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23화 (223/740)

223화 선물 교환식

내가 꺼낸 청룡의 눈물에 경악한 사람들.

등반가들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NPC들은 아닌 것 같았고, 반응은 뜨거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에는 식도락에 취미가 있어 모인 사람들.

이걸 어디에다 써먹나 했더니만 이렇게 쓰게 되네.

원래는 이 자체를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차라리 잘됐지.

‘청룡의 눈물 하나 주는 거랑 박재경이의 요리랑 합쳐서 주는 것, 당연히 후자가 더 쎄게 먹힐 테니까.’

속으로 웃으며 잔을 잡았다.

빛의 속도로 70개의 잔을 가지고 온 직원들.

평소에도 빨랐지만 지금은 더욱 빠른 것 같다.

차분한 듯 보이지만 눈에서는 열망이 불타오르는 중.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지만 내가 들고 있는 술병을 훔쳐보는 게 느껴진다.

이 정도로 귀한 술이었나?

가보로 지닐 정도면 그럴 수도 있지.

사실 술에 큰 관심이 없어서.

“보시다시피 양이 많지 않아서 한 분당 한 잔이 고작이겠지만 즐기시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괜히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가능한 고르게 잔마다 술을 따랐다.

꿀벌주랑은 다르다. 좀 더 청아하지만 묵직한 냄새.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지만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고, 당장이라도 마시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궤, 궤에에.”

“어허. 덕춘아, 네 몫 남겨 줄 테니까 참아라.”

덕춘이도 마찬가지.

찰싹. 슬그머니 손을 내뻗는 덕춘이의 손을 내쳤다.

찌릿. 날 노려보기는 했으니 순순히 물러나는 녀석.

헤그릭과 있으면서 술맛 한번 보더니 정신을 못 차리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소소한 다툼이 있었지만 술을 따르는 건 문제없이 진행되었고.

“자, 드셔 보시지요. 대표님, 건배사 한번 해 주세요.”

모든 이에게 잔이 나누어졌을 때 헬다잉 키친의 대표 브루헴에게 건배사를 권했다.

그리 길지 않은 회사 생활이었지만 한자리 잡으신 분들이 이런 걸 좋아하시더라고.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는 거.

성향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크흠, 쑥스럽군요. 건배사라니…….”

다행히 브루헴은 그리 싫지 않은 눈치였다.

자리에 일어선 그가 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도 충만한 하루를 보내며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길 바라며, 늙은이의 오랜 친구의 제자를 만났음에 감사합니다. 또한 이러한 자리에 모여 주신 분들의……”

세상에나.

부장님 포지션이었나.

끊길 듯 끊기지 않는 건배사가 한차례 지나가고.

“건배!”

-짜안!

기다리던 이들이 한 번에 잔을 울렸다.

나와 박재경도 마찬가지.

먼저 한 입 거리로 만든 안주를 입에 넣고 씹었다.

과하지 않은 육즙과 뒷맛을 잡아 주는 미묘한 시큼함.

은은한 달콤한 향이 입안을 감돌았고.

“크으!”

절묘한 타이밍.

잔을 들이켜자 입안에 남아 있던 맛과 술의 향기가 섞이며 엄청난 풍미를 만들어 냈다.

자연스레 코로 내뱉는 숨에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황홀함이 느껴졌고.

“그에에에!”

마력이 깃들었다는 게 빈말이 아닌지 몸에 힘이 차올랐다.

덕춘이 역시 마찬가지.

오랜만에 괴성을 질렀고.

[덕춘(카오스 개구리)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C → B등급]

[카오스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집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성체기에 접어듭니다. 고유 능력 일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고유 능력은 그동안의 행적을 통해 정해집니다.]

“오오오!”

덕춘이의 등급이 상승했다.

B등급, 성체기!

희미하게 남아 있던 꼬리가 사라졌다.

성체에 접어들었다는 증거.

그와 함께 고유 능력을 얻었으니.

[덕춘(카오스 개구리- B)]

-특성: 산성(AAA), 회복(AAA), 독(AA), 화염(AA), 외갑(AA)

-고유 능력: 뺨치기(S)

“음?”

“궤?”

뺨치기요?

물론 나한테 많이 하기는 했는데 S등급은 너무한 거 아니냐?

나도 하나밖에 없는 게 S등급 스킬인데.

이제 막 B등급으로 성장한 녀석이 S급은 좀 그렇지.

한낱 미물인 개구리 주제에 주인의 존엄성을 넘봐? 생태학적으로 양서류가 영장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털도 없고, 심장도 2심방 1심실인 녀석이.

이 몸은 2심방 2심실이란 말이야. 어? 가아아암히 체온 조절도 못 하는 변온 동물이 S급을 넘봐!

…라고 생각할 뻔했습니다, 덕춘 님.

“그에에에.”

“아, 알았어. 손 내려 봐. 미안해.”

장난이었어요. 왜 그러십니까.

정성을 담아 B등급으로 성장하신 스트롱 덕춘 님을 쓰다듬었다.

듬직한 자태하며, 눈빛에서 느껴지는 포스가 장난 아니십니다.

때깔 좋은 거 봐. 빨판만 봐도 반하겠어.

“그에엑.”

이제야 마음이 풀렸는지 덕춘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째 역할이 바뀐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일단 넘어가자. 기강은 나중에 잡던가 하자.

왜냐.

지금은 음식과 술맛을 본 NPC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거든.

“오오오옷! 이 맛은, 마치 생명이 꽃피어 나는 초원에 있는 것 같구나!”

“혓바닥이 즐거움에 춤을 춘다! 감동, 감동이로다!”

“크으으윽! 내 생에 이런 맛을 볼 줄이야. 태어나길 잘했어!”

비단 초대받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대표인 브루헴 역시 감동에 젖었는지 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

박재경 역시 마찬가지.

나야 워낙 막입이라, 맛있는 건 알겠는데 저렇게 눈물 흘릴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나만 멀뚱거리기는 뭐하니까.

“와! 맛있다!”

“궤엑!”

립 서비스 한번 해 줬다.

단 한입뿐인 서비스라 더욱 여운이 남는 순간.

[청룡의 눈물의 효과!]

[이곳에 모인 이들이 마음을 엽니다.]

[그룹, 미식가에 소속된 NPC들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칭호- 미식가의 요리사를 획득합니다!]

파티에 초대된 이들의 호감도를 얻을 수 있었다.

무작위로 모인 줄 알았는데 하나의 그룹이었구나.

그뿐일까.

요리에 관련된 칭호까지 획득했다.

보조기는 하지만 요리에 참가해서 얻은 것 같은데.

[미식가의 요리사- 칭호]

-미식가 그룹을 감동시켰습니다.

-당신의 요리는 사랑과 기쁨, 희망이 될지도 모릅니다!

-요리에 보조치가 붙습니다.

-요리에 옵션이 붙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꽤 유용해 보이는 효과가 붙어 있다.

안 그래도 요리 실력이 대단치 않은데 이렇게라도 보조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좋지.

이게 다 박재경과 함께한 덕분.

기쁜 마음에 엄지라도 세워 주려고 했건만.

“너무 맜있수우우.”

“어… 그래. 울지 마라.”

질질 짜는 모습을 보니 할 말이 쏙 들어간다.

본인이 만들고 본인이 감탄한다라…….

모르겠다, 이놈의 미식가 생태계는.

나야 어찌 됐든 감동의 여운은 길게 흘렀고.

“미안하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었구나. 너희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충분히 있어!”

박재경에게 시비를 걸었던 해적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

아저씨 태세 변환 잘하네.

“언제 67층에 올라오면 찾아와라. 나 푸그리드, 오늘의 감동을 잊지 않겠다!”

그런 그가 던져 준 물건.

[해상 군도- 발자칸의 귀인 목걸이]

-67층에 존재하는 해상 군도 발자칸

-그곳을 지배하는 해적 푸그리드의 귀인임을 증명하는 목걸이

-몬스터보다 해적이 무서운 그곳에서 안전을 보장합니다!

그냥 술주정뱅이 해적인가 했더니만 한 구역의 패자였던 것인가.

새삼 다르게 보인다.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냈다, 등반가들!”

“마주치면 차라도 한잔 대접하지.”

“죽지 말고 위로 올라오게나.”

다른 NPC들도 우리의 안녕을 빌어 줬고.

“헤그릭의 제자, 제대로 배웠네요. 덕분에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잊지 못할 추억이에요. 이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나중에 따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브루헴 대표 역시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짝짝.

그가 박수를 친다.

마련되었던 주방이 치워지고.

“그럼 이어서 선물 교환식을 진행하죠.”

우리를 시작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 * *

헬다잉 키친의 파티가 끝나고.

“다들 다음 모임 때까지 건강하게나.”

“나 먼저 갑니다, 잘 가요들.”

하나둘 NPC들이 역소환됐다.

다들 손에는 한 보따리씩 선물을 가진 채.

선물 교환식. 체키 프랑켄이 말했던 대로 뭘 준비하든 그 이상의 것을 받아 가는 이벤트였다.

남은 사람은 이제 몇 안 되는데.

“만남이 짧아서 아쉽네요, 또 만날 수 있겠죠?”

“먼저 탑 밖으로 나가지만 않는다면요.”

“그건 걱정 마세요, 으하하하!”

먼저 보송송이.

커다란 근육을 꿈틀거리며 웃는다.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몸이 저렇게 된 거지… 버근가.

속으로 잡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저도 이게 돌아가야겠네요. 슬슬 차례가 된 거 같아서, 가기 전에 이거!”

녀석이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건넨다.

“이건…….”

“하하하하! 좋은 건 나눌수록 좋은 거죠. 만드는 김에 여러 개 만들었습니다!”

다름 아닌 본인이 입고 있는 티셔츠.

디자인은 좀 다르다.

핑크펑크의 서브 보컬 박예은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으니까.

“제가 입고 있는 건 핑크펑크 전체가 모인 사진이고요, 멤버마다도 다 만들어 뒀지요. 이블아이한테는 최애 티셔츠를 주겠습니다.”

“아… 하하.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럼 다음에 봐요.”

-우우우웅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보송송이.

음… 나한테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하다만 기왕 얻은 거 가지고 있어야지.

그보다 나한테 다가오는 놈이 있었으니…….

“이블아이.”

“왜.”

도로 가면을 쓴 스마일캡이 날 바라본다.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보마. 아, 30층대에서 루키들을 건든 건 걱정 마. 아무도 신경 안 쓰니까.”

“대형 길드와는 연을 끊었나 보군.”

“탑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 정도 인연은 버렸어.”

툭, 그가 목을 건든다.

“폭탄을 심은 놈들이기도 하고. 내가 속한 루키 그룹들도 마찬가지. 큭. 크흐흐흐. 내가 있는 곳까지 빨리 올라왔으면 좋겠군. 놀 만할 텐데. 흐흐! 재밌겠어!”

역시 이놈은 좀 이상하다.

정신에 문제가 있든지, 뇌에 문제가 있든지,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 참, 그리고…….”

녀석이 내 옆으로 몸을 기울인다.

“재경이 형한테 허튼짓하면 죽는다.”

“그럴 일 없으니 곱게 가라.”

“크흐흐흐! 그러지. 재경이 형, 저 갈게요!”

스마일캡이 박재경에게 소리쳤고.

“잘 가! 몸 건강하고! 친구들도 생겼다니 마음이 좀 놓인다, 자슥아.”

“네! 형도요!”

-우우우웅

내게 뭔가를 던진 녀석이 역소환됐다.

뭐야, 뭘 준 거지?

보송송이도 그렇고 갈 때마다 하나씩 주네.

확인해 보니 쪽지다.

일단은 챙겨 두자. 별 시답지 않은 거면 갖다 버리면 되지.

이제 남은 건 나와 박재경뿐.

그런 우리에게 다가오는 체키 프랑켄.

시간이 됐다.

“대표님께서 부르십니다.”

“가죠. 그만 챙기고 가자.”

“남기면 아깝잖수. 갑니다, 가!”

남은 음식을 챙기던 박재경에게 소리치자 후다닥 따라온다.

연회장을 나서 도착한 곳은 커다란 집무실.

벽면 전체를 채우고 있는 책들.

원목 테이블에는 각종 서적과 서류가 올려져 있다.

“왔군요, 헤그릭의 제자분들. 앉아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소파를 가리킨다.

사양 않고 앉지.

“체키, 수고했습니다.”

“별말씀을.”

우리를 안내했던 체키 프랑켄이 나가자 맞은편에 자리 잡은 그가 말문을 연다.

“오늘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진데요, 뭘.”

“과연 헤그릭의 제자분들.”

“거, 말씀 중에 미안한데. 우리 스승님에 대해 아십니까? 보니까 다들 아는 눈치더만.”

나도 궁금했다.

헤그릭. 그냥 평범한 NPC인 줄 알았는데 어째 아는 사람이 많다.

반응도 그렇고.

“이런, 헤그릭이 아무 말도 안 했나 보군요.”

브루헴이 손가락을 튕기자 책상에 있던 액자 하나가 날아온다.

사진 속에 있는 두 남자.

한 명은 브루헴.

젊었을 때인지 주름이 없었고, 그 옆에는 머리가 풍성한 헤그릭이 있다.

“헤그릭은 저와 함께 헬다잉 키친을 만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네?”

헬다잉 키친을 만들었다고?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요. 한 번은 헬다잉 키친 자체가 사라질 뻔한 사건도 있었고, 헤그릭은 모든 걸 책임지고 나갔습니다. 저에게 모든 권리를 넘긴 채로 말이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브루헴도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생각이 없는 거 같고.

그가 우리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아직 선물 교환식을 끝내지 못했죠. 헤그릭의 제자라… 그도 선택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멸망의 전조도 나타났고요.”

멸망의 전조는 덕춘이를 말하는 거겠지.

선택을 했다는 건 헤그릭이 박재경을 계승자로 삼았다는 거고.

“헤그릭과의 오랜 약속을 지킬 때가 됐군요. 여러분이 준비해 준 멋진 식사에도 보답해야 하기도 하고요. 이미 무엇을 할지는 정해 놨습니다.”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이 시간부로 헬다잉 키친은 여러분을 지지할 것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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