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히든 퀘스트
릴카가 내뱉은 한마디.
멸망의 징조.
다른 것도 아니고 멸망이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일종의 경고인 셈이지. 열심히 발버둥 쳐랏! 뭉그적거리다가는 모든 게 사라질 것이다!”
“그 말은…….”
난 덕춘이를 들어 올렸다.
너 이 녀석.
“역시 영물이구나!”
“궤?”
그렇지 않은가.
덕춘이가 아니었으면 멸장의 과도기에 접어들고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나태하게 있었다가는 돌아갈 곳을 잃는다.
동기 부여가 되는 동시에 등반 의욕을 살려 주는 것.
위기감은 힘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덕춘이를 만났기에 수많은 위기도 넘겼고.
기특한 녀석!
“궤에에에!”
“덕춘아!”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팔을 벌렸고, 난 녀석을 품에 안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릴카가 바라본다.
‘염병하네’라고 말하는 얼굴이랄까.
어허, 순진한 얼굴로 그러는 거 아니야.
“흐음,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
“가끔 불길한 징조라며 카오스 영물을 죽이는 놈들이 있거든. 징조를 죽으면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해서.”
“와,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그냥 징조일 뿐이건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카오스 속성 펫을 죽인다고 결과가 바뀔 리도 없고.
물론 탑이라는 게 워낙 비상식적인 곳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도할 수도 있다.
그만큼 위기에 몰려 있었을 수도 있고.
난 그럴 생각이 없지만.
우리 덕춘이는 킹갓영물님이거든.
그건 그거고.
내용 자체는 심각하다.
이미 간접적으로 봐 오지 않았던가 멸망한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 세계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냉정하게 따지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높겠지.
NPC들. 지금 우리 세계 기준으로 따지면 비교 대상조차 존재하지 않는 강자들이 있던 곳도 그 꼴이 됐는데 우리라고 다를까.
포기할 수는 없다.
최대한 발버둥 쳐 봐야지.
“정확히 멸망의 과도기에 들었다는 게 무슨 뜻이지?”
“음. 좀 더 게이트가 많이 열리고, 환경도 살짝씩 바뀌고, 나오는 몬스터의 등급도 올라가는 거? 말 그대로 멸망으로 접어드는 과정이지.”
“혼란스러워진다는 뜻이네.”
“맞아. 따지고 보면 너희 세상이 오래 버틴 거야.”
“음?”
오래 버텼다는 건 무슨 소릴까.
릴카가 팔짱을 끼더니 미간을 찌푸린다.
“너희 세계에 탑이 나타난 지 10년 좀 됐나?”
“13년 됐지.”
내가 중학생 때 대격변이 일어났으니까.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곳에 없을 거다.
“13년, 너무 길어. 짧으면 6년, 길어 봤자 8년이면 과도기가 오거든. 정상적인 게 아니야. 누군가 수작을 부린 거지.”
릴카의 말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
대형 길드. 그들이 헌터 수를 줄여 나간 이유가 떠올랐다.
헌터가 많이 나올수록 게이트가 빈번해진다고.
설마 그거 때문에?
대형 길드가 한 행동이 맞았다는 건가.
그럼 내가 저지른 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
불쾌한 감각이 올라오는 그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멍청행. 과도기는 피할 수 없어. 결국에는 온다고. 오기 전에 최대한 등반가 수준을 높여 놔야 하는 건데.”
툭툭. 꼬리로 침대를 치던 릴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상하게 너희 세계는 과도기도 늦게 시작되고, 등반하는 애들도 영 시원치가 않아.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퇴출당하는 애들도 많고.”
“역시 내가 맞았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쫄았다. 내가 한 행동이 인류에 위협을 준 행동이었나 싶어서.
그래, 편법을 쓰면 뭐 하겠는가.
당장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미래는 없는 건데.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흐뭇해하는 찰나.
릴카가 한 가지 정보를 더 내놓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과도기에 접어들면 탑으로 초대되는 사람도 줄어들거든.”
“어?”
“세계마다 다르기는 한데 어느 순간부터는 새롭게 탑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들어온 사람들만으로 탑을 깨야 한다는 거징.”
난 입을 벌렸다.
다른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게 중요한 거지.
탑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그럼 한정된 헌터만으로 무수히 생겨나는 게이트를 클리어해야 한다는 거다.
사람은 죽는다.
사고든 병이든 몬스터에 의해서든.
게이트는 점차 늘어나는데 헌터 수가 줄어들면.
“과도기에 접어들었다는 게 그런 뜻이었나.”
꿀꺽.
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으으음… 정말 짧으면 2년, 보통은 4년, 길면 6년 정도 후에는 탑에 들어오는 사람이 완전히 없어질 거야. 너무 급할 필요는 없어.”
“탑 기준 시간이야?”
“아닝, 바깥 기준. 탑은 바깥보다 시간이 2배는 더 빠르니까 시간은 더 길어지겠지.”
그건 좀 다행이다.
아직 여유가 좀 있다는 것.
이제야 이해가 된다.
알리오스가 탑을 나왔을 때는 이미 세계가 멸망했다고 했었지.
녀석이 99층까지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19년.
너무 오래 걸렸다.
과도기에 들어선 세계가 망가지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니.
좋다. 진정하자.
시간제한이 생긴 건 맞다.
하지만 조급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난 지금 누구보다 빠르게 탑을 오르고 있다.
반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50층에 올랐으니.
위로 올라갈수록 힘들어지고 어떤 위협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다.’
나 자신을 믿자.
나를 도와주는 NPC도 있고 권능도 여러 개다.
덕춘이도 옆에 있고 말이지.
공략을 올린 덕분에 순조롭게 등반을 하는 후발대도 있다.
나 못지않은 실력을 갖춘 멤버들도 있고.
“릴카.”
“왜?”
“100층을 클리어하면 멸망을 막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듣기는 했는데 정확히는 나도 몰라. 100층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까.”
하긴, NPC로 남아 있다는 건 탑을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뜻.
동시에 자신이 있던 세계가 멸망했다는 증거였다.
그러고 보니.
“넌 몇 층까지 올랐지?”
지금까지 릴카에게 이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만만하게 대하고는 있었지만 릴카는 알리오스도 경계했다.
“나? 킬더레스랑 같이 등반했으니까 99층?”
눈을 깜빡인 녀석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99층이요?
어째 내 주변에는 하나같이 높이 오른 애들만 있는 거지?
릴카가 99층이라는 거면 킬더레스도 99층이라는 거잖아.
원래 이렇게 많은 건가, 아니면 끼리끼리 노는 거?
“우후훗! 어떠냐! 나에 대한 존경심이 샘솟느냐!”
“응, 아니.”
-따악!
“아프다고!”
어디서 건방지게 굴고 있어.
뭐가 됐든 나한테 릴카는 민폐 끼치는 수인이다.
나도 99층, 그 이상으로 올라갈 예정이고.
아무튼 덕분에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남은 건.
“처음에 말했던 계약에 대해 좀 이야기해 볼까?”
“맞어. 계약! 이것도 과도기랑 관련이 있지. 에헤헤헤.”
냉큼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 녀석.
계속 가지고 다녔던 건가.
준비성 하나 철저하네.
“어서 사인해!”
“좀 읽어 보고.”
뭐든 계약서는 신중하게 살펴야 하는 법.
난 내용을 쭉 훑었고.
“퀘스트 수행? 어차피 네가 준 퀘스트 다 깨 주기로 했잖아. 아니, 애초에 강제 퀘스트 주는 녀석이 뭐 하러 이런걸?”
“뒷면도 보시지!”
계약서를 양면으로 해 놨냐.
쓸데없이 알뜰하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뒷면을 살폈다.
눈이 가늘어진다.
“다음 릴카의 부탁 퀘스트 클리어 보상은 계승자가 되는 거?”
“나도 계승자 찾아야징. 탑 싫어! 나가고 싶어! 너라면 가능할 거 같아. 이제 슬슬 찾아야 할 때기도 하고… 다른 NPC들도 움직이기 시작할걸?”
과연.
호감도 최대치를 찍었다는 건 이런 의미인가.
하긴, 알리오스가 특이 케이스지 보통은 이런 식으로 계승자를 선별할 거다.
불가능에 가까운 퀘스트를 주고, 신뢰를 쌓고 친밀도를 올리면서 말이다.
나라도 이렇게 했겠지.
‘탑에 있는 NPC는 단 한 번 계승자를 뽑을 기회가 있으니까.’
알리오스도 말했다. 계승자가 탑을 클리어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시스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구체적인 과정은 모르겠지만.
물끄러미 릴카를 바라봤다.
녀석한테 물어보면 대답해 주려나.
“계승자가 100층을 클리어하면 자유로워진다던데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거야?”
“나도 몰라!”
“넌 아는 게 뭐냐.”
“계승자가 탑을 정복한 적이 없거든.”
“와, 그렇… 응?”
잘못 들었나?
100층을 깬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아니. 계승자든 등반가든 100층 깬 사람이 없어?”
“내가 알기로는 없어. 예에에에엣날에 있다고 하는 것도 같은데 괴담에 가깝지. 있었다면 NPC 중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하잖아.”
“아는 사람이 없구나?”
“응. 적어도 내가 만난 NPC 중에는 없어.”
꼬리를 살랑거리던 릴카가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긴다.
“혹시나 진실이라도 따로 정보는 없을걸? 탑에서 벗어났다면 말해 줄 수 없잖아. 시스템적으로 조치했을 수도 있고.”
“그것도 맞지.”
계승자를 통해 밖으로 나간 NPC가 있더라도 탑에 있는 이들에게 사실을 알릴 수는 없다.
“그래서 할 거야 안 할 거야? 설마 날 버리고 다른 NPC한테 가는 건 아니징?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계약하라고오오오.”
다시 본론.
난 계약서를 살폈다.
확실히 계승자가 된다면 도움이 된다.
권능이 하나 더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혼돈 수치도 얻을 수 있다.
뭐가 됐든 혼돈 수치가 100점을 넘지 못하면 100층에 도전할 수 없으니 챙길 수 있는 건 전부 챙겨야 한다.
솔직한 심정으로 릴카와 친해져서, 얘가 계속해서 탑에 갇혀 있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고.
나쁠 건 없다.
없는데.
“왜 하필 나야?”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릴카는 비교적 자유롭게 탑을 돌아다니는 만큼 봐 온 사람도 많을 거다.
분명 그중에는 뛰어난 사람도 있었을 거고.
저번에 이준석이 말한 대로 이미 상위층을 오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면 이후에 들어올 사람 중에서 계승자를 찾는 것도 방법이다.
굳이 나일 필요는 없다는 것.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내가 NPC였다면 나를 계승자로 삼을까?
‘권능 많고, 스킬 다수 보유. 성장 잘하고 있고, NPC와 관계 나쁘지 않음. 펠라인 세트도 얻었으니 장비도 맞춰 가는 중. 쁘띠공듀로 신분 위장까지 하는, 이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패스하고. 영물인 덕춘이도 있으며, 보통 60층대부터 얻는다는 혼돈 수치도 가지고 있다.’
괜찮은데?
10층부터 알아 온 만큼 릴카 역시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
충분히 혹할 만하다는 것.
무엇보다.
‘나한테는 무한 코인이 있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100층을 공략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닐까?
입술을 씹었다.
말하는 게 좋을까?
무한 코인이 있다는 걸 알린다면 수많은 NPC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NPC들의 계승자가 되어 보다 많은 권능을 얻고 강해질 수도 있고.
물론 악의적으로 내 능력을 이용하려는 이도 있을 거고 경계하는 NPC도 나타날 수 있다.
알려져서 좋을 건 없다는 이야기.
하지만 릴카라면…….
좋다. 결정했다.
“릴카 사실 난 ■■■■이 있어.”
-지지지지직!
내가 말하는 순간, 스파크가 튀더니 잡음이 생긴다.
동시에 떠오른 버그 메시지창.
[??? 히든 퀘스트 진행 중.]
[해당 정보는 발설할 수 없습니다.]
[이 메시지는 히든 퀘스트 수행자한테만 보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정보 전달 시 막대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상대방 포함)]
[상대방을 오래 보고 싶으면 말하지 마세요.]
“너한테 뭐?”
릴카가 되물었지만 난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이 막고 있다.
그것도 협박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