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18화 (218/740)

218화 54층

느닷없이 찾아온 위기.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명치를 찌르다니.

박재경 이 녀석, 무서운 놈이다.

어떻게 하지? 일단 기절시켜?

“궤에에에.”

덕춘이가 이마를 쳤지만 무시하자.

지금 중요한 건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

커뮤니티 이야기는 괜히 꺼내 가지고.

아니, 어쩔 수 없잖아. 탑에서 할 거라고는 싸우는 거랑 커뮤니티밖에 없는데.

이 미친놈은 요리에 빠져서 나 몰라라 하고 있었으니.

“음? 어디 아픕니까. 만년설귀한테 다쳤나? 상처는 없는 거 같은데.”

“크흠. 날씨가 추워서.”

“뭔 소리요. 장작 팰 때는 티셔츠만 입고 팼으면서.”

“그건 냉기 내성을 올리기 위한 수련일 뿐.”

“오오! 그거 멋지군.”

일단 뻘소리로 시간을 끌자.

어떻게 한다.

일단 올라가서 녀석이랑 만나기는 해야 한다.

헬다잉 키친에서 초대할 때까지 같이 있어야 하니까.

“어, 맞다. 내 닉네임은 뭐였지?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닉네임을 찾기 위해 박재경이 커뮤니티를 켰다.

지금이 기회다.

움직여라, 두뇌여.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

근래에 들어가 가장 활발하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이거였네. ‘한입만요’, 크으. 그때는 왜 이렇게 지었는지 몰라. 말하고 보니 부끄럽수.”

머리를 긁적이며 낯간지러운 표정을 짓는 녀석.

괘씸하다.

고작 ‘한입만요’ 가지고 그러다니.

누구는 ‘앙녕? 난 쁘띠공듀얏!’ 이러게 생겼는데.

이렇게 된 거 그냥 포탈을 넘어 버릴…….

“아.”

좋은 생각이 났다.

적당한 핑곗거리.

“나도 커뮤니티는 눈팅만 해서 따로 말해 줄 게 없네. 정지를 당하여서 활동이 안 되거든.”

“정지? 그런 것도 있수?”

“일단은 커뮤니티니까. 목록 보면 공지글도 있고 그렇잖아. 기본적인 건 비슷해.”

“아, 이거 쁘띠공듀의 공략집? 세상 좋아졌네. 공략도 올라오고. 자고로 인격과 외향은 비례한다 했지. 분명 마음씨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일 거요. 팔자 피려면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해.”

어흑.

실상은 시커먼… 아니지 알록달록한 나였습니다, 짜잔!

살짝 현타가 와 머리가 어지럽지만 구라가 통한 거 같다.

커뮤니티에 계정 정지 기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탑이란 곳이 워낙 이상한 곳이니 없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

난 천재인가?

이 논리면 그동안 쌓여 온 의혹이 모두 해결된다.

지금도 종종 올라오는 글.

-이블아이는 커뮤니티 안 함?

-글 올리는 거 본 적 없음

-닉네임이 이블아이가 아닌 거겠지 ㅇㅇ.

└ㅇㅈ 우리도 이름이랑 닉네임 다르잖아.

└이블아이도 가명인데?

-혹시… 호오오옥시 말이야. 우리가 알고 있는 닉네임 중 하나가 이블아이 아닐까?

특히나 연합 사람들의 관심이 컸다.

누구누구파 하면서 노는 애들인데. 유일하게 커뮤니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이블아이였으니까.

실제로는 쁘띠공듀로 활동하는 거지만.

그래. 정지 먹은 거로 가자.

완벽해.

“별건 아니고. 등반 초기에 커뮤니티로 싸운 적이 있어서 정지를 먹었거든. 언제 풀릴지는 모르겠네.”

“뭘 어떻게 싸웠길래… 됐수. 말하다 보면 빡 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럼 어쩐다…….”

“만나는 건 문제 없을 거야. 50층대는 한 달 버티기 말고 클리어 조건이 하나 더 있잖아.”

“그렇군. 그곳에서 만나면 되겠어.”

척하면 척이다.

나도 그렇고 녀석도 그렇고 실력이 있으니 이틀 내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필드가 미친 듯이 넓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동안 겪어온바, 클리어 조건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데 며칠이면 충분하다.

“서두릅시다.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니까.”

“먼저 올라간다.”

“가쇼. 나도 곧 따라갈 테니.”

가볍게 손을 흔든 박재경이 어딘가로 달린다.

나도 가 보자.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포탈에 진입했고.

-우우우웅!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 * *

[54층에 진입합니다.]

[54층- 아사餓死]

[클리어 조건]

[한 달 동안 생존하시오.]

[공허의 기사의 인정을 받으시오.]

황량한 공간.

대지는 말랐으며,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특별히 날씨가 춥거나 덥지는 않았지만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함이 느껴진다.

우중충한 하늘.

건조한 바람.

돌아다니는 거라고는 언데드 무리와 몇몇 괴상한 몬스터뿐.

한 가지 주의할 게 있다면.

[54층은 상점창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상대방의 아공간 아이템을 강탈, 오픈 할 수 있습니다. (귀속 아이템 포함)]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가.”

전에도 겪었었다.

상점창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

굶어 죽기 딱 좋지.

안전지대라면 모를까 필드에서는 상점창을 통해 배를 채우니까.

게다가 상대방의 아공간 아이템을 뺏어서 사용할 수 있다라…….

시스템의 개입으로 귀속 아이템까지 적용된다는 말은…….

“보물 주머니도 뺏으면 쓸 수 있다는 거네.”

“그에에.”

이거 어쩌면 다른 곳보다 난장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기존에는 약탈자 무리만 아니면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이곳은 사정이 다르다.

약탈자가 아니더라도 식량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

이래서 핥짝이랑 냥펀이 식량을 준비해 두라고 했던 건가.

나보다 먼저 54층에 올라갔었구나.

그건 그거고.

“어딜 슬쩍하려고.”

“끼, 끼에엑!”

난 은근슬쩍 내게 다가와 보물 주머니를 훔치려던 놈을 붙잡았다.

검은색 피부를 가진 몬스터.

생긴 건 덩치 큰 고블린과 흡사했는데.

[소매치기 전사]

-5성급 몬스터

-필드를 돌아다니는 도둑에 대해 들어 봤나요?

-바로 이놈입니다!

-빠른 태세 변환, 수틀리면 칼을 들이밀죠.

허접한 외형과 다르게 5성급 몬스터다.

아니, 소매치기야 전사야?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키, 키에에엑!”

“얼씨구?”

도둑질을 걸린 녀석이 다짜고짜 칼을 휘두른다.

노상강도가 이런 건가.

어이가 없네. 왜 이딴 몬스터가 화갑룡이랑 등급이 똑같은 거지?

검을 뽑을 필요도 없이 손으로 놈의 공격을 쳐 냈다.

이미 내 방어력은 5성급 몬스터로는 어쩔 수 없는 수준이라.

당황했는지 뒤로 몸을 빼는 소매치기 전사.

확실히 4성급에 비하면 강하기는 한데 부족한 느낌이다.

[파이어 밤 (AAA) Lv.5]

그대로 놈을 폭사시키려는 찰나.

-스으으으으

놈이 바닥에 녹아들었다.

은신 스킬? 아니면 이동기?

[소형화 (AAA)]

-아주 작게 덩치를 줄입니다.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일순간 손톱만 한 크기로 줄어든 거지.

이래서 5성급 몬스터였구먼.

까다로운 스킬을 가지고 있다.

뭐, 들킨 순간 끝이지만.

[심연의 눈동자 (A) Lv.8]

[중량 팔찌 (C)]

-콰직!

심연의 눈동자로 놈을 속박.

이후 무게를 잔뜩 실어 밟아 줬다.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고.

슥, 봐 보니 핏물 같은 게 번져 있다.

“여긴 몬스터도 거지 같네.”

도둑질을 하는 몬스터라니.

아무리 헌터가 초인이라지만 생명체인 이상 방심하는 순간이 있고, 수면을 취해야 한다.

그 와중에 이런 놈들이 식량이 담긴 물건을 가지고 간다면?

그때부터는 뭐, 강도가 되는 거지.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어떤 개판이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도 안 되는 상황.

나라고 그런 꼴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골칫거리인데.

“몬스터도 드글거려요.”

“그에에.”

등반가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는지 곳곳에서 몬스터들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스켈레톤을 기반으로 한 언데드 무리와.

“그르르락!”

“그르륵!”

5성급 몬스터인 볼케이노 리자드.

등에 달린 분화구처럼 생긴 기관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덩치도 제법이라 몰려드는 모습을 보니 박력까지 느껴질 정도.

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몸은 계속 굴려야 하다니.

악독하다, 악독해.

검을 고쳐 쥐며 놈들에게 쏘아져 나갔다.

주변 정리부터 해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독자무강獨者武强 (A) Lv.9]

버프가 활성화된다.

질주하며 검을 휘둘렀으며 내가 지나간 길에는.

[시한폭탄 (AA) Lv.4]

폭발 마법진이 남았고.

[프로즌 브레이크 (AAA) Lv.3]

[파이어 밤 (AAA) Lv.5]

놈들을 얼리는 것과 동시에 파이어 밤과 시한폭탄을 터트렸다.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굉음.

아무리 5성급이라 한들 내 공격을 감당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파지지직!

-찌유우우우웅!

이어 일렉트릭 쇼크와 오로라 빔으로 녹였다.

언데드를 위한 러브 앤 피스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모든 걸 맞고도 살아남은 놈들?

[절삭 (AA)Lv.6]

[도축 (A) Lv.9]

내 친히 도륙해 주었다.

스켈레톤류는 뼈다귀가 되어 날아갔고, 볼케이노 리자드는 뼈와 살이 분리되었다.

한바탕 칼부림이 끝나고 남은 건 도축된 재료들뿐.

난 바닥에 떨어진 살덩이를 집어 들었다.

[볼케이노 리자드의 꼬리 고기]

-뜨끈한 체온에 맞게 부드럽습니다.

-조리 시 화기 내성에 관한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호라.”

54층은 아사 지대.

상점창은 막혀 있지만 몬스터는 존재한다.

그리고 내게는 그것들을 재료로 요리할 수 있는 스킬이 존재했고.

과연 시스템이 이것도 막아 뒀을까?

난 입꼬리를 올렸다.

* * *

조현수가 54층에 도달한 시점.

척살단 무리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하나의 국가가 아닌 다국적 척살단 모임.

원칙대로라면 서로 보고도 모른 척하며 회동을 하는 일조차 없었겠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이대로는 활동 못 해요.”

“우리도 뭉쳐야 해. 놈들도 멍청이는 아니라고.”

“약탈자 무리도 많이 줄었어. 더는 숨어서 움직이기 힘들다.”

“일본 쪽은 거의 다 당했고, 중국도 피해가 심하다던데.”

“말도 마라. 51층, 52층은 거의 전멸이야.”

저마다 한탄하는 이들.

그들의 목적은 타국의 헌터를 처리하는 것.

대격변이 발생한 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으며, 게이트와 몬스터는 생활 깊숙한 부분까지 들어왔다.

경제, 정치, 문화. 뭐 하나 영향이 가지 않은 게 없었고, 각국의 정부는 근미래에 각성자로 이루어진 전투 부대가 세계의 패권을 좌지우지하는 힘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그게 정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특수 부대든, 시장 경제로 돌아가는 헌터계이든.

처음에는 타국의 헌터를 공격하는 게 말이 되냐며 소리쳤었지만, 우리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참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관행이 되어 버렸다.

아예 우호적인 국가끼리는 동맹을 맺어 건들지 않기까지.

“쁘찡 연합? 그놈들이 움직인 게 큽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체 등반가 중에서 우리는 소수잖소. 우리 쪽 연락망에 의하면 이블아이가 54층으로 올라왔다던데. 이참에 끝내 버리지?”

중국의 척살단 인원이 말했고.

“그럽시다. 따지고 보면 그놈이 원흉이니까. 본보기로 죽이면 잠잠해지겠지. 뭉치면 위협이 된다? 그럼 흩어지게 하면 그만이야.”

“동의한다. 가능한 은밀하게 활동하고 싶지만 이 상황에서는 한번 정리하고 가는 편이 나아.”

의견은 차츰 이블아이를 처리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약탈자로 위장하는 건 어렵지 않잖아, 다들. 실제로 약탈도 하고 있으니까.”

“별수 없지. 54층은 한 달 버티는 거 말고는 방도가 없으니.”

“이블아이부터 처치하고 한 바퀴 쓱 돕시다. 밥은 먹고 살아야지.”

이어 약탈 계획도.

50층대는 클리어 조건 두 개를 내건다.

54층의 조건은 한 달 버티기와 공허의 기상에게 인정받는 것.

그리고 대격변 이후, 아직까지 그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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