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뉴페이스
불타 버린 대지와 매캐하게 올라오는 검은 연기.
비릿한 혈향과 고약한 탄내가 어우러진 공간, 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변에 남은 거라고는 놈들이 죽으며 남긴 파괴된 장비와 전투의 흔적뿐.
압도적인 무위.
고작 몇 초만에 척살단 대부분이 사라졌다.
[아스트랄 레인보우가 종료됩니다.]
[1시간 동안 공격에 사용된 스킬의 데미지가 10퍼센트로 고정됩니다.]
그와 함께 버프도 사라졌지만.
“마, 말도 안 돼! 고작 한 명이다, 한 명이라고!”
“50층대에 있는 놈이 이럴 리가 없잖아!”
“제기랄, 이래서 한국 대형 길드가 밀린 건가.”
“불가능해… 불가능한 일이라고!”
척살단의 사기를 꺾는 건 충분했다.
60여 명이었던 놈들 중 살아남은 건 고작해야 10명.
부상자를 제외하고 싸울 수 있는 놈만 따지면 5명 정도인데.
[중량 팔찌 (C)]
-콰앙!
무게를 한껏 늘려 바닥을 내리찍었다.
건재함을 과시하는 것.
놈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아스트랄 레인보우의 반동으로 주력 스킬 대부분의 위력이 줄었다.
나도 싸우기 부담스러운 상황이지만 이왕 칼을 뽑은 거 덤빈 놈들을 확실히 제거하는 게 맞겠지.
괜히 어중간하게 끝내서 뒤탈을 만들 생각은 없다.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내는데 일단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로라 빔을 보고 와 준 사람인가 했지만.
“일이 꼬였군.”
권능으로 확인한 결과 그건 아니었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피로 젖은 골짜기.
그곳으로 일단의 무리가 더 들어오고 있다.
잘못 생각했다.
고작 다섯, 여섯 개 국가의 척살단이 힘을 합친 게 아니었다.
이곳 아시아Ⅰ서버에 있는 모든 국가가 힘을 합친 거지.
“지원군이 왔다!”
“우리가 이 정도로 끝날 거라 생각했나, 이블아이!”
“순순히 죽어라. 아직 대기조도 남아 있어!”
“도와줄 사람은 없다. 대기조가 일대를 장악하고 있으니까.”
새롭게 나타난 놈들이 대략 50명 정도.
말하는 걸 보아하니 이놈들 외에도 주변을 지키는 대기조도 있는 모양.
지원 온 놈들까지 쓸어버리더라도 한 번은 더 싸워야 한다는 건데.
이것 참, 나 잡겠다고 공을 많이 들였네.
그런데 말이야.
“너희가 상대해야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거든?”
“그게 무슨…….”
-짜아아악!
되묻던 놈의 목이 돌아갔다.
그대로 하얗게 변하며 사라지는 녀석.
[고유 능력- 뺨치기 (S)]
“그에에에엑!”
놈들의 결계를 빠져나온 건 나 혼자가 아니다.
베리 스트롱 한 킹갓영물님도 같이 나왔지.
신나서 떠들던 놈들이 1분도 안 돼 쓰러진다.
역시 덕춘이.
이걸로 잔당은 처리했고, 뉴페이스들과 놀아야 할 거 같은데…….
“설마 전부 당할 줄이야.”
주변을 훑어본 척살대원이 감탄한다.
“너희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아니, 그럴 일은 없어. 지금부터는 플랜 B거든.”
플랜 B?
한 번에 못 해치울 때를 대비해서 여러 작전을 짜 둔 건가.
치밀하다 못해 악독하다.
이 정도 노력으로 등반이나 하지 왜 선량한 사람을 괴롭히는 건지…….
말이 많은 스타일인 걸까.
아니면 내게 심적인 부담을 주려는 걸까.
놈들은 곧장 공격하지 않았다.
적당히 어울려 주자. 나도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
“플랜 A, 함정에 빠트려 죽인다. 플랜 B, 상상 이상으로 강할 경우 힘을 최대한 빼고 죽인다.”
“플랜 C도 있냐?”
“물론이지.”
그냥 던진 말인데 진짜 있었네.
놈이 씨익 웃는다.
“플랜 C, 우리마저 네놈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주변을 통제하고 있는 대기조까지 와서 너를 죽인다. 네놈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는 거지.”
“너희 전체가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럴 일은 없지, 왜냐…….”
그가 손을 내렸다.
“넌 절대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푸욱!
-푸슈슉!
일제 사격이 시작된다.
어지럽게 날아오는 공격들.
수십 개? 어쩌면 수백 개는 될 것 같은 화살 세례.
그 뒤로 섞여 날아오는 공격 스킬.
물량으로 밀어 버리겠다는 건가. 강력한 걸 떠나서 최대한 빠르고 많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로 도배해 놨다.
권능을 통해 정보들이 떠올랐지만 읽을 시간조차 없다.
-투두두두두두!
소나기처럼 내리꽂히는 공격들을 피하고 막아 내느라 바빴으니까.
마력도 많이 썼다. 체력도 소모했다.
[강철의 의지 (A) Lv.9]
[강체强體 (AA) Lv.7]
[물리 공격 내성 (A) Lv.9]
화살 따위는 몸으로 받아 내고.
[마법 무효화 (AA) Lv.5]
[화기 내성 (A) Lv.1]
[독 내성 (A) Lv.6]
[저주 내성 (A) Lv.4]
[전격 내성 (A) Lv.1]
[냉기 내성 (A) Lv.1]
각 속성이 담긴 마법형 스킬들은 패시브로 막아 냈다.
조금씩이지만 데미지가 쌓여간다.
아무리 나라도 100명이 넘는 인원을 상대로 싸우는 건 이번이 처음.
정신없이 공격을 쳐 내던 그때.
-푸슉!
-푸우욱!
척살단 서른 명이 그대로 자신의 팔을 잘랐다.
자해?
난데없는 상황에 어이가 없는 것도 잠깐.
“크읍!”
오른쪽 팔의 감각이 사라졌다.
갑옷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물.
쥐고 있던 검이 땅에 떨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공격과 알람에 가려졌던 스킬.
[비정한 거래 (AA) Lv.8]
-일정 비율의 희생양을 통해 적에게 동일 피해를 입힙니다.
-대상이 강할수록 비율이 달라집니다.
-현재 타깃, 매우 강함.
-30:1 비율이 적용됩니다!
-30명을 희생하여 상대방에게 동일한 부상을 입힙니다.
“미친놈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 해 두지.”
물량으로 덤비는 줄 알았더니만 이걸 노린 거였나.
눈가림용 스킬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딜 봐도 비효율적인 스킬.
서른 명의 척살단이 팔을 자르는 걸로 내 팔을 잘라 낼 줄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정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위였으나 다수가 강력한 적 한 명을 상대할 때는 유용한 방법이었고.
“회복할 틈은 주지 않는다, 공격!”
“기회를 놓치지 마라!”
“죽여!”
재빨리 포션을 꺼내 마시려던 찰나 놈들이 본격적인 공세를 가했다.
반도 마시지 못하고 포션을 던졌다.
말 그대로 내가 쉴 틈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이를 악물고 왼손으로 검을 들었다.
“들어와!”
발을 박차고 덤비는 놈들에게 돌격했다.
그대로 그어 버리는 검.
반대 팔로 검을 사용한다는 건 어색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빛을 발합니다!]
-서걱!
나도 그동안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낮에는 등반을.
잠들고 나서는 알리오스의 기억을 토대로 훈련을 지속해 왔다.
계승자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편히 자 본 적이 없다.
정신적인 피로감에 머리가 돌아버릴 거 같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럼에도 버티고 익혔으며 살아남았다.
그런 나한테…….
“네놈들로는 부족해!”
-푸화아아악!
가슴이 갈라진 척살단이 넘어가고, 그 뒤로 십여 개의 스킬이 날아온다.
화살과 투창도 섞여 있었으며.
“놈을 압박해라!”
“못 도망치게 잡아!”
양옆으로 파고든 놈들이 무기를 휘둘렀다.
개 같은 놈들.
팔을 잘라 버린 서른 명은 원거리에서 스킬을.
팔이 멀쩡한 놈들은 근접전을 벌였다.
철두철미하다 못해 지독할 수준.
-콰아아앙!
-찌유우우웅!
파이어 밤과 오로라 빔을 써 봤지만 아스트랄 레인보우의 후유증으로 파워가 나오지 않는다.
평소의 10퍼센트 수준이니 데미지가 박힐 리가 없지.
이러지 저러니 해도 척살단 역시 각 정부가 키워 낸 엘리트들.
각종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 기량도 뛰어났다.
몇몇 나가떨어지는 놈도 있었지만 소수.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있는 거라고는.
[심연의 눈동자 (A) Lv.8]
[집착하는 망령 (AA) Lv.1]
이 정도였지만 어디까지나 발을 묶는 정도.
한순간 멈춰 버린 놈들의 목을 날려 버렸으나 아직도 상대할 놈이 많다.
“그에에엑!”
그나마 덕춘이가 있어서 지금까지 버티는 거지.
멀리 떨어진 놈들 사이를 누비며 혼란을 주고 있다.
중간중간 혀를 뻗어 내팽개치거나 뺨따귀로 머리를 돌려 버리기까지.
등급 업 한 덕춘이의 강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3명이나 해치우다니.
아무리 놈들의 팔 한쪽이 잘렸다지만 대단한 성과다.
놈들도 덕춘이는 싸울 대상에 넣지 못했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걸 덕춘이에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
척살단도 멍청이는 아니어서 대응하기 시작했다.
출혈은 심하고 체력은 바닥.
스킬의 위력도 정상이 아닌 상황.
싸늘하게 가슴이 식는다.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
‘동귀어진.’
빠르게 권능을 사용하며 놈들을 살폈다.
척살단 안에서도 대장 같은 이가 있다.
이렇게 된 이상 대장급들과 함께 공멸하는 건 어떨까.
나머지 잔당은 안전지대에서 부활한 후 정리해도 늦지 않다.
그때는 50층대 모든 필드를 샅샅이 뒤져서 완전히 뿌리를 뽑아야지.
“그에에에.”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낮게 운다.
판단을 마쳤다면 행동은 빠르게.
검을 굳게 쥐었다.
권능을 통해 확인한 결과 척살단을 이끄는 대장급은 총 두 명.
한 명은 나와 검을 섞고 있는 녀석, 다른 놈은 덕춘이가 있는 원거리 공격대 쪽에 있다.
딱 좋다. 나와 덕춘이, 둘이서 한 명씩 없애면 되니까.
그럼 부탁한다.
“그엑.”
녀석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칭호- 밤을 부르는 자]
[밤이 찾아옵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옵텍터가 소환됩니다.]
아껴 두고 있던 칭호 효과를 사용했다.
먹구름이 들이밀며 찾아온 어둠.
옵텍터가 빠르게 날아다니면 놈들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파앗!
전력으로 앞으로 달렸다.
목표는 대검을 들고 있는 남자.
“이놈이!”
놈이 나를 향해 대검을 휘두른다.
뼈는 내준다.
대신.
[영혼 찢기 (S) Lv.2]
목숨을 취한다.
기능을 잃은 오른팔을 방패로 놈의 공격을 받고 그대로 검을 그었다.
-콰드드드드득!
-촤아아악!
내 팔이 비틀어지는 소음과 함께 놈의 목이 튀어 오른다.
위로 솟구치는 핏줄기.
“죽어라!”
“빌어먹을 자식이!”
-콰직!
-꾸드드득!
때를 놓치지 않은 다른 척살대원들이 공격을 가한다.
본인들의 대장이 죽었기 때문일까 손속에 사정은 없었고.
그나마 정상적으로 발휘되고 있는 패시브 스킬로 버티며 덕춘이 쪽을 바라봤다.
덕춘이도 성공했을까?
혀를 씹으며 상황을 살폈고.
“어?”
[해제 (AAA) Lv.3]
-콰과과과광!
익숙한 스킬을 볼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날아온 구체가 일순간에 팽창.
그대로 압축되어 있던 것들이 터지며 일대를 강타했고.
“뭔 레이저가 보이길래 와 봤더니 이러고 있었어?”
“핥짝이?”
먼지가 피어오르는 곳.
반가운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제삼자의 개입.
불의의 기습을 받은 놈들이 바닥을 기었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놈들은 경계심을 끌어 올리며 무기를 겨누었다.
“콱, 씨. 어디다 칼을 들이밀어!”
뭐, 핥짝이 앞에서는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다.
핥짝이 역시 괴물이라는 건.
특유의 생동감 있는 스텝.
긴 리치와 유연한 몸을 이용한 타격.
게다가.
[압축 (AAA) Lv.4]
[해제 (AAA) Lv.3]
주요 스킬을 이용한 공격까지.
비록 생명체는 압축시킬 수 없지만 척살단이 쓰는 무기와 방어구는 상관없었고.
그 말의 뜻은.
-카아아아앙!
“크허아아악!”
“끄그그극!”
놈들이 착용한 모든 장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거였다.
갑옷이 압축되고 터지고.
안에 있는 몸이 걸레짝이 되는 건 당연.
“나도 구경만 할 수는 없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힘이 쭉 빠졌지만 아직 싸울 수 있다, 덕춘이도 있고.
“흐아압!”
기합을 내지르며 전투에 참가.
약 10분 후, 나와 덕춘이, 핥짝이의 활약으로 척살단 놈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거 같지만 결국에는 이겨 냈다.
괜히 뿌듯해져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태가 말이 아니네.”
“땡큐.”
잠시 투구를 들어 핥짝이가 준 포션을 쭉 들이켰다.
덕분에 살았다.
잠깐만…….
아직 끝난 게 아니구나.
“근처에 놈들이 더 있을 거야. 골짜기를 통제하는 놈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아, 오면서 봤지. 걔네는 괜찮아. 지금쯤이면 다 정리했을걸?”
“정리?”
누가?
난 눈을 끔뻑였고.
“모야. 다 끝났어?”
골짜기 너머, 새로운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권능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핥짝이와 함께 움직이는 건 한 명밖에 없으니.
“…냥냥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