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전달 사항
야, 이게 되네.
급격히 바뀐 호칭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가 내민 잔에 꿀벌주를 부었다.
달콤한 냄새가 올라온다.
술이 아니라 꿀 같은 냄새. 달콤함 사이에 숨어 있는 알싸한 냄새가 아니었다면 음료수라고 생각했을 거다.
“귀한 술이지. 요정계에서만 구할 수 있는 거니까.”
“아, 감자탕에는 소주라니까 그러네!”
“어허, 그건 그것대로 마시면 되는 거고. 이건 입맛 돋우는 용도야. 잔말 말고 잔이나 받아.”
투덜거리는 박재경에게 헤그릭이 꿀벌주를 준다.
나도 한 잔.
덕춘이는… 줘도 되나?
술 마시는 개구리라. 묘하게 어울리기는 하는데.
“궤에엑.”
“그래. 너도 마셔라.”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으니 줘 보자.
“짠, 합시다.”
“예, 감사합니다.”
“크으.”
한입에 털어 넣었다.
혀끝이 얼얼한 게 보기보다 도수가 높은 모양.
그래도 이어지는 향이 장난 아니다.
마셔 보니까 알겠는데 달기만 한 게 아니라 꽃향기도 같이 난다.
요정이랑 잘 어울리는 맛.
“캬, 제대로 된 물건이구만. 하하하!”
헤그릭도 만족했는지 크게 웃는다.
“어우야, 맛있네요, 이거, 어디서 이런 거 얻었대?”
“등반하다 보면 이것저것 얻는 게 많지.”
“똑같이 50층대에 올랐는데 왜 난 못 봤지? 역시 세상은 넓은가 봅니다. 요즘에는 맨날 먹던 것만 먹어서.”
자연스럽게 소주를 깐 박재경이 감자탕을 먹는다.
나도 먹어 보자.
먼저 국물부터.
따끈하면서도 얼큰한 맛.
은근히 자극적이지만 속을 녹여 주는 것이 기가 막히다.
살은 또 어떤가.
“와, 부드럽네.”
“그짝에 소스도 있으니 찍어 드쇼. 간장 와사비랑 비슷한 거요.”
“반가운 이름이네. 맛있겠다.”
“거럼, 내가 저것들 만드느라 개고생을 했는데.”
야들야들한 살에, 골 사이에 붙어 있는 물렁뼈까지 깨끗하게 뜯어 먹었다.
여기서 소주 한 잔.
오랜만에 알코올이 들어가서일까. 몸이 탁 풀어진다.
“어떠냐, 음식의 완성은 반주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먹을 건 많으니 이야기나 나누면서 먹지.”
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은 헤그릭이 말했고, 분위기에 녹아들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등반가치고 말할 거리가 없는 경우는 없다.
영웅담이든 험난했던 일이든 할 이야기는 차고 넘쳤으니까.
각자 가지고 있는 권능도, 스킬도 다른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등반한 건 당연했다.
중간에 술에 취한 덕춘이가 난동을 부리는 일이 있었지만 헤그릭이 제압했다.
“형씨도 빡세게 올라왔네. 용케 살아 있습니다, 그려.”
“운이 좋았지.”
무한 코인과 권능 덕에 이럴 수 있었으니.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의자에 등을 기댄 박재경이 한숨을 내쉰다.
“이것 참, 50층대는 내가 먼저 올라왔는데 경험은 그짝이 더 많은 것 같단 말이오. 내가 모르는 몬스터도 만나고, 식재료도 얻고, 풀때기들도 잘 알고.”
“풀때기가 아니라 약초 재료지.”
“그게 그거지, 요리할 때 넣으면 좋은 것들.”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
그중에는 포션 제작에 필요한 약초들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나도 탑의 식물을 가지고 먹을 수 있는 걸 만들기는 했었구나.
포션도 결국에는 먹는 거니까.
잠깐만, 그러면…….
“스승님.”
“그냥 헤그릭이라 불러라. 망할 제자는 한 명으로 족하니까. 요리 스킬은 전수해 줄 거지만. 자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딱 알겠어. 이곳에 오래 머물 놈이 아니야.”
그건 맞다. 결국에 내 목적은 100층 정복이니까.
“오랜만에 등반가다운 등반가를 만났군. 그래서 뭐가 궁금한가?”
“간혹 요리 중에 특별한 효과를 주는 것들이 있었는데요. 당장 상점창에서 파는 스페셜 도시락도 그렇고, 혹시 포션을 만들 때 사용하는 것들로 요리를 하면 효과가 생겨납니까?”
“당연하지. 굳이 약초가 아니더라도 각 몬스터의 부위마다 부여되는 효과가 있어. 그걸 알고 있느냐 마느냐에 따라 요리의 질이 달라지지.”
빙글, 술잔을 돌린 그가 말을 잇는다.
“무작정 조합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잡탕은 어디까지나 잡탕. 이 녀석이 나한테 요리를 배우는 이유야.”
그렇군. 뭔가 실마리가 생긴 느낌이다.
단순히 고기를 굽고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면 맛뿐만 아니라 버프까지 얻을 수 있다.
내게는 별을 주시하는 눈이 있으니 서로 어울리는 재료를 파악하기도 쉽겠지.
“배도 채웠겠다. 스킬을 전수해 주마. 떠나 보낼 녀석이기는 하지만 기본기는 가르쳐야지. 내일부터는 바빠질 거야.”
“바라던 바입니다.”
“어디 보자. 대충 일주일 정도면 되겠지. 이후에는 대가리 깨져 가며 실전으로 익히게나.”
일주일이라.
그 정도 시간은 있다.
이왕 머물게 되는 거 그것도 할까?
덕춘이랑 약속한 것도 있으니.
“이번에는 제가 얻어먹었으니 가기 전에 대접 한번 하겠습니다. 헬다잉 키친 어떻습니까?”
“오호라. 그것도 알고 있는가? 음식에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구먼그래. 나도 한때는 그곳 소속이었다네. 추억이 돋는구먼.”
헤그릭이 그곳 소속이었다고?
그건 그거대로 놀라운데.
“헬다잉 키친? 그게 뭐요?”
박재경 이 녀석은 어째 아는 게 없냐.
나에 대해서도 모르더니만.
“너 혹시 커뮤니티 안 하냐? 개인 거래도.”
“잘 안 보지. 허구한 날 뻘소리만 올라오드만. 그 시간에 재료 손질하고, 밥이나 해 먹는 게 남는 거 아니겠수?”
에휴. 그럼 그렇지.
답답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헤그릭도 녀석의 뒤통수를 친다.
“에라, 이 녀석아.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아야지. 네가 NPC냐, 어? 등반가라는 놈이 위로 올라가야 할 거 아니야. 그래야 새로운 식재료도 얻고 그렇지.”
“아 씨, 안 그래도 떠날 생각입니다. 여서 더 눌러앉아 봤자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고, 이 양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등반하고 싶어졌습니다.”
“잘 생각했다. 아직 갈 길이 먼 애송이가 벌써 퍼져 있으면 안 되지.”
“그래서 헬다잉인지 다이빙인지는 뭡니까?”
“보면 안다. 뒷정리해라. 난 자러 간다.”
대충 손을 흔들고 자리를 뜨는 헤그릭.
난 박재경과 자리를 정리했다.
그렇게 53층에 오른 첫날이 흘렀다.
* * *
53층에 올라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반복되는 일과.
아침에 일어나서 근처 몬스터들이 얼쩡거리지 않게 정리 좀 해 주고 장작을 팬다.
산에 올라 나무도 해 오고, 식재료로 쓸 만한 것들도 챙긴다. 그러고 나서는…….
“아!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에엥? 하라는 대로 했는데요?”
“어허허허. 난 그렇게 개똥 같은 요리를 알려 준 적이 없다.”
헤그릭에게 요리를 배웠다.
[요리 (C) Lv.5]
요리 자체는 밖에 있을 때도 종종 했기에 흉내는 낼 줄 안다.
지금 만든 것도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난 만들고 있던 스튜를 떠먹었고.
“오우, 쒯.”
[독 내성 (A) Lv.2]
[소화 (A) Lv.6]
바로 몸을 지키기 위한 스킬들이 발동됐다.
맛도 장난 아니다. 심연의 마물 슈트가 이런 맛일까.
몸에도 나쁘고, 맛도 나쁜 최고의 폐기물!
“덕춘아, 먹을래?”
“궤?”
농담이야. 주먹 내려.
나 주인이잖아. 때리지 마.
녀석의 앙증맞은 주먹을 내리며 자연스럽게 만든 요리를 떠먹었다.
“너도 참 징하다. 그런 걸 먹고 싶냐?”
“아깝잖아요. 내성 스킬 레벨도 올리고, 입맛 버려 놓으면 어지간한 거 먹어도 맛있게 느끼지 않을까요?”
“저 녀석도 정상은 아닌데 네놈도 정신이 나간 거 같구나.”
혀를 차는 헤그릭이 자리를 뜨고, 난 냄비째로 가져와 식사 시간을 가졌다.
이곳에 와서 단순히 요리 스킬만 배우지는 않았다.
그동안 하지 못한 것들을 해결했지.
냥펀에게 받은 스킬북을 사용해 스킬 레벨을 올렸다.
[SS급 권능, 스킬 합성 (비활성화)]
-활성화까지 이틀 남았습니다.
“아직 안 풀렸네.”
별수 없지.
성과는 있다, 주요 스킬들의 레벨이 올랐으니. 승급한 것도 몇 개 있고.
추운 곳에 있다 보니 냉기 내성도 성장했다.
잡다한 아이템들은 보관 중이다. 나중에 필요하면 쓰든지 할 예정.
물약 제조도 계속하고 있다.
요리하면서 느낀 건데 물약을 만들며 터득한 요령과 지식도 은근히 쓸 만했다.
버프에 중점을 둔 요리를 만들어 볼까 싶어 연구를 거듭하는 중.
그러면서 만든 포션들은 냥펀에게 맡겼고, 조만간 정산금이 들어올 거다.
냥펀이랑 핥짝이는 잘 올라가고 있나 모르겠네.
50층에서 만난 다음 같이 움직이는 거 같던데. 탈모맨은 어디쯤 왔으려나.
다른 이들이 뭐 하는지도 궁금하고.
난 커뮤니티를 열었다.
“이야, 개판이네.”
피식 웃었다.
게시글에 올라와 있는 글.
그중에는 사진이 찍혀 있는 것들도 있었다.
[니머리 탈모]: 이곳의 해적왕은 나다!
로망을 이루었다. 껄껄껄!
(사진)
“안대는 또 어디서 난 거야.”
51층에 올라왔는지 탈모맨이 약탈자의 것으로 보이는 배 위에서 시미터를 든 채 사진을 찍었다.
해적 하면 떠오르는 커다란 모자와 눈에는 안대까지.
그 와중에 쫄쫄이에 보타이는 포기하질 않네.
끔찍한 혼종이었지만 반응은 좋았다.
-형님, 저도 동료가 되고 싶습니다!
-저 항해사 자격증 있어요!
-해적 하면 음악가가 필 수 아닙니까! 저 바이엘까지 쳤습니다!
└아니 바이엘은 좀;
하는 짓이 워낙 또라이라 그런지 지켜보는 맛이 있다.
[정수리 핥짝]: 50층대 환경 왜 모양이냐.
다들 먹을 거 잘 챙겨 놔라. 굶어 뒤지기 딱 좋다.
(사진)
[냥냥펀치]: 나를 찬양하거라! 핥짝이!
[정수리 핥짝]: 오케이. 핥짝핥짝 무료 이용권 증정!
[냥냥펀치]: …그거 반품됨?
[정수리 핥짝]: 기분이다, 하나 더 추가!
[냥냥펀치]: 냐앙…….
핥짝이는 어디까지 올랐는지 모르겠지만 팁을 뿌렸고, 척 봐도 깔끔한 브런치 사진을 함께 올렸다.
냥펀이야 따로 사진을 올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하는 말만 봐서는 둘이 같이 있는 것 같고.
오지혁은…….
[오지혁_산군]: 이걸 왜 올려야 하는 거냐, 버러지들아.
(사진)
[소담소담]: 왜요, 좋으면서.
[오지혁_산군]: …닥쳐라.
“김소담이랑 같이 등반 중인 거 같은데?”
이 무슨 기묘한 조합인가.
친선 경기 때도 둘이 같이 있더니만… 설마?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냥 오징혁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가 분명하다.
그건 그거고.
“슬슬 효과가 오는구만.”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오지혁이 올린 사진. 그건 척살단을 잡은 뒤,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뿐일까. 그의 뒤에는 현자와 오델토, 헤이다가 있었으니.
-저곳이 그곳인가!
-그러하다. 52층의 명소. 이블아이를 비롯한 네임드들이 거쳐 간 곳!
-쁘띠공듀 님도 들렀다는 소문이 있다!
└후욱후욱……!
└어디서 후욱! 더럽게 후욱! 숨을 내쉬어!
└자강두천 어서 오고.
현자와 따로 이야기해 뒀던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거 같다.
연합 사람들에게 내려진 척살령.
약탈자 무리와 그 속에 숨어 있는 척살단을 처리하라는 거였는데, 연합의 특성상 강제성은 없었다.
되도록 해라, 무리 가지 않는 선에서.
권유에 가까운 이야기.
그래서 준비한 게 이거다.
“일종의 유행이지.”
랜드마크 하나 만들어 두고 인증을 하는 것.
상징성이야 내가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팬심이라는 게 무서워서 말이야.
52층에 있는 척살단이 몰려 있는 곳은 용암 동굴 초입.
그곳에 수많은 사람이 오간다면 그들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다들 한가락 하네.”
인증글을 올린 건 오지혁뿐만이 아니다.
게시글을 내려보자 그전에 들렀던 사람들이 쓴 글도 있고, 핥짝이가 올린 글도 있었다.
전부 사실인지 확인할 방도가 없어 실제로 얼마나 많은 척살단이 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너 군데는 박살 난 거 같은데.”
“그에에.”
적어도 그 정도는 처리한 것 같다.
살짝 긴장하고 있기는 했다. 척살단은 다른 대형 길드와도 연관되어 있었고, 일본의 척살단 오니노츠메를 정리할 때도 협박을 받았으니까. 전 세계 대형 길드와 척살단을 적으로 돌리는 거라고.
하지만 분위기로 봐서 팽을 당한 건 오히려 척살단 같았지만.
-근데 척살단 애들 대형 길드랑 엮여 있다지 않았음?
-잘못된 공략집도 정부랑 합작한 거잖아.
-해외도 비슷하더만. 내 친구한테도 물어봤는데 튜토리얼 구간 기억이 없다 했음.
└구라 ㄴㄴ. 너 친구 없잖아.
└들켰네^^, ㅅ;발아.
-해외 쪽에서도 게네들이 백환 같은 거 먹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나옴.
-부분 인정했는데 척살단이랑은 관계없다고 못 박았다는데?
생각보다 우리 쪽 활동이 활발해서 그런지 해외 대형 길드도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척살단이 하는 짓은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여질 수 없는 거니까.
지금쯤 그들도 우리나라 대형 길드가 어떻게 됐는지 파악을 마쳤을 거고.
자세한 건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말이야.
“이놈들이 워낙 음흉해야지, 안 그래?”
“그엑. 그엑.”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나를 노릴지도 모른다.
나야 환영이지만. 직접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아.
식사도 마쳤겠다. 슬슬 준비할까.
일주일이 지난 오늘.
-띠링.
[안녕하십니까, VIP 고객님. 헬다잉 키친에서 확인 메시지 보냅니다.]
[금일 오후 7시, 스페셜Ⅲ 출장 뷔페가 찾아갑니다.]
[VIP 고객님께 전달 사항이 있는 관계로 제3지부장 체키 프랑켄이 직접 방문할 예정입니다.]
헤그릭과 덕춘이에게 약속했던 헬다잉 키친 출장 뷔페가 온다.
그것보다 전달 사항이라.
“그건가.”
대충 짐작 가는 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