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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41화 (241/740)

241화 위기와 기회

아공간 팔찌를 열자 수많은 포션이 떨어져 내린다.

이어서 보물 주머니를 비롯한 기타 아공간 아이템을 개방했다.

혼잡스러운 와중 기행을 펼치는 내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지금부터 상황 정리합니다. 치료자분들 위급한 사람들 위주로 먼저 쓰세요. 부족한 건 이 자리에서 만들 생각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안 그래도 바쁘단 말입니다!”

“손님이어도 긴급 사태 때에는 우리의 지시를 따라 주셔야 합니다.”

물론 말한다고 순순히 따라 주지는 않는다.

나라도 그러겠다. 웬 이방인이 와서 치료를 주도하겠다는데 믿을 리가 있나.

그 사람이 돌팔이인지 어떻게 알고.

굳이 말로 설득할 필요 없다.

“갱블턴, 눈에 부어요.”

“알았네.”

생명수를 그에게 주자 망설임 없이 눈에 붓는다.

나와 헤그웍의 대화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했을 터.

그도 알고 있다, 원래라면 역병의 안개에 노출된 헤그웍의 팔이 못 쓸 정도로 망가졌어야 한다는 것을.

실제로도 그랬었고.

“크으읍!”

통증이 있는지 갱블턴이 작게 신음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제 좀 낫군. 흐릿하기는 하지만 보여.”

입꼬리를 올린 갱블턴이 모두에게 눈을 보여 줬다.

뿌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뿌옇게 변했던 눈동자가 원래의 색을 되찾은 것.

완전히 나으려면 더 있어야겠지만.

“말도 안 돼.”

“진짭니까? 진짜 보입니까!”

“여, 여기 이 아이한테라도 주실 수 있나요? 상태가 안 좋아요!”

“기적이란 말인가.”

아무리 믿기 힘들어도 직접 본다면 생각이 바뀌는 법.

격리 시설에 모인 이들, 특히 안개에 닿아 병을 얻은 이들의 반응이 뜨겁다.

정돈되고 있던 병상이 들썩이는 건 당연했고.

“다들 기다리세요. 여기 모인 이들 전원한테 드릴 거니까요. 질서를 지키고 차례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아직 모든 주민이 구출된 게 아니에요. 구역을 나누고 호전 상태에 따라 분류를 해야 합니다.”

“말 들었지? 빨리 움직여!”

“상태가 안 좋은 순으로 모아야 한다!”

“새롭게 들어오는 이들은 따로 분류하고, 거기! 이쪽으로 오지 마세요! 다들 급한 건 마찬가지니까!”

통제를 하고 있던 구조대원들 역시 발 빠르게 움직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수는 고작해야 30개 남짓.

얼마나 사용해야 유의미한 결과를 낼지 알 수 없다.

상처의 심각성에 따라, 개인의 체질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일 테니까.

우선 급한 이들부터 구하자.

남은 건 만들면 그만. 프램버그가 유적이기는 하지만 상점창이 막혀 있는 것도 아니니 재료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작업을 위해 내 공간이 필요할 뿐.

“혹시 모르니 이 포션도 같이 사용해 주세요. 일반적인 포션은 아니고 생명수 만들 때 실험용으로 썼던 겁니다. 효과는 떨어질지 몰라도 어느 정도 효능은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귀인이시여!”

“자자! 움직여! 한시가 바쁘다! 초동 대응이 가장 중요한 건 알겠지?”

담당자로 보이는 드워프에게 포션을 분류해서 건네줬다.

생명수를 만들 공간을 요구하자 골렘을 분해해 작업대를 만들어 주기까지.

기술자 하면 드워프라 이건가. 그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드워프는 은혜를 잊지 않아요.”

“행운이야! 이런 분이 이곳에 올 줄은.”

절박해 보이는 이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미안하지만 난 구세주도 아니고, 메시아도 아니며, 등반을 하는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다.

모두를 책임질 수는 없다는 말.

하지만.

“발판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겠지.”

난 헤그웍이 꺼낸 생명수를 바라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만든 것과 동일해 보였지만.

[생명수- 프램버그용]

-어느 정도 효과를 간직한 생명수.

-기존 제품보다는 떨어지지만 정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량 생산을 위해 희석되었습니다.

권능으로 통해 자세히 살피자 숨겨진 정보들이 떠오른다.

처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이미 힌트는 있었으니까.

헤그웍이 말했었지, 하루에 6병은 마셔야 한다고.

프램버그는 탑에 있는 모든 드워프가 모인 지하도시.

그 수만 수백 명 이상이다.

그런 이들이 하루에 6병을 마신다?

불가능하지. 난 그만큼 많이 만든 적이 없으니까.

화조국에서 손을 쓴 거다.

나한테는 별다른 연락도 없이.

의도적인가, 아니면 실수인가. 그것도 아니면 탑에서의 거래는 이런 식인 걸까.

어쩌면 내가 등반가이기에 한 행동일 수도 있다.

뭐든 상관없다. 일은 벌어졌고 난 사실을 알아냈으니.

“먼저 멋대로 했으니 나도 신의를 지킬 필요는 없겠지.”

공개한다.

생명수를 만드는 방법을.

화조국이 따지고 들면 그들이 한 행동 역시 밝혀야 할 거다. 여기 모인 모든 드워프들 앞에서.

-촤아악

작업대에 앉아 재료를 꺼냈다.

이미 여러 번 만들었던 것. 재료와 시간, 마력과 신성력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재료가 살짝 모자라기는 한데…….

“사면 그만이야.”

돈은 많다. 망설일 것 없이 상점창에서 재료를 구매했다.

그 모습을 부러운 눈을 바라보는 이들.

NPC는 상점창을 이용할 수 없다 했던가.

글쎄… 그것도 이제 와서는 그것마저 의심스럽다.

모든 NPC가 상점창을 이용할 수 없는 걸까. 프램버그의 드워프들만 사용할 수 없는 걸까.

유적, 지하 도시 프램버그.

그동안 만났던 NPC들과 유적과는 다른 점이 너무 많다.

이 부분은 나중에 따지도록 하고.

“신성력 쓸 수 있는 분 있으십니까? 포션 제작할 줄 아는 분도. 약초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난 곧장 작업을 시작하며 드워프를 모았다.

구조대원 네 명과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환자가 셋.

일곱 명이라… 괜찮다. 내가 바라는 건 보조가 아닌 학습이니.

“지금부터 제가 만드는 걸 잘 보세요. 앞으로는 여러분이 직접 만들어야 할 겁니다.”

“그 말은 설마?”

“예. 진짜 생명수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 드리죠.”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지만 나 역시 약간의 책임은 있으니까.

화조국과의 거래를 더 신경 썼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굳이 필요 이상으로 자책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포션 제작 (AA) Lv.3]

-파아아아앗!

만들어 보자고.

* * *

대략 2시간.

생명수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약간 무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하는 거군요.”

“오오, 조합식이 훌륭하구만. 귀인의 안목이 대단해!”

“으으음, 제 신성력이 좀 더 강했다면 품질이 더 좋았을 텐데… 분발해야겠군요.”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지. 약간이지만 효과가 증가할 거라고.”

드워프는 상상 이상으로 제작에 뛰어난 종족이었다.

굳이 대장장이, 기술자가 아니더라도.

특히 프램버그는 오염된 유적. 그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안 해 본 게 없었고, 당연히 포션 제작에도 열을 올렸었다.

스킬로만 따지면 나보다 못한 이가 없었고, 그동안 축적된 지식과 기술로 즉흥적으로 개량해 내기까지 한다.

이 정도면 오히려 내가 배우는 느낌인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국은 신성력이 문제였군.”

“자네 말이 맞네. 드워프인 이상 이 정도의 신성력을 지닐 수는 없으니 말이야.”

“그나마 페트릴이 신성력이 높지 않았나?”

“그 녀석도 400이 안 될 걸세.”

“별수 없지. 신성력이 담긴 아티팩트를 최대한 모아 보는 수밖에.”

드워프는 신성력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라는 것.

생명수의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가 신성력이었으니 이들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믿는 건 오로지 실력과 장인 정신뿐.

그 흔한 신전이나 종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찾아보면 불과 대장간의 신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흔히 그렇듯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고 신앙심을 가지고 찬양하지는 않는다나.

그런 거로 따지면 정령도 비슷하다고 한다.

녀석들도 워낙 서열 관계가 명확해서 정령왕을 신처럼 여기지 따로 종교는 없다고 한다.

어찌 됐든 급한 불은 껐다.

안개에 노출되었던 이들은 모두 구출되었고 치료를 받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쪽 구역에 있는 사람들은 말이지.

프램버그는 지하 도시. 규모가 있는 만큼 격리 시설은 하나가 아니다.

건물 안에 있더라도 흘러 들어온 안개에 접촉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고, 청사나 기타 공공기관에 임시로 모인 이들 중에도 환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남은 일은 그곳으로 제작한 생명수를 보내는 것.

상황 설명을 해 주는 것도 함께 말이지.

그건 증기 골렘과 안전을 위해 배치된 마법 생명체, 크리쳐가 담당하기로 했다.

방독면으로 중무장한 구조대원도 몇 명 같이 움직일 예정이고.

여기까지는 해결됐고.

-끼이이

난 의자에 몸을 걸치며 창문 밖을 바라봤다.

도시를 가득 채웠던 보라색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위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지하 도시인 만큼 공기 순환이 안 되면 답도 없으니까.

허공을 부유하는 비행선은 안개 속에서도 네온사인을 밝히며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안개 제거율 24퍼센트

비행선이 왜 있나 했는데 일종의 관측기였다.

비상시에는 이렇게도 쓰는구나. 뭐 하나 허투루 만든 게 없네.

시선을 돌려 병상을 살폈다. 호전된 이들이 얌전히 누워 있다. 헤그웍도 마찬가지. 팔 좀 나아졌다고 구조대원들을 돕더니만 그대로 뻗어서 잠들었다.

눈을 뜨고 있는 건 소수. 갱블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갱블턴.”

“왜 그런가?”

“아까 구조대원들이 말하던 탐사대가 뭡니까, 새로운 루트는 뭐고. 저한테 방독면을 준 이는 역병의 안개 보고 프램버그의 고질병이라던데요.”

이제는 안다. 왜 58층이 병사 지대인지.

처음에는 밖에 버려진 온갖 쓰레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프램버그에서 발생한 역병의 안개가 위로 올라가서였어.’

근본적인 원인은 이곳에 있었다.

예민한 질문일지 몰랐으나 이미 이들을 도우면서 친화도가 많이 올라간 상태.

머리를 긁적이던 갱블턴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뭐, 숨길 만한 것도 아니군. 이만큼이나 신세를 지기도 했고. 자네는 이미 다 보지 않았는가.”

갱블턴이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겠지.

“각 세계에는 멸망하기 전에 탑이 나타나지. 우리도 마찬가지. NPC가 탑에 있다는 건 그쪽 세상이 멸망했다는 증거와 같고 말이야.”

부정하지는 않겠다.

멸망을 피했다면 굳이 NPC가 될 이유가 없으니까.

“멸망한 세계가 다양한 만큼 멸망한 이유도 다양한 건 어쩔 수 없지. 우리는 멸망을 피해 지하로 내려갔네. 단순히 멸망 때문만은 아니지만.”

불끈, 그가 주먹을 쥔다.

“세인턴 피스 제국. 그들이 종족 전쟁을 일으키며 밀고 들어온 탓도 있었다네. 자네 질문이랑은 큰 연관이 없으니 말을 아끼지.”

살짝 뜨끔했다.

갱블턴이 말한 내용은 알고 있다. 헤이다를 이용해 전쟁에서 이기고 끝내에는 타 종족의 영역까지 넘봤다는 걸.

세인턴 피스 관계자를 적대시한다 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직접 들으니 더 와닿는다.

“아무튼, 지하로 내려간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찾아온 건 질병이었어. 오염된 대지, 역병의 안개가 차오른 거야. 밑에서부터 끝없는 악의를 가지고 말이지.”

“정확히는 델버튼에서 말이죠.”

“그걸 어떻게!”

“저도 나름대로 알아봤습니다.”

사실은 권능으로 정보를 얻은 거지만.

역병의 안개는 델버튼에서 나온다. 그게 뭔지 몰라서 그렇지.

“많은 걸 알고 있군. 대표님이 말해 준 건가. 상관없지. 맞아. 델버튼, 멸망의 의지를 지닌 그곳에서 안개가 생성되고 약한 지반을 좀먹으며 올라오지. 그게 루트야.”

“안개가 올라오는 루트.”

“다르게 말하면 델버튼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하고.”

“탐사대는 델버튼을 찾는 이들을 말하는 거군요.”

긴말 안 해도 알겠다.

역병의 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은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날인 동시에.

“멸망을 피할 수도 있는 날이라는 거네요.”

그동안 해결하지 못한 걸 보니 이전에 있던 루트는 쓸모가 없었다는 거고.

이번에 새로운 루트가 발견됐다 했지.

그래서 안개가 올라오는 타이밍을 파악하지 못해 이만한 피해가 난 거고.

즉, 새로운 기회가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는 말이네.

그런 자리에 내가 빠질 수 없지.

“읏차.”

“어디 가려고 그러나?”

“탐사대한테도 전해 줘야죠.”

난 생명수를 흔들었고.

“…몸 성히 돌아오게.”

갱블턴은 내가 건물을 나설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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