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벨자트
몬스터를 정리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54층의 테마는 아사.
그에 걸맞게 필드는 황량했으며 물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상점창이 닫히고, 도둑질을 하는 몬스터에, 사람들 간의 싸움을 부추기는 조건들까지.
하지만…….
“스킬이 따로 제한되었다는 말은 없단 말이지.”
“그에에.”
만약 사용할 수 없었다면 메시지가 떴을 거다.
권능을 사용해 54층에 대한 정보를 살폈지만 따로 나오는 건 없다.
해 보자.
물약 제조를 위해 사 둔 약초와 기타 식물들도 많다.
헤그릭에게서 받은 기본 레시피도 있고.
주방 기구는 없지만 그거야 뭐.
“간단한 요리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어.”
직화구이로 가자.
볼케이노 리자드의 꼬리 고기도 있으니 재료는 완벽.
소금은 있다. 향신료 비슷한 약초도 있고.
[파이어 (D) Lv.7]
먼저 불부터 피우자고.
스킬로 하는 만큼 장작은 필요 없다.
난 아공간 아이템에서 적당한 창을 꺼냈다.
나뭇가지로 고정하면 타 버릴 거 같아서 말이지.
창이 달궈지면서 내부까지 익으면 좋기도 하고.
-푹
꼬리 고기를 끼운 창을 바닥에 꽂았다.
불길이 위로 솟으며 고기를 익힌다.
소금과 향신료를 조금 얹고 요리 스킬을 발동.
원래라면 익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릴 만한 두께였지만 스킬의 힘으로 시간이 단축되었고.
“오, 생긴 건 그럴싸해.”
“그에엑.”
약 10분 뒤, 적당히 익은 꼬치구이를 얻을 수 있었다.
이걸로 식량 걱정이 줄었다. 요리 스킬은 정상 작동하니까.
문제는 이게 먹을 만한 거냐 이거지.
아직 요리 스킬 레벨이 낮아서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오는 경우가 적다.
저번에 헤그릭의 지시대로 만들었던 요리도 그렇고.
먹어 보자.
“으뜨뜨.”
불에서 바로 꺼내서 그런지 따끈하다.
화기 내성이 있어서 실제로는 뜨겁지 않지만 연기가 올라오면 후후 부는 게 국룰.
입김을 불어 주고 단검을 꺼내 조금씩 잘라 냈다.
바삭한 겉과 달리 안은 제법 촉촉하다.
이게 바로 육즙……!
“으에에엑. 육즙은 개뿔. 피였네.”
마음이 급해서 핏물을 안 뺐다.
그나마 향신료를 넣어서 뱉을 정도는 아닌데 비리긴 하다.
어디 내놓기에는 부끄러운 요리였으나.
“덕춘아, 그래도 독 내성은 반응이 없다? 소화 스킬도 얌전하고.”
“그에에.”
엄지를 세워 주는 녀석.
장족의 발전이다. 적어도 몬스터 특유의 독성은 사라졌다는 거니까.
그래, 맛이 중하냐. 배를 채우는 게 중요하지.
이것도 하다 보면 나아질 거다.
식사는 이 정도로 해 두고.
“공허의 기사라…….”
그곳으로 가자.
박재경도 54층으로 올라왔을 거다.
이틀 내로 갈 수 있으려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놓고 나와 있었으니까.
필드 곳곳에 박혀 있는 나무 팻말.
반쯤 썩어 있었지만 글자가 적혀 있다.
-공허의 기사는 그대를 환영한다.
화살표까지 그려져 있다. 친절도 해라.
이렇게 해 두는 것을 보니 공허의 기사라는 건…….
“NPC인 것 같지?”
“그엑.”
몬스터가 팻말을 박아 둘 리는 없으니까.
클리어 조건도 공허의 기사를 쓰러트리는 게 아니라 인정을 받으라고 되어 있었고.
난 앞으로 달렸다.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빠르게 가려면…….
“이게 좋겠지.”
[땅굴 이동 (B) Lv.1]
-쿠르르릉!
땅으로 파고들며 전진.
땅 밑으로 움직이면 위에 있는 몬스터들이랑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밑이라고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고.
“따닥. 딱!”
“해골은 빠져!”
스켈레톤 종류의 몬스터가 이빨을 부딪치며 지나가는 날 붙잡으려고는 했다.
-빠각!
그래 봤자 앞으로 질주하는 가속도와 특성 외갑으로 몸을 단단하게 만든 덕춘이가 뺨을 때리는 선에서 정리됐지만.
어느 정도 왔다 싶으면 다시 위로.
“왼쪽으로 좀 더 꺾어야 하는 건가.”
팻말을 확인하고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머리 위로 떠오르는 스킬 레벨 업 메시지.
목적지까지 가는 데 레벨이 꽤 오를 것 같다.
* * *
얼마나 이동했을까.
땅 밑에 있다 보니 시간 개념이 사라진다.
하루가 지난 건 확실하다.
[헬다잉 키친 초대장이 오픈됩니다!]
[다음 날 오후 5시, 헬다잉 키친으로 초대합니다.]
초대장이 오픈되었으니까. 하루 전날에 알려 준다더니 이런 식이었나.
대충 시간은 맞췄다.
-쿠르릉
난 땅굴 이동을 마치고 위로 빠져나왔다.
계속 사용했더니 어느새 레벨이 6까지 올랐다.
“여기인가.”
내가 도착한 곳은 골짜기.
물은 말라비틀어져 바닥이 훤하고 자갈과 흙, 썩어 빠진 나무뿌리만 즐비하다.
그곳에 있는건 거대한 해골.
아니.
“크크큭. 오랜만에 등반가가 오는군. 반가워, 공허의 기사 벨자트라고 한다.”
NPC 벨자트가 있었다.
오우거? 자이언트?
엄청난 크기의 스켈레톤이다.
언데드 형태의 NPC라니.
못 쓸 정도로 파괴된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다리에는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족쇄가 달려 있었다.
바닥에 꽂혀 있는 거대한 대검.
압도적인 사이즈에서 나오는 박력이 장난 아니다.
더 신경 쓰이는 건.
“팔이 묶인 NPC는 처음 보는군요.”
“여러 사정이 있지.”
양팔 모두 대못으로 박혀 고정되어 있다는 것.
NPC라면 충분히 빠져나올 것 같았지만.
[NPC 벨자트는 시스템 제약에 걸려 있습니다.]
-위협을 받을 시 일시적으로 봉인이 풀립니다.
시스템적으로 고정해 놨는지 꼼짝도 못 하고 있다.
건들지만 않는다면 얌전히 있을 거 같은데.
“너도 내 인정을 받고 싶어서 왔겠지?”
“그렇죠.”
“크크큭! 재밌는 녀석이군. 보통 날 보면 왜 묶여 있는지 물어보던데.”
“사정이 있다면서요.”
“그니까 그 사정이 뭐냐면 말이지…….”
“어떤 식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까?”
“아직 내 말 안 끝났는데. 이게 이야기가 길어. 내가 아직 살아 있을 적 이루어진…….”
“보니까 사람들도 없네요. 오는 길에도 못 본 거 같고. 대부분 땅 밑에 있어서 제대로 확인한 건 아니지만.”
“나 말하고 있다고!”
미안하지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NPC치고 사연 없는 애들이 더 드물어서.
뭐 대충 죄를 지었거나, 배신당했거나, 사랑에 눈이 멀어서 뻘짓 했겠지.
“생각해 보면 핥짝이랑 냥펀도 이곳에 안 온 거 같은데.”
“저기… 이봐?”
“있어 봐요. 생각 중이잖아.”
커뮤니티에서 핥짝이와 냥펀이 올렸던 사진.
식량을 준비하라는 문구.
분명 둘은 54층에 있다.
냥펀은 그렇다 쳐도 핥짝이는 한 달을 버려 가면서 같은 층에 머물 위인이 아니다.
그리 차이 나지는 않지만 멤버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탑을 오르고 있고.
그런 녀석이 음식 사진을 올린다?
‘단순히 자랑하려고 올린 걸 수도 있는데. 그런 사진을 올린 게 한 번이 아니란 말이지.’
커뮤니티를 잘 살펴 보면 핥짝이가 올린 글들을 볼 수 있다.
54층에서 찍은 것들이 분명한 것들.
대충 계산해도 이곳에서 나흘 이상 머문 거 같은데.
55층으로 올라갔다면 다른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했겠지.
높은 확률로 두 녀석이 이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상황.
그 말은 곧.
“핥짝이랑 냥펀도 이 녀석한테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건데.”
“방금 녀석이라고 했냐! 건방지구나!”
“아 좀, 끼어들지 좀 마요. 이따 떠들어 줄 테니까.”
“날 이렇게 무시해. 허어, 서럽구나. 나한테 왜 그러냐.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면 되는 것을.”
“덕춘아, 가서 놀아 주고 있어.”
“궤에.”
“아니, 개구리 말고. 후우우.”
대충 덕춘이를 던져 주고 커뮤니티를 켰다.
[정수리 핥짝]: 54층에 뭐가 이리 없냐
[냥냥펀치]: 내가 있음!
[정수리 핥짝]: 어서 내 품에 안기거라
[냥냥펀치]: 냥냥펀치 맛 좀 볼 테야?
[정수리 핥짝]: …맛? 맛을 보자!
[냥냥펀치]: 탈모맨, 도와줘요! 공듀, 살려 줘!
[니머리 탈모]: 미안, 핥짝이는 나도 쫌…….
[정수리 핥짝]: 닥쳐, 쫄쫄머리.
[쁘띠공듀]: 냥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겁니다!
[냥냥펀치]: 즐기고 싶지 않다고!
역시나, 이곳에 있구먼.
둘이 잘 노네.
적당히 댓글을 달아 줬다.
그나저나.
이거 어쩌면 만날지도 모르겠는데?
탈모맨이 있었다면 피했겠지만 저 둘이라면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핥짝이야 내 정체를 알고 있고.
‘냥펀도 대충 눈치챈 거 같단 말이지.’
냥펀과의 거래.
포션과 장비를 지급해 주는 대신 포인트와 스킬북을 받는 것.
거래를 원하는 품목 중에는 50층 친선 경기에서 얻은 상품도 있다.
[대리 희생자 (S)]
-죽음에 이르는 공격을 받을 시 아이템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유자를 살립니다.
-귀속 아이템
일회용 무적 아이템.
중요한 건 귀속 아이템이라는 것.
다른 사람이 가질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대놓고 말했었지.”
-ㄱㅊ. 나 금천황후 계승자라 제한 없이 아이템 거래, 사용 가능. 이블아이한테도 전해 줘.
냥펀은 자신이 계승자임을 밝혔다.
이것까지는 문제 없지만 뒤에 붙인 말.
‘이블아이한테도 전해 줘.’
모든 NPC는 계승자가 정체를 밝히는 걸 꺼린다.
냥펀이 보낸 메시지는 신뢰를 보이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동시에…….
“내가 이블아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다는 거지.”
뒤통수를 긁었다.
핥짝이가 예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냥펀도 대충 눈치채고 있는 것 같다고.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등반 초기부터 떠들던 녀석들인데 쁘띠공듀의 공략과 이블아이의 동선이 겹친다는 것 정도는 진작 알아차렸을 테니까.
이블아이라는 닉네임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뜬금없이 등장한 것도 그렇고.
차라리 잘됐다. 50층대부터는 사람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51층만 해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었는데 여긴 인적이 드물다.
위로 올라갈수록 더 그렇겠지.
조금씩 그 수가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한국계 헌터들.
스타트가 다르다.
내가 올린 공략으로 인해 생존율이 상승했고, 무엇보다 등반 초반에 얻을 수 있는 스타터킷으로 스텟 자체가 상향평준화 되었으니.
지금도 보면 50층대를 오르고 있는 연합 사람들도 꽤 있다.
결과적으로 상위층으로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니 좋든 싫든 내 정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 들키느니 자수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여러 생각이 들지만 일단은 놔두자.
당장은 헬다잉 키친 파티에 참석하는 게 먼저니까.
그래서…….
“인정을 받으라니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야야. 덕춘아, 그러면 안 돼.”
다시 벨자트에게 관심을 돌렸다.
덕춘이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고.
같이 놀고 있으라니까 두개골에 올라가서 때리고 있네.
“미안합니다. 얘가 아직 어려서, 여기 꼬리 보이죠?”
“크아아아악! 망할 놈들!”
“놈이라뇨. 덕춘이는 암컷입니다.”
“닥쳐라!”
화가 많은 NPC네.
이래서 대화가 되려나.
설마 삐졌다고 인정 안 해 주는 건 아니겠지?
살짝 걱정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NPC는 각자 정해진 역할이 있는바, 성질은 부릴지언정 역할을 저버리지는 못한다.
심지어 시스템 제약을 받고 있는 벨자트의 경우에는 더 그렇겠지.
그래도 좀 미안하니까.
“화 풀어요. 달달한 것 좀 먹으면서.”
보물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입에 던져 줬다.
냉큼 입을 열어 받아먹는 녀석.
뼈밖에 없어서 먹을 수나 있나 했는데 잘 먹는다.
훤히 보이는 갈비뼈 사이로 떨어지나 유심히 살폈지만.
“흐음. 맛이 괜찮군.”
“오오.”
어디로 사라졌는지 입으로 들어간 초콜릿은 보이지 않았다.
입맛을 다시던 벨자트가 눈을 빛낸다.
“더 내놓거라. 내 공허함이 사라질 때까지! 내가 더는 먹고 싶지 않을 때 그대는 인정받으리라!”
“그런 거였군요.”
아사 구역의 NPC.
당연히 굶주림과 먹는 것과 연결되어 있을 줄 알았다.
난 권능을 사용했고.
[벨자트- NPC]
-공허의 저주를 받은 고대 거인족 기사
-그는 결코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굶주림과 식욕. 모든 것을 삼켜 버린 자는 끝내 자신도 씹어 삼켰습니다.
녀석의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공허의 기사라는 건 이런 뜻이었나.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
-파스스스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힘을 더합니다.]
눈이 욱신거릴 정도로 힘이 몰리며 추가적인 정보가 떠오른다.
[벨자트는 등반가를 먹어 시스템 제약에 걸렸습니다.]
[자아를 갉아 먹는 허기. 공허함과는 달리 죄악감이 쌓여 갑니다.]
[공허의 저주에서 풀려나고 싶어 합니다.]
이거…….
퀘스트로도 연계될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