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헬다잉 키친 파티
초대장이 열리는 것과 함께 나와 박재경은 편지 봉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포탈과는 또 다른 느낌.
헬다잉 키친의 초대는 뭐랄까…….
어디를 통과한다기보다는 몸이 접혀서 이동되는 느낌이 강했다.
기묘한 감각이 이어지는 것도 잠시.
[헬다잉 키친 파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도착했군.”
“어고고, 빙빙 돕니다.”
박재경이 엄살을 부렸지만 사뿐히 무시해 주고 주변을 살폈다.
탑을 오르다 보니까 낯선 곳에 오면 뭐가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들어서 말이지.
“어째 이제 막 시작한 거 같수?”
“그래 보이네, 초대된 사람도 다양하고.”
NPC뿐만 아니라 등반가로 보이는 이들도 있다.
각 테이블에는 꽃과 향초, 식기가 준비되어 있었고, 헬다잉 키친의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실 것과 간단한 다과를 들고 돌아다니는 이도 있었고, 틈틈이 음식이 모자라지는 않은지 확인하기도 했다.
초대된 거로 보이는 이는 대략 40명. 웨이터를 포함해 헬다잉 키친의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30명가량.
사람들이 많음에도 답답하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공간이 크기 때문이겠지.
조명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어디 사교 회장에서나 볼 법한 풍경.
괜히 눈치가 보인다.
“우리 드레스 코드는 괜찮겠지?”
“어. 따로 말은 없었으니 상관없지 않겠수? 나도 옷 없는데.”
나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완전 무장 한 상태.
따로 흙이 묻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은근 신경이 쓰이던 찰나였는데.
“형씨, 저기 우리 같은 사람도 있네. 상관없나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틈틈이 우리와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보였다.
NPC야 차려입은 경우가 많았지만 일상복을 입은 자도 있다.
등반가의 경우는 대부분 장비를 착용한 채였고.
그런 우리에게 다가오는 웨이터 한 명.
“고객님, 연회실 내에서는 무기를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도록 하죠. 따로 뭐 해야 할 건 없죠?”
“그 외에 제한은 없습니다. 참고로 대표님께서는 선물 교환식 때 입장하실 예정입니다. 모쪼록 즐겨 주시기를.”
무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진다.
좋았어. 이제 눈치 볼 거 없다.
“우리도 가자.”
“흐흐. 좋수.”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준비된 것들을 즐겼다.
과자 같은 것도 한 입 먹어 보고, 샴페인도 한 잔 들었다.
박재경이야 뭐.
“오오. 이거 밸런스가 좋은데? 안에 뭘 넣은 거지?”
거의 해부하다시피 음식을 즐기는 중.
한쪽에 마련된 무대에서 연주가 흘러나오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한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있다.
디퓨저? 아니면 향수인가.
초대받은 사람들도 안면이 있는 이들과 어우러져 이야기를 나누고.
음악과 잡담이 섞여 적당히 들뜬 분위기가 연출된다.
나야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리 흥이 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활발하게 돌아다닐 생각도 없었다.
이곳에 모인 이 중 등반가는 극히 적다.
초대된 이들 대부분이 NPC니까.
이유야 여러 개겠지. 등반 중이라 못 온 사람도 있을 거고, VIP인 사람 자체가 적은 걸 수도 있다.
나야 처음부터 VIP로 분류돼서 잘 모르고 있었는데, 무심한 척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니 쉽게 되는 것도 아닌 모양.
“결국 VIP가 됐군그래.”
“그러려고 돈을 얼마나 썼는지 알아? 들으면 놀랄걸?”
“나처럼 식재료라도 조달하지.”
“내가 있는 곳은 뭐가 없다고. 써먹지도 못하는 몬스터들만 가득해, 쯧.”
NPC의 경우는 상당한 소비를 하거나 헬다잉 키친과 협력 관계에 있어야 했고.
“30층 전에 스페셜 메뉴 시켰으면 바로 VIP였는데.”
“따로 안 알려 주니까. 누가 알았나, 층이 높아질수록 VIP 되기 힘든걸.”
등반가의 경우에는 저층일 때 비싼 메뉴를 주문해야 했다.
오른 층이 높을수록 되기 힘들다는 것.
당연한 이야기지. 똑같은 100,000포인트라도 20층대를 오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 크게, 50층대를 오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작게 느껴질 테니까.
난 운이 좋았군.
덕춘이 덕분이지만.
슬쩍, 샐러드바에 올라가 식사를 하고 있는 덕춘이를 바라봤다.
몇몇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제지하지는 않는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이곳에 모인 이 중에는 테이머나 소환사로 보이는 이들도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아예 소환수나 테이밍 몬스터가 있을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도 했고.
그나저나…….
‘내가 아는 NPC가 없네?’
그래도 꽤 많은 NPC들과 교류했다고 생각했는데.
NPC라고 전부 초대받는 건 아니니까.
그저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지나가면서라도 본 적이 없다는 게 신경 쓰였다.
아마 50층대 이상에 머물고 있는 이들인 거 같은데.
지금 미리 안면을 터 두는 편이 등반할 때 좋을까?
슬금슬금 NPC 옆으로 다가가려던 때.
“NPC들이랑은 말 안 하는 게 좋은 거예요.”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큼지막한 손.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남자.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산적? 예티?’
얼굴은 험악했다.
야생적인 근육. 구레나룻이 턱수염으로 이어져 있었고, 티셔츠 밖으로 나와 있는 팔에도 털이 가득하다.
이것만 해도 예사 놈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입고 있는 옷을 보니 더욱 위험한 놈인 거 같았다.
문제는 내가 아는 녀석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왜냐.
“설마… 보송송이?”
녀석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는 아이돌 그룹, 핑크펑크가 프린터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안다. 해체되기는 했지만 유명한 걸그룹이었으니까.
그리고 탑에 한 명.
핑크펑크의 골수 팬이 있었으니.
“후후. 눈치채셨군요, 이블아이. 제가 보송송이입니다! 아하하핫!”
바로 보송송이.
보송송이 아니라 털복숭이가 아닌가, 양심적으로.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송송이가 포즈를 취한다.
보디빌더라도 했던 건가.
프론트 더블 바이셉스, 사이드 체스트, 가지가지 한다.
그때마다 근육이 부풀어서 티셔츠 속 얼굴들이 늘어났다 줄어드는 게 포인트.
고도의 안티 팬인 건 아닐까.
벌써부터 골이 아파 온다.
잔혹한 탑의 생태계로 비정상만 살아남은 게 분명하다.
이 정도면 통계적으로 검증됐다 봐야지.
“쁘띠공듀가 준 카메라 스킬을 이용해 만들었어요. 장비 제작에 염사 스킬, 그밖에 잡다한 스킬로 만들고 보호 능력까지 탑재했죠.”
“와아아, 대애애단하네요.”
내가 들어도 영혼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보송송이는 기쁜 것 같았다.
한번 봐 보자, 이 녀석은 얼마나 강한지.
[지우석]
-최대 공략층: 65층.
-닉네임: 보송송이
-오늘도 외쳐 봅니다. 핑─크 펑크!
-당신에게 우호적입니다.
-AAA급 권능 ‘백번 깨져도 다시 한번’ 보유.
-보유 스킬: 벌크업 (AAA) 외 43개
난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나보다 권능 등급은 낮다.
그럼에도 칭호나 자세한 스킬 정보는 읽을 수 없다.
모든 정보를 읽어 낼 수 있을 만큼 녹록한 대상이 아니라는 건가.
과연 65층까지 올라간 녀석이다.
당장 탑 밖으로 나가도 S급 헌터로 추앙받을 수준.
스킬도 어떤 것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많다. 나보다 조금 적은 정도.
기분이 묘하다.
상위층에 근접한 사람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다, 60층대에는 뭐가 있는지.
그런 내 어깨에 보송송이가 팔을 얹더니 슬쩍 옆으로 피한다.
“방금 NPC한테 말 걸려고 했죠?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여기서는 좀 조심하는 게 좋아요.”
“왜죠?”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쨍그랑!
“헬다잉 키친이 언제부터 이따위로 돌아갔지?”
보송송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소음의 근원지에는…….
“여기 VIP만 오는 거 아니었어? 내 눈에는 거렁뱅이가 하나 있는데!”
의자에 앉은 한 남자가 있었다.
커다란 모자에 낡은 외투를 입고, 안대까지 꼈다.
척 보기에도 나 해적이요 하고 말하는 듯한 모습.
특이 사항이 있다면 NPC라는 것.
거친 언행과 은근히 느껴지는 술 냄새.
여기까지는 괜찮다. 술 마시고 소리 좀 지를 수 있지.
하지만 삿대질 당하는 대상이 내 일행이라면?
“음? 나보고 하는 말인가? 거, 미안하게 됐수다.”
“됐수다아아? 내가 네 친구인 줄 알아!”
“뭐 잘못 먹었나. 사과하는데 왜 친구 타령이오. 거렁뱅이 같은 건 피차 마찬가진데.”
“이런 건방진 녀석을 봤나!”
-콰앙!
해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한껏 끓어오르는 기세.
과연 NPC다 이건가. 패도적인 기운이 칼처럼 찔러 들어왔지만.
“시비 건 사람은 그쪽 아니우?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듭니다.”
박재경도 보통은 아니다.
그대로 쥐고 있던 포크를 구겨 버리더니 인상을 쓴다.
따지고 보면 이 녀석도 탑에 박힌 지 오래되기도 했고.
헤그릭이랑 지내느라 NPC에 대한 긴장감도 없는 것 같고.
삽시간에 분위기가 다운된다.
자고로 불구경,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고 하지 않았나.
다만 첫 문제는 내 동료가 싸우는 쪽이라는 거고.
두 번째 문제는…….
“진짜네? VIP 명단에서 못 본 사람인데.”
“등반가로군, 쯧쯧. 곱게 탑이나 오를 것이지 여기는 왜 기웃거리는 거야.”
“옷 입은 꼬라지 좀 보시죠. 저게 이 자리에 어울립니까?”
초대된 NPC 절반이 해적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
몇몇은 눈살을 찌푸렸고, 중도인 듯 보이는 이들은 관망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보송송이.
“말하기도 전에 일이 터졌네요. 이곳에 초대된 NPC들은 등반가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지 않아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놓고 티를 내는 이들이 많죠.”
그런 거 같다.
이것 참, 나도 적대적으로 나오는 NPC를 여럿 만났었지만 전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별다른 이유 없이 조롱하는 경우는 처음.
“다른 이들은 뭐라 할지 모르지만 이들은 스스로 상위 계층이라는 인식이 있거든요. NPC가 헬다잉 키친의 VIP가 되는 건 어려워서, 등반가는 비교적 쉽고.”
“아하. 자기들 무대에 급이 안 되는 애들이 껴 있어서 기분이 나쁘다 이거군요. 어이고, 인간미 있어라.”
진짜 별거 아닌 이유였네.
내 이야기를 엿들었는지 NPC 한두 명이 노려본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놈의 특권 의식과 우월감은 어딜 가나 똑같구나.
“그리고 한 가지 더.”
난감한 미소를 지은 보송송이가 손가락을 든다.
“NPC들이 싫어할 만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자존심을 건드는 등반가?”
“등반가?”
언뜻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으나 의문은 금방 풀렸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무안을 주는 해적.
그런 녀석에게 다가가는 한 남자.
가면을 쓰고 후드를 깁게 눌러쓴 그가 다짜고짜 해적의 머리에 샴페인을 붓는다.
“헙!”
“저, 저저!”
사방에서 들려오는 숨 들이켜는 소리.
나도 놀랐다.
설마 NPC한테 저러는 놈이 있을 줄이야.
“아저씨, 술을 마셨으면 곱게 자든가 집에 가야지. 뭐 하는 거야.”
“…네 이놈!”
이를 악문 해적이 후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살짝 긴장을 놓으면 움직임을 못 읽을 만큼 빨랐지만.
“즐거운 자리에서 왜 이럴까. 나도 가만히 있잖아, 애꾸 양반.”
“건방진 자식이! 나서지 않기로 했을 텐데!”
후드는 가뿐히 놈의 손을 잡아냈다.
혹시 NPC가 아닐까 싶었지만 권능을 통해 보이는 정보는 등반가였다.
[김태진]
-최고 공략층: 84층
-닉네임: 스마일캡
-기분이 좋습니다.
NPC만큼이나 제한된 정보.
명실상부한 상위층 헌터.
그가 후드를 넘기더니 가면을 벗는다.
눈가는 퀭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고, 입꼬리는 잔뜩 올라가 있다.
조금은 위험한 느낌.
“가만히 있기에는 반가운 얼굴이 있어서 말이야.”
“크윽!”
해적을 무시한 그가 박재경에게 다가간다.
뭔가 떠올리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박재경이 손뼉을 친다.
“어? 너 혹시?”
“오랜만이에요, 재경이 형.”
재경이 형?
둘이 아는 사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