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오늘
난 다시 한번 계획을 점검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생각을 정리할수록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쉽지는 않겠지만 도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에에에.”
“네 역할도 크다. 파이팅 하자.”
나뿐만 아니라 덕춘이, 헤이다의 도움도 필요했으며.
“데니엄이 어떻게 나오는지도 중요하지.”
여러모로 엮인 게 많은 데니엄의 반응도 잘 살펴야 했다.
부디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여야 할 텐데.
뭐, 혹여나 일이 꼬여도.
“이게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
오델토의 선물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얻은 보상.
하나는 헤이다의 악몽이었고 다른 하나는…….
[펠라인의 남색 왼쪽 다리 (B)]
-광택이 살아 있습니다.
-멀리서도 블링블링, 반짝반짝!
-힘 +23
-민첩 +14
-체력 +22
-마력 +15
-방어력 +43
B등급 펠라인 세트다.
이걸로 내가 모은 펠라인 세트는 다섯 개.
“이러고도 아직 2개가 더 남았다는 게 소름이네.”
“그에에.”
결국에는 찾아내겠지.
그보다 세트 효과를 확인하자.
[펠라인 세트 효과! (5/7)]
-올 스텟 +70
-패시브 스킬 ‘쾌적 (D)’ 적용
-자가 수복 기능 활성화
-완전 파괴 불가
-펠라인 세트의 방어력이 통합됩니다.
-각 파츠별 속성이 개화됩니다.
-‘감각 공유 (C)’ 적용 (펠라인 세트에 한정됩니다.)
-각 파츠별 속성의 저항력이 올라갑니다.
-세트 아이템에 봉인된 스킬 일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펠라인 세트의 광택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통합된 방어력이 증가합니다.
먼저 올 스텟 상승이 40에서 70으로 대폭 강화되었다.
게다가 광택 강화.
아니, 이건 필요 없고.
방어력 또한 올라갔다.
가뜩이나 각 파츠별 방어력이 통합되어서 사기적인 방호력을 자랑하는데, 이 정도면 거의 걸어 다니는 장갑차 아닐까?
이것만으로도 훌륭하지만 더욱 마음에 드는 건.
“으흐흐. 스킬이 하나 더 생겼군.”
펠라인 세트에 봉인되어 있던 스킬이 하나 더 해금되었다는 것.
-세트 아이템에 봉인된 스킬 일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해금된 스킬 목록
-무지개 반사 (S), 아스트랄 레인보우 (S)
무려 S급 스킬!
역시 펠라인 세트다.
취향이 변태일 뿐이지 성능 하나는 압도적.
[아스트랄 레인보우 (S)]
-10초간 모든 공격 스킬 데미지 1,000퍼센트 증가.
-10초 후 공격에 사용된 스킬 데미지 10퍼센트로 하락 (1시간 동안 유지)
-하루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버스트딜 미치겠네.”
무려 10배나 데미지가 올라간다.
이것만 따지면 S급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했지만.
“페널티가 없을 수는 없지.”
“궤에에에.”
하루에 한 번으로 사용 제한이 있기도 하거니와, 버프를 받는 동안 사용한 스킬들은 이후 1시간 동안 데미지가 10분의 1로 토막 난다.
제대로 된 한 방이 필요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
아니면 버프가 끝난 후에 쓸 수 있게 스킬들을 아껴 두던지.
이런저런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S급으로 분류될 만한 효과다.
“흐흐. 으흐흐.”
“그헤헤헤헤.”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역시 장비빨이 최고야.
덕춘이와 함께 웃음을 흘리던 그때.
“나 왔어, 흐잉.”
헤이다가 돌아왔다.
시무룩한 표정.
뭐가 잘 안 풀렸나.
“편지는 잘 읽었어?”
“아니, 나 글 못 읽어.”
맞다. 얘 글 못 읽는 댔지.
머리를 긁적였다.
오델토는 왜 얘한테 편지를 썼을까.
뭔가 이유가 있나?
어깨를 으쓱이는 중 헤이다가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오더니 편지를 내민다.
“읽어 줄 수 있어? 지금이라면 편지 보는 거 허락할게.”
[오델토가 안 된다고 기겁합니다!]
오, 무슨 반응이지.
이러니까 괜히 궁금해지네. 편지에 뭐라 적어 뒀으려나.
“그럴까? 읽어 줄까?”
“응!”
오델토가 뭐라 뭐라 메시지를 전해 왔지만 가뿐히 무시해 주고 오픈.
헤이다를 옆에 앉히고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헤이다에게. 맑고 청명한 날에 온 그대는 참으로 아름다웠고, 순수한 영혼을 대변하듯 작은 손짓 하나에도 따뜻함이 감돌았습니다. 내 삶에 활력이 되어…….”
오우 씨, 이게 뭐야.
말을 이어 나가던 혓바닥이 오그라든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편지가 구겨졌고.
[오델토가 당시 편지를 썼을 때는 감수성이 풍부하던 16살이라고 변명합니다.]
[보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이게 연애편지라는 건가.
실존했구나 이런 게.
닭살인지 소름인지 모를 게 올라온다.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 같네.
헤이다가 글을 못 읽으니까 쓸 수 있는 건가?
“계속 읽어 줘어어어.”
말을 하다 말아서 그런가 헤이다가 달라붙으며 칭얼거린다.
넌 좋겠다, 글 못 읽어서.
난 내가 쓴 것도 아닌데 수치사 할 거 같은데.
[오델토가 죽고 싶다고 중얼거립니다.]
이미 죽어서 영혼만 남은 녀석이 뭐라는 거야.
하지만 그 마음 안다.
‘나도 커뮤니티 하다 보면 현타 오거든.’
겪어 본 자만 알 수 있는 수치심!
헤이다를 위해 목숨까지 건 오델토를 공개 처형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난 잠시 고민했고.
“크흠. 그러니까 말이지. 오델토가 너랑 꼭 만나겠대. 모습은 좀 다를지 몰라도 반드시 앞에 나타날 거라고.”
“진짜?”
적당히 내용을 바꿔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퀘스트만 제대로 깨면 둘이 다시 만날 거니까.
[오델토가 당신의 자비에 감동합니다.]
뭘 또 감동까지야.
이후에도 난 창작이나 다를 바 없는 편지 내용을 읊어 나갔고.
“자, 편지는 여기까지.”
난 헤이다를 앞에 앉혔다.
“그런데 오델토를 만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들어줄래?”
“응!”
적극적이어서 좋네.
난 씩 웃었고 헤이다가 해야 할 것들을 알려 줬다.
이제 남은 건.
‘데니엄을 만나는 것뿐.’
* * *
48층 안전 구역.
데니엄이 활짝 웃었다.
“정말인가? 하하하하! 잘 생각했네. 잘 생각했어!”
그도 그럴 것이.
[헤이다 봉인- 히든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미루고 미뤘던 그의 퀘스트를 받아들였으니까.
흥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좋겠지. 헤이다만 봉인하면 녀석이 48층의 담당 NPC가 될 수 있으니.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하하! 저만 믿으시죠.”
“믿지. 믿고말고!”
나도 따라 웃었다.
몰랐는데 나도 은근 심사가 뒤틀려서, 아니꼬운 사람이 있으면 엿을 먹이고 싶더라고.
“물건부터 주시죠.”
“여기 있네.”
데니엄이 내게 정신체 저장 장치를 건넨다.
그립감 좋네.
“사용법은 간단하네. 헤이다에게 접촉하면 돼. 물론 조건이 없는 건 아니야.”
그렇겠지.
조건 없이 사용할 수 있으면 정령이나 요정은 이 아이템만으로 정복할 수 있을 거다.
“상대가 동의하거나 심신이 혼란스러울 때를 노려야 하지. 사실상 첫 번째 방법은 불가능하니 두 번째 방법을 노려야 해. 내가 준비한 게 있지.”
데니엄이 한쪽에 놔둔 박스를 열더니 물건을 꺼냈다.
옷 한 벌과 초상화.
복도로 고개를 돌렸다.
오델토의 초상화가 있던 자리가 텅 비었다.
“내 아들이 즐겨 입던 옷과 초상화지. 헤이다 그 간악한 요정이라도 이걸 보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터. 그때를 노려 정신체 저장 장치를 사용하게.”
대단한 새끼네 이거.
어떻게 얼굴색 하나 안 바뀌며 이런 말을 하지?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제대로 안다.
오델토를 죽인 건 데니엄이라는 걸.
그가 헤이다에게 접근하지 않는 이유?
별거 있나. 제 발 저리는 거지.
지금 이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아들의 흔적을 지우면서 헤이다까지 잡으려는 계획.
속으로 혀를 차며 옷가지와 초상화를 받았다.
“좋은 소식 기대하지.”
나에게 모든 걸 맡기고 빠지려는 녀석.
그렇게는 못 하지.
“데니엄, 만약 제가 실패한다면 다음 기회가 올까요?”
“그게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로요. 세상에 ‘반드시’라는 건 없고, 퀘스트를 깬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저처럼 필드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등반가가 또 있느냐는 말이죠.”
뭐긴 뭐야.
“보상 좀 더 올리죠?”
협박이지.
“싫으면 어쩔 수 없고요. 사실 옷이랑 초상화만 믿고 NPC랑 뒹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아니다 싶으면 그냥 포탈로 달리는 게 나을 것도 같은데.”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네.”
“자아를 잃는 것과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퀘스트를 깨는 거. 뭐가 더 빠를지 궁금하네요.”
데니엄이 기운을 흩뿌렸지만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반응을 즐겼다.
기세가 매섭기는 한데.
그래서 내 제안을 거절할 건가?
못 할 텐데.
“후우. 그러도록 하지. 봉인에 성공하면 꼭 내게 저장 장치를 줘야 하네. 봉인만으로는 부족해. 확실히 파괴해서 존재를 없애야 내가 담당 NPC가 될 수 있어.”
“걱정 마시죠.”
[데니엄이 ‘태산의 정수 (A)’를 퀘스트 보상에 추가합니다.]
오케이.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됐다.
다음은.
“그럼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이나 하시죠.”
내가 나설 차례.
안전 구역 근처, 데니엄이 은신했고 난 자연스럽게 필드를 거닐었다.
옷가지와 초상화는 인벤토리에 넣어 둔 상태.
난 포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뒤를 슬쩍 보자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데니엄이 보인다.
혹시라도 내가 포탈을 타고 넘어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
걱정 마라. 일 끝나기 전에는 안 올라가니까.
“슬슬 올 때가 됐을 텐데.”
포탈 근처, 자리를 잡은 난 몸을 풀었다.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올라오는 게 보인다.
덕춘이와 헤이다.
“제때 왔군.”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륵 웃으며 날아오는 헤이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거 재밌어, 덕춘아! 이히히힛!”
“그에에에에.”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
앞서 달려가는 덕춘이의 혓바닥을 잡고 풍선처럼 떠 있는 모양새.
“여기야!”
난 손을 흔들었고, 덕춘이 역시 소리를 지르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헤이다의 눈을 가린 이유?
몇 가지가 있지만 첫 번째로는.
‘저 자식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지.’
진실이야 뭐가 됐든 헤이다는 데니엄을 친구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
앞으로 할 걸 생각하면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약속대로 눈 가렸어! 안 보여! 헤헤헤.”
“진짜지?”
“응응. 요정 거짓말 안 해.”
안다.
왜냐 헤이다가 지척에 왔을 때 인벤토리에서 오델토의 초상화와 옷을 꺼내놨으니까.
스킬이든 뭐든 사용해서 시야를 확보했다면 이런 반응일 리가 없지.
-화르르륵
파이어를 사용해 초상화와 옷을 태워 버렸다.
데니엄이 경악하는 모습이 보인다.
벌써 놀라면 안 될 텐데.
“그럼 헤이다, 내가 말했던 거 기억나지?”
난 헤이다를 잡아 데니엄이 있는 곳을 향하게 했고.
“크게 한 방 부탁한다. 최대한 멀리 나가는 거로.”
“알았어!”
-우우우우웅!
헤이다가 내민 손으로 막대한 에너지가 모이기 시작했다.
파괴의 요정.
내가 그녀에게 부탁한 건.
[이레이져 버스트 (SS) Lv.???]
강렬한 파괴 스킬.
섬광이 번뜩이며 순수한 파괴의 에너지가 데니엄이 있는 곳을 강타한다.
말 그대로 섬광.
그 속도는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였고.
-콰아아아아앙!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안전 구역 전체가 폭발에 휘말렸다.
이걸로 역할은 끝.
“이제 오델토 만나게 해 주는 거지?”
“그럼, 답답해도 잠깐만 안에 들어가 있어.”
난 헤이다의 이마에 정신체 저장 장치를 붙였다.
[NPC, 헤이다가 봉인에 동의합니다.]
[NPC, 헤이다가 일시적으로 정신체 저장 장치에 깃듭니다.]
[봉인 기간은 10일입니다.]
[헤이다 봉인- 히든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연달아 메시지창이 떠올랐지만 확인할 틈이 없다.
“크아아아악, 네놈!”
불의의 일격을 받은 데니엄이 뛰쳐나왔으니까.
설마 이런 일을 벌일지는 몰랐는지 놈은 완벽히 공격을 피해 내지 못했다.
팔 하나가 날아갔고, 상체에는 상처가 가득했으니까.
깜짝 선물이 마음에 들었나 모르겠네.
“왜 그렇게 화내고 그래? 퀘스트는 깼는데.”
“봉인 장치를 내놔라. 그럼 이번 일은 넘어가 주마.”
그 와중에도 헤이다에 대한 욕심은 살아 있는지 놈이 손을 내밀었고.
“싫은데? 덕춘아, 고.”
“궤엑.”
난 헤이다가 들어가 있는 봉인 장치를 덕춘이에게 넘겼다.
냉큼 입에 물고 포탈로 들어가는 덕춘이.
예전부터 궁금했었다.
펫 혼자 포탈을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
답은 간단했다.
[Tip. 펫과 테이밍 몬스터, 크리쳐 등이 주인보다 먼저 포탈을 넘을 시 주인이 포탈을 넘을 때까지 대기 상태로 존재합니다.]
내가 포탈을 넘을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는 것.
이걸로 데니엄이 헤이다를 손에 넣는 건 불가능.
설사 내가 죽더라도 덕춘이는 안전지대에서 같이 부활한다.
“네 이노오오오옴!”
분노한 놈이 소리 지른다.
아, 나도 변태가 다 됐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어쩌나? 헤이다가 사라졌으니 퀘스트도 못 주게 생겼네?”
내가 죽더라도 놈은 퀘스트를 줄 수 없다.
그 말은 곧.
“네가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한 달? 아니면 1년?”
놈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는 것이었고.
“아니, 넌 오늘 완전히 NPC가 될 거야.”
난 그날을 오늘로 정했다.
[버프 다이스 (A) Lv.3]
[행운 스텟이 반응합니다!]
[6]
[신의 장막]
-즉사에 이르는 공격을 한 번 막아 냅니다.
[강철의 의지 (A) Lv.9]
[강체强體 (AA) Lv.7]
오늘, 난 NPC를 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