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53층
일을 마치고 용암 동굴로 돌아왔다.
일본의 척살단 오니노츠메를 잡은 후, 2시간을 넘게 돌아다녔지만 다른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소식이 돈 건가.
놈들끼리도 커넥션이 있겠지.
그러지 않으면 서로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
척살단끼리는 마주쳐도 모른 척 넘어간다. 각국의 대형 길드도 마찬가지.
물론 대형 길드원이라고 전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는 않겠지만.
길드 사람이 몇 명인데 전부 다 알려 주면 통제를 어떻게 해.
헤드급에게만 알려 줬을 가능성이 높다.
평범한 길드원들이야 척살단이고 뭐고 덤벼들지 않으니 그들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겠지.
“청소를 하고 왔나 보군. 이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이들이지.”
“알고 있었군요.”
“모를 수가 있나. 여긴 내게 앞마당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인데.”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SSS급 권능, 현자의 눈을 가지고 있으니 누가 뭘 하는지 정도는 쉽게 알겠지.
건들지 않고 놔두는 이유야 그가 NPC이기 때문일 테고.
NPC는 함부로 등반가를 공격할 수 없으니까.
특히나 이곳은 용암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
53층으로 향하기 위해 오는 이들 역시 존재한다.
어떤 식으로든 사고를 치면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 역시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건 현자가 바라는 게 아니고.
멸망하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
존 트레일러의 소망은 그거였으니.
어떻게 아느냐.
[존 트레일러- NPC]
-세인턴 피스의 현자
-멸망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종말은 슬프니까요.
그에게는 그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게 분명했다.
물어볼 생각은 없다.
자신이 속한 세계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묻는 것은 실례니까.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빙그레 웃은 그가 등을 돌렸다.
“오델토와 헤이다도 지금쯤이면 충분히 시간을 보냈겠지, 들어가세.”
“그러죠.”
그를 따라 들어간 은거지.
전에는 들을 수 없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히히히! 늘어난다!”
“헤, 헤이다… 아파.”
“이에잇!”
“으으으으.”
뭘 하나 했더니만 오델토 뺨을 늘리고 놀고 있네.
피식 웃음이 났다.
다행이다. 기억 속 오델토의 모습과 달라서 어색해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셨나요?”
“안녕!”
나와 현자를 발견한 오델토가 손을 흔들었고, 헤이다 역시 쪼르르 달려와 나한테 달라붙었다.
입가에 부스러기가 있는 걸 보니 애플파이는 잘 먹은 것 같네.
좀 닦지.
“으아으.”
대충 털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기 좋네.
“약속 지켰지?”
“응!”
헤이다가 방긋 웃는다.
녀석한테도 약속했었다.
오델토와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부활을 마친 만큼 행동반경은 줄어들었을 거다.
전에는 층 전체를 영역으로 두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혼자인 것보다는 낫지.
혹시라도 일이 생긴다면 현자가 잘 대처해 줄 거다.
“거의 뭐, 아버지의 눈빛인데요?”
“껄껄걸! 어찌 안 즐겁겠나. 적적하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는 시끌벅적하겠어.”
좋다.
이걸로 내가 할 건 끝.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올라가야죠.”
“올라가? 왜애, 같이 놀지!”
“헤이다, 이블아이 님은 할 일이 많아요. 대신 제가 있잖아요!”
“오델토는 재미없잖아.”
“그, 그럴 리가…….”
헤이다에게 묵직한 한 방을 맞은 오델토가 비틀거리고, 현자는 잠시 따라오라면 손짓한다.
“그래, 여유롭게 있기는 힘든 시기지. 52층을 클리어할 방법을 알려 주겠네.”
일이 끝나면 도와준다고 했었지.
그가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어딘가로 가더니 조각상의 머리를 가지고 온다.
“용암 동굴 깊숙한 곳에 머리가 잘린 조각상이 있네. 이걸 붙이면 포탈이 열릴 거야.”
“머리를 찾는 거였군요.”
“그렇지. 포탈이 생성될 때마다 랜덤으로 머리가 있는 위치가 바뀌네. 이번에는 내가 찾아 줬지만 다음에는 스스로 해 보게. 자네라면 어렵지 않을 거야.”
“다시 안 올라오는 게 제일 좋지만 말이죠.”
세상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조각상 머리를 받아 들였다.
“고맙네.”
“제가 더 감사하죠.”
“아니. NPC 중에는 안전지대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존재하지, 자의에 의해서든 시스템에 의해서든. 강대한 존재도 홀로 고립되면 내면이 썩어 간다네.”
그의 시선이 은거지 안에 있을 오델토와 헤이다에게로 향한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휜다.
“이렇게 큰 선물을 받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한 가지 팁을 주겠네.”
통도 크시지. 조각상 머리에 이어 팁까지 주려 하다니.
역시 현자, 만만세다.
“그 전에, 자네 현재 스테이터스가 어떻게 되나.”
“어… 잠시만요.”
스테이터스를 안 본 지 꽤 됐다.
종종 스텟에 따른 착용 제한이 붙은 아이템이 있기는 했지만 이미 스텟이 상당한 터라 따지지 않고 쓸 수 있어서.
얼마나 올랐으려나.
그동안 영약도 많이 먹고, 층을 돌파할 때마다 추가 스텟을 받았으니 꽤 될 텐데.
칭호를 통해 얻은 스텟도 제법 되고.
이렇게 물어보니 나도 궁금하다.
“스테이터스.”
[조현수 (최대 등반 층- 52)]
-힘 669
-민첩 681
-체력 698
-마력 701
-신성력 538
“워우.”
“그에에.”
미쳤네.
많이 올랐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올랐을 줄이야.
스킬을 많이 써서 그런가 마력은 700대를 뚫었다.
신성력도 제법 올랐고.
휴고와 마그네타가 준 칭호.
[잊힌 교단의 팔라딘- 칭호]
-얼음과 불의 교단의 명예 팔라딘에게 주어지는 칭호
-당신이 활약하는 만큼 교단의 명성 또한 높아질 것입니다.
-잊힌 교단의 대표로 업적을 쌓고 칭송을 받으세요. 그에 따라 신성력이 증가할 겁니다.
그동안 한 것도 많고, 쁘띠공듀로 칭송도 받는지라 가파르게 상승했다.
앞으로는 더 올라가겠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배경으로 공략을 올릴 테니.
스테이터스 정보를 전하자 현자가 허탈하게 웃는다.
“굉장하군. 52층에 오른 자의 스텟 평균이 600대 중반이라니. 태생 자체가 강한 자들이라면 또 모르겠네만, 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는 걸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수준이야.”
“그쵸. 저도 처음 각성했을 때는 스텟을 다 합쳐 봐야 30도 안 됐으니까요. 신성력은 있지도 않았고.”
나 많이 성장했구나.
장비와 아이템에 붙은 스텟은 스테이터스에 적용되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가진 저력은 이보다 더 강하다는 말.
“스테이터스에 아이템에 붙은 스텟은 적용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나?”
왤까. 나도 궁금하기는 했다.
보통 착용하고 있는 것까지 적용되지 않나?
게임 보면 그러던데 물론 탑이 게임은 아니지만.
짧게 고개를 끄덕인 현자가 말을 이었다.
“장비와 아티팩트 같은 건 벗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지. 스테이터스는 순수하게 그 사람의 강함을 나타낸다네.”
“오호라.”
듣고 보니 그렇다. 지금까지 올라오면서 장비도 여러 번 교체했으니까.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손에 없으면 의미가 없다.
현자가 가까이 다가온다.
[사일러스 (S) Lv.MAX]
사일러스. 그것도 MAX 레벨.
킬더레스가 이후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이다.
도대체 뭘까. MAX 레벨이라는 건. 스킬은 ‘Lv.10’까지 있는 것일 텐데.
“자네라면 보이겠지. 방금 사용한 스킬의 레벨이 MAX인 것을.”
우리 둘만의 공간.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초월이라네. 시스템적으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은 999가 한계. 79층에 오를 때까지 모든 스텟을 999로 만들게. 그게 80층에 진입할 수 있는 조건이니까. 그때부터는 진정한 초월자의 영역이야. 수많은 등반가가 고꾸라진 원흉이기도 하지.”
“100층에 오르려면 혼돈 수치가 100을 넘어야 하는 거랑 비슷하네요.”
“그렇지. 상위층은 지금과는 달라. 그대라면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네.”
“존 트레일러, 하나 부탁해도 됩니까?”
여기까지만 해도 차고 넘치는 보상을 얻은 것 같지만 하나만 더 부탁할 게 있다.
은근 외로움을 많이 타는 그에게도 좋은 일이고.
좋은 일 맞나? 맞을 거다.
“무엇이든. 제약에 걸리는 것만 아니라면 들어주겠네.”
고개를 끄덕이는 현자.
난 계획했던 일을 한 뒤, 헤이다와 오델토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용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목이 잘린 조각상에 머리를 올리자.
[52층 클리어]
[포탈이 생성됩니다.]
포탈이 생성되었고 난 망설임 없이 위로 올라갔다.
* * *
-우우우우웅
전송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느껴지는 한기.
[53층- 동사]
[한 달을 버티시오.]
[만년 서리 수정에 흔적을 남기시오.]
“이번에는 얼어 죽는 거냐.”
“그에에에.”
더웠다가 추웠다가 가지가지 한다.
대충 이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10층, 20층대도 비슷했잖아.
그것보다…….
“만년 서리 수정이라.”
53층을 통과하려면 그걸 찾아야 하는 건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후오오오오오
거센 눈보라가 치는 곳.
보이는 거라고는 눈밖에 없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릎까지 들어간다.
밑에 뭐가 있을지 짐작조차 안 가는 상황.
운이 나빠 낭떠러지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겠…….
-쿠르르릉
“말이 씨가 됐네!”
“그에에에엑!”
딛고 있던 바닥이 깨지며 아래로 추락했다.
나와 함께 눈이 쏟아져 내린다.
빙하와 빙하 사이의 골짜기.
크레바스.
얼핏 보인 바닥에는 송곳처럼 솟아오른 얼음 기둥이 빽빽했다.
-콰아아앙!
곧장 파이어 밤을 터트려 위로 솟구쳤다.
온몸이 눈투성이가 됐지만 꼬챙이가 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다시 눈밭에 착지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장난 아니구만. 추위도 추윈데 이런 것까지.”
눈사태가 일어나 크레바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50층대가 빡세긴 하다.
그런데…….
“덕춘아, 밑에 있던 얼음 송곳 좀 인위적이지 않았냐?”
“궤엑.”
아무리 탑 환경이 지랄 맞기로 유명하기로서니 크레바스에 얼음 송곳은 선 넘었지.
누가 일부러 설치한 것 같달까.
게다가 크레바스 위는 얇은 얼음으로 막혀 있었다.
눈이 쌓일 수 있도록.
마치 일부러 안 보이게 만들어 둔 것 같은 느낌인데.
흠칫.
-파앗
난 자리를 박차고 옆으로 굴렀다.
“쿠어어어어!”
내가 있던 자리로 내리꽂히는 거대한 앞발.
앞발이 땅에 꽂히는 것과 동시에 눈과 얼음이 폭발한다.
나를 공격한 건 다름 아닌…….
“곰?”
그것도 무식하게 커다란 곰이었다.
하얀색 털로 뒤덮인 몸은 대충 봐도 대형종.
두 발로 선 크기가 9미터? 10미터인가.
체고도 체고지만 떡대가 장난 아니다.
몸과 얼굴에 남은 무수한 흉터.
[빙극태웅氷隙太熊]
-하이 파이브 한 번으로 저승행!
-극한의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6성급 몬스터입니다.
-빙극. 크레바스를 좋아해 간혹 빠지고는 합니다.
6성급이냐.
올라오자마자 보스급을 만나네.
꿀꺽.
침을 삼켰다.
긴장해서?
물론 긴장한 것도 있지만…….
“덕춘아, 보이지?”
“그에에에.”
녀석의 등 뒤에는 온갖 무기가 꽂혀 있었다.
사냥을 하려다 되레 당한 이들이 남긴 것들이겠지.
검과 창, 단검으로 보이는 것까지.
등빨이 있어서 그런지 박힌 무기도 여러 개다.
결정했다.
사냥도 하고 장비도 털자.
“그르륵! 쿠어어어엉!”
자신을 마주하고도 투지를 불태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빙극태웅이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포효했고.
[극한의 포효 (AA)]
-대상의 몸을 얼립니다.
냉기와 위압감이 나를 덮쳤다.
과연 6성급.
소리 한 번 지른다고 이런 효과가.
“우리도 질 수 없지. 으아아아!”
“궤에에에엑!”
괜히 경쟁 심리가 붙어 소리를 질렀다.
위압이니 뭐니 하는 것도 상대방보다 약할 때 먹히는 것.
-챙강!
몸에 달라붙었던 냉기, 그로 인해 생겨난 얼음을 깨트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가죽은 질길 거 같으니 눈부터 노려야 하나?
공략법을 찾던 그때.
-푸욱!
“쿠어어어어!”
창 하나가 날아와 빙극태웅의 어깨에 박혔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곳에서 걸어오는 한 사내.
“뭐야. 함정이 움직였길래 와봤더니만 알록달록한 애가 있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함정이라.
설마…….
‘내가 빠졌던 크레바스를 말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