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징조
-파아아아앗
빛과 함께 가려졌던 시야가 돌아온다.
[50층, 안전지대]
49층에서 바로 올라온 건가.
광장에 선 나는 먼저 더덕이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아무래도 얘는 좀 눈에 띄어서.
그것보다…….
“마지막에 유형이 하나 더 나왔었지.”
“그에에에.”
버그 시스템.
그것이 내게 또 다른 유형을 부여했다.
강제로 전송된 탓에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내가 본 게 맞다면.
[당신의 유형은 ‘정의할 수 없는 혼란’입니다.]
이거였던 거 같은데.
정의할 수 없는 혼란이라.
묘하게 불길하면서도 그럴듯하다.
내가 탑에 올라오고 많은 게 바뀌었으니까.
탑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은 일도 많았고.
대체 이 유형이라는 게 뭐에 쓰이는 건지는 몰라도…….
“두 개 가지고 있으면 더 좋은 거겠지?”
“그에에에.”
아님 말고.
오랜만에 안전지대에 왔겠다, 덕춘이를 머리 위에 올렸다.
이 녀석 은근히 왕관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더라고.
주변을 둘러봤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결국 50층에 올라왔다.
A급 헌터로 분류되는 층.
어디를 가나 대접받는 이들이었고, 각 길드에서도 최고 전력으로 취급받는 헌터들이 모인 곳.
50층대가 A급의 기준이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다른 층과는 다른 것들이 있거든.
올라오는 사람이 소수인 것도 있지만…….
[50층에 입장했습니다.]
[‘통역 (A)’가 지급됩니다.]
[통역 스킬은 레벨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통역 스킬을 준다는 점.
굳이 통역 스킬을 주는 이유는…….
[50층은 일부 서버가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거지.”
50층은 다른 나라 등반가와 마주치는 첫 번째 장소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커뮤니티를 받을 때 적혀 있지 않았던가.
[커뮤니티]
[메인 서버- 대한민국]
규모가 작아 두세 개의 나라가 합쳐진 곳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탑은 나라별로 나뉘어 있고, 그 나라에 해당되는 사람을 초대한다.
중국에는 중국 서버가, 일본에는 일본 서버가 있는 것처럼.
내가 속한 곳은 대한민국 서버.
[아시아 서버가 통합됩니다.]
[현재 서버- 아시아Ⅰ]
이곳은 아시아권 등반가들이 모이는 자리다.
사람이 많은 관계로 아시아Ⅱ 서버도 있다던가.
이것 외에도 유렵 통합 서버, 북미 서버, 남미 서버, 아프리카 서버가 있다는 것 같다.
상위 헌터 중에 외국 헌터와 인맥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50층대에서 인연을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반대로 원한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이 생각보다 많네.”
덕분에 50층이라고 사람이 적지는 않았다.
40층대랑 비슷하거나 좀 더 적은 정도?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국가별로 사람들이 뭉쳐있다.
저기 아랍권에서 온 사람들도 그렇고,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 돌아다닌다.
그동안 한국인들만 봐 와서일까 조금은 신선한 느낌.
감상은 여기까지.
난 자리를 벗어났다.
하나같이 장비를 입은 채 돌아다니는 사람들.
간혹 내게 시선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제 갈 길을 간다.
과한 호기심은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걸까.
아니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한가락 한다는 걸 염두에 둔 걸까.
약간은 조심스러웠고.
조금은 은밀했다.
[옵져버 (A) Lv.8]
“흐음, 이런 식으로 관찰을 하네.”
투명한 관측 구체가 나를 따라온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권능을 통해서는 볼 수 있었고.
-퍽!
난 가볍게 돌을 던져 옵져버를 부숴 버렸다.
아무래도 관측용이다 보니 내구도는 영 별로다.
-움찔
그건 그거고.
옵져버에 돌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움찔하는 놈이 옵져버를 사용한 녀석이겠지.
저놈이었구만.
어디까지나 심증에 불과하지만.
[류웨이]
-최고 층수: 50층
-칭호, 염탐자 보유.
-칭호, 잡스러운 수집가 보유.
-보유 스킬: 옵져버 (A), 청룡보 (AA)……….
권능을 통해 확인한 스킬에 옵져버가 있다면 말이 달라지지.
난 똑바로 류웨이에게 다가갔다.
“몰래 훔쳐보는 짓은 하지 맙시다.”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발뺌인가.
그럴 수 있지. 보는 거 같다가 뭐라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옵져버를 통해 훔쳐봤다는 게 기분 나빴을 뿐.
게다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우리 동생이 실수한 거라도 있습니까?”
“음, 어느 쪽 사람이지? 한국?”
근처에 있던 그의 동료들도 몰리고 있다.
재밌네.
안전지대만 아니면 개인 면담이라도 해 주는 건데.
적당히 넘어가 주자.
나도 올라오자마자 싸울 생각은 없다.
안 그래도 여러 국적의 헌터들이 모인 장소.
괜히 마찰을 빚어 감정의 골을 만들 필요는 없다.
혹시 아는가, 나 때문에 한국 헌터들에게 반감을 가져서 트롤링을 할지.
“아닙니다. 제가 착각했나 보군요. 실례했습니다.”
난 자리에서 물러났다.
놈들도 찔리는 부분이 있었는지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관심 없는 척, 거리 속 인파에 섞여들었지만 귀는 열어 뒀다.
“괴물 같은 놈이군, 옵져버를 눈치채다니.”
“한국 쪽 헌터 같았죠? 팔에 찬 분홍색 띠 그쪽 애들이 끼는 거잖아요.”
“요즘 좀 이상하군. 한국 등반가가 평소보다 너무 많이 올라와.”
“무학성도 잠잠하고요. 평소였다면 타국 대형 길드와 접촉해서 관리를 할 텐데, 개인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아요.”
“계속 확인해 봐. 상황이 바뀌고 있다. 정보를 모아야 해.”
중국계 헌터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통역 스킬이 좋기는 하네.
신체 능력이 좋아져서 그런지 거리가 꽤 있음에도 잘 들리고.
놈들이 날 관찰한 건 우연이 아닌 모양.
“신경 쓰이나 보구만.”
내가 공략을 풀면서 한국 서버의 생존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 말은 곧 50층에 오르는 이들 역시 늘어났다는 이야기.
하긴 40층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기는 했다.
포션 연구도 하고, 스킬 레벨도 올리고, 데니엄과 드잡이질 좀 하느라 말이지.
부지런히 등반을 한 사람이라면 50층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난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들으며 거리를 걸어 나갔다.
잡다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각국의 대형 길드 마크를 달고 있는 이들이 한국 헌터들에 대해 떠드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놀라운 점이 있다면 외국 헌터한테도 이블아이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것 정도?
저 관심이 좋은 쪽으로 흐를지, 나쁜 쪽으로 흐를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할 일이 있어서 기억만 해 둘 생각.
찾고 있는 녀석이 있다.
분명 또 어디서 민폐 부리고 있을 거 같은데.
* * *
“에헤헤헤, 맛있다!”
“저기 있었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찾던 녀석이 보였다.
릴카.
노점상에서 우육면을 먹고 있다.
흐뭇한 얼굴로 릴카를 바라보고 있는 팬더 수인.
얼마나 먹었는지 그릇이 4개나 쌓여 있다.
턱, 옆으로 다가가 머리에 손을 얹었다.
“어떤 놈이 내 머리를, 엥?”
“나 왔다.”
“오오오오오!”
벌떡 일어나 나를 붙잡는 녀석.
뭐지, 오늘따라 반기는 게 과한다.
친밀도가 올라서 그런가?
“계산은 얘가 할 거…….”
-따악!
“아파!”
“그래. 그럼 그렇지.”
바로 꿀밤을 먹여 줬다.
억울한 눈으로 올려다보지 마라.
너 돈도 많잖아.
분명 베팅해서 한탕 벌고 별장까지 지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돈도 많은 애가 뭔 밥을 사 달래.”
“그게. 에헤헤. 재료 사는 데 다 썼엉!”
“오… 오?”
“그동안 비싸서 엄두도 못 냈던 것들을 하나씩 사다 보니까 포인트가 훅훅 나가더라고. 제작하는 데 열중하니까 거래도 좀 뜸하게 됐구. 이런저런 사정이 좀.”
오케이. 오늘도 별로 알고 싶지는 않지만 릴카에 대해 알았다.
돈이 있으면 흥청망청 쓰는 타입.
굳이 따지면 본인 할 일 하느라 쓴 거지만.
하여튼…….
“계산 부탁합니다.”
“아, 예. 고생이 많으시네요.”
“업보려니 합니다.”
난 팬더 수인에게 계산을 하고 릴카를 끌고 왔다.
“퀘스트 재료 다 모아왔으니까 따라와.”
“역시 내가 눈여겨본 사람! 믿고 있었다고! 에헤헤, 덕춘이이이이.”
“그에에에.”
냉큼 덕춘이를 뺏어 안아 든 녀석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평소였다면 골목길에서 적당히 끝냈겠지만 50층은 아무래도 사람들 수준이 높아서 엿들을 가능성이 있다.
단순히 퀘스트만 깨면 상관없다만 따로 물어볼 것도 있어서 말이지.
여관 주인이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가뿐히 무시해 줬다.
“퀘스트! 퀘스트! 재료! 이예에!”
“정신 사나우니까 얌전히 좀 있어라.”
본인이 빌린 것처럼 침대에서 뛰어 대는 릴카에게 챙겨 온 재료들을 건넸다.
철면귀의 가면, 돌바위 거북의 등껍질, 괴익조의 알.
“확인해 봐. 네가 찾던 거 맞지?”
“다 상등품이네. 아주 좋아. 잠깐 만드레이크는!”
맞다. 자연스럽게 내 건 줄 알고 있었네.
인벤토리에 넣어 뒀던 더덕이를 꺼내 넘겼다.
“끼? 끼이이이이!”
잠시 상황 판단을 하던 더덕이가 내게로 달려온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와! 때깔 엄청 좋네? 게다가 이렇게 고분고분. 설마 고문이라도 한 거야?”
“어허, 섭섭한 소리. 사랑과 정성으로 대했을 뿐이야.”
“만드레이크가 그렇게 쉽게 길들어질 리가 없는뎅.”
살짝 찔리는 부분이 있어 시선을 돌렸다.
뺨은 덕춘이가 때렸으니까 난 잘 대해 줬다고.
“그에에에에.”
덕춘이가 띠껍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난 진실만을 말한 거니 당당하다.
그런데…….
“그, 설마 얘도 재료로 쓰는 거야?”
“끼에에에에?”
재료라는 말에 더덕이가 기겁하며 내 다리에 달라붙는다.
키운다며! 키운다며!
그런 표정인데.
“아니. 펫으로 분양 보낼 생각이양. 은근 수요가 있어서 말이지. 고객도 좋아할걸?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훌륭한 뿌리 생물이라고!”
다행이네. 은근히 정이 들어서 곱게 갈려 영약이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거든.
난 더덕이를 쓰다듬었다.
“새로운 주인이랑도 잘 지내야 한다.”
“끼, 끼에에에에!”
이별은 언제나 마음 아픈 것.
그래. 조금은 달래 줄…….
“얍!”
-빠악!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릴카가 더덕이의 머리를 쳐 기절시키더니 아공간에 넣어 버린다.
거, 진짜 분위기 파악 못 하네.
“이걸로 퀘스트 완료! 고생했엉! 이히히히. 역시 네가 최고야!”
[릴카의 부탁 (3)- 강제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선택하십시오.]
[어려운 부탁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릴카의 호감도가 오릅니다.]
[호감도가 최대치에 다다랐습니다.]
[특수 이벤트- 릴카의 계약이 진행됩니다.]
호감도 최대?
특수 이벤트는 또 뭐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단 말이지. 흠흠.”
릴카가 침대에 앉더니 뿌듯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누가 보면 네가 날 키운 줄 알겠네.
“이 정도면 계약을 해도 되겠지.”
“계약?”
“응! 계약! 할 거지? 해야 해! 하라고오오오오!”
무슨 계약인지부터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떼쓰는 녀석의 머리통을 잡고 들어 올렸다.
머리가 작아서 그런가 그립감이 괜찮네.
“시끄럽고 보상부터 내놔.”
“지금 보상이 중요해?”
“중요하지 그럼.”
어디서 슬쩍 넘어가려고.
이번 퀘스트는 보상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상황을 보고 내게 필요한 걸 주기로 정했으니까.
보상은 정해 뒀다.
“제작 스킬 올릴 거야. 네가 알려 줘.”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 장비 제작.
포션 제작은 어느 정도 레벨을 올렸지만 이쪽은 답이 안 나온다.
포션이야 권능을 통해 조합 재료만 알면 어떻게 되지만, 제작은 직접 가공하고 만들어야 해서…….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 탑인 만큼 미리 익혀 두는 게 좋았다.
릴카는 상인이자 대장장이. 멍청해 보이는 것과 달리 수준급 실력자였고, 내게는 훌륭한 조력자다.
고생한 거에 비해 부족한 느낌이지만 물어볼 것도 있으니까.
“거기에 하나 더, 물어볼 게 있어.”
릴카를 침대에 던지고 덕춘이를 손바닥에 올렸다.
“카오스 속성을 지닌 영물이 뭐지?”
생각해 보면 덕춘이에 대해 속 시원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카오스 영물인 걸 알아본 NPC들도 뭔가 아는 눈치를 보일 뿐, 정확한 정체는 말해 주려 하지 않았고.
“으으으음.”
“왜, 비싼 정보야?”
“지금이라면. 아니, 근데 알아서 좋을 게 있을까?”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슬쩍 덕춘이를 바라봤다.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는 중.
안 좋은 뭐라도 있는 걸까.
어차피 덕춘이랑은 함께해야 한다.
그동안 서로 돕기도 많이 했고, 이제 와서는 단순히 펫과 주인 관계가 아닌 파트너 느낌이 더 강할 정도다.
덕춘이의 정체가 뭐든 감당할 자신이 있다.
난 덕춘이를 믿는다.
너도 나 믿지?
“궤에……!”
내 생각을 읽은 녀석이 감동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덕춘아!”
“궤에엑!”
폴짝 뛴 녀석이 내 얼굴에 달라붙었고 나 역시 꼭 안아 줬다.
언짢은 표정으로 릴카가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 정도 모멸적인 표정은 이미 익숙하다!
“후우. 알았엉. 대신 말해 주면 나랑 계약하는 거다?”
“내용 확인하고 괜찮으면.”
“으으. 하라면 할 것이지! 어차피 너한테 나쁜 것도 아닌데.”
하기야. 호감도를 최대치로 찍었는데 안 좋은 짓을 하지는 않을 거다.
릴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말해도 되나 고민하는 눈치.
무슨 말을 하려고 분위기를 잡는 걸까.
짐작하기 힘들다.
“카오스 속성의 영물이 나왔다는 건 징조야.”
난 덕춘이를 꼭 안으며 뒷말을 기다렸고.
“네가 속한 세계가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들었다는…….”
생각보다 센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