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진실
역시 마지막 장에는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인가.
유려한 필체로 적힌 첫 번째 문장.
-헤이다는 나를 배신했다.
난 마저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이어서 앞에 적혀 있는 내용들까지.
간단한 일과와 소소한 사건. 헤이다와 함께한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오델토가 헤이다를 얼마나 아꼈는지, 믿음과 사랑으로 대했는지에 대해.
정신이 불안정한 헤이다의 만행과 그녀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이 있었는지 구구절절하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후반에 갈수록 지쳐 가는 오델토의 심정이 드러났고, 끝내는 은혜를 저버린 헤이다가 주변 인물들을 공격한 것까지.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오델토를 배신한 헤이다에게 분노할 만한 내용들이 가득했지만.
“이것 봐라? 재밌네.”
난 조소를 머금었다.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
정보를 읽어 내는 권능은 읽을 수 없는 이계의 언어뿐만 아니라, 일기장 자체에 대한 정보까지 같이 줬으니까.
[위조된 오델토의 일기장]
-오델토의 필체를 따라 해 작성한 일기장입니다.
무려 1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위조했다.
정성이 갸륵할 지경.
누가 위조했는지는 뻔히 보였다.
데니엄, 그 녀석이 한 거겠지.
자연스럽게 일기장을 건넨 데는 이유가 있었다.
헤이다를 봉인시키기 위해 감정을 건들려는 속셈.
단순하지만 은근히 효과 있는 방법이다.
만약 탈모맨이었다면?
“바로 퀘스트를 수락했겠는데.”
다행이다.
그 멍청이가 뻘짓하기 전에 먼저 올라와서.
빠르게 끝내고 공략글을 올려놔야지.
피식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위조된 일기장에 대한 관심은 사라진 지 오래.
약간은 기분이 가벼워졌다.
데니엄에게 퀘스트를 받은 때부터 여러 의문이 있었다.
첫 번째.
“퀘스트명.”
그가 준 퀘스트 네이밍은 헤이다 봉인이다.
정말로 아들의 복수를 원하는 거였다면 봉인이 아니라 ‘데니엄의 복수’ 이런 식의 퀘스트명이 붙지 않았을까?
그리고 요정인 헤이다와 달리 데니엄은 사람이다.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가 직접적으로 헤이다가 오델토를 죽였다고 말한 적은 없다.
데니엄이 가지고 있는 칭호들도 마음에 걸리고.
두 번째 의문은.
“내가 수행하고 있는 퀘스트.”
오델토의 선물 퀘스트.
단순하게 생각하면 헤이다에게 오델토가 주려 했던 선물을 전달해 주는 게 고작이다.
히든 퀘스트인 것만 빼면 흔하디흔한 내용이다.
눈여겨볼 게 있다면 클리어 시 연계 퀘스트로 이어진다는 것.
[오델토의 선물- 히든 퀘스트]
-퀘스트 클리어 시, ‘오델토의 부탁-히든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펠라인 세트에만 정신이 팔려서 넘어갔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이 퀘스트.
“퀘스트를 내준 주체가 없어.”
관계자인 헤이다가 준 것도 아니고, 데니엄이 준 퀘스트도 아니다.
자연 발생한 퀘스트라는 것.
이벤트도 아니고 말이 안 되지.
게다가 연계 퀘스트가 ‘오델토의 부탁’이다.
죽은 오델토가 무슨 수로 퀘스트를 줘.
가능성이 있다면 한 가지.
오델토를 대신하는 뭔가가 있다는 것.
[합당한 추리!]
[5,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내 생각이 맞다는 걸까.
시스템 보상이 주어졌다.
탑이 이런 건 묘하게 친절하단 말이지.
뭐가 됐든 데니엄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적어도 내가 퀘스트를 하게 만들기 위해 수작질을 벌이는 건 확실하다.
짐작 가는 이유는 있지만 우선은 오델토의 흔적을 찾자.
난 권능을 유지한 채 방 곳곳을 살폈고.
“여기 있었군.”
진짜 오델토의 일기장을 찾을 수 있었다.
일기장 사이에 끼어 있는 편지도.
슬쩍 문을 바라봤다.
아직까지 데니엄이 들어올 것 같은 기색은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일기 내용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빠지자.
-덜컹
난 문을 열었다.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데니엄이 나를 반긴다.
“생각보다 빨리 나오는구나.”
“예. 일기를 보고 있자니 심란해져서요.”
“그럴 수밖에 없지. 사람들은 요정을 신비의 종족이라 칭하며 무해하다고만 생각하지만 실상은 달라.”
슬픔에 잠긴 척 고개를 숙이는 녀석.
이 정도면 연기 대상감 아닌가.
귀족이 아니었다면 연기자로 대성했을 놈이다.
“그래. 퀘스트를 수행할 생각은 들었나?”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한 번 튕겨 주자 그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진다.
“이대로 그냥 위로 올라갈 생각인가?”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뻔하다.
직접 확인하지 않았던가, 필드로 나갔다가 멀쩡히 돌아온 것을.
놓치기 싫겠지.
헤이다에게 공격당하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테니까.
나 말고 아예 없을지도 몰랐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포탈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 터.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끄응. 독촉할 만한 문제는 아니지. 그대의 의사를 존중하네, 다만…….”
씁쓸한 표정을 지은 데니엄이 말을 잇는다.
“사실 내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네. 어쩌면 자네가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 그럼 난 아들의 복수도 하지 못한 채 평생을 원통해하겠지.”
“시간이 없다라.”
역시 그건가.
데니엄이 퀘스트를 내걸고 보였던 반응들.
처음에는 뭔가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확신이 든다.
놈은 초조해하고 있다.
나를 놓칠까 봐?
그런 것도 있지만…….
“NPC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군요.”
“그, 그걸 어떻게!”
“안전 구역에 있는 NPC, 다른 역할은 없는 것 같고 퀘스트를 주는 것만 하고 있잖아요.”
NPC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
헤이다가 필드를 돌아다니며 등반가를 공격하는 것처럼.
추방당한 드루이드 프리스트, 펜그릴이 구역 보스 노릇을 하고, 게일이 노역장에서 착취당했던 것도 같은 이치.
그런데 만약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때는 버티고 버티다 자아를 잃고 탑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된다.
알리오스도 결국에는 보석 세공사로 활동하지 않았던가.
눈의 정령 여왕, 하이누?
오랫동안 방치되다 힘을 잃고 씨앗으로 돌아갔지.
‘데니엄의 역할은 안전 구역에서 퀘스트를 주는 것.’
하지만 단 한 번도 퀘스트를 성공한 적이 없다.
즉, 성과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만약 누군가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48층에 헤이다는 없었을 테니까.
“많은 걸 알고 있구나, 등반가여.”
“NPC와의 교류가 제법 있었거든요.”
잠시 나를 노려보던 데니엄이 한숨을 내쉰다.
고개를 숙인 탓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히 보였다.
어떻게 나오려나.
“자네 말이 맞아. 난 안전 구역에 있으면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지. 그래, 아들의 복수를 하지 못했어! 내가 이렇게 부탁함세. 나를 도와주게.”
생각보다 직접적으로 나온다.
하긴 NPC에 대해 모르면 모를까. 알고 있는 상대에게 거짓말을 해 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니까.
이참에 하나 더 물어보자.
“헤이다를 어떻게 봉인시킵니까? 한낱 등반가보다는 NPC인 데니엄이 직접 나서는 게 나을 텐데요.”
등반가가 아무리 강해 봤자 이곳은 40층대.
NPC가 월등히 강한 구간이다.
내게 도움을 요청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 내가 나선다 하더라도 봉인을 무슨 수로 시켜.
“그건 걱정 말게. 이걸 이용하면 되니까.”
데니엄이 품에서 물건을 꺼낸다.
주먹 사이즈의 정육면체.
위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정신체 저장 장치]
-현자가 직접 제작한 정신체 저장 장치
-정령석과 아케인 젬을 조합해 만들어졌습니다.
-정령이나 요정과 같은 정신체를 일시적으로 깃들게 할 수 있습니다.
-NPC 사용 불가
이런 장비가 있었던 건가.
확실히 이거라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내가 사용하고 싶지만 제약이 걸려 있네. 나는 쓸 수 없어.”
NPC 사용 불가 옵션.
그가 내 도움을 바라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크흠. 자네라면 더 많은 걸 알려 줘도 되겠지.”
데니엄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나를 바라본다.
눈빛이 생기가 돈다.
“헤이다를 봉인시킨 뒤 파괴하면 이곳에 남아 있는 NPC는 나 혼자야. 48층의 담당 NPC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
씨익, 그의 입가가 올라간다.
“자고로 자격이 있는 자에게는 그만한 대우가 필요한 법. 퀘스트 보상을 좀 더 조정해 주겠네.”
[데니엄이 퀘스트 보상을 변경합니다.]
[헤이다 봉인- 히든 퀘스트]
-세인턴 피스의 공작, 데니엄은 NPC 헤이다를 봉인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
-보상: 프레그렌트 가문의 보물, 탐욕의 검 (AA), 멸망한 세계의 영웅이 남긴 장비 (택1)
-실패 시 높은 확률로 사망합니다.
“NPC가 멸망한 세계의 존재라는 건 알고 있겠지. 나는 세인턴 피스의 공작! 그것도 전쟁 영웅으로 활약했었다네. 나와 함께 세계를 호령한 영웅이 여럿 있지. 그들이 쓰던 물건 중 하나를 자네에게 주겠네.”
그는 선심 쓰는 듯이 말했지만 난 속으로 비웃었다.
칭호라는 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대변해 주는 이력서와 같은 거라는 걸 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칭호는…….
-칭호, 권력에 취한 자.
헤이다를 처리하고 메인 NPC가 되려는 건 반쯤은 본능적이 행동이다.
영웅들의 물건이야 세계가 멸망했으니 그가 챙겼을 테고.
얼핏 보면 혹하는 이야기였으나.
‘어디에도 영웅들이 쓰던 물건의 목록은 없지.’
막말로 영웅이 쓰던 숟가락을 줘도 무방하다는 것.
설마 그럴까 싶지만 글쎄.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이에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하물며 등반가보다 월등히 강한 자라면.
지금이야 저자세로 나오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면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날 속이려 한 시점에서 신뢰도는 사라졌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마음 좀 추스르고 일기장을 마저 읽고 싶거든요. 좋은 소식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부탁하네. 기다리도록 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난 미련 없이 저택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데니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 구역을 벗어났고.
“오늘은 빨리 왔네? 애플파이! 애플파이!”
어김없이 안전 구역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던 헤이다가 팔짝거리며 달라붙었다.
슥,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만 보면 애 같은데 말이지.
“애플파이는 못 얻었어. 대신 다른 걸 얻었지.”
“다른 거?”
급 시무룩해진 헤이다가 파드닥 날아오른다.
요정족은 호기심이 많다고 했던가.
난 인벤토리에서 편지를 꺼냈다.
“오델토가 주라고 한 편지야.”
“편지!”
헤아다가 눈을 반짝거리며 손을 내뻗는다.
“어떤 내용인지 나도 궁금한데? 같이 볼까? 으흐흐.”
난 입꼬리를 올리며 편지 봉투를 뜯는 시늉을 했고.
“아, 안 돼! 나 혼자 볼 거야! 울 거야! 으아아앙!”
장난감을 뺏긴 아이처럼 헤이다가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날아다니다가 나를 두들기고, 팔에 매달리다가 귀를 잡아당기고.
아. 눈 어지러워.
“줄게. 자, 자.”
“헤헤헤! 좋아!”
난 졌다며 편지를 건넸고.
헤이다가 날 꼭 껴안더니 잽싸게 편지를 챙겼다.
그러고는 파드닥, 멀리 날아간다.
“훔쳐보면 안 돼!”
“안 훔쳐봐.”
나도 너 몰래 봐야 할 게 있거든.
엄청난 속도로 멀어져 가는 헤이다를 잠시 바라본 후, 나 역시 덕춘이와 함께 은신처로 향했다.
오델토의 일기장을 확인해 볼 생각.
얼마 걸리지 않아 폐가에 도착했다.
아직 오델토의 선물 퀘스트가 클리어되지 않은 걸 보니 헤이다가 편지 내용을 확인해야 클리어가 되는 모양.
그거야 시간문제니까.
클리어를 기다리며 난 일기장을 들췄고.
곧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