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스케빈져
냥펀과의 거래가 끝나고 이틀이 지났다.
예상대로 이곳에는 밤낮이 존재했으며, 일교차 자체는 넘길 만했지만 깜깜한 곳에서 둥둥 떠 있는 감각은 원초적인 공포를 자아냈다.
게다가 징조 없이 불어닥친 폭풍.
위에도 물이 떨어지고 아래에는 물밖에 없고.
시야는 안 잡히는데, 파도는 수십 미터까지 치솟아서 뒤집힐 때마다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왔다.
여기까지만 해도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인데.
“크어어어어!”
-콰드드득!
“이놈의 몬스터들은 잠도 없나. 어떻게 쉬려고 하기만 하면 나타나지? 어디 CCTV라도 달아 놨나?”
“그에에에.”
이놈의 해양 몬스터는 종류도 골고루라 주행성뿐만 아니라 야행성도 있다.
방금 잡은 킹 크레비아탄이 그런 경우.
거대한 가재 비슷하게 생긴 녀석인데 헤엄은 또 얼마나 잘 치던지.
공격하면 도망가고, 잠잠하다 싶을 때 다시 덤비고.
화딱지가 나서 끝까지 추격해서 잡고 났을 때는 동이 튼 이후였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장관이었으나.
“탈출하고 싶다. 몸에서 비린내 날 거 같아.”
지금에 와서는 자연의 위대함이니 뭐니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당히 해야지.
이틀만 해도 이 고생인데 한 달을 버티려면 얼마나 힘들까.
그나마 지금은 한 구역의 우두머리인 킹 크레비아탄을 잡아서 쉴 타이밍이 생겼다.
1시간도 안 지나서 냄새를 맡은 또 다른 놈이 오겠지만.
불평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쉬어야지.
프로즌 브레이크로 자그마한 빙판을 만든 뒤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래도 몬스터를 잡은 덕분에 프로즌 브레이크와 일렉트릭 쇼크 레벨이 많이 올랐다.
환경 특성상 나도 감전되는 바람에 전격 내성도 성장했고.
[프로즌 브레이크 (AAA) Lv.1]
[일렉트릭 쇼크 (AA) Lv.9]
[전격 내성 (B) Lv.8]
훌륭하네.
이게 다 영약을 먹고 마력이 올라가서 가능한 거다.
온종일 스킬을 펑펑 써 대니 스킬 레벨이 안 오를 리가 있나.
다만 좋기는 한데 살짝 피곤한 느낌도 있다.
-띠링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찰나. 알림이 울렸다.
[냥냥펀치]: 물건 잘 받았습니다, 고갱님! 정산금 보냈음.
[냥냥펀치]: 중간에 떼먹지 말고 이블아이한테 잘 전해주라고.
[쁘띠공듀]: 그럼요.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하겠습니닷.
내 주머니로 말이지.
냥펀과의 거래.
포션과 장비를 공급하기로 했다.
거래 대금은 포인트가 50퍼센트. 나머지는 스킬북으로 받기로 계약.
게다가 한 가지 특별한 조건을 걸었으니.
“화조국에서 펠라인 세트를 입수할 경우 가장 먼저 거래하기로 했지.”
아직 펠라인 세트는 두 개가 더 남아 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만큼 최대한 눈과 귀를 열어 두는 게 중요한 법.
[냥냥펀치]: 그거, 일회용 무적 아티팩트는 아직 팔 생각 없대?
[쁘띠공듀]: 살살 꼬드기고 있으니 좀만 기다려 줘용.
[냥냥펀치]: 으으으… 땡큐!
대리 희생자는 거래하지 않았다. 나중에 필요하면 그때 팔아야지.
그럼 얼마나 들어왔는지 봐 보실까.
포션도 400개가량 처분했으니 짭짤하게 들어왔을 텐데.
“오호라.”
“그에에에.”
난 냥펀이 개인 거래로 준 물건들을 살폈고, 작게 감탄했다.
스킬북이 꽤 많다. 대략 30개 정도.
등급도 다양하다. 가능하면 상점창에서 팔지 않는 것들로 부탁한다고 했는데 정말 해 줬을 줄이야.
물량이 없다며 적당히 흔한 것들로 줄줄 알았는데.
[냥냥펀치]: 아, 공듀공듀. 혹시 생명수 더 만들 수 있는지도 물어봐 줭.
[냥냥펀치]: 그거 찾는 사람들 꽤 많음.
“생명수 때문이구만.”
대충 짐작이 간다.
생명수는 상점창에서도 팔지 않는 물건. 수요보다 공급이 적을 수밖에 없다.
제작자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니 당연한 노릇.
화조국에서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스킬북을 골라 준 걸 테지.
“좋은 관계가 되겠군.”
적어도 비즈니스적으로는 훌륭한 집단이다.
스킬북은 스킬 합성의 재료로 쓰일 예정.
당장 쓸 생각은 없다. 52층에 올라가는 게 급해서.
그러고 보니.
“친선 경기에서 그걸 안 썼네.”
스킬 합성으로 새롭게 얻은 스킬을 확인해 보려 했는데 경기가 싱겁게 끝나서 미쳐 못 써 봤다.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쓸 일은 언제든지 있으니까.
내가 새롭게 만든 스킬은.
[달라붙기 (C) Lv.4]
-대상에 달라붙을 수 있습니다.
-등급이 오르면 벽을 걸어 다니는 것도 꿈은 아니죠!
등급 자체는 대단할 거 없지만 효율성이 좋다.
지금이야 어딘가에 잘 붙는 게 고작이지만 나중에 레벨이 오르면?
“그때는 설명대로 지형 상관없이 싸우는 거지.”
탑을 오르면서 다양한 환경을 겪었고, 신체적인 한계에 의해 불편한 적이 여럿 있었다.
단순하게 절벽을 오를 때라던가, 나무 위에 있는 놈들을 잡을 때. 괴익조를 잡았을 때처럼 날아다니는 몬스터 위에 올라탔을 때 등등.
이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면 더욱 편한 등반을 했을 텐데.
상점창에서 파는 스킬북을 합성시켜 레벨도 4로 올려놨다.
손을 털고 물에 몸을 던졌다.
“이번에는 내가 간다.”
“그에에에.”
덕춘이가 냉큼 머리 위에 올라탄다.
서로 번갈아 헤엄치며 체력을 아끼는 중.
영물이라고는 하나 온종일 날 끌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적어도 해양 필드에서는 나보다 활약할 가능성이 높은 게 덕춘이기도 하고.
* * *
그렇게 반나절을 더 이동했을까.
조금씩 필드의 풍경이 바뀌었다.
바다가 펼쳐진 건 똑같았지만.
“다들 힘들었나 본데?”
곳곳에 51층으로 떨어진 이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주인을 잃고 떠다니는 장비와 아이템이 그 증거.
쓸 만한 건 없어 보였다.
널빤지나 잡다한 쓰레기를 뭉쳐 만든 부표도 보이고.
상점에서 파는 가죽 수통을 여러 개 묶어 임시 뗏목으로 만든 이도 보였다.
“끄르르르륵.”
저기 누군가는 체력이 다 했는지 물 밑으로 가라앉고 있고.
거리가 멀어 구해 줄 수는 없었다.
부디 좋은 곳…….
잠깐만, 어차피 죽어 봤자 안전지대 아니면 밖이잖아.
알아서 잘 살라 하자.
중간중간 쓰레기들을 모아 뜰 것을 만들었다.
몸을 얹고 발장구를 치니 그리 힘들지는 않다. 멀리서 보면 쓰레기 뭉치로 보여 은근 위장 효과도 있고.
속도는 좀 느려졌지만. 체력을 아낄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교환이다.
-우우우우웅
하루 동안 열심히 움직였기 때문일까.
멀어 보이던 빛의 기둥도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가면 갈수록 잔해가 많아진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도 저곳을 향해 몰려온 모양.
하기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가만히 있느니 어딘가를 목표로 삼고 이동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겠지.
능력이 되면 나처럼 봉우리를 노릴 수도 있고.
사람이 모이면 서로 협력할 수도 있으니 생존 확률도 올라갈 거다.
물론 사람이 모인다는 건.
“으아아아악!”
“꺼져! 이 자식들아!”
사건 사고도 많아진다는 의미기는 했지만.
“저건 또 뭐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꽤 그럴싸한 배를 만들어 이동하던 등반가 무리가 습격을 당했다.
공격을 감행한 건 잠수로 진입한 다섯 명.
은밀하게 접근하더니 일순간에 배에 진입.
그대로 배에 타고 있던 헌터를 암살하더니 노획품을 수거.
10분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배를 탈취하여 사라졌다.
“저 녀석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
“그에에에.”
말로만 듣던 스케빈져, 혹은 약탈자.
탑에서 죽으면 안전지대에서 부활한다.
온전히 이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이템을 떨구는 경우도 있다.
장비를 놓친 채 죽으면 아이템은 그대로 남으니까.
단순히 근처에 있다가 노획하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데, 아예 공격을 하거나 죽을 만한 상황을 유도하여 약탈하는 자들이 있다.
왜 30층대에서도 보기 힘든 놈들이 50층대에서 설치느냐.
“다른 나라 사람이다, 이거지.”
30층대는 같은 나라 사람들이다.
혹여나 복수하러 올 수 있다는 이야기. 대형 길드가 관리하기도 하고.
하지만 타국 사람이면? 50층대에서 당했다는 이유로 찾아올 수 있을까?
이름도 모르는데? 복면을 쓰면 얼굴도 안 보인다.
심지어 탑에서 죽는다고 실제로 죽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발뺌하면 그만.
그뿐일까. 50층대부터는 A급 헌터. 각 길드의 핵심 전력인 동시에 나라에서도 보호해주 는 상위 헌터다.
만에 하나 완벽한 증거를 범인을 찾아오더라도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 주는 게 보통.
“찾아오더라도 당한 사람이 더 힘이 약할 가능성도 크고.”
나야 무한 코인이 있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니까.
피해자가 억울하게 죽어 탑 밖에 나간 사이 약탈자는 그보다 높이 올라갔을 확률이 높다.
그나마 이쪽은 사정이 나은 편.
아프리카 쪽이나 남미 쪽 서버는 장난 아니라는 소문이 있다.
“얌전히 으쌰으쌰 해서 탑이나 오르면 좋으련만. 쯧.”
말은 이렇게 해도 놈들의 생각을 모르는 건 아니다.
의외로 50층대에 오른 헌터 중 등반 욕구가 낮은 사람이 많다.
어차피 60층대 가지 오르지 못할 거라는 마인드가 있기 때문.
A급 헌터 자격도 얻었겠다. 한탕 하고 나가서 아이템 팔고 떵떵거리면서 살려는 거겠지.
세상이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들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야.
안 되지 안 돼.
언제 100층을 클리어할지 모르는데 그 전에 바깥 현실이 터져 버리면 내가 곤란하다.
내 편안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등반가들을 줄이는 놈들은 처리해야 한다.
“사, 살려 주십시오.”
여러 생각을 이어 가며 앞으로 나아갈 때, 목소리가 들렸다.
40미터 정도 떨어진 곳.
한 남자가 체력이 다 했는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하고 있다.
주변에는 뗏목이었을 것의 잔해가 가득하다.
이 사람도 당한 건가.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이거 잡아요.”
“감사합니다!”
-콰악!
표류자인 척 먹잇감을 노리는 놈일 수도 있지.
이놈은 후자였다.
부표를 내미는 순간 날 잡아당기더니 그대로 검을 내질렀으니까.
깔끔하고도 빠른 일격.
한 번의 찌르기였음에도 안에는 3개의 스킬이 담긴 절기였고.
-콰드드득
“이, 이게 무슨!”
“에휴. 거 잘 좀 합시다. 서투르게 왜 이래?”
난 가볍게 그의 검을 잡아 낼 수 있었다.
이래 보여도 NPC의 공격도 피해 낸 사람이다.
이 정도는 우습지.
놈의 검이 시퍼렇게 빛났지만 내 방호력을 뚫는 건 불가능.
“무슨 수로 안 거냐?”
“어떻게 알기는. 저기 10분 전에 하나 털렸는데 너 같은 애 있으면 너까지 털고 갔겠지.”
약탈자가 괜히 약탈자인 줄 아나.
멀쩡히 있는 애들도 공격해서 벗겨 먹는데 이렇게 물에 빠진 애를 놔둔다?
심지어 전투가 있던 것도 아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아마 이놈이랑 10분 전, 나룻배를 공격한 놈들이랑 한패인 것 같은데.
“에잇!”
내 예측이 맞았는지 검을 포기한 녀석이 목에 걸린 호루라기를 불려 했으나.
-빠각!
“커흑!”
“그에에에에.”
그보다 빨리, 덕춘이가 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뭐로 때렸길래 머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냐.
살짝 당황스러워 바라보니 한 손에 외갑을 두른 덕춘이가 브이 자를 만든다.
나도 엄지를 세워 줬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할까.
이대로 수장시켜도 될 거 같기는 한데.
“그냥 가기 좀 그렇단 말이지.”
꼴을 보아하니 봉우리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목마다 이런 놈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망망대해.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빛의 기둥 하나.
빛에 나방이 꼬이듯 목적 없이 떠다니던 사람들이 모이기 딱 좋지 않은가.
한 달 동안 버티느니 봉우리를 향해 내려가려는 사람도 존재할 거고.
멀리서부터 오느라 체력이 떨어진 이들만큼 좋은 먹잇감은 없겠지.
고로…….
“놈들이 약탈한 것 좀 털어먹고, 겸사겸사 배도 얻어 타야겠다.”
아까 보니까 배도 가져가더라고.
본거지에는 더 큰 배가 있지 않을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삐이이이이이!
놈이 차고 있던 호루라기를 불었다.
어차피 이럴 거 놈이 부르게 놔둘걸.
살짝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이 5분이 지났고.
“오, 왔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배 3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