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일기장
권능을 통해 보이는 정보.
다른 NPC보다는 급이 달리는지 드러난 정보가 많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게 있다면.
‘멸망을 불러온 자.’
NPC가 됐다는 건 그가 있던 세계도 멸망했다는 뜻.
거기까지는 이해되지만 멸망을 불러왔다라.
겉보기에는 평범한데.
단순히 평범한 게 아니라.
[데니엄- NPC]
-칭호, 재앙을 부르는 남자 보유
-칭호, 권력에 취한 자 보유
칭호까지 보인다.
헤이다는 물론이고, 시스템 제약을 받았던 치히린과 모빌리딕 역시 여기까지는 보지 못했다.
80층 언저리에 있었다는 노역소의 악마들도 마찬가지.
그 말의 뜻은…….
‘탑을 높이 오르지는 못했다는 거.’
권능이나 스킬은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나보다는 높이 올랐다는 거겠지.
생각하자.
내가 본 놈 중에 가장 낮은 층을 등반한 게 누구인지.
기억이 맞다면 미궁에서 봤던 리치.
킬더레스에게 영혼을 팔았던 놈이 35층대를 올랐다고 했었지.
그놈은 NPC가 아니었다.
몬스터로 분류되었지.
적어도 일정 수준은 되어야 NPC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
데미 데몬도 그렇다.
본체는 악마. 하지만 현현하기 전이었기에 NPC로도 몬스터로도 분류되지 않았다.
‘대충 70층 이상은 올라야 NPC가 될 수 있는 것 같은데.’
아직 표본이 충분치 않아 확신할 수는 없다.
내 권능이 SS등급으로 오른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예전이었으면 못 봤을 정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70층이 가능성이 있는 게 보송송이와 대화하면서 알게 되지 않았는가.
70층부터는 상위층으로 분류되며, 하위층과는 커뮤니티마저 단절된다고.
“하하하. 좀 당황했나 보군. 괜찮아, 여기는 안전하니까. 저 괴물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야. 안심해도 좋네.”
꿈틀.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헤이다를 괴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분명 헤이다는 데니엄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종종 찾아오기도 했었다고.
헤이다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데니엄이 찾아오면 뭘 하고 노냐고 물었었고, 헤이다는.
-그냥 멀찍이 떨어져서 날 보고 사라져.
이렇게 답을 했었지.
그때는 데니엄 역시 NPC가 되었기에 시스템적 제약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이 녀석, 뭔가 있다.
“일단 쉬지. 선택지를 봐서 알겠지만 안전 구역에서 한 달은 있어야 위로 올라갈 수 있어. 아, 소개가 늦었군. 난 데니엄 프레그렌트라고 하네, 자네는?”
“이블아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예명 같은 건가? 상관없지. 따라오게.”
친근한 척 다가온 데니엄이 나를 이끈다.
일단 동행하자.
헤이다를 제외한다면 48층에 있는 NPC는 이 녀석뿐.
다른 NPC가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확인된 건 그렇다.
그가 안내한 곳은 안전 구역의 마을.
사람 하나 없고, 농작물 역시 멋대로 자라나 유령 마을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여기가 내 집이라네. 방은 많으니 마음대로 써도 좋아.”
딱 하나.
이질적일 정도로 화려하고 멀쩡한 저택이 있었다.
3층 높이의 건물. 하얗게 칠한 저택 내부는 온갖 장신구와 액자가 걸려 있었고.
“원한다면 선물로 줄 수도 있네. 당장은 그렇고 좀 더 친해지고 난 다음에 말이지. 알다시피 한 달은 긴 시간이야, 그렇지?”
손님 접대실로 들어간 데니엄이 소파에 앉았다.
마법처럼 다과상이 나타나 테이블에 놓인다.
나 역시 맞은편에 앉았다.
“집이 좋네요.”
“그런가? 이 정도면 아담한 수준인데. 하하! 알지 모르겠지만 난 한때 제국의 공작이었거든.”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몸을 숙인 채 속삭인다.
특히 공작이라는 단어에 악센트가 붙었다.
권력에 취한 자, 이런 의미였나.
“지금은 다 부질없는 일이지만. 세상 사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거든. 언제나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앞길을 막지.”
“맞는 말입니다. 편하게만 갈 수 없는 게 세상이죠.”
적당히 대꾸하며 준비된 애플파이를 씹었다.
달다.
독은 들지 않았다.
헤이다가 애플파이를 좋아했던가.
“몇 개 챙겨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안전 구역에 있는 동안에는 아무 걱정 말게나. 내가 편의를 봐줄 터이니.”
그동안 탑을 오르며 느낀 점 중 하나.
고립된 NPC일수록 말이 많다.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있으니 더 그렇겠지.
아공간 반지에 애플파이를 챙겨 넣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만…….”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는 법. NPC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안전 구역에 있을 이유도 없고요. 원하시는 게 뭡니까.”
“자네는 눈치가 좋군. 마음에 들어. 요즘 것들은 호의가 당연한 줄 알거든.”
단번에 눈빛을 바꾸는 데니엄.
뱀 같은 눈이다.
나를 훑어보는 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정보를 얻는 게 우선이다.
어찌 됐든 헤이다 주변 인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게 저 녀석이니.
오델토에 대한 것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헤이다가 말하지 않았던가. 유일하게 선물을 주고도 곁에 남아 있던 건 오델토라고.
데니엄이 오델토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직접으로 묻지 않는 이유는.
‘이미 내가 상상하던 헤이다와의 관계가 아니야.’
놈은 헤이다를 적대시하고 있다.
아니. 두려워한다는 말이 맞을까. 단순히 싫어하는 거였으면 괴물이 아니라 다른 표현을 썼을 테니까.
데니엄과 오델토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이상 섣부르게 언급하는 건 옳지 않다.
그의 흔적은 혼자서 찾아볼 생각.
대화든 뭐든 힌트를 얻을 수 있으면 더 좋고.
“잠시 쉬고 있게나, 구경하고 있어도 되고. 난 잠시 볼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네.”
나름의 배려인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접대실을 벗어났다.
데니엄이 권유대로 이곳에서 잘 생각은 없지만.
밖에서 헤이다가 기다리고 있다. 덕춘이도 같이 있고.
그래도 뭐.
“좀 둘러볼까.”
데니엄과 시간 차를 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도로 나왔지만 보이는 사람은 없고.
난 느긋한 걸음으로 건물을 둘러보았다.
복도는 깔끔했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렸다.
데니엄이 말한 대로 대부분의 방이 비어 있다.
몇 곳 창고로 쓰이는 것도 있었지만 특별한 건 없었고, 가끔 잠겨 있는 방도 있었다.
온기가 식은 주방과 발코니 너머로 보이는 방치된 연무장.
1층에 있는 접대실을 시작으로 한 층, 한 층 올라갔다.
혹시나 히든 피스가 있을까 주의 깊게 살폈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다.
대신…….
“초상화인가.”
3층 복도.
데니엄 프레그렌트 가문 사람들의 초상화가 죽 나열된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2미터 크기의 액자.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가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중에는 오늘 만난 데니엄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옆에는…….
“여기서 단서가 나온다고?”
[오델토 프레그렌트의 초상화]
-솜씨 좋은 화가가 보정을 넣어 그린 회심의 역작
내가 찾고 있는 인물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오델토 프레그렌트.
아직은 앳된 얼굴.
대체로 날카로운 인상인 가문 사람들과 달리 순한 인상이다.
유일하게 웃는 얼굴이기도 하고.
머리가 복잡해진다.
데니엄과 오델토가 같은 가문 사람이라고?
“아, 초상화를 보고 있었군.”
“데니엄.”
머리가 복잡해진 타이밍, 계단을 타고 올라온 데니엄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떤가? 잘생기지 않았나?”
“예. 뭐. 잘생겼네요.”
초상화 설명만 아니었어도 좀 더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데니엄이 입꼬리를 올린다.
“내 아들이네.”
“아들, 네?”
아들이었어?
“불쌍한 아이지. 성인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변을 당했으니.”
잠시 말을 끊은 데니엄이 내게로 고개를 돌린다.
“아까 말했었지.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무엇을 바라냐며 말이야.”
“그러기는 했죠.”
“좀 더 여독을 푼 뒤에 말하려 했건만 지금 말해도 괜찮겠지.”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이블아이, 아들의 복수를 도와주게나.”
[헤이다 봉인- 히든 퀘스트]
-세인턴 피스의 공작, 데니엄은 NPC 헤이다를 봉인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
-보상: 프레그렌트 가문의 보물, 탐욕의 검 (AA)
-실패 시 높은 확률로 사망합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예상치 못한 전개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고쳐 잡았다.
퍼즐이 살짝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헤이다는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었지.’
대부분 하인이나 정원사, 아이와 같은 주변 인물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전부 일반인이다.
반면에 최후까지 사라지지 않은 데니엄은 제국의 귀족이고, 그것도 공작의 자리까지 오른.
누군가 수작을 부리려 해도 쉽지 않은 상대.
오델토가 오랫동안 헤이다 곁에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일 거다.
자그마치 공작의 아들이니까.
헤이다는 기억이 없다고 하지만, 기억이 없다고 한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할까.
현재 나는 오델토의 선물 퀘스트를 수행 중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받아들여도 된다.
내가 수행 중인 퀘스트 조건은 이거.
[오델토의 선물- 히든 퀘스트]
-오델토가 준비한 선물을 헤이다에게 전달하시오.
-오델토의 반지 (1/1)
-오델토의 편지 (0/1)
선물을 건네주는 것뿐이니까.
편지를 찾아 건네주고, 데니엄의 퀘스트에 따라 헤이다를 봉인해도 문제 될 건 없다.
없는데…….
“좀 걸린단 말이지.”
“뭐가 말인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생각을 좀…….”
생각보다 미적지근한 반응 때문일까, 데미안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 보여 줄 게 있네. 오델토가 어떤 아이인지 알게 된다면 자네 역시 헤이다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
데니엄이 날 데리고 간 곳은 저택의 3층 끝 방이었다.
텅 비어 있던 다른 방과는 다르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그대로 있다.
“아들이 쓰던 방이지. 마음이 아파 잘 들어오지 않네만 종종 들어와 아이가 쓴 일기를 보고는 한다네.”
그가 책 사이에 끼워져 있는 공책을 꺼낸다.
“착한 아이였어, 영지 내에 아들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주술에도 재능이 있었지. 가신들은 검술도 마법도 아닌 것에 빠져들었다고 수군거렸지만. 쯧.”
스윽. 내게 일기를 건네는 데니엄.
“난 나가 있겠네. 계속 있기 힘들군. 천천히 읽어 보게나. 퀘스트 수락 결정은 이후에 내려도 좋네.”
“저기, 저건 뭔가요?”
난 밖으로 나가려는 데니엄을 붙잡고 침대에 걸쳐진 인형을 가리켰다.
목각 인형. 방의 분위기랑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다.
특히나 얼굴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장난감보다는 공예품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
-움찔
아주 잠깐이지만 데니엄의 눈가가 씰룩였다.
“아이를 본떠 만든 인형이라네. 아들이 그리워서 말이지.”
그 말을 끝으로 데니엄은 방을 나섰다.
방 안에 남은 건 나 혼자.
먼저 일기를 들춰 봤다.
간단한 하루의 일과와 소소한 사건. 헤이다와 함께한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오델토가 헤이다를 얼마나 아꼈는지, 믿음과 사랑으로 대했는지에 대해.
적힌 것만 봐서는 그저 밝기만 한 소년의 이야기.
그런 오델토를 배신한 헤이다에게 분노할지도 모를 내용이었지만.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동됩니다.]
권능이 발현되며 일기장의 정보가 떠올랐다.
[위조된 오델토의 일기장]
-데니엄이 오델토의 필체를 따라 해 작성한 일기장입니다.
하, 이 새끼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