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185화 (185/740)

185화 46층 그리고

하늘 높이 올랐다 하강하기 시작하는 모빌리딕.

가방 속에 들어가 있던 치히린이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내고, 덕춘이 역시 빨판의 힘으로 내 어깨에 딱 달라붙어 있다.

난 모빌리딕의 상태를 살폈다.

이래저래 시스템 제약이 걸려 있다고는 하나 80층을 넘어선 괴물.

되갚기를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별다른 상처는 없다.

강철의 의지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고.

수호자의 의지는 깨져 버렸기에 성물을 보물 주머니에 넣었다.

“떨어진다아아아!”

치히린의 외침.

이대로 호수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위치상으로는 대략 건너편까지 200미터 정도 남은 곳에 떨어질 것 같은데.

짧다면 짧은 거리지만 충분치 않다.

경험상 모빌리딕이 물속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정 지점을 지나면 몸이 흩어지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막바지에 이른 지금 괜한 모험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시원할 거다.”

계획대로 해내는 수밖에.

[프로즌 브레이크 (AA) Lv.3]

-꽈드드드득!

난 아이스 브레이크를 사용했다.

얼음 다리를 만들어 건너려 했을 때 레벨이 올랐던 만큼 위력은 전보다 강력하다.

더불어.

“크으읍!”

숙련도가 쌓였기 때문일까.

마력을 컨트롤해 모양을 변형시킬 수 있었다.

그동안은 단순한 블록 형태였다면 지금 만들어 내는 건…….

-촤르르르르륵!

“미끄럼틀 타 봤냐!”

“이야앗호!”

[모빌리딕이 충격에 대비합니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끄럼틀이었다.

자그마치 200미터 거리를 이어 호수 끝에 닿는 미끄럼틀.

현기증이 올라온다.

단번에 마력을 너무 많이 썼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 프로즌 브레이크를 연달아 사용.

손끝에 감각이 없다.

반발력으로 체온까지 떨어졌는지 반응이 느리다.

살짝 감긴 눈으로 스킬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보인 것도 하다.

“궤에에에엑!”

순간 정신을 잃으려는 걸 덕춘이가 흔들어 깨웠다.

나이스 덕춘이.

치히린을 메고 있는 건 나다.

어이없게 물에 빠져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지.

-콰아아아앙!

다시 균형을 잡는 시점.

모빌리딕이 얼음 미끄럼틀에 떨어졌다.

반쯤 터지듯 날아가는 얼음 조각들.

이 정도는 예상했다.

추락했을 때의 충격이 보통은 아닐 테니까.

-쿠드드드득!

금방이라도 튕겨 나갈 것처럼 몸이 흔들린다.

모빌리딕이 어떻게든 지느러미와 꼬리를 움직여 밖으로 밀려나지 않게 몸을 조절했고.

분수처럼 치솟았던 얼음 알갱이가 호수에 떨어져 녹아내릴 때쯤엔.

[호수 건너편에 도달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신창이다.

딱히 전투를 한 것도 아닌데 힘이 쭉 빠진다.

마력도 거덜 난 것 같고.

벌러덩 눕자 등에 깔린 치히린이 ‘악! 악!’ 소리치며 가방 밖으로 기어 나온다.

모빌리딕 역시 땅속으로 잠수하더니 배를 내밀고 늘어진다.

“성공, 했다.”

결국 해냈다.

준비하면서도 되나 싶었는데.

“와! 와아아아! 일어나, 커다란 녀석아! 끝에 왔다고!”

가장 먼저 기운을 차린 치히린이 환호성을 지르며 모빌리딕을 괴롭혔다.

기분이 좋은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도는 녀석.

[모빌리딕이 고마움을 전합니다.]

“맞아, 너 아니었으면 못했을 거야.”

그러다 내 생각이 났는지 내 쪽으로 다가와 만세를 해 댄다.

삭막한 탑에서 정령이랑 요정이랑 있으니 묘하게 힐링 되는 것도 같고.

툭툭. 두 NPC를 두들겨 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호수는 건넜고, 우물을 찾아야 하는 건가?”

[호수 건너기-일반 퀘스트]

-처음으로 치히린과 모빌리딕이 함께 구출됐습니다.

-호수를 건너 우물에 도달하십시오.

-보상: 두 NPC의 친화도 증가, 은혜 갚기.

-실패 시 두 정령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퀘스트 완료 조건은 호수 돌파뿐만이 아니다.

우물까지 가야 진짜 끝이지.

다행히 우물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약속의 우물]

-45층의 NPC, 모빌리딕과 치히린을 위해 만들어진 우물

-시스템의 약속에 따라 우물을 통해 두 NPC는 안전지대로 이주할 수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우물 안으로 빠지기만 하면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거겠지.

감개무량한지 모빌리딕과 치히린이 눈물을 글썽인다.

당장이라도 가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원섭섭한 마음도 있을 거다.

이러나저러나 45층에 있던 시간이 길었으니.

잘 다독여서 보내야겠다.

녀석들이 우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고생한 보람 없이 퀘스트를 실패할 테니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크흠, 다들 45층에 오래 있느라…….”

“다신 보지 말자, 45층! 끔찍한 시간이었다!”

[모빌리딕이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45층이 있는 곳을 향해 침을 뱉을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아니구나.

엄청 싫어했구나.

괜히 걱정했네.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

[모빌리딕이 정령의 친구는 영원한 친구라고 말합니다.]

피식 웃으며, 호들갑을 떠는 두 녀석에게 맞장구 쳐 줬다.

급한 건 끝.

받을 것만 남았다.

“그럼 약속했던 것들 알지?”

“당연하지!”

씽긋 웃으며 치히린이 하늘을 날더니 볼에 뽀뽀를 했다.

[버프가 적용됩니다.]

[요정의 입맞춤]

-당신의 노력은 그 이상의 결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일주일간 지속됩니다.

신비로운 기운이 몸에 깃든다.

설명만 봐서는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하는 일마다 잘될 거야! 스킬을 써도 예전보다 빠르게 레벨이 오를걸?”

“아, 그런 뜻이었냐.”

성장 관련 버프였구나.

들어 본 적도 없는 종류였지만 좋은 일이다.

스킬 레벨은 강해질수록 좋았으니까.

“자자, 아직 안 끝났어.”

[요정의 꿀벌주]

-요정계 파티하면 빠질 수 없는 술!

-달콤하다고 막 마시면 금방 취할걸요?

-요정계가 멸망하면서 더욱 귀해졌습니다.

[요정의 날개 가루]

-신비로운 힘이 담긴 가루

-다양한 마법 재료로 쓰입니다.

-방금 떨어져서 신선하군요!

두 아이템을 얻어 냈다.

살짝 놀랐다.

날개 가루야 한 주머니 정도라 그러려니 했는데.

“너, 엄청 훔쳐 왔구나?”

꿀벌주는 양이 꽤 됐다.

오크통 하나 정도?

요정이 먹는다길래 500밀리리터 생수통 정도일 줄 알았는데.

“그럼! 자고로 요정이 한번 장난치기로 마음먹었으면 배짱을 두둑이 가져야 하는 법.”

자랑스럽게 가슴을 펼치고 허리에 손을 얹는 녀석.

큰 도둑이 될 마인드네.

안전지대에서 소매치기하다가 얻어터지는 거 아니냐.

됐다. 알아서 하겠지.

“오케이. 넌 어깨 주무르고 있어.”

“응!”

갑옷을 잠시 벗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치히린이 어깨에 올라타 열심히 주무른다.

쪼만한 게 은근히 힘이 세다.

다음으로.

[모빌리딕이 공중 3회전 쇼를 펼칩니다!]

“와우.”

대기 중이었던 모빌리딕이 땅에서 솟구치더니 공중제비를 돌았다.

저 덩치로 이게 된다고?

박수를 치며 감탄하던 때.

[미스릴 원석]

-마법 광물

-고오오오오급 장비 재료입니다.

-미스릴을 두고 전쟁이 벌어지기도 할 정도죠!

퍼포먼스처럼 원석이 떨어졌다.

미스릴 원석이 있는 위치를 알고 있다더니 이미 챙겼던 건가.

[Tip. 땅의 정령은 귀한 원석을 찾으면 챙겨 두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바로 받을 수 있어서 좋네.

3회전 쇼를 끝낸 녀석이 이번에는 금으로 된 네모난 판을 건넨다.

[지하 도시 출입증]

-유적, 지하 도시 프램버그에 출입할 수 있는 증표

지하 도시 프램버그?

다른 건 모르겠고 유적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이게 어디 있는 거지?”

[모빌리딕이 50층대 어딘가에 있다고 말합니다.]

50층대라 이거지.

조심스럽게 인벤토리에 넣어 놨다.

마지막으로.

[정령의 가호가 내려집니다.]

-당신을 향한 악한 기운이 약화됩니다.

가호가 깃들었다.

악한 기운이 약화된다는 걸 보니 저주같이 유해한 것들을 어느 정도 줄여 주는 모양.

저주 내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있으면 더 좋지.

“고마웠어! 우린 가 볼게, 또 보자!”

[모빌리딕이 이별을 아쉬워합니다.]

일이 끝나고 두 NPC가 우물에 섰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면 끝.

난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배웅했고.

둘이 떠나기 직전.

“잠깐만. 치히린, 너 혹시 이거 알아?”

릴카에게 받았던 오델토의 반지를 보여 줬다.

퀘스트로 이어지는 트리거 아이템.

[오델토의 반지 (B)]

-요정을 사랑한 자, 오델토

-그는 헤이다를 위한 반지를 제작했지만 끝내 건네지 못하고 숨을 거뒀습니다.

-강력한 미련이 남아 있습니다.

-그의 바람을 이루어 주는 건 어떨까요?

-편지도 함께요.

생각해 보니 치히린도 요정이다.

어쩌면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약간의 기대감을 가졌고.

“어, 그거? 48층에 가 봐, 그럼 안녕!”

[모빌리딕이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둘은 짧은 말을 끝으로 우물 안으로 뛰어내렸다.

-우우우웅!

찬란한 빛이 솟아오른다.

안전지대로 간 거겠지.

[호수 건너기-일반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치히린과의 친화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모빌리딕과의 친화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두 NPC는 당신에게 입은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퀘스트가 완료되며 친화도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은혜 갚기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모르겠지만.

[선택 완료!]

[전 서버 최초 두 NPC가 안전지대로 입성했습니다.]

[칭호-요정의 친구를 획득합니다.]

[혼돈 수치 +2점]

[46층으로 이동됩니다.]

-파아아앗!

이후 선택 완료가 뜨며 나 역시 빛에 휘감겼다.

칭호를 얻을 줄은 몰랐는데.

혼돈 수치도 올라가고 며칠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다.

난 빛에 몸을 맡겼다.

[다음 순번 NPC가 45층에 배치됩니다.]

[소수의 NPC가 희망을 가집니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기 전, 또 다른 메시지가 뜬 것도 같았다.

* * *

46층.

난 해변가에 도착했다.

확실히 위층으로 올라오니까 환경이 다양해진다.

광활하게 펼쳐진 모래사장.

필드 대부분이 바다다.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여기서 나오는구나?”

“그에에에.”

모래사장에는 바위처럼 보이는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

진짜 바위는 아니다.

바위처럼 생긴 등껍질이지.

[돌바위 거북]

-4성급 몬스터

-단단한 등껍질!

-억울한 눈!

-왠지 어디선 얻어터지게 생겼습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릴카의 퀘스트의 마지막 재료.

돌바위 거북의 등껍질을 얻을 찬스다.

이럴 것 같았다.

릴카 녀석, 퀘스트를 막 주는 것 같지만 막상 해 보면 각 층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만 가져오라고 한다.

난 돌바위 거북을 노려봤다.

4성급 몬스터는 이제 쉽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있다는 것.

순박한 몬스터인지 나를 보고도 달려들지는 않는다.

그저 촉촉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구어어어어─.”

구슬프게 울어 댈 뿐.

아직 뭘 한 건 없지만 괜히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다.

힘없이 모래사장을 걸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녀석들.

“얘네는 최대한 안 아프게 죽여야겠다.”

“그에에.”

왠지 그래야 할 거 같다.

그러니.

“이참에 화끈하게 쓸어버려야지.”

요정의 입맞춤 버프도 받았겠다. 스킬 레벨을 올릴 절호의 기회 아니던가.

버프가 유지되는 시간은 일주일.

그 안에 최대한 많이 레벨을 올릴 예정이다.

아,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으흐흐. 으흐하하하!”

내 웃음소리와 함께 아티팩트가 빛난다.

[아마겟돈 파편 배지 (A)]

-한 세계를 멸망시킨 운석, 아마겟돈의 미세한 파편이 들어간 배지

-위압감이 서립니다.

-위축된 대상에게 더욱 큰 데미지를 줍니다.

[돌바위 거북이 위축됩니다.]

“구어어어.”

“구아아아아.”

부르르 떨며 옹기종기 모이는 녀석들.

“괜찮아. 괜찮아. 살살 맞으면 안 아파.”

어떤 스킬로 스타트를 끊을까 고민하는 찰나.

-띠링

메시지가 왔다.

발신자는 이준석.

[이준석]: 쁘띠공듀 님, 40층에 도착했습니다!

[이준석]: 바로 내일 Q&A 시간을 가지시죠. 세팅은 마쳐 놨습니다!

“아.”

45층을 클리어하느라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당시에는 해도 되겠다 싶었지만.

“제에에에엔장!”

막상 하게 되니 너무나 하고 싶지 않다.

“구, 구어어어!”

“구아아아─.”

마력이 담긴 비명에 놀란 돌바위 거북들이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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