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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44화 (244/740)

244화 그럼

망설임 없이 안개 질주를 사용해 역병의 알 안으로 들어갔다.

안개가 나온다는 건 반대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

외부에서는 부술 수 없다. 그렇다면 내부는 어떨까?

물론 위험한 일이기는 하다.

안개 질주는 지속시간이 짧고, 이 망할 바위가 얼마나 두꺼운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안에 도달하지 못하고 안개화가 풀리면 그냥 으깨져서 죽는 거지.

서두르자.

-스스스스

안개화된 몸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막힌 곳을 돌아 다른 길을 뚫는다.

나라는 존재가 분열되는 감각.

그럼에도 하나의 나로 인식되는 기묘한 느낌.

약간은 불안했고, 어떤 면에서는 신비로웠다.

여유가 있었다면 좀 더 즐겼겠지만.

‘얼마 안 남았군.’

안개화 지속 시간이 끝나간다.

아직 내부에는 들어오지 못한 상태.

불현듯 나쁜 생각이 들었다.

알이라고는 했지만 내부가 돌덩이가 아니라는 말은 없었다.

안에도 겉과 똑같은 상태면 어쩌지? 그럼 개죽음인데.

마음이 조급해진다.

난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이동했고.

[안개화가 종료됩니다.]

[망자귀환 (AA) Lv.7]

“후아!”

이내 육체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망자귀환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성력과 기타 스킬, 장비로 버티고는 있었지만 나 역시 역병의 안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 멀쩡히 돌아다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건 그거고.

“상상하던 모습과는 좀 다르네.”

역병의 알 내부는 어두웠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단순히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묵직한 기류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역병의 안개와 다르게 독성이 있지도 않고.

내성 스킬들이 잠잠한 걸 봐서는 그러하다.

그런 내게 떠오르는 메시지.

[전 서버 최초, 역병의 알에 진입했습니다!]

[예정되지 않은 행동]

[카오스 박스가 지급됩니다.]

카오스 박스? 이건 또 뭐야.

뭔지는 몰라도 준다고 하니 받아야지.

[카오스 박스 (???)]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혼돈 수치 50점을 넘겨야 사용 자격을 얻습니다.

설명 한번 심플하네. 완전 랜덤이라는 거 아니야.

등급마저 물음표로 되어 있다.

대단한 물건이 나올 수도 있지만 쓰레기가 나올 수도 있고, 콕 집어서 아이템이라 적혀 있지 않으니 저주나 디버프가 튀어나와도 할 말이 없다.

다른 랜덤 박스와는 다르게 조건도 붙어 있고.

혼돈 수치 50이라.

낮은 수치는 아니다. 100층에 도전하기 위해 필요한 혼돈 수치가 100.

현자 존 트레일러 역시 70점을 채우지 못한 게 혼돈 수치인데.

[현재 혼돈 수치- 39점]

“생각보다 많이 모았네.”

이런저런 일이 있다 보니 이만큼 모았다.

단순히 얻은 거로 따지면 36점이지만 알리오스의 계승자가 되면서 혼돈 수치가 조금씩 올라가는 중.

싱크로율이 올라감에 따라 혼돈 수치를 준다고 했었다.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

-동화율 46퍼센트

슬슬 50퍼센트에 근접해 가는 동화율.

이걸 빨리 올랐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고 봐야 되나.

머리를 긁적이고 카오스 박스를 챙겼다.

내게는 할 일이 있으니까.

역병의 알을 부수는 것.

문제는 막상 들어오고 나니 부숴야 할 곳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내가 지나온 돌덩이들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바닥을 딛고 있지만 정작 바닥은 없다.

허공에서 투명한 판을 밝고 있는 느낌.

뭐 하나 명확한 게 없었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맞겠지.

-콰아아앙!

스타트는 파이어 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주위가 잠깐이지만 밝아진다.

확실히 없다. 아무것도 없다.

뒤를 돌아봐도 내가 지나왔던 바위도 보이지 않는다.

경계를 알 수 없는 검은 기류만 가득한 곳.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는 없는 법.

-파아앗!

발을 박차고 돌진했다.

어디로든 가다 보면 경계에 도달할 거고, 칼질을 하든 폭발을 하든 하면 되니까.

가는 길에 검을 휘둘러 봤지만 걸리는 게 하나도 없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난리를 치는 느낌.

[오로라 빔 (AAA) Lv.1]

광선도 날려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알이 아니라 우주 어딘가로 던져진 것만 같은 느낌.

알 표면은 단단해서 부술 수가 없고, 내부는 물리적으로 부수는 게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건가?

아무리 멸망이니 뭐니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난이도 아니냐고.

[파이어 밤 (S) Lv.1]

-콰아아아앙!

짜증이 나 터트린 폭발.

“어?”

처음으로 무언가가 보였다.

아니, 누군가가.

“그런 공격은 의미가 없다, 이방인이여.”

커다란 키, 비틀어진 몸,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는 존재.

그가 누군지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알에 깃들어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니까.

“델버튼.”

[전 서버 최초, 혼돈의 파편을 마주했습니다.]

[혼돈 수치 +4점]

단순히 마주했을 뿐인데도 혼돈 수치가 올라간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구구구구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길함이 온몸을 옥죈다.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에너지.

존재 자체에 대한 불신.

권능이 발휘된다.

[델버튼- 혼돈의 파편]

-???

단출하다 못해 아무것도 없는 정보.

NPC를 봤을 때도 기본적인 정보는 나온다.

종족이라든지, 간단한 배경이라든지.

이 정도로 백지 상태인 경우는 처음.

그만큼 격차가 크다는 걸지도 몰랐고 그게 아니라면…….

‘혼돈의 파편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권능이라고 만능은 아니다.

파악하지 못하는 정보 또한 존재하니.

생각해 보면 버그 메시지창이 떠올랐을 때도 권능은 별다른 정보를 말해 주지 않았다.

기껏 말해 준 거라야 혼돈의 힘에 덕춘이가 반응한다는 것 정도.

-키릭

상관없다.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

망자귀환 버프가 종료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5분 남짓.

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면 꺾으면 될 일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지!”

-카아아아아앙!

빠르게 쏘아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검을 내리쳤다.

절삭과 도축, 권능의 힘이 합쳐진 일격은 6성급 몬스터라도 위협을 느낄 수준이었지만.

“그대는 나를 이길 자격이 없다.”

그는 간단히 손을 내밀어 공격을 받아냈다.

아무런 데미지를 주지 못했느냐?

그건 아니다.

놈이 내민 손바닥. 아주 미세하지만 검이 박혔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정도로 얕은 상처 아니, 상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흔적이었으나.

“…대단하군. 60층에도 오르지 못한 자가 이 정도라.”

녀석은 감탄했다.

이거 좀 짜증 나네. 얕잡아 봐도 너무 얕보잖아.

“빈말이 아니다. 나는 혼돈의 파편. 아무리 강대한들 나와 같은 혼돈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으니까.”

“혼돈 수치를 말하는 거군.”

“정확하다.”

한 세계의 멸망을 부르는 존재.

혼돈의 파편.

100층을 도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혼돈 수치 100점.

대충 이해가 된다.

내가 덤비고 있는 놈이 어떤 놈인지도.

적어도 탑의 정상 근처까지 간 이들이 상대해야 할 대상이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그들조차 꺾기 힘든 존재고.

99층까지 올랐던 알리오스, 킬더레스, 릴카.

세 명 모두 NPC가 되었다.

그들의 세계에서도 델버튼과 같은 멸망의 파편이 있었을 테니 결과적으로 말하면…….

‘전부 졌다는 거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가뜩이나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상황.

게이트 발생이 늘어나고, 더 강한 등급의 몬스터들이 쏟아져 내리다가 재앙이라 불리는 네임드 몬스터가 등장.

땅이 얼어붙든 불타오르든 환경이 바뀌는 건 물론이요, 이후에는 델버튼과 같은 혼돈의 파편까지.

이제 좀 명확해지네.

세계가 멸망하는 과정이.

어째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혼돈 수치가 없는 이들은 미약한 도움조차 되지 못하니까.

-주륵

식은땀이 흐른다. 존재감이 다르다. 분명 놈은 가만히 있는데 압박감을 느끼는 건 나.

침 한 번 삼키고.

[버프 다이스(AA) Lv.1]

[5]

[팔라딘의 방패]

버프 다이스를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총공격을 이어 나갔다.

검을 횡으로 그으며 놈의 팔을 밀쳐 내고 안으로 파고들기.

놈의 발목을 향해 오로라 빔을 사용하면서 파이어.

-화르르르륵!

놈의 시야를 가린다.

이어 절삭.

정수리를 가를 기세로 검을 내려치고.

-까아아앙!

당연히 통하지 않을 것까지 계산.

[프로즌 브레이크 (AAA) Lv.5]

일대를 얼어 붙인다.

뭐든 해 보라는 것처럼 가만히 서 고개를 까딱이는 녀석.

어디까지 그럴 수 있는지 봐 보자고.

인벤토리에서 뇌봉참검으로 무기를 변경. 놈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으며 일렉트릭 쇼크를 사용했다.

-파지지지직!

버프를 먹어 엄청난 전격이 뿜어져 나왔으나.

“부족하다. 단순히 마력을 이용한 공격으로는 날 어찌할 수 없어.”

“어, 맞아. 부족한 거 같네.”

그러니 무리 좀 해야겠다.

[안개 질주 (AA) Lv.9]

아직 버프는 끝나지 않은 상태.

난 다시금 안개 질주를 사용했다.

무적기 스킬인 만큼 전투 중에 2번 쓰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마력을 잡아먹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고.

[망자귀환 (AA) Lv.7]

이걸로 내 스텟은 한 번 더 몇 배가 증가.

[펠라인 세트 효과! (5/7)]

[아스트랄 레인보우 (S)]

모든 공격 데미지를 10배로 올려 주는 스킬을 사용했다.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오버스펙을 만들어 본 적은 없다.

과도한 힘의 사용으로 온몸이 터질 것 같다.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상태.

위태롭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지만 정신은 또렷했고.

“이건 좀 아플 거야.”

난 놈을 향해 모든 공격을 쏟아 냈다.

* * *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버프를 두르고 가장 강력한 조합식으로 스킬을 날렸으며 권능을 사용한 일격을 그었다.

그럼에도 놈은 멀쩡한 상태.

아니, 조금은 상처를 입었다. 뭐가 됐든 나 역시 혼돈 수치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놀랍군. 놀라워.”

누군 죽을 거 같은데 놈은 태연하다.

놈의 가슴을 타고 올라간 상처.

그곳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다른 자잘한 상처는 아문 지 오래.

의미 있는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다.

반면에 나는.

“진짜 안 좋은데, 이거.”

마력은 바닥났으며 신체 또한 컨디션이 바닥이다.

놈이 장난스럽게 한 공격에 어깨가 반쯤 뜯겨 나가 바닥을 구르고 있기도 하고.

지금도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간신히 숨을 내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

뒤엎을 수 없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

존재 의미가 다르다. 놈은 한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놈이니까.

난 아직 상위층에도 오르지 못한 애송이고.

으득. 입술을 깨물었다.

멸망이 가속되면 이런 놈이 우리 세계에도 떨어진다는 거 아니야.

어떤 꼴이 될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눈이 흐릿하다. 이미 한계.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지만.

[구사일생 (A) Lv.1]

-아직 죽기에는 이릅니다!

-일어나세요, 용사여!

-몸을 회복시킵니다. (현재 회복 가능량 3퍼센트)

다시 한번 눈을 뜰 수 있었다.

46층에서 스킬 합성으로 만든 스킬은 두 가지.

하나는 외톨이의 길, 은신 스킬이었고.

‘벌떡!(C)’과 ‘수면 회복(D)’을 합성해 만든 구사일생.

지금까지 쓸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쓰게 되네.

“크으으윽.”

조금이지만 힘이 돌아왔다.

고작 3퍼센트. 지금도 톡 치면 죽는 상태인 건 마찬가지지만 안 죽은 게 어디야.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입에 부었다.

그런 내게 다가오는 델버튼.

“그대는 왜 내 과업을 방해하려 하는가.”

“왜? 왜냐고?”

진심으로 몰라서 하는 말인가?

프램버그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뭘 봐 왔는지 이 녀석은 알까?

갱블턴, 헤그웍, 마이어스, 베힐탄.

다른 탐사대원들과 전멸한 크리쳐.

기계로 몸을 대신해 돌아다니는 이들까지.

-꾸드득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으나 놈은 내 팔을 짓밟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거래에 의거 드워프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베힐탄은 내기에서 질 것이며, 그대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들을 구하지 못하겠지.”

입가를 비틀며 비웃는 녀석.

“그대가 드워프들이 겪어야 할 죽음을 대신한다면 모를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좌절하기 바라는 걸까.

델버튼이 느리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속삭인다.

…어?

“잠깐만.”

“아무리 애원하고 매달려도 난 멈추지 않는다.”

“아니, 그거 말고.”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내가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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