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헤이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
살짝 당황했다.
릴카에게 받은 오델토의 반지는 퀘스트를 진행시키는 트리거 아이템.
당연히 퀘스트를 하기 위해서는 숨겨진 뭔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선택하시오.]
[헤이다를 피해 도망친다.]
[안전 구역에서 30일 동안 버틴다.]
바로 반지와 연관된 이름이 나타났다.
헤이다.
오델토가 반지와 편지를 전해 주려 했던 요정.
그녀가 이곳에 있다.
선택지는 헤이다를 피하라고 말하고 있고.
그 말은…….
“헤이다가 상당히 위험한 존재인 거 같지?”
“그에에.”
“끼이이이.”
덕춘이와 더덕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더덕이는 넣어 두자.
“끼이이?”
“위험해서 그래, 인마. 너 죽으면 나 많이 슬프다.”
“끼이익……!”
내 말에 감동했는지 다리에 달라붙어 얼굴을 비비는 녀석.
그냥 퀘스트 재료라 없어지면 곤란한 거였지만 속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별수 있나.
물론 약간 정이 든 것도 있기는 하지만 내게는 덕춘이뿐이다!
“궤에에……!”
이번에는 덕춘이가 감동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녀석, 은근히 더덕이를 신경 쓰고 있었단 말이지.
처음 만날 때부터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한 것도 그 탓이다.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반려동물을 한 마리 더 데려오면 기존에 있던 애가 질투하기도 한다고.
탑 초반부터 함께한 인연인데 덕춘이를 홀대할 수는 없지.
나 그렇게 나쁜 주인 아니야.
내 의지에 반응한 걸까.
[덕춘이의 충성도가 상승합니다.]
“오오!”
절대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알림이 떠올랐다.
충성도가 오르다니.
난 두근대는 마음으로 덕춘이의 정보를 살폈고.
[덕춘 (카오스 개구리- C)]
-특성: 산성 (AA), 회복 (AA), 독 (A), 화염 (B), 외갑 (A)
먼저 나와 함께 구른 탓인지 특성이 많이 오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등급은 여전히 C급이지만.
뭐, 등급과는 관계없이 강력한 터라 별 신경은 쓰이지 않는다.
덕춘이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고.
난 아래 설명을 읽었다.
[덕춘 (카오스 개구리- C)]
-혼돈을 가진 영물
-주인을 동등한 수준의 강자로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충성도: 2점
뭐지? 버근가?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똑같다.
2점.
아니, 그전에는 몇 점이었다는 거야.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그래도 괜찮다.
“드디어 동격으로 봐 주는 거냐.”
“궤에에.”
적어도 인식 자체는 바뀌었으니까.
전에는 나보다 강하다고 되어 있었다.
훌륭하다.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지.
난 덕춘이를 쓰다듬었고 확인한 김에 더덕이의 정보도 살폈다.
[더덕이 (만드레이크)]
-훌륭하게 성장 중인 만드레이크
-충성도: 93점
왜 네가 더 높냐.
살짝 억울하네.
눈을 반짝이며 날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찔렸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들어가.”
“끼이이.”
바로 인벤토리에 더덕이를 넣었다.
아까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다.
선택지와 환경, NPC.
이 세 가지 정보를 조합했을 때.
“필드가 이 꼴이 된 건 헤이다가 원인일 가능성이 커.”
NPC는 위험하다.
특히나 적대적인 감정이 있다면 더욱더.
여러 번 겪어서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나를 도와줄 NPC도 없다. 알아서 조심해야지.
난 필드 멀리 시선을 던졌다.
-우우우웅
-우우웅
빛기둥 2개가 보인다.
다른 40층대와 다르게 48층은 포탈이 생성되어 있다.
첫 번째 선택지.
[헤이다를 피해 도망친다.]
이걸 위해서겠지.
높은 확률로 헤이다와 마주친다는 뜻이었고, 헤이다라는 NPC는 사람에게 적대적이라는 걸 암시하는 부분이었다.
다른 빛기둥은 안전 구역.
[48층의 안전 구역]
-NPC, 헤이다가 접근하지 않습니다.
저곳에서 한 달을 버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안전하게 48층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
그렇다 하더라도 한 달은 너무 길다.
선택하라는 거다.
위험을 무릅쓰고 포탈로 갈 건지, 안전하게 버틸 건지.
어느 쪽이든 나랑은 관계가 없다.
난 헤이다 본인에게 볼일이 있었으니까.
오델토의 반지를 꺼냈다.
요정 사이즈에 맞춰진 물건.
“편지도 찾아야 하는데.”
[오델토의 반지 (B)]
-요정을 사랑한 자, 오델토
-그는 헤이다를 위한 반지를 제작했지만 끝내 건네지 못하고 숨을 거뒀습니다.
-강력한 미련이 남아 있습니다.
-그의 바람을 이루어 주는 건 어떨까요?
-편지도 함께요.
결국은 뒤져 보는 수밖에 없나.
이 황폐한 곳에서 편지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해 보면 알 일이었다.
권능을 유지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깨 위에 올라탄 덕춘이 역시 특별한 게 있나 확인을 해 댔고.
“궤에엑.”
“음?”
오래지 않아 덕춘이가 한곳을 가리켰다.
모래바람이 부는 장소.
그 안에서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본 채로 끝이 타들어 간 날개를 파닥이는 요정.
[헤이다- NPC]
-파괴의 요정
-정신의 일부가 망가졌습니다.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역시 NPC다 이건가.
떠오른 정보는 많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있었지만.
먼저 파괴의 요정.
이걸로 확실해졌다. 필드를 이 꼴로 만든 건 헤이다가 맞다.
다음은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정보.
본인이 부숴 버린 곳에서 뭔가를 찾는다?
찾을 만한 게 뭐가 있지.
설마.
“녀석도 오델토의 편지를 찾고 있는 건가?”
반지의 정보를 봤을 때 오델토와 헤이다는 아는 사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반지를 건네주니 마니 했던 걸 테고.
잠깐만.
이상하지 않은가.
오델토는 죽었다.
반지와 편지를 전해 주기도 전에 죽었고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이곳을 부순 게 헤이다라면…….
“오델토를 죽인 건…….”
헤이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모종의 사건이 있었고 헤이다가 오델토를 원망해 복수한 거라면, 오델토의 반지를 가진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쩌긴 어째, 바로 공격하는 거지.
지금 접촉하는 게 옳은 선택일까 갈등이 생긴 타이밍.
우뚝.
멈춰 선 헤이다와 눈이 마주쳤다.
내 얼굴을 한 번, 이어 반지를 쥐고 있는 손을 한 번.
“요정의 친구……?”
이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헤이다가 다시 날 응시했고.
“이히히힛! 친구다!”
-콰아아아앙!
폭발적으로 내게로 날아왔다.
입이 찢어지게 웃는 얼굴로.
* * *
“크으읍!”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뭐지?
분명 헤이다가 달려든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에 기억이 없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절그럭
팔다리에 쇠사슬이 묶여 있는 걸 보니까 릴카의 별장은 아닌 거 같다.
릴카가 이상한 녀석이기는 해도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아니, 잠시만…….
“묶여 있어?”
“그에에.”
덕춘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천장에 매달린 새장.
그 안에 덕춘이가 들어가 있다.
평범한 새장은 아닌 거 같다.
단순히 쇠창살로 만들어진 거였다면 덕춘이가 맨손으로 뜯어 버렸을 테니.
그렇다는 건.
-쩌어엉!
“내 것도 안 풀리네.”
힘차게 쇠사슬을 당겨 봤지만 소리만 요란하게 날뿐, 부서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권능으로 살피니 알겠다.
[재앙 포박용 쇠사슬]
-지하 도시 프램버그의 드워프 장인이 만들어 낸 특별한 쇠사슬
-재앙이라 불리는 존재를 구속하기 위해 영혼을 갈아 만든 물건입니다.
프램버그.
낯익은 이름이다.
모빌리딕이 준 지하 도시 출입증.
그곳이 프램버그였으니까.
헤이다가 있던 세계와 같은 곳인 모양.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다 하다 NPC한테 납치를 당하네.”
이건 예상 못 했다.
그동안 만난 NPC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었다.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이거나, 별 관심 없든가.
당연하게도 첫 만남부터 납치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체 왜?
등반가를 잡아 와서 뭘 하려고.
헤이다를 피해 도망치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
어쨌든 죽는 것보다는 이편이 낫다.
-절그럭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기는 했지만 길이가 제법 되기에 근처를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파악하자.
창고라기에는 크고, 가정집이라기에는 너무 삭막하다.
낡은 침대와 잡동사니 몇 개, 유리도 없이 뻥 뚫린 창문이 전부.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공간을 잠시 거닐다 입구 쪽으로 나아갔다.
녹이 슬어 붉어진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고.
“으음?”
황량한 공터를 뒤덮은 수백 개의 무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요정 헤이다.
그녀의 손에 오델토의 반지가 쥐어져 있었다.
멍한 눈으로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녀석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너, 오델토의 친구야?”
친구도 뭣도 아니다.
그저 그의 소유였던 반지를 가지고 있었을 뿐.
모른다고 대답하려는데.
“오델토가 보고 싶어.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다른 사람들은 많았는데.”
시무룩한 표정으로 헤이다가 무덤을 바라봤다.
이 녀석.
‘폐허에서 죽은 사람들을 꺼내 묻어 주고 있던 건가.’
오델토에 대한 악감정도 없어 보인다.
혹시나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오델토를 찾기 위해 필드 곳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지.
이해가 잘 안 된다.
필드를 부순 건 헤이다가 아닌 건가?
본인이 한 짓이라면 이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을 텐데.
“너 혹시 필드를 파괴한 게 누군지 알아?”
난 조심스럽게 물었고.
“잘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헤이다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은 아닐까?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Tip. 신비의 종족, 정령과 요정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팁 메시지를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종족값 자체가 거짓말을 못 하게 되어 있는 모양.
기억이 없다라.
분명 헤이다의 정보에 파괴의 요정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오델토의 기운이 느껴져.”
작은 손으로 반지를 꼼지락거리는 헤이다가 슬쩍 날 바라본다.
가지고 싶은 게 분명한데.
어쩐다.
난 살짝 고민했고.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그런 내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함인가, 퀘스트가 발생했다.
[오델토의 선물- 히든 퀘스트]
-멸망한 제국, 세인턴 피스의 조각가 오델토는 헤이다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헤이다와 마주한 당신, 그의 소망을 이루어 주는 건 어떨까요?
-오델토가 준비한 선물을 헤이다에게 전달하시오.
-오델토의 반지 (1/1)
-오델토의 편지 (0/1)
-보상: 펠라인의 남색 왼쪽 다리, 헤이다의 악몽.
-퀘스트 클리어 시, 오델토의 부탁- 히든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연계 퀘스트!
게다가.
“펠라인 세트?”
“그에에에.”
이건 무조건 해야 한다.
릴카 이 녀석, 좋은 걸 줬구나!
난 허리를 굽혀 헤이다와 눈을 마주쳤다.
“오델토의 선물을 전해 주러 왔어.”
“지, 진짜?”
“응. 그 반지, 오델토가 전해 달래.”
거짓말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진실이기도 하다.
그가 준비한 선물을 건네주는 것이 퀘스트 조건이니까.
확실히 정상적인 퀘스트는 아니다.
‘당사자는 모르는 퀘스트라.’
퀘스트 내용을 아는 건 나뿐.
헤이다는 모르고 있다.
왜?
어쩌면 오델토는 자신이 죽은 걸 알리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의문스러운 게 한두 개가 아니다.
파괴의 요정이라는 게 무엇인지.
오델토가 죽은 이유는 무엇인지.
필드를 파괴한 자는 누구인지.
어째서 헤이다는 나를 납치했는지.
하나씩 풀어 봐야지.
난 헤헤 웃으며 반지를 만지는 헤이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고.
“헤이다, 그런데 난 왜 데리고 온 거야? 지금까지 올라온 사람들도 다 납치한 거야?”
팔과 다리에 걸린 쇠사슬을 흔들었다.
일단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 뭘 하니까.
기분이 좋은 걸까 헤이다는 싱글싱글 웃었고.
“아니! 다른 애들은 친구 아니야. 저기 있어.”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이곳과는 또 다른 언덕.
헤이다가 서 있는 곳과 마찬가지로 수백 개, 어쩌면 그 이상의 무덤이 언덕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