의감도 없어, 영웅 심리는 더 없고. 그냥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 뿐이야.”

진심이다.

정의의 사도는 나랑은 거리가 있는 단어라서 말이지.

누구를 돕게 되더라도 부수적인 결과일 때가 더 많았다.

아니꼬운 걸 못 참는 성격. 당한 만큼 돌려줘야 하는 기질.

자고로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하는 놈은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똑같은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놈을 조지면 자연스레 다른 피해자들의 속도 시원해지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비슷하다.

이 자식이 한 짓도 마음에 안 들고, 드워프들한테 받아내고 싶은 것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해 볼 생각.

-꽈악

놈의 멱살을 잡았다.

힘이 빠져 보잘것없는 발악으로 보이겠지만 오히려 그편이 더 낫다.

흥미를 이끌 수 있으니.

현 상황에서 난 확실한 을이다.

다시는 이놈을 만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역병의 알은 안개 배출을 멈추면 사라지고,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 시간 동안 프램버그가 사라질 수도 있는 거고.

“베힐탄과 거래를 했다고 했지.”

“내기에 가깝다.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

“끝은 무슨, 10년이 넘게 못 이겼으면서. 아니지, 프램버그가 탑에 들어오기 전부터 했을 테니까 더 길 거야. 알에 갇혀 있느라 아무것도 못 했나?”

-뿌득

잠깐이지만 놈이 반응했다.

내 팔을 짓밟고 있던 발에 힘이 더 해졌으니까.

팔이 뭉개졌으나 덕분에 확실히 알겠다.

통증에 머리가 펄떡거릴 지경이었지만 입꼬리를 올렸다.

이 녀석…….

“너, 내기에 약하구나?”

어떤 의미로든.

난 확신할 수 있었고.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빛납니다!]

녀석에 대해 조금은 파악했기 때문일까 권능이 발휘됐다.

단 한 줄이지만 추가된 내용.

[델버튼- 혼돈의 파편]

-도박은 병입니다.

이 무슨 공익 광고에 나올 법한 문장인지는 모르겠다만 하나는 알겠다.

세계가 멸망하는 이유는 세계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혼돈 수치가 쌓였기 때문.

그렇다면 그런 세계를 멸망시키는 혼돈의 파편은 어떤 존재일까.

어떤 존재기는.

똑같이 혼돈에 관한 거겠지.

작게는 연인의 다툼, 크게는 전쟁.

이놈의 경우에는…….

“도박과 질병. 넌 그걸로 이루어져 있겠지.”

상식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애초에 도박이니 질병이니 하는 것들이 실체화되어 나돌아다닌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탑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떠올리지도 못할 생각.

따지지 말자. 성물도 있고, 요정도 있고, 지금은 드워프랑 땅을 파고 내려와서 뭔지도 모를 존재랑 떠들고 있는데.

“더 말할 필요가 없군, 죽어라.”

잠시 입을 멈추었던 녀석이 손을 들어 올린다.

정면승부는 못 한다.

적어도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힘들다.

한순간에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속에는 미약한 확신이 있다.

정말 내 목숨을 취할 거였다면 진작에 취했다.

그 말은 곧…….

“나와 거래하는 건 어때? 쫄리면 뒈지시던가.”

“건방지구나.”

놈이 나와의 내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

말은 저렇지만 즐겁다는 듯 웃고 있다.

꾸드득.

내 팔을 짓이기는 녀석.

“아주 건방져.”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이를 악물며 참았다.

이 상황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뼈가 산산조각 나 근육에 박히는 느낌.

결코 좋지는 않다. 그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든 건지 녀석이 뒤로 물러선다.

“좋다. 하지만 내기를 제안하는 건 내 쪽이다.”

델버튼이 팔짱을 낀 채 날 내려다본다.

“자비를 베풀어 그대에게 드워프들을 대신해 죽을 기회를 주지. 총 2,384명분의 죽음을 감내하라.”

2,000번이 넘는 죽음이라.

벌써부터 심장이 쫄깃해진다.

아무리 나라도 긴장이 안 될 수는 없는 노릇.

그래도 할 건 제대로 해야지.

“내가 성공하면 어떻게 되지.”

“프램버그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베힐탄의 승리가 되겠지. 다만 그들을 구해도 네가 얻어 갈 건 없을 것이다.”

“괜찮아. 보상은 걔네한테 받을 생각이니까.”

“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군.”

진심으로 질 자신이 없다.

적어도 탑 안에서는.

녀석은 이를 단순한 패기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지만.

“원래라면 네놈의 진짜 목숨을 대가를 가져갔겠지만 이곳은 탑. 이곳에서는 이곳의 규칙을 따라야 하지. 그대 또한 코인이 있으니 건방지게 구는 것일 테고.”

제대로 봤다.

맹점. 이곳에서는 진짜로 죽을 수가 없다.

코인이 목숨을 대신하니까.

NPC들은 코인이 없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NPC는 탑을 올랐던 존재.

주어졌던 코인은 이미 다 썼을 터. 페니와 같이 특수한 방법으로 NPC가 된 이들도 마찬가지.

받은 코인이 없으니 목숨은 똑같이 하나.

키득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정색한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니 계약서가 생성된다.

“짜증 나는군. 결정했다. 그대가 실패하면 어떻게 할지.”

내게 계약서를 내민다.

뭘 하나 했더니만…….

“내기에서 진다면 내가 그대의 세계로 찾아갈 것이다.”

이미 프램버그가 어떻게 됐는지 두 눈으로 보고 온 상태.

내가 있는 세계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거다.

다른 사람이라면 압박감에 주춤했겠으나 나는 아니었다.

“그러지. 대신 몇 가지 조항을 추가하자고.”

꼼꼼히 계약서를 살핀 난 추가 사항을 명시한 뒤 서명을 했고.

“꼼꼼하군. 칭찬하지.”

[계약이 성립됩니다!]

[베힐탄과의 거래가 이전됩니다.]

[혼돈의 파편이 엮여 있음을 확인.]

[이 거래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멸망 대상이 변경됩니다.]

[현 시간부로 역병의 안개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그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거래가 끝날 때까지 네놈은 죽어도 안전지대로 가지 못할 것이다.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이지. 그 누구도 돕지 않을 것이고 홀로 비참히 죽어 가리라.”

“시끄럽고 시작이나 해. 나 바쁜 사람이야.”

“그러지. 부디 코인에 여유가 있길 바라마. 드워프 한두 명 정도는 살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철컥

-구그그그

난 장비를 해제해 인벤토리에 넣었다.

아무래도 이편이 더 편할 거 같아서.

그냥 죽기만 할 생각은 아니다.

[독자무강獨者武强 (AA) Lv.2]

[러브 앤 피스 (AA) Lv.6]

[마법 무효화 (AA) Lv.9]

[소화 (A) Lv.9]

[강철의 의지 (AA) Lv.2]

[강체强體 (AA) Lv.9]

[정신 보호 (AA) Lv.9]

[독 내성 (AA) Lv.1]

[저주 내성 (A) Lv.6]

최대한 버티고 버틸 생각이지.

“레벨 많이 오르겠네.”

난 작게 읊조렸고.

-푸화아아아악!

역병의 안개가 나를 집어삼켰다.

* * *

역병의 안개.

기존에 겪었던 건 장난에 불과했다.

드워프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던 것이 오로지 나를 죽이기 위해 성질을 바꾸었으니까.

즉, 멸망의 대상이 나로 바뀐 것.

신성력? 내성 스킬?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고작 몇 초 만에 죽었으니까.

어쩐지 드워프랑 비교했을 때 이상하리만치 잘 버틴다 했더니만 이런 비밀이 있던 건가.

이거야말로 그들이 견디던 진짜 역병이었다.

처음에는 내장에 출혈이 왔다.

두 번째에는 신경이 죽었고, 그다음에는 몸이 비틀렸다.

피부가 썩기도 했으며, 이가 모조리 빠지는 경험도 했다.

독에 중독되는가 하면 저주에 걸리기도 했고, 가끔은 놈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목이 날아가기도 했다.

수많은 죽음이 한 번에 몰아닥쳤다.

놈이 작정하고 퍼붓는 질병과 저주는 가히 대단했다. 내성 스킬이 발동되기가 무섭게 내 몸을 갉아 먹었으니까.

부활하기가 무섭게 몸이 녹아내렸다.

끔찍한 통증이 중첩됐다. 이전의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 새로운 죽음이 찾아왔다.

죽음은 깊은 잠과도 같다던가.

적어도 나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였고, 수십 시간 어쩌면 수백 시간이 흐르며 영혼이 깨질 것 같은 고통이 계속됐다.

죽음과 부활의 반복. 내가 내가 아닌 듯한 이상한 감각.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시간도 결국에는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아프고 힘들었지만 정신은 점차 맑아지는 기현상.

감각이 돌아오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조금이지만 여유도 생겼다.

한번은 반격하기도 했다.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발악과 같았던 반격의 횟수가 늘어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 한 번에 못 끝내냐. 예전 같지 않네. 쯧쯧.”

“이, 이이! 버러지 같은 녀석이!”

즉사하지 않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몸은 만신창이.

터져 나간 피부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괜찮다.

아직은 버틸 만하니까.

[감당해야 할 목숨: 1/2,384]

이제 한 번 남았다.

놈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처음과는 뒤바뀐 입장.

멈출 수 없다. 이미 계약은 진행되었고, 날 죽이지 않고 버틴다는 선택지는 없으니까.

그러지 못하도록 계약서에 추가 조항을 삽입했거든.

놈은 날 죽여야 한다. 확실하게, 살의를 가지고.

“뭔가 잘못됐다. 잘못됐단 말이다!”

-서걱!

분을 이기지 못한 녀석이 팔을 휘둘렀다.

그대로 갈라지는 가슴.

치명적인 일격이었으나.

[구사일생 (S) Lv.3]

-몸을 회복시킵니다. (현재 회복 가능량 72퍼센트)

-연속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루 한 번 발동. (사망 시 초기화)

급속도로 가슴의 상처가 아물며 회복했다.

구사일생.

애증의 스킬.

내가 이거 때문에 2,000번만 죽으면 될 걸 4,000번을 죽어야 했다.

한 번에 안 죽어 가지고.

진짜 치가 떨리고 뒷골이 아려 오지만 지금은 좋다.

2,000번을 넘게 사용하며 S급까지 올리고 말았으니. 정상적인 방법이었다면 못 했을 텐데.

다른 스킬들도 마찬가지.

꽤 많은 스킬을 S등급까지 승격시켰다.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결과는 달콤한 법.

-콰아아앙!

난 전력을 다해 파고들었다.

마지막이다. 이놈과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러브앤피스 (S) Lv.4]

온몸에 두른 신성력.

놈이 팔을 휘두른다.

-푸구구국!

놈의 공격에 맞은 어깨뼈가 부서진다.

[독자무강獨者武强 (S) Lv.2]

[강철의 의지 (S) Lv.1]

[강체强體 (S) Lv.2]

[물리 공격 내성 (S) Lv.1]

S등급의 패시브 4개가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이었다면 부서지는 게 아니라 팔 자체가 터져 버렸을 텐데.

장족의 발전.

놈에게 얻어터지는 동안 확실히 깨달았다.

혼돈 수치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스킬이 얼마나 강하든, 몸이 얼마나 튼튼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나마 내게 혼돈 수치가 있어서 이만큼 비비는 거다.

동등한 싸움을 원한다면 놈과 같은 수준의 혼돈 수치가 있어야 한다.

뭐, 그건 그거고.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빛납니다!]

[영혼 찢기 (S) Lv.4]

[절삭 (AAA) Lv.6]

-그그그극!

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피부를 긁고 지나가는 검.

선혈이 흘러내린다.

“이노오오오옴!”

노기 어린 함성과 함께 놈이 안개를 내뿜는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공격.

푸확!

의지와 상관없이 눈, 코, 입, 귀에서 피가 터진다.

저주와 질병의 콜라보.

게다가 정신 착란까지.

많이 당한 공격이다.

다르게 말하면.

[정신 보호 (S) Lv.3]

[독 내성 (S) Lv.4]

[저주 내성 (S) Lv.1]

그것에 대항하는 패시브 역시 발전됐다는 거고.

여전히 혼돈 수치가 부족해서 완전히 막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제길! 제기랄!”

당하고 있는 건 나지만 악에 받친 건 녀석이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목숨은 이게 마지막.

죽고 부활하면 놈은 사라진다.

그게 내기의 내용이니까.

실실 웃음이 나온다.

나도 이러고 있는 게 유쾌하지는 않아서 그냥 편하게 죽고 싶기는 한데… 왤까, 그러고 싶지 않은 건.

놈한테 당한 게 많아서 그런가.

수천 번 죽어 보니 알겠다. 슬슬 한계다. 죽음이 다가온다.

나의 죽음은 곧 놈의 죽음.

녀석을 엿 먹일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래, 하자.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다만 이 새끼한테는 쌓인 게 많아서 말이지.

이를 악물며 몸을 움직였다.

마음에도 안 드는 녀석, 가는 길에 안 좋은 거나 보고 가라지.

“이렇게 하면 다들 빡쳐 하더라고.”

[구애의 춤 (B) Lv.7]

[치명적인 포즈 (E) Lv.10]

꺼져 가는 의식 속.

난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포징을 취했고.

“…어?”

[오로라빔 (S) Lv.3]

얼빵한 소리를 내는 녀석의 면상에 시원하게 오로라 빔을 갈겼다.

그걸로 기억은 끝.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델버튼과의 내기에서 승리했습니다!]

[전 서버 최초! 혼돈의 파편을 처치했습니다!]

[위대한 업적!]

[프램버그가 멸망의 길에서 벗어납니다!]

.

.

.

수많은 알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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