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22화 (222/740)

222화 헤그릭의 제자

예상치 못한 상황.

사실 헬다잉 키친 파티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먹을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설마 이곳에서 상위층 헌터를 만나게 될 줄이야.

보송송이도 놀라웠지만 NPC와 정면으로 맞부딪칠 수 있는 등반가가 있다는 걸 확인한 건 엄청난 소득이었다.

그것도 박재경이랑 아는 사이라니.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는데.”

“좀 바빠쓰. 스승한테 가르침도 받고 그러느라. 너도 알잖어, 나 커뮤니티 잘 안 하는 거.”

“알아요. 그래도 너무했어요. 10년 동안이나 입 다물고 있을 줄이야.”

“하하하하! 그러게. 시간 참 빠르구만, 그제?”

반가운 듯 웃는 박재경.

NPC들도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을 끔뻑거렸고, 보송송이 역시 놀란 눈치였다.

이해는 된다.

박재경이 탑에 들어온 지 오래된 만큼 등반하면서 만난 사람도 있을 거 같았으니까.

대부분은 밖으로 나갔겠지만. 극소수, 온갖 시련을 이겨 내고 기어이 상위층에 도달한 인물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은 곧.

‘저 녀석도 10년 가까이 탑을 오르고 있다는 거네.’

10년 동안 84층.

긴 시간이다.

“맞다, 여기 형씨는 스승님의 두 번째 제자. 일로 오슈, 동생 한 명 소개시켜 줄라니까.”

박재경이 내게 오라며 손짓한다.

순간 이목이 내게 쏠려서 민망한 감도 있었지만, 조용히 넘어가기에는 너무 큰 기회.

상위층은 미지의 공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거다.

여기에 모인 NPC들은 등반가에게 적대적이라고 하지만 같은 등반가인 스마일캡에게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감을 갖고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호오, 네놈이?”

음?

뭔가 말투가 바뀌지 않았나?

퀭한 눈에 스산한 기운이 깃든다.

비틀어진 입꼬리.

나는 슬쩍 내밀었던 손을 가져왔다.

손끝이 간지럽다.

당장이라도 무기로 쓸 만한 걸 쥐어야 할 것 같은 기분.

“너였구나? 루키들을 몰살시킨 게.”

“루키? 설마…….”

“반가워. 나도 루키 출신. 구룡이 만들어질 때쯤 들어왔지.”

이준석이 말했던 루키 출신 그룹 중 한 명인가.

처음 본다. 구룡 길드의 루키는.

구룡이 어떤 곳이냐.

대한민국 대형 길드 서열 1위.

국내 보유 S급 헌터의 절반을 가지고 있는 곳.

대기업이 모태인 길드였으며, 정부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안전지대를 관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

탑의 통제는 다른 길드에 맡긴 채 소수의 정예를 상위층으로 보내고 있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목으로 간다.

저 사람도 목에 제약이 걸려 있을까.

“큭!”

내 눈길을 알아차렸는지 웃음을 터트린 녀석이 옷깃을 내린다.

아무것도 없다.

손을 오므렸다 펼치는 녀석.

퍼엉. 장난스럽게 입을 뻐끔거린다.

“그건 없어. 나보다도 위로 못 올라간 사람이 걸어 둔 것 정도는 그냥 풀지.”

맞는 말이다.

이준석과 대화할 때도 제약은 풀린 후일 거라고 추측했었다.

그래도 직접 확인하는 건 다른 이야기니까.

“잘도 내 귀여운 후배들을 죽였더라? 널 어쩌면 좋을까?”

놈이 내 주변을 빙빙 돈다.

흘러나오는 살기.

보통은 여기서 졸릴 수도 있는데.

“어쩌기는 뭘 어째, 맞을 짓 해서 맞은 놈들 가지고.”

나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 말이지.

여기서 싸워도 상관없다.

상위층 헌터가 어느 정도인지 겪어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죽어 봤자 내게는 무한 코인이 있으니 바득바득 올라가서 복수하면 그만이다.

그때까지 이 녀석이 탑에 있다면 말이지.

이런 걸 떠나서도.

‘박재경도 보고 있고, 아무리 막 나가는 놈이라도 파티를 완전히 망치는 건 부담이 크지.’

몇 가지 상황을 봤을 때 놈이 물러설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 나오려나.

난 느긋하게 반응을 기다렸다.

다만 여차하면 바로 반격할 수 있게 준비는 해 두고.

이미 머릿속에서는 전투가 벌어졌을 때의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었다.

승산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엿을 먹이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큭! 크흐흐흐흡!”

놈이 웃음을 터트렸다.

몸을 들썩이던 녀석이 내게 손을 내민다.

“아, 정말 재밌는 녀석이 늘었네. 스마일캡이라고 불러라.”

“그러도록 하지.”

악수를 나누는 우리를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박재경.

“이 녀석이 낯을 많이 가려서 어쩌나 했는데 사이좋게 지내면 좋지, 안 그렇수?”

“가능하다면.”

“재경이 형, 난 마음에 들어요. 큭!”

마음에 드는 거 맞냐.

이 웃음 많은 녀석이 정말 도움이 될까.

괜히 이상한 놈이랑 엮인 거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일단은 지켜보지 뭐.

분위기를 틈타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까도 했지만.

“감히 날 무시해? 버러지 같은 것들이!”

샴페인에 젓은 모자를 벗어 던진 해적이 호통을 질렀다.

잠시 잊고 있었네, 관심 밖의 대상이라.

어쩌다 보니 나도 싸잡혀서 욕을 먹는 거 같은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푸그리드 님, 죄송합니다. 옷부터 닦으시지요.”

“체키 프랑켄.”

헬다잉 키친의 지부장, 체키 프랑켄이 중재에 나섰다.

한 수 물러서는 해적.

오호. 그만큼 강적이라는 건가.

아니면 헬다잉 키친의 지부장 자리가 생각 이상으로 높은 걸까.

체키가 고개를 숙인다.

“저분은 제 권한으로 초대했습니다.”

“등반가를? 그것도 VIP도 아닌 녀석을? 아무리 지부장이라도 권력 남용일 텐데?”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렇습니다만.”

스윽, 그가 해적에게 몸을 기울인다.

“저분은 헤그릭 님의 제자입니다. 이곳에 올 자격이 충분히 되지요.”

“헤… 뭐? 어… 헤그릭!”

해적이 눈을 부릅뜬다.

다른 NPC들도 마찬가지.

“헤그릭이라니. 은퇴한 거로 알고 있었는데.”

“과연 그런 거였군. 그렇다면 납득이 되지.”

“설마 등반가를 제자로 삼았을 줄이야.”

“확실한 거 맞아? 의심스러운데.”

“아무리 그래도 등반가를… 언제 밖으로 나갈 줄 알고.”

“착오가 있던 거 아닐까요?”

웅성거리는 사람들.

헤그릭이 가지고 있는 이름값이 상상 이상으로 높은 모양.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두 알 정도면 말이지.

정작 제자인 박재경과 나는 아는 게 없었지만.

묘한 긴장감과 의심, 호기심이 깃든 눈이 우리를 훑는다.

차분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어수선한 기류만 감도는 그때.

-빰빠바밤!

“대표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 끝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대표의 입장을 알렸다.

단번에 자세를 바로잡는 이들.

본 무대에 한 노인이 들어온다.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허리는 반듯했으며, 깔끔하게 입을 슈트에는 헬다잉 키친의 문양이 각인된 배지가 달려 있었다.

“다들 반갑습니다. 다들 파티는 즐기고 있으신가요?”

멋들어지게 인사를 건네는 대표.

[브루헴 카이트- NPC]

-헬다잉 키친의 대표!

-헬다잉의 모든 인원이 그를 따릅니다.

-배포가 크지만 조심하세요.

-원한은 더 큰 원한으로, 은혜는 더 큰 은혜로 갚으니까요.

권능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만 봐도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겠다.

이름만 대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헬다잉 키친이라는 집단을 이끄는 리더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헬다잉 키친, 그곳에 적혀 있던 주의 문구를.

-단순 변심으로 인한 주문 취소는 불가합니다.

(이로 인한 영업 방해 및 음해 적발 시, 식재료 수급팀이 찾아갈 수 있으니 이 점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

다.)

말이 출장 뷔페지, 명분만 있으면 무력 단체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겠지.

당장 초대받은 이들도 정중하게 그를 맞이하고 있고.

브루헴이 스윽 좌중을 훑는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런 거 같지는 않군요. 본의 아니게 소란을 엿듣기도 했고요.”

소란이라는 단어에 해적이 얼굴을 붉힌다.

다른 NPC들도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리고 있고.

“헤그릭의 제자라는 게 거짓은 아니겠죠, 두 신사분?”

헬다잉 키친의 대표, 브루헴이 나와 박재경을 바라본다.

온화하지만 답답하게 죄어 오는 느낌.

스마일캡도 이 순간만큼은 나서지 않고 숨을 죽였다.

나와 박재경만 빼고.

동시에 인벤토리를 열어 메달을 꺼냈다.

헤그릭에게 받은 제자 증명 메달.

이걸 왜 주는가 했더니만 이럴걸 예상하고 있던 건가.

“확인해 보시죠.”

“이거면 됐수?”

눈을 가늘게 뜨던 그가 환하게 웃는다.

“틀림없는 진품이군요! 때마침 잘됐습니다.”

그가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뒤따르는 직원들.

NPC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린다.

“선물 교환 이벤트가 시작될 차례! 실례가 아니라면 헤그릭 제자분들의 실력을 볼 수 있을까요? 저에게 큰 선물이 될 것 같군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수다!”

박재경이 당당히 외친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감은 넘친다.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이 좋은 걸 혼자 즐길 수는 없죠. 이곳에 초대된 분들에게도 해 줄 수 있습니까?”

“맡겨만 주쇼. 치사하게 누구한테는 주고 누구한테는 안 주지 않으니까.”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준비해 주세요.”

짝짝.

브루헴이 손뼉을 치자 대기하던 직원들이 빠르게 움직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단상 일대가 주방으로 변했고, 나와 박재경에게 다가온 이들이 조리복을 입혀 줬다.

잠깐만…….

“나도?”

“당연하지요. VIP께서도 헤그릭 님의 제자지 않습니까.”

“그, 그렇죠. 하하하.”

난 따로 선물을 준비해 왔다고!

억울한 마음이 솟아올랐지만 이제 와서 빠지기는 애매한 상황.

이렇게 된 이상 작전을 바꾼다.

“이봐, 뭐 만들지 생각해 뒀어?”

“으음. 재료를 보고 정할 생각인데. 보니까 선택지가 많구만. 으으, 선택 장애 오겠수.”

정면에는 조리 공간.

좌측에는 오븐이나 화덕 같은 덩치 큰 기구들이 배치되었고, 우측에는 각종 신선한 재료와 조미료가 깔끔하게 준비됐다.

어지간한 건 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

녀석은 고민하는 거 같지만 난 해야 할 게 명확히 보였다.

NPC들의 기대감,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모든 걸 조합하면 떠오르는 건 한 가지.

“바로 떠오르는 거 아니면 이런 건 어떨까 하는데.”

박재경에게 내가 생각한 것들을 속삭였다.

구체적이지는 않고 아이디어에 가까운 말들.

요리에 대해서는 이 녀석이 잘 아니까.

“으으음… 확실히 괜찮은 생각이기는 한데, 스승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하고. 다만 그러려면 그게 있어야 하지 않겠수?”

“걱정하지 말고 진행해 줘, 날 믿으라고.”

“에잇! 까짓것 해 봅시다! 형씨는 보조해 주쇼. 복잡한 건 내가 할 테니까. 아! 이참에 상점창에서 클린 스킬 사 두고!”

“오케이.”

바로 상점창에서 클린 스킬을 사서 익혔다.

[클린 (F) Lv.1]

오랜만에 보는 F급 스킬.

깜찍하기 그지없었지만 효과는 확실했고.

“덕춘아, 너도 와.”

“그에에엑.”

볼록 올라온 배를 문지르고 있던 덕춘이도 합류.

“불 올립시다! 최대한 화끈하게!”

“라져!”

-화르르르륵!

폭발 전문인 내가 불을 쏟아내는 것과 함께 요리가 시작되었다.

* * *

무려 70인분.

초대를 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직원들까지 먹이겠다는 강한 의지의 결과였다.

처음 겪어 봤다, 이만큼 많은 양을 한 번에 조리하는 건.

체력은 괜찮은데 심적으로 지친다.

이 짓을 1시간째 집중력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박재경이 새삼 대단해 보일 지경.

아니, 1시간 만에 70인분을 만든 게 더 신기하다.

초인이기에 가능한 업적.

녀석의 어깨에 올라탄 덕춘이가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주는 시점.

“이걸로 완성.”

박재경이 마지막 한 접시를 만들어 냈다.

이미 만들어 둔 것들은 헬다잉 키친 직원들이 테이블로 이동시켰다.

직원들 몫은 파티장 옆 별관에 마련된 상황.

아무래도 직원들 입장에서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오오. 이게 무엇인가?”

“메스토카 유충과 크레아돈의 지느러미살, 애플팝으로 기름진 걸 잡고 심해 소금으로 간을 맞췄수다. 크라켄 다리 껍질도 구워서 식감을 살렸고. 거기에…….”

“육류와 어류를 섞었다라… 자칫 잘못하면 밸런스가 안 맞을 텐데요.”

“그래서 특별한 소스를 만들었지. 이건 영업 비밀이라 말은 못 해 주는데 피를 섞었다는 것 정도는 알려 드리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직접 브루헴에게 서빙한 박재경이 요리에 대해 설명한다.

음, 과연…….

하나도 모르겠다.

다들 놀라는 눈치라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일 뿐.

내가 준 메스토카 유충의 살덩이와 크라켄 다리가 사용됐다는 것만 안다.

길다면 긴 설명이 끝나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을 장식할 게 남아 있으니 기대해도 좋수.”

박재경이 내게 눈짓한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인가.

내가 박재경에게 제안한 건 하나.

‘술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식을 만들자’였다.

헤그릭의 요리 철학도 챙기고, 이곳에서 제공한 것 외에 따로 준비한 재료도 있다는 걸 어필.

이미 파티에서 배를 채운 이들이 부담 없이 즐기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물론 쉽지 않다.

요리 자체도 훌륭하지만 기본적으로 안주.

그에 걸맞은 술이 필요했다.

적어도 파티에 있는 것보다 양질인 물건으로.

우리가 마신 것도 기본 B등급, 중간중간 A등급까지 섞여 있는 상등품이다.

즉, A급 이상의 주류를 70명이 마실 만큼 제공해야 한다는 건데.

‘아슬아슬하지만 딱 한 잔씩 돌린다면 가능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앞으로 나왔다.

내게 모이는 시선.

난 인벤토리에서 그걸 꺼냈다.

49층 퀘스트 보상.

헤그릭에게 줬던 요정의 벌꿀주보다 대단한 물건.

[청룡의 눈물 (AAA)]

-동양의 영물이 흘린 눈물로 만들었다는 명주!

-프레그렌트가의 시조가 이 술을 통해 이종족과의 거래를 텄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엘프, 드루이드, 요정, 수인할 것 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습니다.

-마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건강이 좋아집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집니다.

-모두에게 우호적으로 변합니다.

술 주제에 AAA등급을 먹어 버린 명주.

“세상에! 저게 실존했단 말인가?”

“허어… 말로만 들었던 것인데.”

“진품인 게 확실해. 저 귀한 걸 어떻게!”

여기저기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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