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05화 (205/740)

205화 공간이 되려나 모르겠네

51층. 익사 구간.

대양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빛의 기둥.

그 바깥에는 열네 척의 함선이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함선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게 많았지만 적어도 구색은 갖추었고, 잡동사니를 모아 만든 나룻배나 뗏목 따위와는 크기부터가 달랐다.

각 함선을 호위하듯 쪽배들이 포진해 있었고, 그중 대부분은 팀을 이루어 약탈에 나섰다.

“짜증 나는군.”

“참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1함선에 타고 있는 건 베트남 출신 헌터, 히엔.

우락부락한 몸에 각진 얼굴을 가진 남자였고, 그 옆에는 응우옌 반 빈이 서 있었다.

30층대부터 안면을 튼 이후 가깝게 지내는 사이.

현재는 약탈자로 활동하는 이들이었고, 51층에 올라온 지 4주가 지난 고참이었다.

각국의 헌터들이 모인 곳. 그중에서도 선장이라고 불리는 14인 중 하나였지만 그리 축하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 그를 따르는 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각자의 이익과 덩치 불리기를 위해 있을 뿐이었으니까.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일본, 태국 등등 온갖 나라에서 모인 이들.

50층대에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들이었고, 밖에 나가서도 위험하게 헌터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죽는 게 두려워 바득바득 기어 올라왔지만 몬스터도, 비상식적인 환경에도 진절머리 난 지 오래.

돌아가면 편안하게 즐기며 살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A급 헌터가 받는 사회적 대우와 남들보다 강하다는 우월감.

미래를 생각할 때야말로 가장 즐거웠으니까.

물론 그중에는 이곳에서 발판을 마련한 뒤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사람도 있었으나 히엔과 그의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 히엔이 얼굴을 구겼다.

“빌어먹을 대형 길드 놈들. 우리가 집 지키는 개인 줄 아나. 올라갈 거면 곱게 올라가지, 지들이 못하는 걸 가지고 왜 지랄이야. 시벌 것들이 진짜.”

“에헤이. 잘난 놈들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우리는 짭짤하게 벌잖아.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카악, 퉤! 똑같이 51층에 올라온 것들이.”

침을 뱉은 히엔이 빛의 기둥을 바라본다.

각국의 루키와 대형 길드원들, 개인의 능력으로 안에 진입한 이들이 모인 곳.

동시에 버티는 것 말고는 51층을 클리어할 다른 능력이 없는 자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곳.

아니. 배척받는 곳.

같은 51층에 있었지만 어떻게 올라왔느냐에 따라 무력은 극명하게 나뉘었다.

“크라켄을 잡다 다 뒈졌으면 좋겠군.”

“그것도 나쁘지 않지. 물갈이 싹 되면 안에 들어가서 긁어모아서 나오자고.”

약탈자 무리와 공략자 무리에 암묵적으로 약속된 내용.

공략자 무리는 크라켄을 잡아 52층으로 향한다.

약탈자 무리는 빛의 기둥을 지키며 해양 몬스터의 진입을 막는다.

대신 이곳으로 오는 이들을 약탈하는 것을 방관한다.

서로의 이익을 만족시켜 주는 거래였고, 대부분은 큰 불만이 없었으나 선장들의 입장은 달랐다.

능력 부족?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다.

평소라면 그들도 별다른 터치가 없지만 오늘은 아니다.

봉우리를 지키고 있는 괴수. 크라켄을 공략하는 날이었으니까.

예민해진 루키와 길드원들이 속을 긁고 갈 때는 약탈자 무리를 이끌고 전부 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었으나.

‘하자고 할 놈은 없겠지.’

히엔은 잘 알고 있었다.

속으로 생각한 말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는 안으로 들어가 일러바칠 것이고, 강대한 무력을 가진 공략자 무리는 본보기 삼아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걸.

당장 옆에 있는 빈도 마찬가지.

결국에는 남이었고, 밖으로 나가면 연락조차 하지 않을 사이였다.

더러워진 기분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그때.

“서, 선장! 약탈 나갔던 애들이 당했어! 다른 구역 애들도. 중간거점까지 털렸어!”

쪽배를 타고 온 이가 소리를 질렀다.

쌉빠롯. 타이 출신의 약탈자였다.

“몬스터?”

“사람! 미친놈이야! 보이는 대로 부수고 있다고!”

“강한 놈들은 그냥 보내라고 했잖아. 시발. 길드 소속 건든 건 아니지?”

“마크는 없었어. 분홍색 띠, 한국 쪽이야.”

종종 있다.

소속도 없이 강한 녀석들이.

크라켄을 잡고 봉우리로 향하려는 자들.

약탈자들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약탈 및 노획.

부딪쳐서 껄끄러운 상대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놔두는 게 기본 원칙이다.

상대에 따라서는 배에 태워 안내해 주기까지.

대형 길드원의 경우 섭섭지 않은 보상도 줬기에 어지간하면 그냥 통과시키라고 했더니만.

“그냥 놔두라니까. 멍청한 새끼들이 꼭 말을 안 들어. 욕심부리면 죽어. 그게 탑이다.”

“아니, 그냥 공격한다고! 미친놈이라고! 애들 다 당했다니까?”

히엔의 눈이 가늘어진다. 평소 지능이 모자란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유별나다.

도대체 여기까지는 무슨 수로 온 건지 이해가 안 되는 놈.

고개를 흔든 히엔이 나무상자에 든 쇳덩이를 들더니 그대로 집어 던졌다.

-콰아아앙!

포탄처럼 날아가 박히는 구슬.

물기둥이 치솟고 쌉빠롯이 타고 있던 쪽배가 크게 흔들렸다.

“허튼 소리하지 말고 길 열어 줘. 백기라도 들고 적이 아니라고 어필하란 말이야. 말은 통하잖아. 너도 통역 스킬은 있으니까. 안내해 주겠다고 해. 아예 배라도 한 개 연결해 주던가.”

“이미 했다고……!”

그가 뭐라 소리쳤지만 히엔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댕댕댕!

적의 출현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까지는.

-구우우웅

-우우우우우웅

바다를 타고 전해지는 진동.

초대형종이 날뛸 때나 느껴지는 박력.

“젠장! 몬스터다! 준비, 어?”

당연히 몬스터의 침입이라고 생각하던 히엔이 몸을 굳혔다.

아니다.

초대형종도, 떼를 이루어 덤벼드는 해양 몬스터도 아니다.

“저게 뭐야.”

난파선이나 다를 바 없는 배.

약탈자들이 사용하던 것이 미친 듯한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약탈품이 가득한 배 위에 서 있는 한 남자.

-콰아아아앙

그가 손을 뻗을 때마다 일어난 폭발이 추진력이 되어 배를 밀고 있다.

“저, 저놈이야! 히이익! 다들 도망쳐!”

* * *

시원한 바람이 분다.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펠라인 세트의 효과, 감각 공유 덕에 맨몸처럼 느낄 수 있다.

“약탈자 놈들 알뜰하게도 모았네.”

“그에에에.”

약탈자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이템을 가지고 밖에 나가는 것.

50층대에 올라오는 사람이면 대부분 A급 이상 무구를 쓰고 있으니 짭짤하겠지.

굳이 등급이 낮더라도 모아서 팔면 돈이 꽤 되고, 그 돈으로 다른 물건을 사 챙기면 그만이다.

한마디로 빼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빼먹는다는 이야기.

당장 지금 타고 있는 난파선에 있는 물건들도 잡스럽다 못해 이렇게까지 모아야 하나 싶은 것들도 있다.

상태가 별로라 상점창에 팔아도 제값을 못 받을 것들.

“몇 명을 상대했는지 기억도 안 나네. 에휴, 착실하게 살 것이지”

처음 잡았던 놈의 동료들을 시작으로 다른 놈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나중에는 5성급 몬스터, 아일랜드 터틀을 이용해 만든 거점까지 털었고…….

다국적 약탈자들.

덕분에 포인트도 두둑해졌고, 나한테는 필요 없지만 지나가기에는 아쉬운 아이템도 잔뜩 챙겼다.

이것들은 나중에 처분하도록 하고.

거의 다 왔다.

“저기가 봉우리가 있는 곳.”

근 사흘 만에 도달했다.

아직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나를 반기는 놈들이 보인다.

모양새를 갖춘 함선, 그 주변에 포진해 있는 쪽배와 나룻배.

대규모 해적인가.

대항해시대 뭐 그런 거?

“상관은 없지.”

약탈자들을 처리하며 들은 이야기가 있다.

길드와 해적들의 관계.

충분히 이들을 억누를 수 있었음에도 방치했다고 했었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스쳐 지나갈 사이, 이용하면 그만이니까.

무슨 정의감이 있어서 약탈자 무리를 정리하나. 나선다 하더라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시간을 소모할 바에는 하루라도 먼저 위로 올라가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이들에게 있어서 탑이란 밖으로 나가기 전에 거쳐 가는 곳에 불과했으니.

나도 마찬가지.

특별히 영웅 심리나 정의감 때문에 약탈자 무리를 공격하는 게 아니다.

소소, 아니지. 풍족하게 부수입도 좀 얻고.

겸사겸사하는 일이다.

“새로 들어오는 애들이 좀 쉽게 올라올 수 있도록 해놔야지.”

“궤에에에.”

예전이라면 모를까 우리 세계 또한 멸망에 접어들고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이런 쭉정이들 때문에 가능성 있는 이들이 퇴출당하는 꼴은 못 본다.

100층을 클리어하고 나가면 뭐 해.

현실이 개판 나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거기, 봉우리로 향하려는 건가! 지나가게!”

놈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갑판 위에서 소리를 질렀다.

마중이라도 나온 건지 범선 두 척이 내 양옆에 서고, 쪽배 수십 척이 주변을 감싼다.

좋게 말하면 호위고 나쁘게 말하면 포위.

은근히 살의를 뿜으며 무기를 쥐고 있는 것이 후자가 맞는 것 같다.

“우리 동료들을 공격했다는 건 들었다. 신경은 안 써. 어차피 잠깐 모여 있는 놈들뿐이니까. 싸울 생각 없으니 넘어가라, 괜한 마찰은 피하고 싶다.”

알고 있다. 약탈자도 눈치가 좋아야 하거든.

괜히 엄한 사람 건드렸다가 되레 당하면 안 하느니 못하다.

나에 대한 소문이 퍼졌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공격하기는커녕 피해 다녔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난 그놈들도 다 잡으면서 왔거든.

가볍게 손을 풀었다.

“예, 지나가기는 할 건데 제가 좀 예의가 발라서.”

[파이어 밤 (AAA) Lv.4]

-콰아아아아아앙!

“노크 좀 하고 가겠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함선을 향해 폭발을 일으켰다.

그대로 구멍이 뚫리며 가라앉는 배.

내가 곱게 지나갈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선장으로 보이는 자가 칼을 뽑았고.

“으이이익! 오늘 되는 게 없군! 죽여!”

“한 번에 몰아붙여!”

“어차피 한 놈이다!”

일제히 공격이 날아왔다.

하늘을 수놓는 스킬의 향연.

오랜만이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건.

30층대 이후로는 처음인가.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도 잠시.

[프로즌 브레이크 (AAA) Lv.1]

-콰드드드득

손짓 한 번에 나를 에워싸고 있던 모든 배가 얼어붙었고.

압축을 시작.

-콰아아아앙!

그대로 터지듯 깨져 버렸다.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흩날린다.

방어구조차 찢어 버릴 위력.

쪽배에 타고 있던 이들은 그대로 리타이어.

그나마 덩치 큰 배에 있던 이들은 방어 스킬을 구사하며 버티려 했지만.

[오로라 빔 (AA) Lv.3]

“으아아아악!”

“피, 피해!”

“젠장! 뛰어내려!”

가만히 놔둘 내가 아니다.

손끝을 타고 쏘아져 나가는 광선.

쉴드가 깨지고 방어구가 부서진다.

정면에서 맞은 해적은 그대로 즉사.

근처에 있다 휘말린 녀석들조차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른다.

그러다 퐁당.

물에 빠졌고.

[일렉트릭 쇼크 (AA) Lv.9]

-파지지지지지직!

“크, 크아아아!”

“어그그그극!”

좌초된 배와 사람들 모두 사이좋게 감전됐다.

툭. 손을 털고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함선으로 몸을 던졌다.

[달라붙기 (C) Lv.4]

딱히 잡을 만한 건 없었지만 스킬의 효과로 배를 타고 오르는 건 어렵지 않았고.

“마, 말도 안 돼. 이런 게 가능할 리가!”

허망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선장을 볼 수 있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나, 하면 다 되는 거지.

다른 곳도 아니고 탑인데.

“그러게 왜 약탈을 하고 다녀. 사람 피곤하게.”

“대체 왜 이러러는 거냐. 나는 널 약탈한 적이 없다! 공격한 적도 없어! 다른 멍청이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얼굴만 겨우 아는 사이야. 내게 이럴 이유가 없다고!”

오. 그것참 논리정연한걸?

난 계속해 보라며 손짓했고, 말이 통한다고 느꼈는지 그가 입을 놀렸다.

“지금 우리를 건드는 건 좋지 않아. 저기 빛의 기둥 안에 있는 각국의 대형 길드원과 루키들 모두 예민한 상태거든. 꼴은 이렇지만 우리와 저놈들은 공생하는 관계라고.”

입술을 한번 적신 그가 은밀하게 떠든다.

“갈 거면 지금이야. 곧 있으면 공략이 시작되거든. 너도 52층으로 올라가려고 여기 온 거잖아. 나 같은 놈한테 신경 쓸 거 없어, 올라가야지. 좋아. 내가 선물도 줄게. 내가 따로 모아둔 물건들이 있는데 괜찮은 놈으로 하나 주지. 너도 알겠지만 등반하는 데는 좋은 장비가 필수잖아, 그치?”

“그럼 그럼, 올라가기는 해야지.”

“이제야 좀 통하는군. 바로 저, 큽!”

계속해서 떠드는 놈의 입을 붙잡았다.

“그런데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 등반은 내가 알아서 할 거고 지금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를 약탈하러 온 거야.”

“이런 씨─!”

-콰아아아앙!

놈의 말이 완성되기도 전에 배를 완전히 침몰시켰다.

-피유우우웅, 퍼엉!

하늘 위로 올라가는 십여 개의 신호탄들.

빛의 기둥에 포진되어 있던 범선과 쪽배. 각자의 무기를 꼬나쥔 약탈자들이 몰려든다.

이것 참.

“아공간에 여유가 있을라나 모르겠네.”

놈들이 떨군 아이템을 얻을 생각에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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