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크라켄
약탈자 무리는 하나가 아니다.
다국적 헌터들의 집합소이지.
방금 처리한 히엔의 말이 맞다. 그는 해적 전체를 통솔할 능력이 없다.
그저 가장 큰 무리의 대표를 맞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지.
애초에 이들에게 서열에 따른 체계적인 움직임을 기대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출신도 다 다르고, 좋은 목적으로 만난 것도 아니며, 상황에 따라서는 하루아침에 밖으로 퇴출당할 사람이니까.
별다른 이유 없이 고참이 선장을 맡았겠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만 말이야.”
이런 곳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는 거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혹시 모른다. 며칠만 더 버텼으면 한 달을 채워 위로 올라갔을지.
나름대로 실력이든 뭐든 있었을 거다.
저기, 오고 있는 놈들도 말이야.
“덕춘아, 부탁한다.”
“궤에에에.”
난 덕춘이에게 아공간 아이템을 넘겼다.
전투는 내가, 놈들이 남긴 물건들은 덕춘이가 모을 예정.
아무래도 혼자서 전부 하기에는 부담스러워서 말이지.
분업하는 편이 낫다.
“저놈이다!”
“빨리 쳐 내!”
고함과 욕설.
살벌한 기세로 다가오는 이들이 스킬을 난사한다.
이미 내가 한 짓을 봤다.
다가오기보다는 원거리에서 날 노리려는 것 같은데.
“그럴 수 있을까?”
-타앗
-콰아아아앙!
위로 뛰어오른 뒤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움직였다.
이곳까지 이동할 때야 마력과 체력을 아끼느라 쓰지 않았지만 전투라면 말이 달라지지.
“날아온다!”
“쏴! 뭐든지 다 쏴!”
“저 새끼 잡아!”
“뭐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아이템은 엄청나겠는걸?”
돈에 눈이 돌아간 녀석들인가.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내가 착용한 장비에 눈독을 들인다.
나였다면 먼저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인지부터 확인했을 텐데.
-스팟!
-구구구구궁!
몸을 스쳐 지나가는 화살과 창.
온갖 스킬.
중간중간 파이어 밤을 이용해 방향을 바꾸었지만 모든 스킬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디까지나 파이어 밤은 공격 스킬. 비행 스킬이 아니었으니까.
-콰앙!
-카가가가가각!
전격에 디버프. 정신 공격과 화염이 나를 뒤덮었지만.
“맞췄다!”
“떨어지기만 해봐. 그대로 도륙 내주마!”
“저 투구는 내 거다! 건들지 마!”
성격도 급하지. 날 벗겨 먹을 생각을 벌써부터 하다니.
[물리 공격 내성 (A) Lv.9]
[강체强體 (AA) Lv.7]
[강철의 의지 (A) Lv.9]
물리적인 공격은 3개의 패시브 스킬에.
정신 공격과 저주는…….
[저주 내성 (A) Lv.1]
[정신 보호 (AA) Lv.2]
두 패시브 스킬에 막혔다.
나머지 스킬 공격?
[마법 무효화 (AA) Lv.3]
[화기 내성 (B) Lv.5]
[전격 내성 (B) Lv.8]
이것들이 있어서 간지럽기만 하다.
나를 잡으려거든 더 대단한 걸 준비해 와야 할 거다.
그러지 못한다면…….
“너희가 죽을 거거든.”
[버프 다이스 (A) Lv.3]
[2]
[둔화 부여]
가볍게 두른 버프.
거기에.
[홀리 크랩 (AAA)]
-콰지지직!
성무로 소환된 성스러운 집게발이 함선 하나를 붙잡았고.
[심연의 눈동자 (A) Lv.7]
[집착하는 망령 (A) Lv.9]
끔찍한 환상과 더덕이에게 고통받았던 망령이 뛰쳐나와 우두머리 격 인물들을 사로잡았다.
라스트로.
[워터 (D) Lv.2]
[프로즌 브레이크 (AAA) Lv.1]
워터와 프로즌 브레이크의 콜라보.
-꽈드드드득!
바다가 얼어붙으며 뭉쳐 있던 배들을 붙잡았고.
망설임 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공격 스킬들을 쏟아부었다.
그때마다 속성에 맞게 펠라인 세트가 번쩍인다.
-찌유우우우웅!
오로라 빔이 오색 찬란한 색을 내뿜으며 배를 가르고 지나간다.
빙판에 내려선 내가 파이어 밤을 터트릴 때면 어김없이 사람과 선체가 터져나갔으며.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
[절삭 (AA) Lv.2]
친히 검을 그은 곳은.
-사아아아아악!
깔끔한 단면을 남기고 베어졌다.
압도적인 무력 차이.
귀를 때리는 폭음과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광선에 약탈자들은 고개조차 내밀지 못하고 떨어야 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능한 빠르게 이 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뿐.
-촤아아아아
물보라 치는 가운데 내 검을 쉬지 않았으며.
마지막 남은 함선을 갈랐을 때는…….
“도, 도망쳐!”
“살려 주십시오!”
“일단 튀어! 달리라고!”
모든 의욕을 상실한 약탈자들이 도주하는 풍경만이 남았다.
굳이 쫓지는 않았다. 별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살아남아서 떠들 놈이 필요하거든.”
이번 일을 퍼트리고 경각심을 가지도록 만들지.
아무리 아이템을 모아서 밖에 나가 사는 게 목적이라지만 개죽음은 피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생존 본능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올라오는 거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궤에에에엑!”
잔해가 떠다니는 바다.
부서진 갑판에 서 있는 내게 덕춘이가 다가왔다.
아공간 아이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보따리도 한 아름 싸 왔다.
역시 덕춘이야. 그 빠른 시간 내에 물건을 긁어 오다니.
“보따리는 가지고 다니기 뭐하니까 바로 처분해야겠군.”
“그에에에.”
대단한 물건은 없었다.
대부분 A급 이하. 종종 AA급 아이템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크게 관심 가질 만한 옵션은 보이지 않았기에 상점창에 판매.
짭짤한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남은 건.
“크라켄, 봉우리.”
* * *
생각보다 이동하는 데 시간을 많이 사용했다.
조금은 여유가 있지만 봉우리가 있는 곳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지.
게다가.
[소란스러움에 크라켄이 분노합니다.]
[필드 보스- 크라켄이 출연합니다.]
내가 난리를 피운 탓에 잠잠하던 크라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적 선장이 말했던가.
오늘 크라켄 공략에 들어간다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다.
적당히 끼어들어 촉수만 얻고 내려가야지.
난 바다에 뛰어들어 빛의 기둥 안으로 헤엄쳤고.
-우우우우웅!
[대양의 봉우리 구역에 진입했습니다.]
[크라켄의 공격에 대비하십시오!]
“젠장. 온다!”
“예상 시간보다 빠른데?”
“약탈자 새끼들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소란 피우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각국의 길드 마크를 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원이 대형 길드원은 아니었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대충 40퍼센트 정도?
내가 모르는 길드의 마크를 단 사람도 있었고, 탑에서 만나 팀을 꾸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개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고.
그중에는 연합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경계 밖에 있던 해적들도 배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는 더 하다.
구색만 갖췄던 놈들과 달리 무슨 수로 만들었는지 모를 제대로 된 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예 아일랜드 터틀을 테이밍 해 부리는 사람도 있었고, 선장이 말했던 대로 크라켄 공략을 준비했는지 각자 맡은 범위를 커버하고 있었다.
크라켄.
5성급으로 분류되는 몬스터였지만 초대형종 같은 경우에는 6성급으로 취급된다.
-콰르르르르륵!
“제기랄! 뚫렸다! 보조 팀 붙어!”
“촉수 시발! 지져! 재생 못 하게 지지라고!”
당당히 51층의 보스몹으로 존재하는 이 녀석의 경우에는 당연히 초대형종이었다.
그 정도면 그나마 나은데.
[대양의 봉우리를 지키는 크라켄]
-봉우리에 깃든 힘을 받아 더욱 강해졌습니다.
“버프까지 받은 녀석이었네.”
“그에에.”
촉수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덤프트럭만 한 굵기다.
과연 초대형 종.
특별한 능력 없이도 피지컬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놈이건만, 재생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그 외에 마법적인 능력은 없다는 것 정도?
그래 봤자 촉수 하나 자르는 것도 고역인 것 같지만.
여덟 개의 다리.
빨판에 붙은 함선이 종이배처럼 휘둘려지고, 물에 빠진 이는 허우적거릴 시간도 없이 촉수에 맞아 밑으로 처박힌다.
투명하게 몸이 사라지는 걸 보니 즉사한 게 분명하다.
방어력에 신경 쓰지 않은 사람이라면 일격조차 버티기 힘들다는 건가.
보물 주머니에서 인면어 마스크를 꺼내 썼다.
나뿐만이 아니다. 한국계 헌터들은 대부분이 쓰고 있다.
값싼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수중 호흡 아이템이니까.
“시작해 보자.”
난 밑으로 잠수했다. 덕춘이도 마찬가지.
촉수를 막느라 다른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르르르르.”
바다 밑에는 크라켄 본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본다.
놈의 목적은 봉우리에 접근하는 사람을 막는 것.
그 말은.
-촤아아아아악!
내가 주요 타깃이 된다는 뜻이었다.
빠르게 헤엄쳤지만 놈의 촉수가 더 빠르다.
파이어 밤을 터트려 피하려던 때.
“궤에에에!”
덕춘이가 내 머리통을 붙잡고 이동한다.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가는 촉수.
그래. 빨판은 너만 있는 게 아니다 이거야.
우리 영물님께서도 가지고 있다.
봐라. 앙증맞은 손으로 내 머리를 컨트롤하는 모습을!
“그에에.”
아, 왜. 칭찬하는 거잖아.
속으로 덕춘이와 떠드는 것도 잠깐의 여유.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다는 사실에 분노한 크라켄이 두 개의 촉수를 더 보내 왔다.
총 세 개.
유연하게 촉수는 변칙적인 각도로 들어왔으며, 이동 경로를 예측하는 것 또한 힘든 일이었으나.
-카아아아앙!
난 애초에 예측해서 피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공격을 흘려보내 충격을 줄인 다음.
[달라붙기 (C) Lv.4]
붙어 버리는 게 목적.
펠라인 세트와 패시브 스킬들이 아니었다면 팔 하나는 내줬을 만한 위력이다.
어깨가 뻐근했지만 무시하고 팔을 뻗었다.
그런 나를 옥죄기 위해 촉수가 감겨온다.
6성급이라고는 하나 결국에는 문어.
후려치거나 움켜쥐는 것 정도가 공격의 전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하기는 하지만…….
‘일단 하나 정도만 끊어 볼까.’
온몸을 조여 오는 촉수.
압박감에 갑옷마저 괴상한 소리를 낸다.
촉수가 말리면 말릴수록 몸통에 가까워지는 건 당연한 일.
내가 노리는 건 그거였고.
견디기 힘들다고 느낄 때쯤.
[되갚기 (AA) Lv.7]
-콰아아아아앙!
그동안 쌓인 데미지를 한 번에 터트렸다.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촉수 조각.
체액과 피가 바닷물에 퍼지며 뿌옇게 번졌고.
“그르라아아아!”
크라켄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멈추면 안 된다.
놈에게는 재생 능력이 있다.
비록 촉수 하나를 날려 버렸다지만 1분도 되지 않아 복구시키겠지.
내가 원하는 건 그 잠깐의 찰나.
다행히 물 위에서는 공략 무리가 분투해 주고 있다.
나를 잡기 위해 모든 촉수를 쓸 수 없다는 것.
‘덕춘아, 붙자!’
난 덕춘이에게 의지를 전했고.
-파아아악!
내 뜻을 읽은 덕춘이가 나를 이끌고 놈에게 질주했다.
작은 덩치에서 나온다고는 믿기 힘든 추진력.
크라켄의 촉수가 어지럽게 뻗어 왔지만 곡예나 다를 바 없는 헤엄으로 돌파.
난 놈의 미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케이. 덕춘이는 나가 있어.
“그에에에.”
덕춘이가 빠져나간 직후.
“그라라라락!”
위기를 느낀 놈이 한순간에 모든 촉수를 회수해 나를 공격하려 든다.
설마 위에 있던 촉수까지 가져올 줄이야.
감이 좋네.
-촤라라라락!
-쏴아아아!
일곱 개의 다리.
빠져나갈 곳은 없이 덮쳐오는 일격.
스스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확실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방법이었고.
-콰아아아앙!
조금의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날아온 촉수 다발이 놈의 안면을 강타했다.
굉음과 파장이 폭발적으로 퍼져 나가는 타이밍.
[안개 질주 (AA) Lv.2]
난 안개화 되어 공격을 회피.
이어.
[안개화가 종료됩니다.]
[망자귀환亡者歸還 (AA) Lv.3]
능력치를 증폭.
인벤토리에서 뇌봉참검을 꺼내 놈의 미간을 찔러 넣었다.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놈의 외피라도 절삭이 가미된 공격에는 버티기 힘들었고.
[일렉트릭 쇼크 (AA) Lv.9]
[뇌봉참검의 효과, 전격이 흐릅니다.]
-파지지지지직!
난 그대로 전격을 쏟아부었다.
바닷속에서 펼친 쇼크!
머리 위로 전격 내성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지만 신경 쓸 틈이 없다.
죽을 거 같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정신줄을 놓기 직전에 스킬을 중단.
“궤에엑!”
빠르게 내게 다가온 덕춘이가 투구를 벗기고 얼굴을 핥아 준다.
회복 특성 덕에 조금은 힘이 돌아온다.
이제 남은 건.
[절삭 (AA) Lv.2]
[도축 (A) Lv.2]
-서걱
촉수를 챙기는 것.
혹시 몰라 2개 챙겼다.
바로 뜨자.
마음 같아서는 마무리를 하고 싶은데.
-촤아아아
촉수가 사라졌기 때문인가 위에서 전투를 벌이던 사람들이 하나둘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안 되지 안 돼.
‘봉우리에는 뭔가가 있단 말이지.’
크라켄은 그걸 지키는 거고.
놈을 잡은 건 난데 다른 사람이 챙기는 꼴을 지켜볼 생각은 없다.
미간을 찔리고 전기 충격을 받았지만 이 크라켄은 초대형종.
그것도 버프를 받은 놈이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정신을 차릴 거다.
지금 잠수한 녀석들도 봉우리보다는 빈사 상태인 크라켄에 이목이 끌릴 거고.
난 그 틈을 노린다.
“그에에에.”
덕춘이가 힘이 빠진 나를 데리고 밑으로 내려간다.
대양의 봉우리를 향해.
심해 저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산.
푸르게 빛나는 그곳으로 내려가고 내려갔다.
미세한 진동만 느껴지는 고요한 공간.
물의 온도는 차갑게 식고, 물길의 흐름은 잔잔하면서도 서늘하다.
원초적인 두려움마저 드는 곳.
그럼에도 입꼬리는 내려가지 않았고 기어이 봉우리에 도착했을 때는.
[대양의 봉우리에 도달했습니다.]
[포탈이 생성됩니다.]
[봉우리에 도달한 자! 보상이 지급됩니다.]
놈이 지키던 걸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