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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17화 (217/740)

217화 위에서 만나려면

이게 무슨 소리야.

헤그릭에게 가르침을 받은 지가 10년이 넘었다고?

가능한 일인가? 이제 탑이 생긴 지 13년이 됐는데.

이건 말이 안 된다, 설마…….

“바깥 기준으로는 탑에 들어온 지 대충 8년 정도 지났겠구만. 시간 참 빨라, 그쟈?”

“그 정도면 이제 막 대형 길드가 자리 잡기 시작하던 때 아닌가?”

“아, 그렇지. 세이퍼 정책도 진행하려던 참이었으니까.”

대격변이 발생하고 5년 후에 탑에 들어온 건가.

무주공산이었던 대격변 초기가 4년까지. 이후 1, 2년 정도의 재정비 시간을 가지고 나서야 지금의 사회가 만들어졌다.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 나온다.

무려 백환이 나오기도 전에 등반한 사람이 이런 곳에 박혀 있었을 줄이야.

거짓말은 아닐까?

간단한 테스트를 해 보자.

“하나만 묻자. 1층에 고블린이 몇 마리 나오지?”

“어디 보자.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3마리 정도 됐을 거요.”

이걸로 확실하다.

백환을 먹었다면 튜토리얼 구간의 기억이 없어야 정상이니까.

“형씨는 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나 보네.”

“반년 정도 됐을 거다. 1년은 안 됐고.”

탑이라는 것이 시간 개념이 정확하지 않아서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대략 이 정도 되지 않았나 싶은 거지.

말하고 보니 상당히 빠르다.

나뿐만이 아니다. 공략법이 퍼지고 나서부터는 전체적으로 등반 속도가 상승했으니까.

“캬, 빠르고만. 난 50층대까지 오는 데 4년이 넘게 걸렸는데. 별수 있나. 탑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이었으니 대가리 깨지면서 해 보는 수밖에.”

정보의 차이.

지금이야 다들 몬스터에 대한 거리감이 줄어들었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몬스터, 두려운 존재. 인류를 먹이사슬 아래로 내려 버린 것들이었으니까.

시간이 흐른 뒤 헌터계가 활성화되고, 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 몬스터와 탑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고 나서야 흐름이 바뀌었지.

당장 나만 해도 탑의 부름을 받을 걸 준비하며 자료를 수집하고 운동을 했었다.

박재경과 같은 초기 헌터는 아무런 대비도 못 한 채로 들어온 거고.

생소한 환경, 의지할 곳도 믿을 곳도 없이 탑을 올랐다는 거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어. 나 노땅 아니니까.”

“누가 뭐랬나.”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50층에 있는 헌터 중 한 명이다.

강함은 평균 이상. 어쩌면 나나 멤버들급일지도 모르지만.

헤그릭이 말하지 않았던가.

어벙해서 그렇지 강하다고.

실제로 6성급 몬스터인 빙극태웅을 잡으려고도 했었고.

내가 없었다면 혼자서 잡았을 거다.

“다들 잘 올라갔는지 모르겠수다. 지금쯤이면 밖으로 나갔으려나.”

“같이 올라온 사람이 있어?”

“30층대에서 만난 애들도 있고, 안전지대에서 만난 애들도 있고.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나 때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열심히 올랐었지. 악질인 놈들도 있었지만.”

뭘 어떻게 해도 퇴출당할 사람은 퇴출당하니까.

탑의 특성상 모두가 탈락하지 않고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보다…….

‘초창기에는 다들 힘을 합쳐서 올라왔었군.’

생각해 보면 이게 정상인데.

어쩌다 이 꼴이 된 건지.

쯧. 혀를 차는 것도 잠시.

“만년 서리 수정은 저짝에 있수. 수정이라 카는데 째깐한 건 아니고 몸뚱아리만 합디다. 아마 수정에 스크래치 쫙쫙 그어 주면 될 거요.”

박재경이 한쪽을 가리켰다.

설산.

나무들이 쓰러진 곳 너머로 거대한 절벽이 보인다.

눈이 쌓이고 물이 얼어붙어 지금은 하나의 얼음 조각이 되어 버린 것.

저곳 어딘가에 있다는 건가.

“만년설귀라고 수정을 지키는 몬스터가 있기는 한데 형씨라면 걱정 없을 거요.”

“잘됐군. 안 그래도 그놈을 잡았어야 했는데.”

“으엑. 그딴 걸 잡아서 어따 쓰실라고. 먹지도 몬합니다, 그건.”

왜 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릴카가 준 퀘스트 재료 중에 녀석의 혓바닥이 있어서 잡는 거다.

됐다. 이 녀석한테는 몬스터는 곧 먹을 거니까.

그것보다…….

“이야, 이제 새롭지도 않다. 어째 한결같이 있냐.”

“으음? 뭡니까, 저 잡것들은?”

움직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척살단이 보이냐.

하여간 곱게 클리어하는 꼴을 못 보는구만.

한 가지 눈에 걸리는 게 있다면.

“조 있네, 만년설귀. 저거 잡아야 하는 거 아입니까? 한번 죽으면 일주일 뒤에나 나올긴데.”

“어중간하게 있네.”

싸우고 있는 무리 사이에 만년설귀가 있다는 것.

“미처 말 못 했는데, 만년설귀라는 게 수정 근처에서는 엄청 쎄다 말입니다. 여러 팀이 달려 들어가 운 나쁜 애들은 미끼가 되고, 나머지는 통과하는 게 정석이오.”

“그래 보이긴 하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언덕 위.

빙벽에 박혀 있는 수정이 보였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경계심을 가진 채 돌아다니는 만년설귀가 보였다.

얼음 알갱이와 그림자가 섞인 듯한 기묘한 모양새.

전체적인 모습은 사람이랑 비슷한데 짐승 같은 송곳니와 발톱을 지니고 있다.

“흐음.”

잠깐 살폈을 뿐인데 전투력이 굉장하다.

영역 내로 들어오는 등반가에게 팔을 휘두를 때마다 방어구가 그대로 날아가 버리니까.

척살단들은 그 점을 이용했다.

조직적으로 움직여서 놈의 영역으로 사람들을 밀어붙이는 것.

앞에는 척살단, 뒤에는 만년설귀.

놈들에게 당하고 있는 사람 중에는 쁘찡연합 띠를 두르고 있는 사람도 있다.

활약하고 있었지만 수적인 열세에 밀려 고전하는 중.

그도 그럴 것이…….

“척살단 놈들도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군. 중국계랑 인도계가 합쳤어.”

연합에서 척살령을 내린 후, 피해를 입은 녀석들이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대형 길드 루키에 비견되는 놈들인데.

“척살단? 그건 또 뭐요. 우물 안 개구리가 다 됐네. 어째 듣는 것마다 처음 듣는 건지 원.”

“모르는 게 당연해. 네가 있을 때는 없었던 거니까.”

애초에 나도 50층대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고.

대형 길드가 자리 잡기도 전에 탑에 올라온 박재경이 아는 게 더 이상한 내용이다.

하다못해 커뮤니티라도 한다면 말이 달랐겠지만 이 녀석은 커뮤니티를 안 하는 아날로그적인 놈이다.

“대충 등반가들 못 올라가게 막는 놈들이라고 보면 돼. 나도 저 녀석들이랑 한바탕했었지.”

“한마디로 쓰레기란 것이구만, 좋소.”

-촤르르륵

박재경이 인벤토리에서 창 다섯 개를 꺼낸다.

하나는 손에, 나머지는 등에 장착한 뒤.

“형씨는 볼일 보쇼. 저짝은 내가 처리할라니께. 순 나쁜 놈들이구먼그래.”

“그쪽은 맡기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도와주면 고맙지.

겸사겸사 박재경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파악해 보고.

“일단 한 방.”

등에 멘 창을 집어 든 녀석이 그대로 창을 던진다.

단순해 보이지만 스킬 3개가 중첩된 일격이었고.

-푸국!

척살단 한 명이 그대로 꿰뚫려 날아갔다.

힘 좋네.

그럼.

“나도 볼일을 봐야지.”

박재경이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걸 확인한 뒤 나도 달렸다.

목표는 만년설귀.

[만년설귀]

-6성급 몬스터

-만년 서리 수정을 지키고 있습니다.

-수정 영역 내에서는 능력치가 대폭 강화됩니다.

-얼음 속성과 어둠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블아이다!”

“제기랄, 앞에 있는 놈부터 신경 써!”

나를 발견한 걸까. 척살단과 연합 사람들이 반응한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좀 바빠서 화답할 수가 없다.

왜냐…….

“어흑!”

등반가 중 한 명이 뒤로 밀리며 만년설귀의 영역으로 들어섰으니까.

“키햐아아아!”

그대로 등반가에게 달려드는 녀석.

영역에 대한 집착이 굉장하다.

그 말은 곧…….

“시야가 좁아진다는 거기도 하고 말이야.”

-구구구궁!

땅굴 이동을 통해 전진.

위로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등반가를 잡아당기고 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와 절삭.

아티팩트, 포식자의 응어리의 효과 물어뜯기.

거기에.

[러브 앤 피스 (AA) Lv.3]

-푸화아아악!

신성력까지 곁들여 놈의 목을 찔렀다.

“키헤아아악!”

핏줄기처럼 터져 나오는 그림자.

지체할 것 없이 공격을 이어 나가자.

[버프 다이스 (A) Lv.8]

[1]

[압박감]

버프는 썩 좋은 게 나오지 않았지만 상관없다.

남은 수는 차고 넘치니까.

먼저.

“귀신은 귀신끼리 싸워야 제맛이지.”

[집착하는 망령 (AA) Lv.1]

“끼헤에에엑!”

한때 더덕이와 함께하며 실력을 쌓아 온 망령!

두 유령이 맞부딪친다.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서로를 향해 발톱과 이빨을 박는 녀석들.

아무래도 망령 쪽이 등급이 낮아 밀리기는 하지만 이거라면 어떨까.

[심연의 눈동자 (A) Lv.8]

공간이 찢어지며 드러나는 악마의 눈동자.

그것이 만년설귀를 노려봤고.

“키, 키햐악?”

일순간이지만 놈의 몸이 굳었다.

강력한 정신 공격. 아무리 6성급 몬스터라도 정신 보호가 없다면 걸려들기 십상.

잠깐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망령이 놈에게 엉겨 붙는다.

“끼아아아악!”

목 놓아 소리를 지르는 것이 그동안 쌓인 울분이 많은 모양.

그래, 내가 네 마음 잘 안다.

그동안 힘들었지?

“편하게 보내 줄게!”

[영혼 찢기 (S) Lv.2]

-찌이이이익!

아프지 않게 깔끔히.

검을 내리그었다.

“끼아아아악!”

“키햐아아악!”

만년설귀와 집착하는 망령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토해 내는 순간, 난 한 번 더 검을 휘둘렀고.

[도축 (A) Lv.9]

썩둑.

놈의 혓바닥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엑!”

냉큼 달려가 혓바닥을 챙기는 덕춘이.

나이스 캐치.

필요한 것도 챙겼겠다. 힘 조절할 필요는 없겠지.

마무리는 역시.

[파이어 밤 (AAA) Lv.5]

[러브 앤 피스 (AA) Lv.3]

-콰아아아아앙!

신성한 폭발!

새하얀 광채와 붉은 화염이 공간을 뒤덮는다.

단번에 녹아 버린 얼음과 눈이 증발했고, 어두컴컴했던 하늘이 잠시나마 밝아졌다.

“으읏! 뭐야!”

“내 눈!”

뒤에서 싸우던 이들조차 눈을 가릴 수밖에 없을 정도.

빛이 잦아들었을 때는.

-쿠웅, 쿠구구구궁

만년설귀뿐만 아니라 수정이 박혀 있던 빙벽까지 깨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 위로 떠오르는 알람.

[만년 서리 수정에 막대한 손상을 입혔습니다.]

[조건 클리어!]

[포탈이 생성됩니다.]

[만년 서리 수정의 내구도가 닳았습니다.]

[회복되는 한 달 동안 생성되는 만년설귀의 힘이 줄어듭니다.]

흔적만 남긴다는 게 반쯤 부숴 버린 모양.

의도치는 않았지만 결과는 좋다.

진입을 방해하는 몬스터의 힘이 약화된다는 뜻이니까.

이쪽은 정리됐고 남은 건.

“여기도 끝냈수다.”

“빠르네.”

“애들 좀 칩디다? 그래 봤자 나한테는 안 되지만. 으하하하!”

안 끝났으면 도와주려 했더니만.

전투의 흔적만 봐도 알겠다.

‘고전적인데 강하군.’

특별히 광범위한 스킬을 쓰지는 않았다.

그저 곳곳에 뚫린 구멍들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암시할 뿐.

순수하게 무기를 사용해 싸우는 느낌이다.

자세한 건 더 지켜봐야겠지만.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블아이 아닙니까? 커뮤니티에서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존한 등반가들이 감사함을 전한다.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다.

그냥 아니꼬운 놈들 조진 거지. 실제로 조진 건 박재경이고.

“저, 저도 연합 사람이에요!”

“맞다, 그 연합 말인데… 외국인도 받아 줍니까?”

내가 구해 줬던 연합 사람이 구멍에서 기어 나오자 몇몇 사람들이 연합에 관심을 보인다.

받아 주냐고?

“연합은 강제적인 뭔가가 아니에요. 마음이 맞으면 하는 거고, 특별한 제한 사항은 없습니다. 자세한 건 이준석에게 물어보는 게 빠를 겁니다.”

“오우, 그럼 내가 첫 번째 외국인 출신이 되는 건가? 아무튼 신세 졌습니다.”

긴장이 풀렸는지 대화를 건네는 사람들.

나도 적당히 대꾸해 주고 있는데 슬쩍 내 뒤로 돌아온 박재경이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형씨, 유명한 사람이우? 어디 한자리하시는 분이라던가. 옆에 있으면 나한테도 콩고물 좀 떨어지나? 크흠, 한솥밥 먹던 사이의 의리로다가, 어흠흠.”

어째 헤그릭이나 이 녀석이나 하는 짓이 고만고만하냐. 이래서 사제지간인가.

능력도 되는 양반들이 왜 자꾸 콩고물을 찾아.

“따로 콩고물이랄 건 없고 그냥 연합에 소속되어 있어서 그래. 너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 커뮤니티 좀 해라.”

“어우. 난 복잡한 거 싫어서.”

손사래 치던 녀석이 잠시 고민한다.

“아닌가. 세상도 바뀐 거 같으니 나도 둘러는 봐야겠군.”

“잘 생각했어. 자자, 여러분 저희는 일정이 있어서 바로 올라가 봐야 할 거 같네요. 다치신 분들은 이걸로 치료하시고 파이팅 하세요.”

떠들고 노는 것도 좋지만 나랑 박재경은 할 일이 있다.

등반도 계속해야 하고, 이틀 후면 헬다잉 키친에서 초대가 온다.

그 전에 준비를 해야 한다.

포션을 몇 개 쥐여 주고 포탈로 향했다.

이대로 올라가면 되는데.

“넌 포탈이 다른 데 있지 않나?”

“그치. 난 한 달 머물러서 포탈이 생겼으니까.”

잠깐이지만 박재경이랑 떨어져야 한다.

난 수정에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녀석은 53층에서 오래 머무는 것으로 클리어 조건을 만족시켰으니까.

박재경을 위한 포탈은 따로 있을 거다.

“어차피 동시에 올라가도 떨어지는 위치는 랜덤이니까 상관없을 거요. 54층에서 만날 방법을 찾아야지.”

“맞는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박재경이 손을 내민다.

“이참에 커뮤니티도 하기로 한 거 닉네임 좀 알려 주쇼. 그래야 54층 올라가서 서로 어디에 있나 확인하지.”

“그렇군…….”

잠깐만.

닉네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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